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의 아이돌 팝을 돌아보며, 아이돌로지는 전/현역 필진 11인과 객원 심사위원 6인(늘, 도니언, 만나, 잔물결, 티미랩, 파이)의 투표를 거쳐 2024년 발매된 아이돌 팝 앨범 중 올해의 앨범 16개를 선정했다. 별도의 순위는 산정하지 않았으며, 순서는 발매순으로 정렬했다.
엔믹스 “Fe3O4: BREAK”
스큅: “믹스팝”이라는 장르를 장렬히 선포한 데뷔 이래 때로는 그 명분에 휘둘리기도, 때로는 이를 짐짓 외면하기도 하던 엔믹스가 이제야 그 이름에 걸맞은 사운드를 확립한 듯하다. 대담한 믹스 앤 매치를 시도한 앨범 전반부의 트랙들은 변칙적인 구성, 장르의 교차를 끊임없이 제시하면서도 명료한 후렴구로 곡의 몰입감을 끈덕지게 유지해낸다. 상이한 요소 간 충돌과 낙차에서 빚어지는 불안감은 완충하되 짜릿한 스릴은 극대화해낸 것이다. 후반부에는 “믹스팝”에서 일보 후퇴했던 시기의 스타일이 녹아있는데, 이는 앨범의 한가운데서 곡 내 장르/BPM 전환으로 변곡점을 만들어내는 ’BOOM’을 통해 전반부와 매끄럽게 연결되고, 21분여의 앨범은 그렇게 그 자체가 하나의 “믹스팝” 트랙으로 거듭난다. 자기 과시는 물론 자기 회의의 시기까지 엔믹스의 지난날을 완벽하게 집대성해낸 앨범을 들으며 마블 프랜차이즈 시리즈의 성공적인 리부트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것이야말로 집념이 이뤄낸 쾌거일 테다. 케이팝이 글로벌 팝과 동기화되어가는 와중, 케이팝이 아니라면 어디서도 하지 않을 음악을 고수해냈다는 데에 특히 찬사를 보낸다.
(여자)아이들 “2”
에린: (여자)아이들의 “2”는 아이들이 소화할 수 있는 콘셉트의 스펙트럼을 한계없이 펄쳐놓는다. 최근 많은 아이돌 그룹이 일관된 콘셉트와 스타일로 정체성을 형성하는 흐름 속에서, (여자)아이들은 다채로운 음악적 스토리텔링을 통해 독보적인 위치를 점한다. ‘Super Lady’는 메가 크루와 함께하는 콘서트의 한 장면을 연출하듯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Revenge’와 ‘Doll’는 서스펜스를 극대화하면서도, ‘Wife’로는 장난스럽고 도발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7 Days’는 전형적인 팝곡의 형식을 취하는 반면, ‘나는 아픈 건 딱 질색이니까’는 일상적인 가사를 통해 대중적 공감을 유도한다. 이처럼 “2”는 앨범의 유기성을 취하기 보다는 각 곡이 다른 콘셉트와 장르를 표현함으로써 모든 곡이 개별적으로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이는 ‘LATATA’로 데뷔한 이후 ‘LION’, ‘퀸카’, ‘Tomboy’까지 이어지는 (여자)아이들의 유연한 음악적 접근이 있었기에 가능한 시도일 것이다. “2”는 (여자)아이들의 지금까지의 역량을 총집결한 앨범으로, 케이팝이 구현할 수 있는 다양한 콘셉트와 스토리텔링의 집합체로 자리 잡는다.
