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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너를 위한 화성학 ①

알고 있으면 듣는 재미를 조금은 더할 수 있는 정도를 목표로 한다. 듣는 이를 위한 화성학. 그래서 2014년말, 아이돌로지 엔터테인먼트는 12인조 화성학돌 하모니즈를 데뷔시킨다.

화성학 책을 펼치면 처음부터 온갖 숫자와 악보, 개념이 쏟아지기 시작해 읽는 이의 기를 죽인다. 음악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실력의 격차가 확연히 벌어질 정도로, 깊어질수록 끝없이 복잡해지는 시스템이다. ‘화성학 따위 몰라도 얼마든지 히트곡을 써낸다’ 같은 표현이 자주 들려오는 것 또한, 이 악마 같은 존재가 음악 이론 중에서도 대표적인 골칫덩이임을 반증한다. 확실히, 화성학은 몰라도 그만이다. 그러나 그 기초를 알고 있다면 전에는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이 보이게 되는 열쇠인 것도 사실이다.

또한 화성학이 주는 한 가지 희망, 혹은 희망고문이 있다면, 입문의 문턱만은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면 “하우 아 유? 아임 파인 땡큐 앤쥬?” 정도는 말할 수 있고, 그것만으로도 낯선 땅에서 이방인을 웃으며 만날 수 있다. 거기에 “엄… 캔 유…? 포토? 플리즈?” 정도의 응용력이 있다면, 셀카봉으로 담기엔 조금 벅찬 에펠탑 전경과 함께 브이를 그릴 수 있다.

이 글은 전공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누구나 복잡한 화성학의 오의를 깨우칠 필요는 없다. 그저 알고 있으면 듣는 재미를 조금은 더할 수 있는 정도를 목표로 한다. 듣는 이를 위한 강좌이다. 따라서 화성학 교과서의 커리큘럼과는 다르게 진행되며, 아이돌 곡을 재료로 삼는다. 다만 건반이나 베이스, 기타를 조금은 다룬다면 따라가기 쉬울 것이다.

헬로!

2014년말, 아이돌로지 엔터테인먼트는 12인조 화성학돌 하모니즈를 데뷔시킨다. 연말 시상식마저 끝난 시점에 신인을 데뷔시키다니 참으로 비상식적인 기획사다.

하모니즈 완전체 단체샷

학교의 음악 시간이 싫었던 사람도 많겠지만 잠시 꾹 참고 보자. 위의 단체샷은 하모니즈의 열두 멤버들이다. 골치 아플 것 없다. 이들은 그저 키 순서로 나란히 서있을 뿐이다. 샵(#) 기호는 깔창 혹은 힐이다. 겉으로는 잘 안 보이지만, 우리가 보기에 왼쪽에 있는 멤버보다 조금 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극복하기는 힘들어서, 오른쪽 멤버보다는 작다. 얼굴이 왜 다 똑같냐고 한다면, 이 멤버들은 같은 병… 아니다.

이 그룹의 각 멤버들은 각자 분명한 캐릭터를 갖고 있으며, 완전체로 활동하는 일은 거의 없다. 상황에 따라 곡에 따라 다양한 유닛으로 활동한다. 하모니즈의 유닛 유동성은 다른 아이돌보다 월등히 높아서, 유닛에 따라 멤버들의 포지션도 마구 변화한다. A 유닛에서는 리더인 멤버가 D 유닛에 가면 서브보컬이 되기도 하는 식이다. 이를 두고 업계와 팬덤 일각에서는 상도덕에 위배된다는 비난을 하기도 한다. 과연 악랄한 기획사다.

리더를 찾아라

아직 신인인데다 얼굴도 비슷비슷, 아무리 잔뼈가 굵은 아이돌 팬이라도 단숨에 멤버들을 구별하긴 어려운 게 하모니즈다. 그러나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무개념 기획사 아이돌로지 엔터테인먼트는 멤버 구별을 쉽게 하기 위해 의상에 번호를 붙여주거나 하지조차 않는다. PR 담당자는 개인 SNS계정을 통해 “잘 들어보시면 알아요 ㅋ”라 발언,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잘 들어보시면 안다”는 건 사실이기도 하다. 밴드 악기 연주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음악을 들을 때 저음에 집중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화음이 바뀔 때마다 첫 박자에 들리는 가장 낮은 음이 특히 중요하다. 많은 경우 이것은 베이스로 연주한다. 하모니즈의 멤버들은 이것으로 구별하면 가장 편하다. (물론 비열한 기획사 아이돌로지 엔터테인먼트는 여기에도 예외를 두지만, 상냥한 웹진 아이돌로지는 이를 추후에 차근차근 다루도록 하겠다.)

