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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친구 “回:LABYRINTH” (2020)

‘파워청순’이라는 수식어는 여자친구를 간명하게 설명하기에는 좋았으나, 여자친구의 음악세계는 그보다 깊고 복잡한 감성을 다루어왔다. 이 복잡함과 풍성함이 앞으로 그룹이 밟아나갈 성장의 추진력이 될 것으로 보인다.

쏘스뮤직이 빅히트 산하 레이블이 된 후 내놓은 첫 결과물이다. 이제까지 여자친구의 색깔을 연속적으로 이어가고 있는 동시에, 빅히트의 영향으로 변화한 부분 역시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가장 큰 변화는 곡의 믹싱과 의상, 뮤직비디오 등 투자 규모에 따라 확연히 달라지는 분야의 퀄리티가 크게 상승했다는 점이다. 이전부터 해오던 음악을 지금까지의 노하우로 표현하되, 리소스가 좀 더 넉넉했다면 이렇게 했을 것이다 싶었던 부분이 그마만큼 향상되었다.

타이틀곡 ‘교차로(Crossroad)’는 이미 ‘밤(Time for the Moonlight)’과 ‘해야(Sunrise)’로 함께 한 바 있는 노주환과 이원종의 작품이다. 8비트 락드럼과 스트링 신스 선율, 애상이 묻어나는 멜로디와 가사가 여전하다. ‘애달픔’ 같은 우리말보다도 일본어 ‘세츠나사切ないさ’로 설명해야 할 것 같은 감성이다. 이제껏 여자친구의 음악을 두고 ‘투니버스 풍’이라 평하는 이들이 많았다. 1990~2000년대에 케이블 채널을 통해 일본 애니메이션(이하 ‘아니메’)을 보고 자란 세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요소가 많았다는 뜻이다. 이 시대 아니메 사운드트랙은 90년대부터 일본 내에서 유행했던 J-Rock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현직 록 밴드와 타이업 취입도 잦았다.

이번 ‘교차로’를 같은 작곡가와 작업한 전작 ‘밤’과 비교했을 때 가장 달라진 지점은 드럼과 믹싱이다. 비슷한 리듬을 택했지만 ‘교차로’는 리얼 드럼셋으로 들린다. 이제까지 여자친구 타이틀곡들은 대부분이 8비트 록 드럼이되 어디까지나 그 리듬을 미디로 찍은 전자음악이었다. 이것이 아니메 사운드트랙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패스티쉬(Pastiche) 같은, 특유의 묘한 감성을 자아냈다. 여기에 여자친구의 탄탄한 안무가 결합됐을 때 ‘케이팝스러움’이 배가되기도 했다. 그러나 음악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는 ‘기왕 이런 리듬이라면 리얼 악기를 쓰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불러일으킨 것도 사실이다. ‘교차로’부터는 이 부분이 보완되었다. 드럼 외에도 스트럼이 그대로 들리는 어쿠스틱 기타 등 리얼 악기의 사용이 늘었다. 이는 빅히트의 프로덕션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믹싱도 이에 따라 달라졌다. 이전보다 보컬 트랙들이 인스트루멘탈과 부드럽게 섞인다. 노래를 소화하는 멤버들도 프레이징에 더 염두를 두고 가창한듯 구절마다 연결이 매끄럽다.

곡의 매무새가 달라지니 비로소 오리지널 레퍼런스가 들린다. 20년 전에 발매된 사카모토 마야의 ‘プラチナ'(플라티나)는 국내 음악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친 여성 작곡가 칸노 요코의 작품으로, 국내 방영명 <카드캡터 체리>라는 아니메의 3기 오프닝 곡으로 기용되었다. 노주환과 이원종이 만든 여자친구의 곡들은 최소한 이 곡의 간접적 영향권 아래 놓인 것으로 보인다. ‘プラチナ'(플라티나)는 기본적으로 록 밴드 편성을 베이스로 했으나, 스트링(당시에는 스트링 세션도 리얼이었다)으로 화려함을 더해 생동감 있는 팝으로 완성되었다. 2000년대 중반 페퍼톤스가 ‘Ready, Get Set, Go!’ 같은 곡을 통해 비슷한 감성을 시퀀싱으로 재연했고, 이후에도 국내에서는 이런 사운드가 마니아 층을 기반으로 꾸준히 사랑 받았다.

