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의 아이돌 팝을 돌아보며, 아이돌로지는 전/현역 필진 11인과 객원 심사위원 6인(늘, 도니언, 만나, 잔물결, 티미랩, 파이)의 투표를 거쳐 2024년 발매된 아이돌 팝 싱글 중 올해의 노래 16곡을 선정했다. 별도의 순위는 산정하지 않았으며, 순서는 발매순으로 정렬했다.
엔믹스 ‘DASH’
랜디: “어딘가 붕 떠 있는 느낌을 주던 NMIXX의 음악이 드디어 지상에 안착한 느낌이다. 지난 음반부터 점차 이지리스닝을 염두에 둔 변화가 보였다면, 이번 곡 ‘DASH’는 펑크에 가까웠던 올드스쿨 힙합에 기대 듣기 좋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펑크 드럼 브레이크 비트와 묵직하게 춤추는 베이스라인이 곡 전체의 중심을 잡고 달린다. 도입부 3초가 이미 완벽하다. “Dash, I wanna dash, I wanna run it” 하는 릴리의 선창 뒤로 멤버 전체의 화성이 들어오고, 음가와 타격감이 동시에 들리는 뉴 잭 스윙 힙합의 대표 악기 오케스트라 힛이 청신경을 번쩍 놀래킨다. 후렴을 보컬 화성으로 풍성하게 만드는 건 레드벨벳이나 NCT 같은 팀에게서 자주 들리던 방식인데, NMIXX의 스타일로 들으니 그들 나름의 매력이 있다. 오케스트라 힛처럼 ‘음이 있는 타악기’ 느낌으로 쓰여 더욱 쫄깃하게 들린다. 역시 노래를 잘하는 팀이다.” (〈위버스 매거진〉2024.01.26 “이 주의 영화, 예능, 도서, 음악” 中)
투어스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
예미: 데뷔의 순간과 첫 만남의 두근거림이 겹쳐지는 가사를 교복 입은 소년이 부르는, 소위 ‘청량 컨셉’의 공식이 곡 전반에 녹아있다. 코드 전개를 정확하게 읽을 수 있는 정직하고 힘찬 사운드와 멜로디 전개 위주의 보컬 구성으로 비교적 긴 길이의 제목을 청자에게 각인시킨다. 특히 이전 세대의 향수마저 느껴질 정도의 멜로디 전진 배치에서 느껴진 ‘가요’의 유산이 곡의 가독성을 높이는 기폭제처럼 느껴진다. 모든 요소가 과할 정도로 고전적이어서 오히려 반가웠던 훌륭한 계획 덕에 투어스는 2분 33초 만에 아이돌 시장과 첫 만남에 성공했다.
영파씨 ‘XXL’
에린: 2023년에 데뷔한 그룹 영파씨는 힙합을 주된 장르로 삼으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2024년 발매한 ‘XXL’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Come Back Home’을 오마주한 사운드를 기반으로, 묵직한 비트 위에 공격적으로 내뱉는 랩이 돋보이는 곡이다. 영파씨는 ‘XXL’로 90년대 힙합의 감성을 2024년의 스타일로 재해석 하고 있는데, ‘가요톱텐’의 형식을 차용한 ‘XXL’의 퍼포먼스 비디오는 무대 전체를 배경으로 한 풀샷이나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카메라 워크 등을 활용하며 곡이 표방하는 분위기와 콘셉트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역동적인 동작과 관객의 호응을 유도하는 퍼포먼스 또한 이전 곡인 ‘마카로니 치즈’, 차기 컴백곡인 ‘ATE THAT’과 연결되며, 영파씨 특유의 중독성 있는 후렴구를 완성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명확한 콘셉트 구현과 장르적 색채를 바탕으로 탄탄한 디스코그래피를 쌓아가고 있는 그룹으로서 주목할 만하다.