이런 저런 멤버들이 있겠지만, 하모니즈를 이해하는 데에는 리더를 찾는 게 제법 중요하다. 리더의 파트로 끝나는 곡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별하기도 좋다. 하모니즈 팬덤에서는 리더를 ‘토닉(Tonic)’이라고 부르며, 사이트에 따라 ‘으뜸화음’이나 ‘I’, ‘i’라 부르기도 한다. 하모니즈의 선배들 중에는 곡의 시작도 토닉이 맡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모 일간지 음악기자는 토닉을 가리켜 “가장 안정감 있는 멤버”라 평했고, 토닉의 개인 팬사이트 홈마스터는 “그 목소리를 들으면 마치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라 하기도 했다.

화성학에서 토닉은 가장 중요한 화음이다. 또한 가장 중요한 음이기도 하다. 모든 화음과 모든 음은 토닉을 향해 돌아오고자 하는 힘이 있다. 하늘을 향해 공을 던진다고 생각해 보자. 공은 위로 날아오르지만 결국 바닥을 향해 내려온다. 이처럼 여러 가지 화음에 의해 음악은 공중에서 움직이지만, 결국에는 출발점인 토닉에게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 고전적인 화성학의 시각이다. 현대로 오면서 이 법칙은 많이 약해졌고, 특히 대중음악에선 이 원리를 비껴감으로써 세련된 느낌을 주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토닉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여전히, 먼 곳을 돌아다니다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편안한 안정감을 느낀다.

이 악보를 모두 잘 읽을 필요는 없다. 다만 콩나물 머리가 음의 높낮이를 표시한다는 것만 염두에 두고 멜로디를 따라가보자. 이 곡들은 모두 토닉에 해당하는 음에 도달하면서 끝을 맺는다. 이 마무리가 주는 안정된 느낌을 잘 기억하면, 다른 곡에서도 하모니즈의 리더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리더가 없으면…

토닉이 ‘집으로 돌아온 느낌’이라 한다면, 토닉의 자리에 다른 화성이 올 때 하모니즈는 방황하는가. 그렇다. 그러나 그게 꼭 나쁘지는 않다. ‘아직 더 여행하고 싶은’ 기분을 주는 것도 음악에선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두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규현의 ‘광화문에서’는 보컬의 멜로디가 토닉 음에 도착해서 안정감을 주지만, 반주는 다른 화음을 선택했다. 그래서 노래가 끝난 뒤에도 음악이 흐르는 추진력을 만들어내고, 잠시 시간을 끌면서 노래에 여운을 부여한다. 그리곤 후주의 마지막 마디에서 결국 토닉 화음에 도달해 마무리를 짓는다. 스피카의 ‘고스트’는 화음은 토닉이지만, 보컬의 멜로디는 다른 음이다. 그로 인해 곡은 마치 공중에 매달린 것 같은 느낌으로 마무리되게 된다. 이 두 사례가 앞의 곡들과 보이는 느낌의 차이에 귀 기울여 보면 토닉이 주는 안정감의 의미를 좀 더 잘 알 수 있다.

각자 좋아하는 곡을 살펴보자. 멜로디는 토닉으로 끝나는가? 화음은 토닉으로 마무리되는가? 그건 어떤 느낌인가? 토닉이 아닌 음이나 화음으로 끝나는 곡도 찾아보자. 질문이 있다면 최대한 답변하도록 하겠다. 다음 시간에는 하모니즈 멤버들이 곡의 콘셉트에 따라 어떤 표정을 짓는지 살펴보겠다.

미묘

By 미묘

가식과 내숭의 외길 인생. 음악 만들고 음악 글 씁니다.
f(x)는 시대정신입니다.

6 replies on “리스너를 위한 화성학 ①”

아이돌 음악을 화성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컨텐츠가 있었으면 했는데, 미묘님께서 써주시니 (그것도 아이돌 덕후 입맛에 맞는 용어로) 잘 읽었습니다!!! 다음편도 기대할게요~

화성학을 독학으로 공부하는 k-pop ‘애정’자로써, k-pop을 화성학으로 해설해주는 콘텐츠가 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글을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어디에든 나올 수 있어요. 다만 노래가 끝나는 부분에 등장하는 경우가 많아서 찾기 쉬울 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