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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과 바다의 윤무: 태민의 ‘Drip Drop’

‘Drip Drop’은 물이 물에 떨어지는 자연 현상을 관찰하면서 그 과정을 음악으로 만들어낸다. 유기적으로 촘촘히 결합된 음악과 춤, 형식과 내용이 자아내는 극적인 황홀경.

0. Drip Drop

빗줄기가 바다에 떨어지기 시작한다.

빗방울은 수면에 파문을 일으킨다. 외부에서 닥쳐온 이질적인 침입자처럼, 수면의 평온을 어지럽힌다. 수면은 흔들리고 일렁이면서 불안해진다. 그러나 이내 또 다른 빗방울이, 그리고 또 다른 빗방울이, 떨어지고 떨어지면서 끊임없이 이어지면, 이내 파문은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리듬이 된다. 빗방울은 바닷물에 뒤섞여 더 이상 분간할 수 없는 하나의 물이 되고, 그 과정은 끝없이 되풀이된다… 흔들리고 일렁이는 불안감은 오히려 새로운 평온이 되고, 완전한 일체감이 되고, 황홀한 음악이 된다.

바로 그 음악이 ‘Drip Drop’이다. 이 곡은 물이 물에 떨어지는 자연 현상을 현미경으로 세밀하게 관찰하면서 그 과정을 하나의 음악으로 만들어낸다. 그리고 음악과 춤, 형식과 내용이 유기적으로 촘촘히 결합되면서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존재하게 되는 극적인 황홀경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그러므로 그 측면들을 모두 아울러 살펴보면 이것을 온전히 즐기는 데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1. 음악

태민의 첫 번째 정규 앨범 “Press It”은 두 존재가 서로를 만나 하나가 된다는, 완벽한 일체감으로서의 사랑을 테마로 한다. 자기 자신의 또 다른 자아와 사랑에 빠지는 나르시시즘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첫 번째 트랙인 ‘Drip Drop’은 그 테마를 가장 상징적으로 구현한 곡으로, ‘나’와 ‘너’의 만남을 바다와 물방울의 만남으로 비유한다. ‘Drip Drop’의 화자를 바다와 물방울로 각각 나누면 이렇게 서사화할 수 있을 것이다.

바다: 수면과 같은 내가 있고, 내게 떨어지는 물방울 같은 네가 있다. 너는 잔잔하던 내 마음을 떨리게 하고, 간지럽히며, 깊이 스며들어 온다. 나는 너를 도무지 피할 수가 없다. 마치 중력처럼, 자연의 법칙처럼, 절대적인 힘으로 나를 뚫고 들어오는 너이기에. 나는 너로 인해 속수무책으로 흔들리고 일렁이며 설레어 한다.

물방울: 조그마한 빗방울인 내가 있고, 거대한 바다와 같은 네가 있다. 나는 저 높은 하늘에서 정신없이 떨어져 내리며 너를 향해 돌이킬 수 없이 추락하고 있다. 너무나 거칠고 광대하고 위험한 너에게 이끌려서. 나는 너에게 닿는 순간 산산이 부서져 사라지고야 말 것이다. 그러니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키를 잡아야 한다. 역풍을 헤쳐야만 한다. 너에게 휩쓸려 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지극히 조심해야 한다.

물방울: 그런데 조심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어째서 물방울인 나를 보존하기 위해 너의 거친 파도에 맞서 싸워야 하나? 어쩌면 나는 너에게 이대로 집어 삼켜져도 괜찮을 것이다. 네 안에서 내가 사라진대도 좋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너와 하나가 될 수 있을 테니.

바다: 나는 물방울인 너로 인해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다. 그런데 요동치는 것은 누구이고, 요동치게 하는 것은 누구일까? 너는 내 안에 들어와 내가 되고 있고, 지금도 이미 나와 함께 흔들리고 있는데. 내 수면을 두드리는 너의 손길은 이제 더 이상 나를 어지럽히는 교란이 아니다. 그것은 어느덧 내 몸속의 심장 박동처럼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리듬이 되었다. 나는 내게 스며오는 너의 달콤함에 더 이상 저항하지 않는다.

애초에 누가 바다였고, 누가 물방울이었을까? 물방울은 바다가 되고, 바다는 다시 물방울이 된다. 우리는 함께 춤을 춘다. 원래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2. 춤

‘Drip Drop’의 안무에서 태민은 수면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표현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모순이 발생한다. 태민은 분명히 ‘네’가 ‘나’에게 물방울처럼 내려오고 있다고 노래하지만, 그 자신의 춤은 오히려 물방울인 ‘너’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빗방울을 맞아 흔들리는 수면인 ‘나’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은 태민이 아니라 다른 댄서들이다.