아일릿 ‘Magnetic’
조은재: 갓 데뷔한 신인 그룹이 2020년대 초반기의 케이팝 트렌드를 집대성하면서 동시에 선도해내는 걸출한 싱글을 발표했다. 그러나 ‘기획의 승리’라기엔 잘게 나뉘어진 비트 사이를 바쁘게 뛰어다니는 멤버들이 최전면에 배치되어 있어, 결국 ‘좋은 기획’이란 ‘리더’가 아니라 ‘서포터’의 위치에 있을 때 그 진가가 나옴을 깨닫게 된다. ‘Magnetic’을 리드하는 것은 전적으로 아일릿 멤버들이다. 트렌디한 음색으로 킬링파트를 돋보이게 하는 민주와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발군의 연기력을 보여준 원희, 그리고 저마다 아이코닉한 장면들을 연기해내는 멤버들의 재능이 ‘Magnetic’에 가득 채워져있다. 그래서 그 누구도 ‘Magnetic’을 들으며 다른 이를 떠올릴 수 없으며, 이것이 케이팝 아이돌이 아이덴티티를 만들어나가는 가장 전통적이고 정석적인 방식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들의 재능이 데뷔곡 ‘Magnetic’ 뿐만 아니라 이후 발표한 곡들에서도 그대로 빛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멤버들 본연의 매력, 그 자체가 아이덴티티가 될 때 퍼포먼스는 더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일릿이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총괄 기획자로서의 제작자들이 자의식 과잉을 버리고 실연자인 멤버들에게 집중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멤버들이 가려지면 제작자 또한 지워짐을 깨닫게 되는 2024년이었다.
온앤오프 ‘Bye My Monster’
마노: 케이팝과 클래식의 접목은 1세대 때부터 작금에 이르기까지 흔하게 시도되어 왔다. 대다수가 샘플링이라는 방식으로 클래식 넘버를 소환해왔는데, 이 곡 역시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3악장(Rachmaninoff’s Symphony No.2, Ⅲ. Adagio)의 테마를 코러스 파트에 차용하여 곡의 비극적인 서사와 처연한 정서를 극대화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적재적소에 배치한 악기의 활용인데, 곡의 도입을 열어내며 서정성을 더하는 피아노 리프, 프리코러스를 탄탄히 받혀주는 오케스트레이션, 보컬과 함께 한껏 폭발하는 록 사운드 등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쓰인 것이 없어 경탄을 연발하게 된다. 무엇보다 이 곡의 가장 큰 미덕이란 사람의 목소리라는 악기의 아름다움을 최대치 이상으로 끌어내고 있다는 점인데, 어느덧 팀과 (2025년 기준으로) 9년 째 호흡을 맞춰온 전담 프로듀서 황현이라서 해낼 수 있는 업적이 아닌가 싶다. 한 차례 몰아치다 그야말로 ‘일렁이는 호수’처럼 잔잔해지며 6명이 유닛별로 한 소절씩 주고 받는 브릿지 파트에서 순수한 애수(哀愁)를 느끼지 않을 이가 과연 있을까. 한 마디로 요약하건대, 케이팝과 클래식의 하이브리드는 많았을 지언정 케이팝과 클래식에 록까지 더해 이토록 우아하고 아름답게 빚어낸 혼종은 이제껏 없었다. 그런 일이 과연 있을까 싶지만, 이 곡을 한 번도 들어보지 않았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비극이 아닐지.
