Kenzie 12주년 : (3) 이상하고 켄지한 나라의 소녀들 (상)

네 가지 패턴으로 더하고 곱한 소녀시대, 천상지희, 보아, f(x)의 노랫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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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켄지가 쓰는 노랫말’이라는 단어에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릴 단어는 분명 ‘난해함’과 ‘황당함’일 것이다. 십 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SM 엔터테인먼트 그룹 대부분과 작업해왔지만, 그녀가 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곡은 슬프게도 그런 노래들이 대부분이었다. ‘땀 흘리는 외국인은 길을 알려주자 / 너무 더우면 까만 긴 옷 입자’는 가사로 f(x)의 팬들은 물론 음악 방송 시청자들 모두를 멘붕 시켰던 f(x)의 ‘Hot Summer’, ‘아 싸랑해요’ 한 마디로 3분 50초를 평정했던 엑소의 ‘늑대와 미녀’, 아슬아슬 이어지던 천상지희의 마지막 호흡기마저 떼어버렸다는 맹비난에 시달렸던 천상지희 다나&선데이의 ‘나 좀 봐줘’까지. 부릅뜬 눈보단 풀린 동공, 두뇌 풀가동보다는 살짝 놓은 사고의 끈이 더 어울리는 노랫말들은 잊을만하면 죽지도 않고 돌아오는 그녀만의 서글픈 연례행사 같았다. 물론 이 혼돈의 노랫말들은 아무나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으로 말미암아 켄지에게 멀어진 이들만큼 열광적인 마니아를 이끌도록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종종 사고회로를 마비시키는 가사를 발표하는 SM 전속의 신비주의 작곡가. 대중 앞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개인적인 성향에 더해, 작곡가 켄지에 대한 정의는 늘 그 정도 선을 오르내릴 뿐이었다.

아트웍 강동

아트웍 강동

그래서 늘 아쉬웠다. 거기에 딱히 엄청난 메가 히트곡이 없다는 페널티까지 더해지면, 딱히 더 길게 이야기를 이어가기도 곤란했다. ‘SM 공무원’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쉼 없이 개성 넘치는 노래들을 발표해 온 그녀의 작품세계의 종착역이 고작 여기라니. 인정할 수 없었고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여기에서 무너질 수는 없다는 간절함과 아쉬움, 팬심을 담아 매의 눈으로 한참을 바라보다, 비로소 길이 보였다. 바로 ‘소녀들’과의 접점이었다. 특히 노랫말이 그랬다. 미끈한 공산품이나 곡에 맞춘 맞춤형이 흔한 보이 그룹들과의 작업에 비해 걸 그룹과의 작업에서 보다 강한 서사성을 띄며 해당 그룹과 그룹 구성원의 정체성과 성장의 역사를 차분히 담아내고 있었다. 그 특징을 쉬운 이해를 돕기 위해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해 보았다.

A – 맑고 건강한 소녀
B – 사랑에 빠진 소녀
C – 언니인 듯 언니 아닌 언니 같은 소녀
D – 알 수 없는 소녀

이처럼 켄지의 노랫말이 묘사하고 있는 소녀들은 대부분 꽤나 다층적인 면모를 견지하는데, 그러니까 소녀라고 다 같은 소녀가 아니라는 얘기다. 이 복잡하고 미묘한 나라에 살고 있는 소녀들 가운데 소녀시대, 천상지희, 보아, f(x) 네 그룹을 대표로 뽑았다. 켄지가 비교적 꾸준히 곡을 제공해온 네 그룹의 노래들은 위의 네 가지 요소들을 더하고 곱하는 것만으로 대부분의 수식을 완성할 수 있었다. 다소 뻔한 사랑 노래에서 맨 정신으로 썼다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곡에 이르기까지, 켄지와 소녀들이 만난 노래들은 ‘소녀’라는 큰 틀 안에서 수없이 쪼개졌다 합쳐지기를 반복했다.

* 이 모든 특징은 꾸준히 공동작업을 해오고 있는 작업파트너이자 남편인 김정배가 가사를 담당하고 켄지가 곡을 쓸 때에도 거의 변형 없이 그대로 반영된다. 특히 소녀시대와의 작업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소녀시대 파트에서 이 흐름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곡들을 특별히 포함했다. 켄지가 곡을 담당하고 김정배가 작사를 한 대표곡들로는 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힘내’, ‘Oh’, ‘Express 999’ 등이 있다. (개별항목에서는 *로 구분)

(1) 소녀시대 AxB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 널 생각만해도 난 강해져 / 울지 않게 날 도와줘 / 이 순간의 느낌 함께 하는거야 / 다시 만난 우리의 (‘다시 만난 세계’*)

자존심 강한 내가 변했다고 놀리지 말아요 / 마치 Express 처럼 달려가 이건 위험하잖아요 / 궁금해져 네가 내 앞의 이 사람이 / 지금의 이 느낌을 껴안은 채 달려가볼게 No excuse (‘Express 999’*)