텐 “TEN”
조은재: 언젠가부터 남자 솔로 가수들의 레퍼토리, 특히 SM에서 나오는 작품들은 비주얼적으로 관능미를 어필하거나, 특정 장르의 문법을 완벽히 수행해내는 것에 집중하는 경향으로 양분되고 있다. 텐의 첫 미니앨범 “TEN”은 관능미만을 어필하지도 않고, 특정 장르의 공식을 따르지도 않는다. 다만 명실상부 ‘올라운더’인 텐의 재능을 어필하고, 장르 문법 이상의 곡 해석을 해내며 다양한 스펙트럼의 팝 트렌드를 보여주는 것에 집중한다. 여담이지만 필자가 텐을 처음 알게 된 무대는 Mnet 〈HIT THE STAGE〉의 댄스 퍼포먼스 무대였는데, 그 때부터 지금까지 텐을 관통하는 캐릭터 중 하나는 ‘모범생처럼 깔끔하게 떨어지는 선’이라 하겠다. 불필요하고 어딘가 엇나가있는 습관이나 ‘쪼’가 없는 보컬과 그러한 보컬 운용을 뒷받침하는 깔끔한 미성의 음색, 역시 군더더기 없는 춤선과 그것을 만들어주는 피지컬 등등이 너무나 ‘모범적’이고 동시에 정교해서 이것이 천부적인 재능의 영역인지, 후천적인 연출력의 영역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래서 그룹의 멤버로서는 ‘표준성’을 담당하는 역할을 하지만, 솔로 앨범에서는 가장 다양한 것을 펼쳐보일 수 있는, 단 한 명으로도 충분하고 온전한 존재가 된다. 진짜 올라운더는 포지션 뿐만 아니라 장르와 멤버 구성조차도 넘나들 수 있다는 것을 앨범 한 장으로 설명한다.
영파씨 “XXL”
스큅: 높아진 씬의 기대치에 맞춰 많은 이들이 휘황찬란한 전신갑주를 두르고 컴백 전쟁에 뛰어드는 가운데, 영파씨는 대뜸 혈혈단신 맨몸으로 링 위에 올랐다. 그리 복잡다단하지 않은 곡 구성, 스킬 과시에는 큰 관심이 없는 듯한 정직한 보컬과 랩. 설익은 야망을 노래하는 가사 역시 자신들의 치기 어림을 애써 부정하지 않는다. 앨범을 구성한 많은 요소들이 놀랍도록 투박하지만, 동시에 결코 만만하지는 않다. 음악을 향한 진득한 갈망이 여실히 느껴지기 때문이다. 프로듀서 키겐은 올드스쿨 스타일을 중심에 둔 채 레이지, 아프로비트, 저지클럽 등 동시대적인 장르를 교차시키며 영파씨를 위한 안정적인 놀이터를 짓고, 멤버들은 그 위에서 힙합이라는 장난감을 요리조리 가지고 논다. 언뜻 장난스러워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성장기에는 장난이야말로 가장 진지하게 임하는 활동이지 않은가. 상처를 툭툭 털고 일어나 “작은 꿈”(‘Scars’)을 향한 뜀박질을 계속 이어가는 그들의 태도를 얕잡아볼 순 없을 것이다. 그러니 힙합 매거진 XXL 표지에 실리고 싶다는 이들의 터무니 없는 포부까지도 그저 응원하게 될 수밖에.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아마추어리즘의 봉기다.
아이브 “IVE SWITCH”
예미: 음악의 스케일과 레퍼토리 범위를 투어 규모에 걸맞게 확장하려는 아이브의 시도는 “IVE SWITCH”로 방향을 찾았다. 멤버들의 장식적인 목소리 톤에 어울리는 선명한 멜로디 라인이 사운드를 불문하고 전 곡에 걸쳐 살아있어 꼭 맞는 옷을 입었다는 인상을 준다. 공격적인 드럼 및 베이스 라인 배치와 판타지의 차용으로 표현의 폭을 넓히면서도 돋보이는 음색을 굳이 누르지 않은 ‘해야’와 ‘Accendio’가 그 선봉장에 있는 한편, 이후 수록곡들은 힘을 살짝 덜어내고 팀의 표현 범위를 자유롭게 시험한다. 앨범의 모든 곡이 조금씩 가진 선형적인 ‘노래’다움이 유독 어린 청자의 정서와 조응하는 아이브의 캐릭터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데, 팀의 정체성을 보존하면서도 훨씬 더 뻗어갈 곳이 넓다는 선언이 반가웠다.
