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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빠는 호모가 아니야

아이돌의 성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팬들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 사람은 아니다’라고. 넘겨짚거나 아우팅하는 건 실례가 맞다. 그러나 이 부분에, 팬들이 직시해야 할 산이 있다.

이미지 CC BY KLHint

*주의: 이 글에는 수많은 ‘오빠’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만 이것은 여성이 연상 남성을 지칭하는 개념으로서의 오빠가 아니라, 그냥 잘 생기면 다 오빠로 부르는 본인의 버릇을 그대로 적용한 것뿐이다. 본인에게는 여진구도 오빠고 유승호도 오빠다.

한국에서 팬픽의 역사는 아이돌의 시작과 그 궤를 같이한다. 일부 팬들은 RPS(Real Person Slash, 실제 인물을 소재로 한 팬픽)를 매우 경계하지만, 많은 아이돌은 팬픽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팬픽과 별개로 성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온라인에서 떠돈다면 팬들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다. 실제 그 사람의 정체성은 알 수 없으나 일단 ‘내가 파는 그 사람은 아니다’라는 이야기부터 꺼낸다. 나만 하더라도 모 연예인을 게이 클럽에서 봤다고 트위터에 올리자마자 ‘그때 지방에서 로케이션 촬영 중이었다’고 알계(익명 계정)를 파서 나에게 멘션을 보내는 사람이 있었다. 나 말고도 그 사람을 클럽에서 본 이들은 너무나 많았다. 그런 그 팬은 과연 무엇 때문에 그런 멘션을 보낸 것일까?

일부 커뮤니티에서는 저런 소문에 대해 조금이라도 흘리는 글을 쓰면 강제 탈퇴 당한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이 유달리 성 정체성에 대해서만 정치적으로 올발라서(PC)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니까 ‘당사자가 밝히지 않았으므로 다른 사람이 언급하는 건 실례’라는 마인드로 그러는 것 같진 않단 소리다. 물론 타인의 성 정체성을 넘겨짚는 건 실례가 맞다. 아직까지 한국에서 민감한 사안이고, 본인이 밝히기 전까지 함부로 유추하는 것은 실례가 될 수 있다. 또 이것이 직장이나 사회관계 문제로 간다면 상황을 매우 악화시킬 수 있다. 특히 악의적으로 타인의 정체성을 공개하는 것을 ‘아우팅(outing)’이라고 하는데, 이 경우 아직까지도 개인에게 있어서 큰 악영향을 끼치곤 한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에, 팬들이 직시하고 넘어가야 하는 산이 있다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하리수와 홍석천 이후 ‘연예인’ 중에 공식적으로 커밍아웃한 사람은 없다. 다른 분야 사람들의 커밍아웃은 꽤 있지만 방송을 업으로 삼는 사람 중에는 전무후무하다. 원인은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겠지만,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이 커밍아웃하지 못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이 등 돌릴까 봐’일 가능성이 높다. 홍석천만 하더라도 커밍아웃 직후 하고 있던 방송에서 단지 정체성 때문에 퇴출됐으며(〈여성동아〉 2000년 11월) 그 후로도 수년간 방송 출연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이 이후로 커밍아웃한 연예인이 없기 때문에 제2의 사례가 있을 때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다. 역으로 말하면, 후배 연예인들에게 ‘내가 커밍아웃했을 때의 반응’을 볼 수 있는 사례도 저것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실제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커밍아웃했을 때 지지할 수 있는 팬은 몇이나 될 것인가? 나는 여전히 이 부분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2D 캐릭터 BL을 파는 사람이나 아이돌 파는 사람들의 커뮤니티 반응, 트위터 등을 살펴보고 있으면, ‘가상의 오빠는 호모여도 괜찮지만 실제 호모는 싫다’고 하는 사람들이 꽤 되기 때문이다. 인기에 가장 민감한 연예인들은 팬들의 기류에 대해 나보다도 훨씬 잘 알 것이다. 성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마저 입막음하려 하는 경우가 흔한데, ‘우리 오빠가 게이일 리 없어’라는 정서 역시 그 자체로 호모포빅하기 때문이다.