태민의 노래와 춤은 이렇게 기묘하게 분열된 채로 시작된다. 노래는 수면의 시점에서, 춤은 물방울의 시점에서. 이는 ‘Drip Drop’의 가사 속 화자가 수면과 물방울의 시점을 이리저리 오고 가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러한 시점의 괴리와 이동은 처음에는 비유를 산만하게 남용하는 듯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곡이 진행되면서 이 분열은 궁극적으로 합일로 이어지는 장치였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음악이 시작되면, 태민은 댄서들로 이루어진 수면으로 ‘한 방울씩 한 방울씩’ 내려온다. 손짓 한 번에 수면이 떨리고, 태민이 바람에 흩날리자 수면이 단숨에 일렁인다. 그는 중력을 타고 지구의 중심으로 이동해오며 물결을 일으키고 또 일으키면서, 마치 “음악같이” 움직인다.

태민 - Drip Drop | 엠넷

“이 음악같이”라는 노랫말이 신호처럼 떨어지면, 음악은 규칙적인 빗방울과 파문의 연쇄와도 같은 밀도 높은 간주로 이어진다. 태민과 댄서들은 군무를 추며 음악을 표현한다. 아니, 음악을 일렁이게 한다. 그들은 물방울이 수면에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서, 관객이라는 수면에 떨어져내리는 물방울 자체가 되려 한다. 이때부터 우리는 무대에서 벌어지는 환상을 무대 밖에서 안전하게 관찰하는 관람자의 입장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귀에 들리는 춤이, 눈에 보이는 음악이, 관객을 즉각적으로 “적셔”오기 시작한다.

이윽고 태민이라는 빗줄기는 더욱 거세어진다. 태민이 앞으로 튀어나오자 댄서들의 물결은 갈라지고, 태민이 허공에서 낙하하자 댄서들은 사방으로 튀어 흩어진다. 태민의 다이내믹한 움직임에 댄서들은 자석처럼 끌리기도 하고 밀쳐지기도 하며 입체적으로 반응한다. 댄서들이 파도를 치며 태민을 거슬러 오면, 태민은 “역풍을 헤치고” 험한 바다를 가로지르듯 격렬한 몸짓으로 맞서 나간다. 쏟아지고, 튀어 오르고, 흩어지고, 흘러가고, 쏟아지고, 휘도는 물방울의 윤무는 점점 더 압도적이고 거대한 환상이 되어가고, 마침내 관객을 바다처럼 휩쓴다. ‘물방울인 태민은 우리에겐 바다가 된’다.

태민 - Drip Drop | 엠넷

그는 이제 우리 앞에 무릎을 꿇어앉고서 노래한다. 천천히 밀려와 자신을 삼켜달라고. 요동치는 자신의 마음을 잠재워달라고, “네 손길만이 이 파도를 평화롭게 한다”고. 처음에는 태민이 노래하는 ‘너’란 곧 태민 자신이었으나, 이제 태민은 관객을 ‘너’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를 물방울이라고 호명하면서 자신과 하나가 되어달라고 말하고, 동시에 우리를 바다라고 호명하면서 자신을 삼켜달라고 말한다. 이 유혹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 곧이어 후렴구가 되풀이되고, 이제 음악은 관객들과 태민과 댄서들을 모두 집어삼킨 거대한 환상으로 팽창되어 한층 더 강력하고 생생한 힘을 얻어 흘러간다.

처음에 태민이 노래하는 ‘나’와 춤추는 ‘너’가 분열되었던 모순은 이제부터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합쳐졌으므로. 나뉘어 있었던 너와 내가 비로소 하나가 되었으므로. 너와 나는, 즉 태민은, 원래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완벽하게 합일되어 춤을 추기 시작한다.