‘칸노 요코-적 모먼트’는 복잡한 전조에서도 느껴진다. Eb 마이너 테마로 평이하게 시작하는 곡은 전주가 끝난 뒤 곧장 C 마이너(Eb 메이저와 나란한 조)로 바뀌고, “(똑같이 헤맸는데 왜) 내 맘이 다 무너져버릴까” 구절에서 Db 메이저로 바뀌어 가사대로 짧은 절망을 표현한다. “저 바람마저 널 아직 기다리며 서있어” 하며 빌드업하는 프리코러스에서는 4박을 쿵쿵 때리는 킥 드럼에 Bb 메이저였다가, 코러스 전반에는 Bb 마이너(1절의 은하 파트 Db 메이저와 나란한 조)로 또 바뀐다. 그리고 마침내 인트로의 Eb 마이너 리프레인이 반복된다. 이런 복잡함을 돌아 마침내 다시 도달한 인트로 테마는 처음과는 전혀 다르게 들린다. (특히 뮤직비디오를 보면 곡 말미의 마지막 리프레인에서 시간이 거꾸로 흐르며 은하의 공간이 격렬하게 무너지는데, 이 시각적 자극이 동시에 제공하는 카타르시스가 상당하다.) 간주 뒤에 유주가 크게 “Guide to the sky” 하고 긴 애드립을 내지른 후에 드럼이 트리플렛으로, 스트링이 크로매틱으로 하강하다 다시 상승하는 부분은 빼도 박도 못할 ‘칸노 요코-적 모먼트’다.

이렇듯 음악적 닮은 점이 존재하나, ‘교차로’는 ‘プラチナ'(플라티나)와는 출발하는 감정부터가 확연히 다르다. 전작 ‘밤’이나 ‘해야’ 등에서 이어왔듯 ‘교차로’에는 애달픔이 있다. 그에 더해, 페이소스는 유지하되 음악적 복잡성이 추가되며 전작들보다 좀 더 풍성한 표정의 노래가 되었다. 갈림길에서 헤매는 이미지는 이런 변화의 시기에 적격인 소재였다. 데뷔 5년 차, 이 복잡함과 풍성함이 앞으로 그룹이 밟아나갈 성장의 추진력이 될 것으로 보인다. ‘파워청순’이라는 수식어는 여자친구를 간명하게 설명하기에는 좋았으나, 자칫 일본 서브컬처가 ‘무기를 든 교복 소녀’ 등의 이미지를 클리셰로 소비하듯 납작하게 오해될 가능성이 있었다. 여자친구의 음악세계는 그보다 깊고 복잡한 감성을 다루어왔다. 청순한 소녀라는 이미지 속에 박제되지 않고, 판타지 세계관이나 서서히 변화하는 디스코그래피를 통해 성장을 보여주었다. 이번 음반을 기점으로 이 성장은 더욱 크게 뻗어나갈 것이다.

뮤직비디오에서는 푸른 공작나비나 타임리프 등, 방탄소년단의 <화양연화> 유니버스가 다룬 소재가 중복되어 등장한다. ‘교차로’ 뮤직비디오 발매 전 나온 ‘A Tale of the Glass Bead : Previous Story’ 티저 영상을 보면 이 또한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닌, 전부터 가져온 세계관 소재를 이어가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쏘스뮤직이 인수 전부터도 빅히트와 공유하고 있는 코드가 있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합병 후의 결과물에 큰 위화감이 들지 않는 것에는 이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코로나19 탓에 관객과 만나기 어려운 시기에 활동 해야 했지만, 팬들의 함성이 더해졌다면 더 힘있는 무대가 되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이제껏 잘 해온 것을 더욱 강화해 완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여성 팀에 더 많은 격려와 응원을 보내고 싶다.

回: Labyrinth
쏘스뮤직
2020년 2월 3일

By 랜디

K-Pop enthusiast. I mean 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