트리플에스 ‘Girls Never Die’
미묘: “느긋한 템포에 R&B적 색채가 흐르는 사운드는 우아해서 그로테스크하다. ‘죽지 마’ ‘울지 마’가 반복되는 절박한 가사에도 보컬은 그저 묵묵히 걸어가며 노래만 하는 듯한 처연함을 유지한다. 끔찍한 세계일수록 춤추는 뮤직비디오와도 같은 결이다. (중략) 영상은 내내 한껏 불길하게 추락하기만 하는 까마귀를 보여준다. 그러다 영상 후반 각기 한 쪽씩 검은 날개를 단 두 소녀가 손잡은 채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에 이를 때 곡은 가장 과감한 메시지를 던진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갖는 게 아니라, 극한의 절망 자체를 희망으로 삼는 것, 그리고 그 열쇠로서 ‘서로’를 말한다. 트리플에스는 이전부터 ‘거리에서 춤추고 틱톡을 하는 소녀들’로 대표되는, 말하자면 ‘K팝 리얼리즘’으로 동시대성을 추구했다. ‘Girls Never Die’는 이를 가장 암울한 곳까지 끌고 내려가 터널 속을 지나는 현실을 향한 용기와 위로를 시도하며, 미학적으로도 하나의 완성형에 도달한다.” (〈주간동아〉2024.05.22 “유별난 24인조 소녀들 ‘트리플에스’” 中)
에스파 ‘Supernova’
스큅: 그룹과 회사를 둘러싼 정쟁으로 세계관의 균열을 마주한 시점, 에스파는 “우린 어디서 왔나”라는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를 재정의한다. 에스파가 내놓은 답은 놀랍게도 ‘균열’ 그 자체다.
‘Supernova’는 온통 균열로 가득 들어찬 곡이다. 끝없이 꿈틀거리는 베이스 라인, 좌우로 분주히 왔다갔다 하는 사운드의 패닝, 어깃장을 놓듯 엇박으로 마구 때려박는 후렴구, 잊을 만하면 비집고 들어와 후렴구와 주객을 전도시키는 “사건은 다가와 Ah Oh Ay” 파트, 예상치 못한 브릿지의 비트 체인지까지. 네모반듯한 규범에 짜릿하게 균열을 내는 송메이킹은 프로듀서 켄지와 뎀 조인츠의 시그니처이자, 곧 SMP의 본질이기도 하다.
여기에 더해 우스꽝스럽고도 매혹적인 뮤직비디오는 균열을 통해 효용이 완성되곤 하던 아이돌 세계관의 역설을 새삼스레 상기시킨다. 많이들 쉬쉬하지만, 사실 진중한 설정의 늪에서 멤버들이 문득 설정 바깥의 자아를 드러내는 순간이야말로 세계관의 묘미 중 하나 아니던가. SMP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에스파의 터무니 없는 세계관 역시 이를 뻔뻔스레 긍정하며 메타적 인식을 드러내는 멤버들로 인해 비로소 활기를 띠곤 했다. (멤버들이 유영진에게 소녀시대의 ‘Beautiful Girls’ 같은 노래를 받고 싶다 요청해서 ‘aenergy’를 받게 되었다던가, 지젤이 영상통화 팬사인회에서 우리가 일할 동안 ae-멤버들은 게으르게 아무 것도 안 한다고 디스를 했다던가…) 황당하기 짝이 없는 장면들을 멤버들이 천연덕스레 연기해내는 모습을 보며 이러한 균열이 세계관의 일부로, 아니 아예 핵심으로 완전히 공인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마침내 각성하여 폭주하던 멤버들의 얼굴을 AI 이펙트로 일그러뜨리며 ‘균열’을 완벽하게 성문화한 뮤직비디오의 마지막 시퀀스는 2024년 케이팝의 가장 진보적인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모든 것이 붕괴되는 순간 가장 번뜩이는 빛이 뿜어져나왔고, 그렇게 세계관의 균열은 불의의 사고가 아닌 주목할 만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 균열이야말로 케이팝의 근원이었던 게다. 도전보다 안전을 택하곤 하는 현 세대 케이팝이 잊고 있던 사실을 ‘Supernova’는 일깨웠다. 프로덕션과 멤버들의 줄탁동시로 만들어낸, SM 3.0 시대의 메타-SMP.