트리플에스 “ASSEMBLE24”
예미: 24인조 완전체 트리플에스의 첫 정규앨범 “ASSEMBLE24”는 그룹 트리플에스의 표현 범위를 구획한다. 멤버 전원이 모든 곡을 불러야 하는 앨범의 구조는 자연스레 큰 그림에 초점을 맞춘 프로듀싱을 요구하는데, “ASSEMBLE24”는 스스로 만든 요구사항에 앨범의 모든 구성 요소를 동원하여 ‘서로의 손을 잡고 현실에 뛰어드는 소녀들’이라는 답을 내놓는다. 포메이션 변화가 돋보이는 퍼포먼스를 삶을 마주하는 치열함으로, 이해하기 쉽고 색채감 있는 사운드에 맞물린 생기있지만 평이한 가창을 어디에나 있을 법한 친근한 소녀의 얼굴로 이어보게 하는 역할을 타이틀곡 ‘Girls Never Die’가 맡는다. 다인원이라는 팀의 특징을 공동체와 연대의식으로 치환하여 이를 곧 아이덴티티로 굳히고, 이 앨범을 넘어 이후 트리플에스의 모든 컨텐츠에 영향을 끼칠 대전제를 만들어낸 앨범.
RM “Right Place, Wrong Person”
비눈물: “Right Place, Wrong Person”은 시작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나는 과연 제자리에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익스페리멘탈 힙합을 전면에 내세워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본 정체성의 혼란, 낯선 감정, 겉도는 듯한 불안감을 표현하지만, 역설적으로 RM의 자아는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혼란 속에서 길을 잃어도 (‘LOST!’) 흔들리지 않는 그의 단단함은 앨범의 뼈대를 이루며, ‘나’를 찾기 위해 멀리 뻗어나갔던 물음표는 긴 여정을 거쳐 결국 인간 김남준의 내면으로 돌아오게 된다 (‘Come back to me’).
이러한 RM의 아이덴티티를 감싸며 더욱 빛내주는 것은 오혁, 김한주, 리틀 심즈, 모세스 섬니 등 국내외 다양한 아티스트들의 참여다. 큐레이터가 세심하게 고른 작품들처럼, 앨범 곳곳에 배치된 팀 RM과 ‘도모다치’들의 고유한 색깔은 RM의 뚜렷한 취향과 조화를 이루어 팔레트처럼 풍성한 무드보드를 완성한다. RM의 정규 2집은 우연히 마주친 신비로운 미술관을 떠올리게 한다. 그를 방탄소년단의 리더로서만 알고 있던 이들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도 있지만, 용기를 내 한 발 내디딘다면 그의 유쾌하면서도 깊이 있는 내면과 투박하면서도 예술적인 면모와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에스파 “Armageddon”
에린: 에스파는 SM의 거대한 메타버스 세계관 ‘광야’를 기반으로 출발했지만, ‘Spicy’와 ‘Welcome To My World’를 거쳐 “Armageddon”으로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했다. ‘광야’라는 배경이 점점 희미해지는 상황 속에서, “I’m like some kind of Supernova”라는 가사는 마치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대답처럼 들린다. 무겁게 짓누르던 세계관이 흐려지면서, 에스파라는 그룹 자체의 존재감이 전면에 부각된다. ‘Supernova’는 엔진 소리를 연상시키는 전자음으로 시작해 긴장감을 끌어올리며, ‘Armageddon’은 후렴구를 길게 늘려 속도를 왜곡시키는 듯한 감각적인 충격을 선사한다. 이어지는 ‘Set the Tone’은 앨범 초반부의 뒤틀린 속도감을 정리하면서도, 다시금 레이스를 펼치는 듯한 역동적인 흐름을 만든다. 이 곡들은 미래적이면서도 초월적인 이미지를 형성하며, 에스파가 그들만의 속도를 의도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후반부의 ‘Prologue’와 ‘Live My Life’는 자신들이 구축한 세계 속에서 완전한 자유를 선언하며, 이들의 독립적인 음악적 세계관을 확립한다. ‘Supernova’의 “사건은 다가와”라는 가사처럼, 2024년 가장 강렬한 ‘사건’이 된 앨범.
