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아이돌팝 발매작 중 정규앨범을 중심으로 주목할 만한 앨범을 다룬다. 르세라핌, WOODZ(조승연), 투모로우바이투게더, 정세운, 아스트로, HYO(효연), 강다니엘, 세븐틴 등.
스큅: 인트로 트랙 ‘The World Is My Oyster’가 깔아둔 런웨이 위에 르세라핌은 ‘Fearless’로 모습을 드러낸다. ‘Fearless’는 단순한 베이스 라인과 그에 평행한 보컬 테마를 메인 모티브로 두고 구조와 사운드(여기에는 가창까지도 포함된다), 메시지 상의 군더더기를 최대한으로 덜어낸 미니멀한 편성이 특징인데, 이는 강렬하거나 요란하게 시선을 휘어잡는 데에 열중했던 4세대 걸그룹의 흐름을 완전히 거스른다. 이러한 과감한 선택은 오히려 가뿐하고 상쾌한 감각을 일깨워 르세라핌만의 차별점을 빚어내며, 퍼포먼스에서는 멤버들의 존재감과 매력을 효과적으로 부각하는 역할을 해내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미니멀한 편성이 틔워둔 여백에 침습하는 것들이다. 실체 없이 애티튜드만이 남겨진 곡은 그를 둘러싼 여타 요소들에 너무도 쉽게 휩쓸린다. 진취적인 운동성을 소거시켜버린 스포티한 패션과 모터의 이미지에, 블라인드 쳐진 유리창 너머로 이들을 관음적으로 쫓는 카메라 앵글에, 모델이 궁극적으론 도구로서 존재하게 되는 런웨이라는 무대 세팅에 “Fearless”라는 슬로건이 주장하는 주체성은 곧바로 파훼된다. “What you lookin’ at”이라는 후렴구 가사가 드러내듯 어디까지나 상대방의 시선을 전제로 성립된 도취적인 자아상은 결국 그 시선에 의해 무력화되고 만다. 온통 자기애적인 (콘)텍스트로 수놓아진 최근의 케이팝 흐름과는 상반되는 양태다. 이쯤 오면 애초에 의도되지 않은 ‘침습’이 아닌 의도된 ‘안착’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된다. 곡에 여백이 적고 내러티브가 선명한 ‘The Great Mermaid’를 중심으로 콘셉트가 꾸려졌다면 보다 더 위험성을 덜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본다. 말 그대로, 여러모로 “겁 없는” 기획.
조은재: 청각적 임팩트를 크게 남기기 어려운 안티-드롭 위주의 진행은 화려하고 집중력 있는 댄스 퍼포먼스로 보완되었지만, 잔뜩 힘을 준 메시지와 균형을 이루어줄 다른 구심점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앨범 전체에 걸쳐 'Fearless'라는 키워드를 집착적일 만큼 반복하는데, 문제는 모든 부정어와 마찬가지로 '두려움이 없다'는 말 또한 듣는 이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두려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두렵지 않고 겁이 없다고 주장하는 강도에 비해 대척점에 무엇이 있는지는 분명치 않고 막연하다. '저항'은 대상이 명확할수록 힘을 가지며, 대상이 모호할수록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저항의 대상을 구체화할수록 대중예술가로서 정치적으로 안전한 위치를 잃을 확률이 늘어나므로, 결국 'Fearless'는 충분한 '안전성 검증'이 필히 선행되었어야 했던 테마이자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아쉬움을 표해본다. 동시대성을 강하게 반영한 음악은 지금 스포티파이 차트를 통째로 긁어온 것 같은데, 메시지는 2010년대 초반쯤 케이팝이 이제 막 전 세계 시장으로 확장되어 자기고양감으로 가득 차 있던 시점의 막연한 비장함과 진지함에 갇혀있다. 음악과 메시지의 괴리가 감상을 방해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탁월함에는 못 미친다는 인상을 남긴다.