뉴진스 ‘How Sweet’
스큅: 맥시멀리즘의 튜닝 끝에 다다른 케이팝이 미니멀리즘의 순정을 넘보기 시작한지도 오랜 세월이 흘렀다지만, 그 가운데서도 뉴진스는 유독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구석이 있다. 뉴진스의 미니멀리즘은 과한 치장을 하나 둘씩 걷어내는 ‘빼기’의 방식이라기보다, 무(無)에서 시작해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들을 하나씩 얹어가는 ‘더하기’의 방식에 가까워보이기 때문이다. (프로듀서 250이 ‘Attention’의 보컬 찹 루프 위에 키보드 반주와 비트를 차례대로 얹어갔듯이, 퍼포먼스 디렉터 김은주가 멤버들이 놀면서 나오는 움직임에서 안무를 발전시켰듯이, 별도의 티징 없이 공식 계정에 노래와 뮤직비디오만 덜컥 공개한 뒤 부대 콘텐츠를 추가해갔듯이.) 이러한 비움이 아닌 채움의 미니멀리즘에서는 독특하게도 절제미나 균형미보다도 새싹이 움트는 듯한 움트는 듯한 생기가 감지된다.
‘How Sweet’은 뉴진스만의 미니멀리즘 미학을 이어가되 이를 색다르게 비튼다. 여느 때처럼 댄스 뮤직에 근거한 탄탄한 리듬과 몽롱한 화성 세션을 정교하게 배열한 트랙 위에서 노래는 ‘지겨움’의 정서를 담아낸다. 줄곧 설렘과 떨림을 그리던 뉴진스가 노래하는 권태라니. 줄곧 중저음역에 머물며 상승보다 하강이 강조되는 탑라인, “toxic lover”를 일갈하는 냉소적인 가사, 나른함을 넘어 따분하게까지 들리는 가창은 고양감을 자아내던 이전 곡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방법론을 택하고 있다. 그러나 권태가 이끈 설렘과의 작별은 해방감이라는 또다른 형태의 생기를 부여한다. 이는 90년대 스트릿 댄스 스타일에 충실한 안무, 히로시 후지와라와의 협업으로 완성된 우아하라 패션과 결합하며 기존의 애쓰지 않음(effortless)의 미학을 여유로운 칠(chill)함으로 확장한다. 개인적 변용의 여지를 한껏 열어둔 안무 덕에 어느 때보다도 무대에서 자유로이 뛰노는 멤버들의 퍼포먼스를 보는 재미 역시 쏠쏠했다. 공중에 두둥실 떠올라 있던 뉴진스가 지상에 발을 붙이도록 한, 인상적인 분기점으로 기록될 만한 곡.
에스파 ‘Armageddon’
마노: 곡이 세상에 처음 발표 되었을 당시, 팀에게 수시로 붙던 ‘쇠맛’이라는 수식어를 넘어 본격 ‘흙맛’이라는 평이 온라인을 중심으로 퍼지곤 했었다. 진흙마냥 질퍽하고 묵직한 곡의 전반적인 텍스처 하며 어딘가 텁텁하고 까슬하게 느껴지는 뒷맛 같은 부분 등을 생각하면, 그런 묘사가 무리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한없이 어둡고 둔탁하게 떨어지는 비트, 시종일관 낮게 그르렁대는 신스, 후반부에 하강하며 무겁게 내려앉는 드럼까지 ‘흙맛’이 느껴지지 않는 부분이 없는데, 각각의 요소가 마치 겹겹이 쌓아올린 지층과 같다고 한다면 너무 억지스러운 비유일까. 한 층 한 층 집요하게 쌓아올려 빚어낸,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광야(廣野)’. 굳이 세계관 같은 장치를 빌려오지 않고도, 심지어 가장 ‘에스파다운’ 것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이 곡은 어떠한 쾌거다.