아르테미스(ARTMS) “<DALL>”
비눈물: 아르테미스는 전 소속사를 벗어난 이달의 소녀 멤버 중 5명이 모여 새롭게 데뷔한 그룹이다. 아르테미스는 그 시작부터 이달의 소녀와의 비교를 피할 수 없는 운명이면서, 동시에 재데뷔한 그룹으로서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정립해야만 했다. 아르테미스는 하나가 되는 과정을 하나하나 보여주기로 결심한다. 그룹의 완결성을 위해 결성 과정(오드아이써클-희진-하슬)부터 3단계로 빌드업하고, 데뷔 ‘정규’ 앨범을 꾸린다. 또한 유닛 및 솔로 곡을 샘플링하여 만든 신곡을 하나씩 선공개하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준다. 방식에 대한 우려도 있었으나 결국 “Dall”이 공개된 후 앨범의 3단 구성(4곡-4곡-3곡) 안에서 선공개곡들이 제자리를 찾아 균형을 이루게 되며 완결성에 대한 지독한 집착은 일정 부분 그 필요를 증명해 보였다.
타이틀곡 ‘Virtual Angel’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로 대표되는 첫 번째 페이즈는 기존 그룹이 품었던 우주·몽환 테마와 익숙한 ‘루나 사운드’ 위에 컬트적 분위기와 신성한 심상을 더하여 아르테미스만의 정체성을 소개한다. 유닛/솔로 트랙을 샘플링한 두 번째 페이즈는 아르테미스가 전형적인 걸리시 팝을 한다면? 이라는 상상력 아래 여러 장르 소화력을 보여주고 앞으로의 가능성을 점쳐본다. 마지막 페이즈는 앨범의 서사를 마무리하며 아르테미스만의 사운드를 심화적으로 탐구한다. 특히 첫 번째 선공개곡이었던 ‘Birth’는 그룹이 추구하는 실험적 사운드와 서브컬쳐와 컬트가 접목된 미적 감각을 선명하게 보여주며 가장 소름끼치는 앨범의 마무리이자 그룹의 시작을 선언하는 역할을 맡는다.
생각해보면 아르테미스는 우연에 우연이 겹치며 갑작스레 모이게 된 운명이다. 그러한 그룹이 첫 앨범부터 뚜렷한 주제 의식 아래 유기성을 갖춘 탄탄한 정규 앨범을 발매할 수 있었던 것은 기존 제작진과의 재회, 그리고 ‘지독한 집착’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이유는 오랜 기간 활동하며 체화한 기억과 경험들이 차곡히 쌓여 “Dall”을 구성하는 특별한 유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희진, 하슬, 김립, 진솔, 최리 5명의 목소리는 ‘Virtual Angel’, ‘Flower Rhythm’ 등 수록곡에서 전에 없던 새로운 밸런스로 어우러져 그룹의 유닛이 아닌 아르테미스로서 고유한 특성을 정립해나간다. 재에서 불타오르듯 새롭게 태어난 아르테미스가 앞으로 새로운 낯섦과 오랜 익숙함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아나갈지 주목해도 좋겠다.
레드벨벳 “Cosmic”
비눈물: 데뷔 10주년을 맞이한 레드벨벳은 지나온 길을 단순히 되돌아보는 대신 시선을 더 먼 곳으로 확장한다. “Cosmic”은 ‘우주’와 ‘신스팝’이라는 두 키워드를 축으로 삼아, 지금까지의 디스코그래피 중 가장 정제되고 조화로운 구성을 선보인다. 이전 앨범들이 장르를 거침없이 넘나들며 트랙 간 대비를 선명히 드러냈다면, “Cosmic”은 넘버링의 제약에서 벗어난 스페셜 앨범이라는 특성을 활용해, 보다 통일된 주제와 사운드 아래 그라데이션처럼 부드럽게 이어지도록 설계되었다.