동성 간의 연애 서사인 팬픽을 쓰는 입장에서, 또는 사진이나 이야기만으로도 커플링을 엮는 팬 입장에서 성 정체성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다면 모순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팬픽과 커플링 문화가 성 정체성과 무관하게 ‘그 사람이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건 그냥 보이 크러시(Boy Crush) 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선 긋기, 걸 크러쉬”에서 아스토가 말하는 것처럼, 걸 크러시든 보이 크러시든 비판을 피해갈 순 없다. “‘좋아한다’는 개념은 성적인 면의 포함 유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데, 걸 크러쉬는 유독 이를 판단의 척도로 삼고, 포함되는 쪽과 거리를 두기 위해 쓰인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팬픽은 많은 경우 성적인 요소를 포함한다. 장르를 보이 크러시라고 하기에는 이미 한참 지나갔단 이야기이다.

하지만 RPS가 됐든 BL이 됐든,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전혀 부끄러울 일이 아니다.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그러한 장르를 즐기는 사람이 호모포빅한 면을 보일 때다. ‘내 오빠가 또 다른 오빠’랑 연애하는 건 괜찮으면서 ‘실제 동성애자들은 역겹다’고 하는 작태를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다. 일일이 사례를 수집하지 않은 게 아쉬울 정도로 그 양태 또한 다양하다. 그런데 차마 자신이 호모포비아라고는 인정할 수가 없어서 “내 오빠는 게이 아니거든요!”하는 걸 보고 있으면, 왜 연예인들이 커밍아웃하지 않는지 알 것도 같다. 나를 가장 좋아해 준다는 팬들이 저러는데 누굴 믿고 커밍아웃을 할 수 있을까?

가까운 일본에서도 이미 연예인 커밍아웃이 속속들이 이뤄지기 시작하고 있다. 동성 결혼이 법제화된 미국에서는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커밍아웃한 연예인들이 나오고 있다. 그들은 차별받는 성 소수자들을 위해 기금을 조성하고 기부를 하고 있으며, 그것을 보고 자란 십 대 성 소수자들은 그러한 영감을 줄 수 있는 롤 모델이 있어서 자신들이 잘 클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나 역시도 십 대 시절에는 한국에서 커밍아웃한 사람을 홍석천과 하리수밖에 보지 못했다. 바다 건너 이야기를 들어보면 간달프 역의 이언 매켈런 등 다양한 유명인사들이 커밍아웃한 것을 볼 수 있었지만, 그건 내가 사는 이 땅의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전혀 위안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절망감이 더 컸다. 왜 이 땅에는 그런 사람은 별로 없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었다.

‘내 오빠’가 그런 위치에 서서 선동자 역할을 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는 때가 되면 알아서 할 일이며, 팬들 역시 알아서 선택하고 말 문제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 사람 게이 아냐?”라는 말에 일단 아니라고 소리치고 보는 것은 팬의 몫이 아니다. 진지하게 생각하라. 그 사람이 정말 게이라면 어쩔 것인가?

누가 게이라느니 레즈라느니 소문만 무성한 채로 성 정체성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쉬쉬하게 되는 문화에서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문화가 나올 수 있을까? 누군가의 정체성이 ‘상관없다(it doesn’t matter)’라는 상황이 되려면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바뀌어야 한다. 때문에 혼자만의 노력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 적어도 ‘내 오빠가 게이여도 상관없어!’ 정도의 마인드는 가져야 하지 않을까? 당신이 호모포비아냐 아니냐, 팬픽을 파느냐 아니냐를 떠나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간에 좋아하는 것’이 팬이라면 말이다.

PS. 엠버의 ‘Borders’ 지지한다.

상근

By 상근

의식주 해결에 허덕여 덕질도 못하는 안방수니

2 replies on “내 오빠는 호모가 아니야”

진짜 팬픽 커뮤 보면 망상=현실인 사람이 많아요 ㅋㅋㅋㅋ 꼭 그게 아니더라도 호모일 때 꺼리면서 호모를 쓰는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물론 이 모든 게 궁예일순있지만 이 글 자체도 궁예로 이루어져있는 것 같네요…

호모포비아적인 관점 외에도 음지 계열에서는 팬픽으로 동성애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아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성애로 치면 포르노나 판타지나 다를 바 없는 로맨스 소설로 남녀간의 사랑을 논할 수 있다는 것과 같겠지요. 실제로 비엘, 지엘이나 동성 팬픽을 통해 동성애에 대한 환상을 가진 사람들이 실제 동성애자들한테 주는 피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 글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좋은 글이고 전체적인 취지에 공감하지만 그냥 이러한 일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호모포비아든 일정 이미지에 그들을 구겨넣든, 둘다 위험한 행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