레드벨벳 ‘Cosmic’
비눈물: ‘Cosmic’은 최근 활동곡에서 주로 나타났던, 울컥하면서 벅차게 만드는 후렴 구성을 이어간다. 장조와 단조를 휘이 넘나들며 희망차면서도 동시에 씁쓸한 멜로디를 만든다. 멀리는 ABBA가 떠오르는 빈티지한 디스코 비트와 현악기가 함께 어우러지면서 익숙한 애수를 자아내는 한편, 6박에서 다시 시작하는 불완전한 프레이즈 구조를 통해 끝날 듯 끝나지 않고 노래가 계속될 듯 들리게 만든다. 이렇게 익숙함과 낯섦이 끊임없이 부딪치며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청자에게 멜랑콜리한 감정을 이끌어낸다.
SM의 대표 프로듀서 켄지와 레드벨벳의 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낸 문샤인이 함께 만들어낸 여러 음악적 장치를 완성시키는 것은 레드벨벳의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목소리이다. 특히, 레드벨벳의 하모니 속에서 저음을 채우는 예리의 음색으로 시작해 거침없이 뻗어나가는 웬디의 애드리브로 이어지는 브릿지 파트는 노래의 주제인 무한하고 광활한 사랑을 몸서리치도록 생생하게 구현한다.
레드벨벳은 10주년을 맞이하면서도 지금까지 구축해온 그룹의 고유한 영역을 지켜내며, 항상 그래왔듯 여전히 새롭고 흥미로운 음악을 내어줄 수 있음을 증명한다. ‘Cosmic’은 긴 시간을 함께해 온 레드벨벳이 앞으로도 우주처럼 더 머나먼 목표를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끄는 반짝이는 이정표이며, 동시에 지금까지 레드벨벳이라는 ‘별’에 다녀간 모든 ‘여행자’에게 우주처럼 무한한 사랑을 바치는 숭고한 팬송이다.
리사 ‘Rockstar’
예미: ‘LALISA’ 시절부터 엿보인 ‘태국인 라리사 마노반’의 정체성은 ‘Rockstar’에 이르러 더욱 선명해졌다. 리사는 방콕 야오와랏 거리를 배경으로, 이국적 멜로디와 신스 진행, 어두운 피부 연출을 통해 태국인으로서의 자신을 비관습적이되 현대적인 존재로 그려낸다. 그가 표현하려는 ‘비관습적임’의 비교 대상이 그의 배경이자 도구인 케이팝 및 팝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미국 RCA에서 영어로 발매된 이 곡도 과연 케이팝일까? 그가 사용하는 도구와 존재양식이 불러일으키는 의문이 ‘월드와이드’ 케이팝의 현재란 점만큼은 분명하다.
리센느 ‘Pinball’
예미: ‘Pinball’은 보컬 기량이 돋보이는 걸그룹으로 리센느를 소개한다. 2010년대 SM의 유명 R&B 트랙 다수를 만든 안드레아스 오버그의 주도 하에 제작된 ‘Pinball’은 미니멀하고 차분한 신스 위에 산뜻한 질감의 목소리로 리듬을 밀고 당기는 R&B식 가창을 내세운다. 하강하다 살짝 상승하는 멜로디의 후렴 “I’m playing pinball pinball pinball / Love is like an arcade” 를 뒷받침하는 풍성한 코러스가 겨냥하는 곳은 명백히 케이팝 팬의 기억 속 ‘보컬팀으로서의 걸그룹’ 이다. 현 케이팝 시장에서 공급이 줄어가던 ‘보컬’에 대한 열의를 멤버의 역량과 회사의 배경을 더해 자신들의 영역으로 확보하는 영리한 전략이 그룹의 미래를 기대하게 만든다.