하나의 흐름을 따라 전개되는 앨범 안에서도 특히 반짝이며 마음을 사로잡는 순간들이 있다. 타이틀곡 ‘Cosmic’은 씁쓸한 멜로디로 울컥하는 감동을 자아내고, ‘Last Drop’은 죽어가는 별의 마지막처럼 모든 걸 불태우겠다는 절절한 서사로 깊은 여운을 남긴다. 또한, ‘벨벳’ 콘셉트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프로듀서 다니엘 오비 클라인과 수민(SUMIN)이 함께 완성한 ‘Bubble’은 레드벨벳의 절기인 R&B의 정수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어떤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을 미래를 약속하는 ‘Night Drive’는 시티팝의 감성을 빌려와 앨범의 낭만적인 마무리를 맡는다.
우주처럼 광활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가사 위로 붕 뜬 판타지에 핍진성을 부여하는 것은, 부드럽게 하나로 섞이는 레드벨벳의 단단한 목소리다. 여러 겹의 화음을 쌓거나, 혹은 한 겹의 소리로 정교하게 맞물리는 다섯 명의 보컬은 하나의 악기처럼 기능하며 곡의 서사를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또한, 유사한 무드가 이어지는 구성 속에서도 의외의 변주를 더해주며 듣는 재미를 놓치지 않는다.
레드벨벳은 “Cosmic”을 통해 지난 10년간 쌓아온 레거시의 견고함을 증명하는 동시에, 그 너머를 내다보는 비전을 제시한다. ‘천둥, 번개든 무엇이든 상관없’다며 (‘Night Drive’) 힘주어 외치는 슬기의 진심어린 목소리를 듣고 나면, 자연스레 이들의 여정을 끝까지 함께 하겠노라 다짐할 수 밖에 없다. 이제 남은 건 레드벨벳이 다음에는 또 어떤 경이와 즐거움을 선사할지, 경의와 믿음을 갖고 기다리는 일뿐이다.
NCT 127 “WALK”
미묘: “앨범은 유려한 R&B 보컬과 SM엔터테인먼트 특유의 매끄럽고 환상적인 보컬 화성, 까칠한 래핑의 교차가 여느 때보다도 준수한 균형감과 짜릿한 청각적 쾌감을 제공한다. 그래서 “드디어 SM에서 제대로 된 랩이 나온다”는 NCT 초창기 기대감이 이제는 재론의 여지가 없을 만큼 완성형으로 충족됐음을 재확인하게 된다. 이는 단지 랩을 잘하는 멤버가 있거나 본격적인 힙합 사운드를 구사한다는 식의 문제가 아니다. SM의 음악적 자산과 전통 위에 안정적이고도 효과적인 구성미를 제시하고 이를 K팝, 또는 팝 음악으로서 성립시키는 완성도의 차원이다.” (〈주간동아〉 2024.07.25 “마침내 완성, ‘삐그덕’ NCT 127” 中)
재현 “J”
마노: 디지털 싱글 형식으로 발매했던 전작들(‘Try Again’, ‘Forever Only’, ‘Horizon’)의 연장선에 놓인 발매작을 섣불리 점쳐보았던 기대는 여지없이 배신당하고 말았으나, 그것이 되려 기분 좋게 다가오는 이유는 아마 아티스트가 음악을 대하고 있는 진지한 태도 덕분이 아닐까 한다. 이전까지의 디스코그래피와는 상당히 판이한 무드와 장르를 취하고 있는데, 아티스트가 가진 특유의 매캐한 질감의 음색과 썩 잘 어우러져 있음은 물론 고유의 캐릭터와도 잘 맞아 떨어지는 인상을 준다. 그루비한 리듬 위에서 미끄러지듯 춤추는 센슈얼한 ‘으른 남자’부터(‘Smoke’) 재지한 화성을 노래하는 천진무구한 소년까지(‘Dandelion’) 마치 옷을 바꿔 입듯 능수능란히 연기해내는 점에서는 (속된 표현으로) 그간의 ‘짬’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앨범 전체를 꿰어내는 솜씨인데, R&B 및 힙합이라는 장르로 통일성과 유기성을 주면서도 적절한 변별점과 억지스럽지 않은 변화구를 주어 25분 여의 러닝타임을 지루할 틈 없이 꽉 채웠다. 완성도에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으나, 굳이 토를 달자면 (‘Smoke’의 영어 버전 트랙을 포함한) 8곡이라는 구성이 풀렝스 앨범치고는 다소 단출하다는 점일까. 그러나 이런 소소한 불만은 차기작에 대한 기대로 남겨놓아도 좋지 않을지. 그의 복귀가 감히 기다려지는 이유다.
