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트색을 입고 한 걸음 멀리
첫 트랙 ‘데자-부(Déjà-Boo)’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백업보컬과 필터에 눌린 반주의 뭉툭한 질감을 대뜸 내놓는다. SM 엔터테인먼트(이하 SM)가 거창한 인트로 트랙을 많이 사용하는 편은 아니지만, 조용하지도 어마어마하지도 않은 이 도입부는 근래 SM의 발매반들 중에선 가장 느닷없는 시작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곡은 그러나 끝까지 대단한 폭발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곤 나직하게 “OK, next.”라 말한 뒤 2번 트랙 ‘Crazy’로 넘어간다. 뜨거운 열정이나 은밀한 긴장보다는 차가운 모습으로 ‘위험한 이끌림’이란 주제를 담아내는 이 곡은 S&M 이미지의 티저와 맞물린다.
‘열창’이 선보여지는 것은, 비극적인 분위기 속에서 연인에 대한 벅찬 마음을 노래하는 3번 트랙 ‘할렐루야’에 이르러서이다. 곡의 어두운 공기는 “신께 감사할래”의 상승하는 멜로디와 함께 후렴으로 돌입하는데, “천사가 보여, 눈물이 고여, 할렐루야”를 노래하는 목소리는 힘을 발밑까지 뺀 듯하다. 그리곤 다시 힘이 붙기 시작해, 절정은 가스펠 풍의 백업보컬을 융단처럼 깔며 감정을 터뜨리는 후렴의 마지막 지점을 향해 걸어 올라간다.
이 음반의 힘의 구조는 3번 트랙, 특히 트랙의 마지막을 가리키고 있다. 7곡(CD 기준으론 8곡)의 미니앨범임을 감안하면 다소 느린 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첫 두 곡의 흡인력이 확실하게 보장되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음반은 4번 ‘Love Belt’에서 포근하고 느긋하게 숨을 돌린 뒤, 다시 비슷한 구조를 반복한다. 5번 ‘NEON’은 ‘데자-부’의 조금 더 과감한 버전 같고, SM 비사이드 트랙들의 업그레이드 버전 같은 6번 ‘일인극’은 다시 ‘할렐루야’와 비슷한 질감의 뜨거움을 보여주며, 7번 ‘시간이 늦었어’는 다시 편안하게, 그리고 ‘Love Belt’보다는 산뜻하게 내려앉는다.
다시 첫 트랙 ‘데자-부’로 돌아가 보자. 이 곡은 고전적인 훵크가 으레 그렇듯, 긴장과 해소에 의한 결론을 갖기보다는 끝없이 앞으로 그저 굴러간다. 첫 후렴이 ‘열리는’ 36초경을 포함해 곳곳에서 능란하게 호흡을 잡았다 풀었다 할 뿐이다. 보컬 역시, 샤이니에서 종종 강렬한 보컬을 담당하는 종현의 이미지에 비해, 차갑다. 그러나 보컬은 차갑되 현란하다. 그것은 (자이언티의 피처링을 포함하여) 여러 개의 레이어가 맞부딪쳤다가는 떨어지는 역동성으로 이뤄진다. 이는 짝을 이루는 ‘NEON’에서도 마찬가지다. 종현의 목소리는 여러 명의 보컬리스트가 나눠 부를 곡을 혼자 부르는 듯 주고받다가는 서로 겹쳐지곤 한다. ‘데자-부’의 방송 무대는 마치 그룹 무대의 1인 세로 직캠을 보는 듯하다. 그리고 그는 이 일인다역을, 통일감을 주기보다는, 수시로 변화하는 창법을 통해 더욱 다채롭고 혼란스럽게 만든다.
솔로 보컬리스트의 목소리가 여러 겹으로 녹음되는 것은 스튜디오 기술이 어언 70년을 넘은 2015년에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반복된 녹음과 편집을 통해 한 사람의 목소리로 다양한 효과를 내는 기법 또한 비요크(Björk) 등에 의해 대중적으로도 익숙하며, 가깝게는 신해철의 ‘A.D.D.A’ 같은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여전히 어느 정도 ‘실험적’이란 수사로 분류되는 것은 그만큼 그것이 대중에게 안락한 팝을 제공하지는 않는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코드 진행과 단선율, 그리고 가사로 이뤄진 ‘노래’를 가장 편안하게 느끼며, 때로는 그것이 ‘진짜 음악’이길 요구하기도 한다.
그 지점에서 종현의 ‘노래’는 흥미롭다. 비요크나 신해철과 나란히 비교할 만큼 파격적이진 않다. 어쩌면 그룹의 곡으로 들어온 데모들에게서 영감을 얻었을까. ‘데자-부’와 ‘NEON’은 부담 없이 들어도 그저 즐거운, 매끈하고 매력적인 팝이다. 세련된 아이돌팝의 맥락 속에서, 아주 조금 아슬아슬한 정도로 수위를 유지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NEON’의 이질적인 리듬의 병치와 함께 수시로 비틀어지는 그루브와 테이프스탑(tape stop), 섬세하게 조절된 텐션 화성과 불협은, 이 두 곡의 보컬(들)에게서 다른 맥락을 시사한다.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지는 팝의 기술에 대한 긍정이다. 거기서, ‘데자-부’의 3분 27초 지점 “Ok, next”는, 느리게 두 번 절정을 맞이하는 이 음반이 갖는, 레코딩을 통해 만들어진 예술로서 음반이란 매체의 정체성을 지목한다.
아이돌이 솔로 아티스트로서 인정받는 가장 정석적인 방법은 아마도 훌륭한 발라드를 부르는 것일 터이다. 정통적인 ‘어른의 팝’을 선보인 규현의 솔로 음반이 그 정통적인 예라 할 수 있다. SM의 잇따른 솔로 음반 발매가 어떤 의미인지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는 가운데, 샤이니의 두 멤버가 내놓은 솔로 음반은 그러나, 조금 다른 길을 걷는다. SM 패권주의적 시각이든 그렇지 않든 샤이니는 아이돌 인정투쟁의 과정에서 아이돌 상(像)이 진보해온 맥락을 보여왔다. 음반의 구성을 통해 아티스틱한 가치 혹은 이미지를 강화하는 한편, (좀처럼 흠잡을 수 없는 ‘가창력’을 바탕으로) 퍼포먼스 아티스트의 가치를 입증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 두 축이 서로 맞물리는 곳에 샤이니의 위상이 존재한다.
태민의 “ACE”(2014)가 퍼포먼스의 우수성을 전면에 내세웠다면, 종현의 “BASE”는 음반을 다시 말한다. 음원 시대에 접어들면서 한동안 솔루션으로 부각되었으나 이제는 다소 시들해진 형태인 CD 한정 수록곡을 굳이 활용하는 것 또한 그렇다. (이는 2012년이었다면 뒤쳐진 느낌이었을지 모르나, 지금이기에 새삼 정직하게 받아들여진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이돌 산업의 ‘기반’은 곧 음반이라는 주장일까. 그리고 그런 자의식은, 열창이 아니어도 목소리의 컨트롤과 연극적 표현력으로, 또한 우아한 팝을 주조해낼 수 있는 퀄리티로 얼마든지 인정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빛을 발한다. 민트색 정장을 입고 꼭 한 발짝 멀리 내딛는 걸음이 과감하다.
- 데자-부 (Deja-Boo) (Feat. Zion.T)
- Crazy (Guilty Pleasure) (Feat. 아이언)
- 할렐루야 (Hallelujah)
- Love Belt (Feat. 윤하)
- NEON
- 일인극 (MONO-Drama)
- 시간이 늦었어 (Beautiful To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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