예미: 2020년부터 WOODZ의 작품은 록스타의 상을 아이돌 케이팝의 어법으로 그려 왔고, “COLORFUL TRAUMA” 역시 그 궤를 잇는다. 타이틀곡 ‘난 너 없이’는 내달리는 사운드와 메이저 멜로디, 높은 채도의 스타일링, 스타일링만큼이나 재기발랄한 가사 톤으로 앨범의 기조를 대표한다. 서구권 팝 펑크 리바이벌이 케이팝에도 상륙했음을 새삼 느낄 수 있는데, ‘삐딱하게’ 등 약 10년 전 YG에서 내놓던 팝 록 트랙이 연상되기도 한다. 강력한 기타 사운드를 내세운 ‘Dirt on my leather’와 ‘HIJACK’, 비교적 팝적인 편곡과 멜로디가 돋보이는 ‘Better and better’와 ‘안녕이란 말도 함께’ 사이에 두 요소 모두를 갖춘 ‘난 너 없이’가 배치되어 있는데, 다채로운 보컬 활용과 위악적이지 않은 아티스트의 캐릭터가 록스타 이미지와 미성 보컬을 모두 보여주는 구성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커리어의 연속성과 현 시점의 트렌드를 한 결과물 안에 모두 녹여낸 점이 흥미롭다.
스큅: 공격적인 기타 사운드와 팔딱이는 리듬 세션부터 “영원이란 말 위에 못질해 관뚜껑을 덮어”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도발적인 가사까지. 음울한 자조를 넘어 신랄한 자기파괴까지 다다른 ‘Good Boy Gone Bad’는 역대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음악 중 가장 악독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곡의 위악은 이들의 장점이라 할 수 있었던, 말 그대로 ‘착실’한 이들의 “실증적 접근 능력”과 다소 어긋나는 양상을 보인다. 야멸찬 가사와 달리 온전히 “지워”지지도 “망가지”지도 못하는, 이들이 규정했던 “소년”의 부단함이 곡의 중간 중간 불쑥 고개를 내밀 때마다 느껴지는 이물감이 있다. 물론 이러한 이물감이 어색함으로 다가갈지 혹은 오히려 복잡다단한 심리극의 촉매로 기능할지는 듣는 이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퍼포머보다 거대 서사가 한 발짝 앞서있는 인상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반면 수록곡의 경우 일말의 위화감 없이 처연한 감성을 효과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전반적으로 타이틀곡과 상반되는 단출한 구성 가운데 섬세한 보컬 운용을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유닛곡 ‘Lonely Boy’와 ‘Thursday’s Child Has Far To Go’를 짚어볼 만하다. 연준, 휴닝카이의 ‘Lonely Boy’는 연준의 역동적인 스웨거와 휴닝카이의 유약한 떨림을 매력적으로 교차시키고, 범규가 프로듀싱에 참여한 ‘Thursday’s Child Has Far To Go’는 명랑한 신스 팝 트랙 위에 수빈, 범규, 태현의 허심탄회한 가창을 풀어놓으며 뭉클함을 배가시킨다. 아이돌 팝에 있어서 기획의 무게감과 균형감에 대해 고찰해보게 되는 EP.
예미: 두 번째 ‘minisode’는 주제, 감정선, 사운드, 보컬 역량까지 모든 면에서 전작 “혼돈의 장”을 넘어온 이후의 투모로우바이투게더를 보여준다. 타이틀곡 ‘Good Boy Gone Bad’는 강렬한 기타 사운드와 내지르는 창법, 공격적인 화법으로 소위 ‘흑화’한 모습에 힘을 실었다. 지속적으로 록 사운드를 활용하여 큰 주목을 받은 팀이지만, 록스타를 지향점으로 삼기보다는 아이돌 그룹으로서 자신들의 세계관을 빚는 재료 중 하나로 록을 활용한다. 세계관 스토리라인 상의 어느 지점을 여러 가지 사운드로 포착하는 기조가 전작에 이어 지속되고 있는데, ‘Trust Fund Baby’, ‘Lonely Boy’ 등 비교적 간소한 규모의 수록곡에서 감정선을 명확하게 그려내는 보컬 역량 성장이 빛난다.