리센느 “SCENEDROME”
조은재: 우아하고 몽환적인 콘셉트로 어필해온 걸그룹은 꾸준히 있어왔지만, 리센느가 그 중에서도 깊은 인상을 남긴 이유는 자칫 강렬하지 않게 흐려지고 모호해질 수 있었던 인상을 ‘향’이라는 테마를 통해 강하게 각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감히 ‘올해의 노래’로도 꼽을 수 있는 ‘Pinball’에 와서는 그루브감이 살아있는 보컬이 신비로운 무드로 퍼져가는 사운드 위를 유영하며 ‘귀로 맡는 향수’를 잔뜩 흩뿌린다. 앨범 전체에 걸쳐 R&B가 주는 적당한 상승감에 향처럼 퍼지는 리버브가 예쁘게 다듬어진 보컬과 좋은 호응을 보이는데, 마치 조향부터 케이스, 마지막에 묶어주는 얇은 리본까지 하나의 세트를 구성하는 니치 향수 브랜드의 심플한 듯 소담한 디자인을 닮아있다. 후각에 대한 기억이 가장 오래 지속된다던가. ‘기억되고 싶다’는 메시지를 표현하기엔 향기만한 것이 없고, 그 후각적 기호를 청각적으로 번역해내는 데에 성공한 훌륭한 사례라 하겠다.
빌리 “appendix: Of All We Have Lost”
에린: 빌리는 “Of All We Have Lost”에서도 이전 앨범들에서 구축한 ‘신비로운 모험’이라는 서사를 이어가며 자신들만의 디스코그래피를 견고히 한다. ‘기억사탕’은 발랄한 리듬과 따뜻한 보컬로 산뜻한 모험의 시작을 알리며, ‘trampoline’은 복잡한 리듬과 전환으로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재즈 리듬과 몽환적인 신스 사운드가 어우러진 ‘Blue Rose’는 앨범 전체를 감싸는 판타지적 분위기를 더욱 극대화한다. 이후 ‘BTTB’는 강렬한 전자 사운드로 판타지 세계 속 위기를 돌파하려는 도전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앨범 후반부에 위치한 ‘shame’과 ‘dream diary~etching memories of midnight reverie’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아련하게 마무리하며 서사를 완성한다. “Of All We Have Lost”는 배경, 인물, 서사가 조화롭게 결합된 하나의 예술적 판타지로, 빌리만의 동화적인 세계를 완성한다.
이브 “I Did”
비눈물: “I Did”는 데뷔 앨범의 첫 곡 ‘DIORAMA’에서 이브가 보여준 가능성을 확장시키면서도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한다. 이전 앨범이 장르를 넘나들며 실험과 탐색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 앨범은 프로듀서 IOAH의 주도 아래 이브에게 잘 어울리는 사운드를 구축하며 불필요한 요소를 덜어내고 더욱 단단한 형태를 갖추었다. ‘Viola’는 전작의 날카롭고 감각적인 사운드를 유지하면서도, 하우스풍을 계승한 하이퍼 팝 스타일을 통해 국내 여성 솔로 아티스트 사이 유별난 입지를 점한다. 이후 앨범은 ‘Hashtag’를 기점으로 R&B 사운드의 스펙트럼을 확장하며, 앨범 전체에 걸쳐 자연스러운 유기성을 갖춘다. 또한 아직 확신을 갖지 못한 희미한 자아를 표현하기 위해 곳곳에 드라이한 보컬 필터와 오토튠을 활용하며, 이러한 디테일을 통해 아티스트 본인의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앨범의 기획과 구성의 결을 일관되게 맞춘다.