르세라핌 ‘Crazy’
에린: 르세라핌에게 ‘미치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르세라핌은 ‘FEARLESS’, ‘ANTIFRAGILE’, ‘UNFORGIVEN’에서 반복적인 캐치프레이즈를 활용해 두려움 없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진취적인 메시지를 전달해 왔다. 그러나 ‘성공’, ‘실패’, ‘추락’ 등의 단어가 주는 현실적인 무게감이 그룹에게 부담으로 작용하며, 기존의 소구점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Crazy’는 그러한 무게감을 전복하고, 폭발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대신 내면에 응축된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미침’을 해석한다. 뮤직비디오는 멍하니 화면을 응시하는 멤버들의 모습으로 시작하며, 키치한 의상과 하우스 리듬을 기반으로 한 퍼포먼스, 그리고 분절적인 안무 동작들을 통해 기존의 메시지를 정면 돌파하기 보다는 내적으로 몰입해서 ‘미친’ 상태를 그려낸다. 기존의 메시지를 재해석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돌파구를 찾고 있는 시도가 돋보이는 곡.
XG ‘IYKYK’
스큅: XG가 m-flo의 ‘Prism’을 샘플로 낙점한 것은 참으로 절묘하다. 한미일을 가로지르는 글로벌한 배경을 지닌, 힙합과 일렉트로니카를 넘나들며 2000년대 일본과 한국을 풍미했던 제이팝 그룹의, 성간(星間) 여행을 콘셉트로 한 곡. “은하계의 늑대(galactic wolves)”라는 외계 크리쳐의 형상으로 초국적 케이팝의 탐험을 단행하는 그룹 XG의 평행우주라 해도 좋지 않은가. 이러한 평행우주를 꿰뚫어보기라도 한듯, ‘IYKYK’는 단순 샘플링을 넘어 ‘Prism’을 계승하고 번안한 하나의 대구(對句)를 만들어낸다. 곡의 메인 테마인 몽롱한 아르페지오 건반과 보컬 리프는 물론, 투스텝 리듬, 성간 여행의 콘셉트까지 원곡의 에센스는 모두 고스란히 유지되며, 이는 2024년의 사운드, 능수능란한 일곱 멤버의 보컬-랩 앙상블로 새롭게 태어난다. 우주를 꿈꾸던 인간으로부터 은하 여행자로 입장을 달리한 가사는 마치 먼 미래로부터 과거의 인간(이는 곧 ‘Prism’의 화자이리라)에게 우주 여행 초대장을 보내는 외계인의 교신 신호처럼 들린다. 다다미방, 타비 양말, 부항, 침술 등 일본/동양의 전통 코드를 이색적인 빛깔로 포장한 뮤직비디오는 XG의 평행우주를 매끈하게 실체화한다.
‘Shooting Star’ 때부터 XG는 현실-과거의 요소를 가상-미래의 색감과 질감으로 치장하는 데에 두각을 나타냈고, 초현실적이고 미래적인 이미지는 초국적 케이팝이라는 그들의 정체성과 조응했다. 2024년의 XG가 흥미로웠던 점은 이러한 미학을 증폭시키는 기폭제로 일본의 로컬리티를 활용했다는 것이다. 기존의 고고함 위 신비로움을 한 꺼풀 덧입은 음악, (아니메라기보다는) ‘재패니메이션’을 연상시키는 비주얼 콘셉트, 현란한 하라주쿠 패션은 한국의 케이팝과는 사뭇 다른 기이한 아름다움을 탄생시켰다. 이는 물론 여전히 온갖 문화들을 끌어와 부싯돌처럼 충돌시키며 형형색색의 스파크를 터뜨리는 케이팝의 방법론에 입각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문화라도 자기 식대로 번안하여 융화시키는 제이-컬쳐의 유구한 방법론을 따른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XG는 해외 문화에 영감을 얻어 독자적으로 발전해온 일본 문화(제이팝, 재패니메이션 등)가 해외로 뻗어나가 각색된 문화의 단면들(제이팝을 참조했던 케이팝, 힙합 등 서구권의 유색인종 문화에 스며들었던 재패니메이션 코드 등)을 다시금 일본식으로 번안해내는, 문화적 순환의 환상교차로인 셈이다. 역설적이게도 XG의 초국적 케이팝 정체성은 ‘케이’ 바깥의 지역성을 녹여내며 더욱 단단해졌다고 할 수 있겠다. 2024년 본격적으로 부상한 초국적 케이팝 조류에서 가장 도드라졌던 그룹과 곡.
