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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베리 “Face Me” (2020)

1번 트랙을 재생한 순간 귀를 의심하게 된다. 명확하게 현재지향적인 사운드를 들려준다. 그룹 색의 채도를 낮추고 색칠에 박력을 더해가는 일련의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불과 데뷔 1년 만에 이루어진 변화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1번 트랙 ‘Photo’를 재생한 순간 귀를 의심하게 된다. 뉴잭스윙을 위시해 과거 영미권 보이밴드의 생기를 케이팝의 문법에 맞추어 순도 높게 증류해냈던 과거와 180도 다르게 ‘Photo’는 몬스타엑스부터 NCT, SF9, 그리고 근래의 골든차일드와 온앤오프까지 현재 4~6년차에 접어든 케이팝 보이그룹의 곡들을 편집한 듯 명확하게 현재지향적인 사운드를 들려준다. 으레 그 연배의 그룹이 변화구를 고를 때 그러하듯 칼을 벼리고 또 벼린 듯한 비장미 역시 느껴진다. 둔탁한 비트가 길을 이끄는 가운데 사이렌처럼 웅웅대는 사운드가 저편에서 따라 붙으며 불안감을 조성하면, 끊임없이 어긋난 화성을 난사하는 후렴구 멜로디가 위태로운 느낌을 자아내고, 곡의 막바지 날카로운 스트링이 얹어지는 순간 격동은 극에 치닫는다. 사운드의 레퍼런스부터 의도, 지향점까지 모든 것이 이전과 극명히 다른 이 곡이 정녕 베리베리 앨범의 수록곡이 맞는지 얼떨떨하기만 하다.

급격한 변화구에 정신이 혼미해질 무렵 타이틀곡 ‘Lay Back’이 흘러나온다. ‘Lay Back’은 ‘Photo’의 음산한 기조를 이어받는 가운데 첨예함을 줄이고 타격감을 높인 사운드와 코드 진행을 이전 타이틀곡들과 같이 탄력 있는 비트가 떠받치며 불안한 격동을 비교적 안정화시킨다. 사실 이미 톤다운을 시도했던 ‘Tag Tag Tag’과 ‘Lay Back’을 나란히 놓고 보면 그리 부자연스럽지 않을 정도. 프리 데뷔곡인 ‘Super Special’부터 ‘불러줘’, ‘딱 잘라서 말해’, ‘Tag Tag Tag’, ‘Lay Back’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역대 타이틀곡을 쭉 이어 들어보면, 그룹 색의 채도를 낮추고 색칠에 박력을 더해가는 일련의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Lay Back’이 이전작들에 비해 큰 변화의 폭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불과 데뷔 1년 만에 이루어진 변화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그룹 정체성을 각인시키고 기반을 공고히 다질 시기에 급속도로 이미지를 소모해버리고 있다는 데에 회의감이 들 수밖에 없다. 더구나 남은 수록곡들은 (3, 5번 트랙의 경우 멤버들이 직접 작사 작곡에 참여했다) 여전히 그때 그 시절에 머무르고 있어 ‘Photo’와 ‘Lay Back’의 시도가 너무 조급한 도약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개별곡의 준수한 퀄리티에도 불구하고 부정교합을 보이는 트랙리스트의, 디스코그래피의 흐름에 선뜻 호응하기에는 망설여진다.

또 한 가지 우려스러운 점은 콘셉트 트레일러가 주는 기시감이다. 2020년 새로운 시리즈 <Face it>을 예고한 콘셉트 트레일러는 어쩔 수 없이 방탄소년단의 “화양연화”와 “Love Yourself” 시리즈를 연상케 한다. “자기 자신들을 포함하여 때로는 좌절하고, 현실의 벽에 부딪히며, 상처받고 방황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이 스토리를 만들어가고자 한다”, “무한한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지만 때론 소외되고 단절된 상처받은 청춘들이 자기 자신을 마주하고, 나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을 통해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과정을 담아내고자 하였다”와 같은 설명에서 방탄소년단을 떠올리지 않기란 힘들다. 이전의 성공 사례를 참조하고 따르는 것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아직은 뚜렷한 차별점이 감지되지 않는 상황에서 기존의 장점을 깎아내면서까지 고착화된 ‘세계관’의 굴레에 이들을 귀속시킬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따름이다. 또한 이것이 비단 베리베리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점에서 보이그룹의 패턴이 한층 더 납작해지고 있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물론 이번 발매작만으로 베리베리의 청량함이 퇴색되었다고 단정짓기에는 이르다. 빨라진 시장 순환 주기와 과포화된 시장 상황에 대처하는 필연적인 적응의 움직임이라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 베리베리의 앨범은 궁극적으로 보이그룹의 ‘지속 가능한 청량함’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샤이니를 제외하면 ‘청량함’이라 불리는 특질들을 끈기 있게 끌고 가는 그룹이 거의 없는 것이 사실이기에. (그나마 세븐틴과 아스트로까지를 특기할 만하다.) 그룹의 성장과 성숙은 이른바 “소년에서 남자로”라 일컬어지는 흑화의 방식으로만 이루어져야 하는 걸까. 보이그룹은 정녕 ‘독야청청’할 수 없는 걸까.

Face Me
젤리피쉬 엔터테인먼트
2020년 1월 7일
스큅

By 스큅

머글과 덕후 사이(라고 주장하는) 케이팝 디나이얼 러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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