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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구슬, 그리고 다만세

여자친구의 ‘유리구슬’이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모방했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이야기지만, 그리 흉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친구가 복기한 ‘다만세’는 적어도 몇 가지만큼은 놓치고 지나간 것이 분명하다.

여자친구의 ‘유리구슬’을 감상했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이하 다만세)와 유사하다는 평들이 지배적이고 실제로 그렇게 느껴진다. 하지만 여러 번 감상해 보면 단순히 유사하다는 이야기로만은 뭉뚱그릴 수 없는 몇 가지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한동안 걸그룹 씬은 씨스타를 위시해서 건강한 섹시미를 선보이려는 팀들로 부산스러운 상태였다. ‘대세’가 지배하는 케이팝 씬에서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었던 몇 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팀들이 이 싸움에서 큰 타격을 입고 주저앉았고, 그 틈새에서 홀로 소녀적인 콘셉트를 고집하던 에이핑크는 점점 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14년에 출범한 레드벨벳과 러블리즈는 아마도 섹시 vs 소녀의 균형을 역전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였다. 새로 데뷔한 여자친구는 이런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

‘소녀’라는 키워드를 떠올릴 때 케이팝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은 S.E.S.일 것이다. S.E.S.는 에이핑크의 음악적인 영감이 되었다. 윤상과 강수지는 러블리즈의 기초가 되었다. 그리고 여자친구는 대중에게 수없이 회자된 것처럼 소녀시대를 벤치마킹했다. 이런 예들만 본다면 소녀 콘셉트란 과거지향적이고, 그 이유는 선배들이 할 만한 것은 다 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느껴진다. 케이팝 역사에 이름을 남긴 팀들이 롤모델, 혹은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가장 성공적인 걸그룹으로 평가되고 있는 소녀시대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나는 다가오는 몇 년간 소녀시대의 뒤를 따르려는 수없는 시도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고 모방을 하면서 배우게 된다. 모방이 단순히 비판의 대상이라고 생각할 수만은 없다. 여자친구의 ‘유리구슬’이 소녀시대의 다만세를 모방했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이야기지만, 그것이 그리 흉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친구가 복기한 다만세는 아직 모방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다만세는 메가히트곡은 아니지만 덕후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곡이다. 많은 사람들이 소녀시대를 ‘Gee’로 기억하지만 이들을 시작부터 본 사람이라면 다만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무엇이 다만세에게 그런 힘을 부여한 것인지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몇 가지만큼은 ‘유리구슬’이 놓치고 지나간 것이 분명하다.

1. 기승전결의 구식감성

소녀시대의 데뷔곡 다만세는 2007년에 발표되었지만 실제로 만들어진 때는 2002년 경이다. 밀크의 2집 앨범에 수록되기로 되어 있었던 다만세는 팀의 해산으로 인해 주인을 잃고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2007년이 되어서야 나올 수 있었다. 당시의 기준으로 봐도 다만세는 구식 노래였다. 2007년에 이미 원더걸스는 대표작 ‘Tell Me’로 향후 수년간 케이팝의 방향을 이끈 훅송이라는 형식을 선보였다. 이에 비해 다만세는 너무 길고, 요즘 기준으로는 지루할 정도의 버스(verse)를 가지고 있다. 기승전결의 구성을 충실히 따른 결과 후렴에 이르기까지 감정적인 동력을 충분히 축적해서, 후렴에서 덕후들의 가슴 속에서 울컥하는 무언가를 만들어준다. 데뷔의 벅찬 감정을 전달해야 하는 시점에서는 오히려 이런 구성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유리구슬’은 구조적으로는 에이핑크의 ‘NoNoNo’와 비슷하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시작에서 강력한 후렴을 보여주고 다음 후렴이 나올 때까지 버스가 분위기를 가다듬으며 다리를 놓아주는 것이다. 이는 기승전결이라고 하기보다는 곡의 아이덴티티로서 후렴을 귀에 남기기 위한 시도로 보여진다. 그리고 ‘유리구슬’ 후렴의 아이덴티티는 다만세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은가 싶다.

2. 롤플레잉과 서사

“이 중에 네 취향이 한 명쯤은 있겠지”라는 우스갯소리는 아이돌의 핵심을 제대로 짚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돌은 캐릭터로 승부한다, 그리고 다만세는 이 점을 놓치지 않는다. 9명의 소녀들은 제각각 롤플레잉을 한다. 미묘하지만 각자의 캐릭터를 보여주고 기억할 만한 특징들을 선사한다. 그리고 다만세는 미약하게나마 어려움을 극복하는 서사를 내포하고 있다. 이런 특징은 ‘유리구슬’ 뮤직비디오에서 찾아볼 수 없는데, 뮤직비디오는 똑같은 교복을 입은 소녀들이 남자들의 판타지에서 봤음직 한 여학생들의 학교생활을 그려내는 데 집중한다. 서사는 생략되고 소녀들의 재잘거림이나 몸짓들 자체가 기억할 만한 어떤 것이 된다. 두 곡의 가사 모두 어떤 다짐이나 의지를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차이점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유리구슬의 뮤직비디오는 가사와는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3. 학교의 안과 밖