로제, Bruno Mars ‘APT.’
랜디: “언어는 국경을 넘나들며 변화한다. ‘Apartment’는 한국에 들어와 ‘아파트먼트’가 되고 또 ‘아파트’가 되었다. 로제의 신곡은 ‘APT.’라 표기하고 당당하게 ‘아파트’라고 읽는다. 곡은 단순한 구조다. 신나는 드럼이 전반에 깔린다. 소속사 더블랙레이블에서는 토니 베이즐의 ‘Mickey’를 ‘인터폴레이션(신곡을 만들면서 기존에 있던 곡을 차용, 재연주해 넣는 것을 의미)’했다고 밝혔다. 멜로디도 전개도 예상이 가능하게끔 어렵지 않게 만들어져 있다. 함께한 브루노 마스는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단순한 팝 멜로디를 스타일리시한 가창으로 불러내 여러 번 히트시킨 가수다. 로제 역시 그 특유의 스타일리시한 가창으로 정평이 나 있는 보컬리스트이고 말이다. ‘APT.’는 술자리 게임이라는 웃음 나는(unserious) 소재가 무얼 불러도 ‘간지 날’ 보컬들을 만나 즐겁지만 우습지 않은 멋진 팝으로 태어난 곡이다. 접근이 쉬우면서도, 여전히 노래하는 그들을 스타로 우러러볼 만큼 멋스럽다.” (〈위버스 매거진〉2024.11.15 “이 주의 드라마, 음악, 책” 中)
에스파 ‘Whiplash’
조은재: 데뷔 때부터 견지해온 ‘쇠맛나는’ 사운드에 농도와 밀도를 더해 ‘극한의 쇠맛’을 구현해냈다. 곡 전체에 깔려있는 와일드한 베이스 리프는 시작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고, 다소 히스테릭하게 귀를 찔러오는 하이햇 위를 킬힐을 신은 에스파의 보컬이 ‘밟아버린다’. 데뷔 때부터 ‘에스파는 H.O.T.를 계승하는 그룹’이라고 주장해왔는데, ‘Whiplash’에 이르러서는 H.O.T.가 갖고 있던 카리스마와 SMP에서만 나오는 박력 뿐만 아니라 Y2K 시절을 관통했던 테크노 사운드마저 완벽하게 계승해냈다. 아닌 게 아니라, ‘Whiplash’를 처음 감상할 때 떠오른 것은 H.O.T.의 ‘OP.T’였는데, 심지어 이 곡은 H.O.T.의 3D 영화였던 ‘평화의 시대’의 OST였다. ‘평화의 시대’는 에스파가 SMCU를 통해 보여주려 했던 세계관의 프로토타입으로도 볼 수 있는데, Y2K 시절에 그렸던 막연한 미지의 미래 세계가 이제는 좀 더 현실감 있는 형태로 구현되고 있다는 데에서 SM이라는 레이블의 역사성과 현시대성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Whiplash’는 SM을 개창한 H.O.T.가 곧 현시점에서 SM을 이끄는 에스파이기도 하다는 선언과도 같은 곡인 셈이다. 30주년을 맞아 레거시를 강조하는 그 어떤 이벤트보다 ‘Whiplash’가 훨씬 더 설득력 있었던 이유이다. 아울러, ‘평화의 시대’와 ‘다나 공주’를 아시는 분들은 꼭 가까운 시일 내에 건강검진을 받으시길 바란다.
- 결산 2024 : ④뮤직비디오 Pick! - 2025-02-28
- 결산 2024 : ③올해의 앨범 16선 - 2025-02-28
- 결산 2024 : ②올해의 노래 16선 - 202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