여기서 태민은 무대에 홀로 남겨진 채 화려한 독무를 춘다. 그는 처음에는 음악과 일체화되고, 그 다음에는 관객과 일체화되더니, 이제는 무대 전체를 장악하며 공간 자체와 일체화된다. 태민이라는 물방울 하나에 세계가 축약된다. 그 거대한 자의식이 불러일으키는 현란한 환상에 관객이 몰입하는 동안, 댄서들이 다시 무대로 돌아와 태민과 합을 맞춰 나가기 시작한다. 이전에는 태민과 상호작용을 주고받으며 갈등과 긴장 속에 움직였던 댄서들은 이제 태민과 하나가 된 듯 같은 호흡으로 같은 춤을 춘다. 환각적인 일체감, 아찔한 황홀경. 그 모든 것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미 잃어버렸을 때, 어느덧 음악은 끝나고 태민은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한다. 완벽한 환상의 종결을 고하며.

3. 퍼포먼스 비디오

‘Drip Drop’은 3분 25초의 독백이다. 화자는 ‘너’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너’는 실존하는 타인이 아니라 ‘나’의 대리물일 뿐이고, 이 음악은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무리 깊은 심해와 넓은 대양이 펼쳐져도 그 모든 공간은 폐쇄적인 자기 탐닉의 무대에 불과하다. 보통 이런 자아도취적 환상은 남들에게 내보이기에는 차마 부끄러운 일기장 같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자아도취적 환상이 지나치게 정교하고, 대담하고, 모험적이라면 어떨까? 부끄러운 일기장과 위대한 자서전은 어디에서 어떻게 구분될까? 자기 탐닉과 자기 극복은 과연 어떻게 구분할 수 있나? 자폐적인 독백과 진솔한 고백은?

‘Drip Drop’은 그 두 가지의 경계에서 유희하는 작품으로 보인다. 일기장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완벽하게 공예되어 있고, 자서전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포즈를 취하는 작품. 태민이 이 아슬아슬한 유희를 얼마나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는지를 보려면, 무대 영상들보다도 퍼포먼스 비디오를 봐야 한다.

2월 22일에 공개된 ‘Drip Drop’의 퍼포먼스 비디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배경이 사막이라는 점이다. 음악과 춤은 분명히 물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정작 영상은 드넓은 사막 한가운데에서, 내리쬐는 햇빛을 강조하듯 채도를 한껏 높인 강렬한 색감으로 펼쳐진다. 무척 아이러니하고도 과감한 도전이다. 하필이면 세상에서 가장 메마르고 황량한 공간을, 단 3분 25초 동안, 별다른 조명도 소품도 극적 효과도 없이, 오로지 태민과 댄서들의 퍼포먼스와 음악만 가지고, 세상에서 가장 충만한 바다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자신감.

태민 - Drip Drop Performance Video | SM 엔터테인먼트

무대 공연과 퍼포먼스 비디오가 가장 현저하게 차이 나는 점은 마지막 부분이다. “원래 하나인 것 같이 우리는 춤을 추고 있어”에서부터 시작되는 독무. 중간에 다시 댄서들과 합쳐지는 무대 공연과 달리, 퍼포먼스 비디오 속의 태민은 끝까지 내내 혼자서만 춤춘다. 무대에서는 ‘나’와 세계가 마침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댄서들의 도움을 받지만, 퍼포먼스 비디오에서는 끝까지 완전히 ‘나’ 혼자만으로 온 세계를 구현하려 하는 것이다. 태민 혼자서, 그 하나의 육체로, 사막 전체를 적시는 일이다.

이 사막은 도대체 어떤 세계인가? 자폐적이되 완벽한 환상의 공간인가? 아니면 물방울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태민의 환상을 위협하고 깨뜨리려 하는, 현실적인 장애물로서의 공간인가? 그 판단은 영상을 보는 사람들의 몫이겠지만, 나는 좀 다른 차원에서 의구심이 든다. 아무리 봐도 의심이 거둬지지 않는다. 저렇게까지 비현실적인 것이 실재할 수는 없다는 의심이. 지금까지 본 모든 것이 어쩌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모든 걸 압도하는 절대적인 존재감과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허가 완전히 일치하는 어떤 평형 상태에서, 음악은 멈추고 태민은 사라진다.

Press It
SM 엔터테인먼트
2016년 2월 23일
아밀

By 아밀

글을 쓰고, 아름다움과 투쟁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http://lunabell.cafe24.com

2 replies on “빗방울과 바다의 윤무: 태민의 ‘Drip Drop’”

항상 아이돌의 안무에 대한 평론이 하나쯤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찰나에, 이런 훌륭한 리뷰가 등장했군요. 굉장히 재밌게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굉장히 재미있고 탐미적인 글이군요. 리뷰된 곡 뿐만 아니라 이 글을 쓴 사람에 대해서까지 궁금해집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