그렇게 모아진 흐름의 끝에서 마지막 곡 ‘DIM’은 새벽 숲 안개를 연상케 하는 스산한 스트링 선율과 두꺼운 베이스 비트를 제외한 모든 소리가 가라앉고, 이브의 어둑한 목소리만 남아 분위기를 전환한다. 통제를 벗어나 자유를 갈망하는 노랫말이 멎고, 침묵이 스며드는 순간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고, 빠르게 쪼개지는 비트와 불안한 전자음이 겹쳐지면서 혼란스러운 내면을 청각적으로 형상화한다. 결국 모든 것이 사그라든 최후에는 텅 빈 비트만 남아 앨범의 핵심 주제인 ‘평온함’을 구현한다. 이브가 이토록 깊고 진솔하게 자신의 음악과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었던 것은 솔로이스트로서 자신만의 뚜렷한 그림을 구상할 수 있는 능력과, 이를 분명하고 유니크한 방향으로 이끌어준 현 소속사의 전폭적인 지원이 맞물렸기 때문이다. 그는 아티스트와 아이돌 둘 중 어떠한 수식에도 쉽사리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브랜딩을 영리하게 구축하며 솔로 활동에 뒤따르던 의심과 물음표를 미래에 대한 기대와 느낌표로 바꿔놓는다.
로제 “rosie”
마노: 각자 흩어져 활동하고 있는 블랙핑크 멤버들 중에서도 로제의 행보는 유독 흥미롭다. 선공개 싱글로 국내외로 큰 사랑을 받은 ‘APT.’를 제외하고 피처링 아티스트를 기용한 트랙이나 댄스 음악 장르의 트랙 없이 오롯이 본인만의 목소리로 12곡이라는 상당한 볼륨을 채웠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본작을 통해 아티스트가 추구하는 음악성이 왠지 모르게 테일러 스위프트 같은 기존의 서구권 아티스트를 연상시킨다는 점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로제라는 솔로 아티스트의 행보가 이토록 흥미롭게 다가오는 이유는, 본작에 이르러서야 아티스트 고유의 캐릭터와 아이덴티티가 비로소 온전히 드러난다는 점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레 점쳐본다. 사상 첫 풀렝스 앨범에 굳이 본인의 애칭을 타이틀로 붙였는데, 아마 여느 때보다 가장 내밀하고 ‘본인다운’ 이야기를 고백하고 있는 작품이기에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은 아닐지. 그래서일까, 완성도를 고려하여 매우 고심하고 공들인 흔적이 여기저기서 엿보이기도 한다. 싱글컷된 ‘number one girl’, ‘toxic till the end’, ‘APT.’ 등의 트랙을 중심으로 수록곡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완급과 호흡을 조절한 점 역시 탁월하고, 자칫 흐름을 깨거나 유기성을 끊기 일쑤인 메가 히트 싱글 앞뒤로 적절한 변곡점을 주어 전체적인 흐름을 매끄럽게 갈무리했다. 말할 것도 없이 가장 ‘로제다운’ 작품임은 물론이고, 후대의 솔로 여성 아티스트에게도 좋은 사례로 남지 않을까 감히 단언해본다. 케이팝 아티스트가 자전적인 이야기를 음악에 녹여낸다고 해서 안 될 것이 그 무어 있는가 말인가.
- 결산 2024 : ④뮤직비디오 Pick! - 2025-02-28
- 결산 2024 : ③올해의 앨범 16선 - 2025-02-28
- 결산 2024 : ②올해의 노래 16선 - 202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