2007년의 소녀시대와 2015년의 여자친구는 모두 학생이다. 하지만 다만세는 학교 밖이 배경이며, ‘유리구슬’은 학교 안의 일상을 보여주고 있다. 둘 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판타지이지만 큰 차이점이 있다. 학교 밖의 판타지는 학생들의 것이고, 학교 안의 판타지는 학생들의 것이 아니다. 이 점은 아이돌의 구매층을 타게팅하는 중요한 기점이 된다. 학생들에게 학교 밖의 세상은 동경의 대상이고, 다만세가 보여주는 세계란 학교를 벗어나는 어느 시점이다. 새로운 세계에 발을 내딛는 데에는 두려움이 앞서고, 이에 맞서는 용기가, 그리고 사랑이 필요하다. 이는 가사의 컨텍스트와 이어져 있고 결국 한 덩어리가 된다. 그에 비해 ‘유리구슬’의 학교는 변함없는 행복과 기쁨의 공간이다. 노래 가사는 사랑을 향한 다짐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화면에 비치는 오타쿠적인 코드들은 가사의 컨텍스트를 희석시킨다.

마케팅적인 관점에서 ‘소녀시대’라는 키워드는 위태롭지만 무척 매력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 키워드를 이용하자고 결정한다면 큰 결단이 필요할 것이다. 팀명이나 데뷔곡, 뮤직비디오, 그리고 닮은꼴이라는 것까지 철저하게 활용해서 마케팅적 효용을 끌어내는 것은 매우 영리한 전략이고, 적어도 지금까지는 성공적으로 보인다. 그런 면에서 ‘유리구슬’은 소녀시대라는 이미지를 끌어내기 위해 치밀하게 맞춤제작된 곡으로서, 그 목적에 매우 충실한 곡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다만세와는 달리 ‘유리구슬’은 가사의 컨텍스트와 곡, 그리고 뮤직비디오가 유기적으로 엮여 하나가 되지 못했다는 부분이다. 마케팅적인 수단으로 전락할 것인가, 하나의 작품으로 평가될 것인가의 판단 근거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세는 여러 차례 복기할 가치가 있는 곡이다. 이 곡은 많은 이들에게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고, 그 엑기스는 아직 제대로 뽑혀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이제는 8년이 되어가는 옛 노래지만 이 곡은 아이돌 걸그룹의 핵심을 꿰뚫고 있고 앞으로도 수년간은 풀리지 않는 난제처럼 케이팝 씬을 떠돌게 될 것이다. SM 엔터테인먼트가 소녀시대의 원천기술을 공개하지 않는 이상, 이리저리 따라 해보고 배우는 것도 비지니스적으로 합리적인 일일지 모른다. 이렇게 끊임없이 복기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전혀 새로운 소녀들이 탄생할지도 모르겠다는 희망도 있다. 이 난제에 도전해서 해결하고 또 하나의 난제를 남기는 걸그룹이 빨리 나타나길 기대해 본다.

여자친구의 ‘유리구슬’이 수록된 “Season Of Glass” 미니앨범에 관한 아이돌로지 필진들의 단평은 1st Listen : 2015년 1월 중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맛있는 파히타

By 맛있는 파히타

덕후는 혈관으로 흐르는 것

9 replies on “유리구슬, 그리고 다만세”

음악평론들이 언젠가부터 예전의 것들에서 끼워맞추는식의 비평이 많아지는것 같아 안타깝다 유리구슬에서 소녀시대 – 다만세의 느낌이 날순 있지만 꼭 거기에 신인의 데뷔곡을 대입해 창작물을 함몰 시켜버려야했는지, 여자친구의 유리구슬은 그 존재자체로 충분한 노래 같은데 말이죠. 예전부터 느낀거지만 노래와 가수에 대해 흠집잡기에 안달난듯한 평들이 많아지는것 같아 속상하네요, 아이돌로지의 친SM성향, 모든걸 SM식으로 귀결되기도 좀 신경쓰이구요.

무슨 말씀이신진 알겠지만, “그 존재 자체로 충분”하기로 따진다면 그렇지 않을 아이돌과 노래가 있을까요? 비평은 “그 존재 자체로 충분”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그 존재 자체로 충분”한 것들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말하는 작업인 걸요.

유리구슬을 듣고 다만세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영향력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비평의 가치가 떨어지는 일 같은데요. 그건 그냥 침묵이나 무시가 아닌가.

유리구슬 노래 자체에 대한 평을 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소녀시대가 결부되어야 합니다. 기획 의도 자체가 그러니까요. ‘

유리구슬 노래 자체에 대한 평을 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소녀시대가 결부되어야 합니다. 기획 의도 자체가 그러니까요.

다만세 뮤비는 소녀들이 주체적으로 보여서 좋은데 이런 뮤비는 이제 아이돌 중에 별로 없는거 같아요.

막상 유리구슬이랑 다만세랑 멜로디 어느 구절이 비슷하냐고 하면 한구절도 못대는게 다만세 타령하는 인간들 수준…

그냥 무슨 일본 애니 ost 풍 느낌 나면 다 다만세 참고한건줄 알고 있음 ㅉㅉㅉ

다만세 타령하는것들 자체가 그냥 소시빠들이라 걸그룹 음악을 소시에 기준 맞추고 여자아이돌을 판단하니깐 그런거임.

내가 항상 말하지만 정확히 몇분 몇초 부분이 소녀시대 다만세랑 비슷하냐고 하면 절대 이야기 못함. 그저 분위기가 어쩌네 전체적으로 어쩌네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해대는게 현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