이별을 맞이한 소년의 모습을 파괴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이들의 디스코그래피 전개 상으로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완성도 높은 콘텐츠를 기량이 물오른 멤버가 소화하는 쾌감도 있다. 다만, 지금 같은 파괴적인 비장미가 멤버 개개인의 본래 성향에 부합하는지는 약간의 의문이 든다. 작업물의 방향성이 멤버가 가진 기질과 잘 맞는지 여부는 케이팝 아이돌 작업물에 있어 만족도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크고 촘촘한 기획을 설계하면서도 멤버와의 합을 보다 많이 고려할 여지는 있을 것 같다.
조은재: "Where is my Garden!"을 듣는 내내 어떻게 이렇게 다정한 소리로만 가득한 앨범이 있을 수 있는지 놀랍기만 했다. 전작 'Say Yes'와 마찬가지로 일상다반사를 긍정하는 밝은 에너지로 가득한 'Roller Coaster'도 너무나 정세운다운 곡이지만, 아이돌 정세운에 대한 미련을 놓을 수 없게 하는 '10분'이나 '케이팝 김창완'으로서의 면모를 발휘하는 'Nerdy'까지 소년의 천진함으로 리스너에게 담담한 지지와 응원, 그리고 위로를 보낸다. 유기성 있게 잘 구성된 앨범 안에서도 인트로 트랙인 'Garden'은 서사성이 가장 크게 느껴지는 곡이다. 앨범을 듣기 직전까지 세상의 여러 소리에 파묻혀있던 현대인에게는 '막 들어와도 돼'라고 편하게 운을 띄우는 도입부를 거부할 재간이 있을 리 없다. 본격적으로 정세운의 음악을 듣기 전에 청중을 차분하게 자리에 착석하게 하는 곡을 첫 번째에 배치한 탁월함과 배려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큅: 중간 중간 ‘All Night’, ‘Blue Flame’ 같은 변주가 있기도 했으나, 아스트로만큼 뚝심 있게 맑고 청량한 음악을 고수해온 그룹도 드물 것이다. 정규 3집 “Drive to the Starry Road”의 타이틀곡 ‘Candy Sugar Pop’은 ‘After Midnight’의 기조를 잇는 화사한 디스코 곡으로,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듯 매우 정직한 ‘청량’ 음악이다. 쨍한 질감의 신스와 긴장감 넘치는 화성의 변주들로 한층 고양감 넘치는 타이틀곡을 완성하며 전작과의 차별점 역시 확보했다. 멤버별 솔로곡을 중심으로 평탄하게 흘러가는 후반부는 멤버들의 개성을 정갈하게 담아내고 있는데, 유닛 앨범들에서보다도 개개인의 특색이 덜 감지되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스큅: 기존 발매 싱글들과 2곡의 신곡을 엮어낸 효연의 첫 앨범 [DEEP]은 2018년 DJ HYO로 솔로 활동명을 변경한 뒤 표방해온 그의 독자적인 커리어를 집대성한다. 타이틀곡이자 1번 트랙인 ‘DEEP’은 강렬한 비트와 전자음에 그의 톡 쏘는 목소리 톤을 버무려낸, HYO의 주특기와도 같은 곡이다. ‘Punk Right Now’, ‘Badster’ 등 이전에 유사한 작법을 보여준 곡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효연 개인의 존재감이 한층 강하게 부각되고 있다는 점인데, 이는 효연의 목소리가 향신료를 넘어 가장 선명한 사운드 소스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겠다. 한껏 거드름을 피우는 도입부부터, 완결문으로 맺지 않는 가사를 쌓아 올려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프리-코러스의 벌스를 지나, 정박의 킥 드럼에 맞춰 휘몰아치는 코러스에 이르기까지, 뱉음(spit)에 가까운 효연의 랩이 곧은 심지로 뻗어나가고 있다. 안무의 경우 포인트 동작만큼이나 1절 후렴구 초입 “Deep Deep Deep Deep Deep”에 맞춰 효연이 무대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시퀀스가 인상적인데, 그러한 “뻗어나가”는 그의 존재감이 가장 응축적으로 담겨 있기 때문이겠다.