서둘지 않고 갈게 매일 매일 /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해볼게 / 아주 조금씩 커져온 내 맘이 말했어 / 이젠 그대에게로 갈 시간이야 / 닿을 수 없던 우리의 거리 / 꿈이여 내게 와요 그 안에서 살게 / 까만 어둠 속 너만 보여 (‘유로파’)

소녀시대와 켄지의 만남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힘차고 경쾌한 소녀들의 일기장이다. 십 대 소녀들의 일상에서 불안과 어둠을 모조리 걷어낸, 혹은 숨길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숨긴 것이 이들이 직조한 세계다. 이 조합의 경우 다른 어떤 그룹보다도 강한 사랑에 빠진 소녀들을 집중해 그리고 있는데, 덕분에 ‘Oh’ 같은 다소 과격한(?) 사랑 노래가 탄생하기도 한다.

‘사랑’과 ‘소녀’라는 두 단어에만 집중하고 있는 세계인 탓에 다른 어떤 그룹과의 조합보다도 구체적으로 사랑에 빠진 소녀들의 마음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거기에 더해지는 건 켄지 특유의 힘차고 명랑한 소녀상. 비록 노래하는 대상에 푹 빠져있긴 하지만 ‘사랑하는 대상’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녀보다는 ‘사랑에 빠진 나’를 집중탐구하느라 여력이 없는 소녀들의 모습을 대중음악에서 읽는 건 썩 낯설고 신선한 일이다. 켄지x소녀시대의 노랫말은 사랑이라는 거대한 감정에 갇혀 허우적대거나 누군가에게 금세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보다는 어디까지나 ‘나(소녀)’의 입장에서 신호를 감지하고 물음표를 던지고 함께하고자 원하는 소녀들의 주체적인 몸짓을 그린다. 이러한 묘사는 SM 엔터테인먼트 걸 그룹들이 기본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자세이자 그러므로 켄지x소녀시대 조합, 혹은 ‘다시 만난 세계’를 SM 걸 그룹을 대표하는 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게 만드는 가장 준수한 근거이기도 하다.

(2) 천상지희 C+D

이미 젖어버린 옷을 벗고 싶어 / You’re talkin’ too nasty / 이미 빠져든 널 난 가졌어 / 그 역시 당연한 언제나의 현실 / 고민했다면 잊어 모든 것 / This time you don’t let me down / Everybody stop 밤이 깊어질수록 더 대담해 / 한 번 더 ok? (‘한 번 더 ok?’)

난 먹고 자고 울고 웃고 사랑하고 / 다 저울질하고 때로는 미워하고 / 오 매일 매일 난 큰 꿈을 꾸고 있는데 / 이 놈의 통 큰 갈비뼈를 빼서라고 날아갈 거라고 / 아마조네스 시대엔 내가 왕인데 / 남자가 언제부터 우릴 먹여 살렸니? (‘나 좀 봐줘’)

한없이 청량한 소녀시대의 세계에 반해 천상지희와 켄지의 만남은 맏언니끼리의 만남답게 과연 어둡고 끈적하다. 천상지희가 태운 마지막 불꽃 ‘한 번 더 ok?’의 경우 핑클 ‘Now’의 뒤를 잇는 흔해빠진 걸 그룹의 ‘난이제더이상소녀가아니에요-송’으로 보일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뜯어보면 뜯어볼수록 복사하듯 찍혀 나온 곡들과는 다른 면모들이 눈에 띈다. 이곳에서도 역시 중심은 ‘나’다. 켄지x천상지희의 소녀들은 ‘너의 품에서 모든 걸 잊고 싶은’ 게 아니라 네가 ‘나의 품에서 모든 걸 잊게’ 만들어 주고자 한다. ‘나를 네가 가진’ 것이 아니라 ‘너를 내가 가진’ 것이다. 아직 여성이 주도하는 관계에 대해 뜻 모를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이 남아 있는 조국의 풍토를 생각해 보면 이 곡에 걸 그룹 노래로는 흔치 않은 19금 딱지가 붙어 있다는 사실이 얼추 이해되기도 한다. 이제 우리 나라 대통령도 여자분이신데 뗄 때도 되지 않았나 싶긴 하지만.

어쨌든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이어지는 문제의 그 노래 ‘나 좀 봐줘’도 어느 정도 받아들여질 만한 여지가 생긴다. 아담의 갈비뼈며 소주잔 막걸리잔, 통 큰 갈비뼈 같은 자극적인 어휘들을 제외하면 여전히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언니인 듯 언니 아닌 언니 같은 소녀의 고군분투 연애담으로 읽히기 충분한 서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널 가졌던’ 언니들이 줄줄이 퇴짜를 맞은 셈이니 오죽할까. 물론 그렇게 마음을 가득 열고 들여다보고 또 봐도 ‘여지가 생기는’ 정도에서 그친다는 게 이 노래의 무시무시한 점이기도 하다.

Kenzie 12주년

김윤하

Author:

듣고 보고 읽고 씁니다. 특기는 허송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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