타이틀곡 ‘DEEP’과 당당한 애티튜드를 뽐내는 신곡 ‘Stupid’ 뒤에는 그의 역대 발매작들이 발매 역순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순도 높은 댄스 팝으로 반짝이는 그의 지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솟구치는 마지막 트랙(이자 HYO로서 선보인 첫 트랙) ‘Sober’에 다다랐을 땐 뭉클함마저 느끼게 된다. 4년에 걸친 효연의, DJ HYO의 뚝심을 확인할 수 있는 EP.
조은재: 허밍에 가까운 창법에 어두운 베이스와 비장한 드롭이 강조되는 R&B가 강다니엘 음악의 특징인데, 정규 앨범 또한 이제껏 해온 음악의 연장선에 있는 앨범이다. R&B를 주로 소화했던 아티스트 치고 그루브감과 음량이 부족한 보컬은 겹겹이 레이어링한 악기 소리로 덮어버려 주목을 분산시키는데, 화려한 화성 진행이 돋보이는 트랙이 많아 이러나 저러나 '들을 거리'는 충분히 제공된다. 다만 그만큼 아티스트 강다니엘에 집중할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데, 더블 타이틀곡인 'Parade'처럼 '깨워', 'PARANOIA', 'Antidote'를 잇는 무겁고 러프한 무드의 곡일수록 강다니엘 본연의 특장점이 하이라이트 되는 감이 있다. 아무래도 처음 그의 존재감이 대중에게 강하게 드러났던 곡이 '열어줘'였기 때문이었을까. 일관적인 아이덴티티를 구축해온 만큼 좀 더 과감한 시도나 실험이 더해져도 나쁘지 않았을 앨범이다.
마노: 앨범명에서처럼 몇몇 트랙을 통해 일관적으로 드러나는 ‘태양’라는 키워드가 눈에 띈다. 그리고 그 태양은 이 세계관 속에서 저항의 대상, 극복해야 할 난관으로 상정이 되는 듯하다. “태양을 향해 불붙”이라던가(‘HOT’), “마치 카우보이처럼” 태양 위로 달린다던가(‘March’) 하는 식으로. 태양을 향해 불을 붙이고, 태양 위로 거침없이 내달리다, 결국은 “높이 올라가서 태양이 되어버릴” 것이라 감히 선언하는 비장한 패기. 세븐틴이 데뷔 이래로 (다소의 예외는 있을지언정) 일관적으로 그려온 어떤 ‘소년상’을 생각하면 사뭇 이색적인 부분이다.
늘 그랬듯이 우지와 범주를 주축으로 멤버들이 힘을 보태 완성한 트랙들은 장르적으로도 다채로울 뿐더러 완성도가 각각 매우 준수하다. 힘을 주어야 하는 곳에는 있는 힘껏 주고, 그렇지 않아도 되는 곳은 과감히 힘을 빼버리는 완급 조절도 인상적이다. 다만 구성이 답지 않게 다소 산만하다는 인상이 드는데, 트랙 배치를 통해 충분히 보완할 수 있었을 듯한 부분이라 아쉽게 느껴지고 만다. 금세라도 기울어버릴 듯 설레는 마음을 도미노에 비유한 하우스 장르의 ‘Domino’, 촘촘하고 치밀한 화성과 절묘하게 교차하는 보컬 구성이 돋보이는 발라드 트랙 ‘If you leave me’를 그중 가장 즐겁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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