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아이돌팝 발매작 중 정규앨범을 중심으로 주목할 만한 앨범을 다룬다. 빌리, 트와이스, 카이 등.
스큅: 미스틱 스토리에서 처음으로 런칭한 아이돌 그룹 빌리의 데뷔곡 'RING X RING'은 이 달의 문제작으로 꼽힐 만하다. 불길한 사이렌 소리, 삐딱하게 뒤틀린 자세로 난입하는 벌스, 좀처럼 긴장을 풀어주지 않고 예측 불가능하게 덜컹이는 멜로디와 화성 진행, 리듬 세션을 단단히 정박시키지 않은 채 혼비백산 내달리는 후렴구, 전반적으로 갑갑하게 느껴지는 사운드까지. 곡의 어느 하나 명료하게 해소되는 구석이 없다. 이 정도의 불협은 의도되지 않고서는 구축이 불가능한, 명백히 용의주도하게 짜인 것으로 느껴지는데, 이 '괴이함을 위한 괴이함'을 만들어낸 저의에 다소 의문이 들기는 한다. 내가 네트워크, 에이팝 엔터테인먼트, 미스틱 스토리로 이어지는, 조영철 프로듀서와 이민수-김이나 콤비의 합작(브라운아이드걸스, 써니힐, 아이유, 가인, 민서 등)은 꾸준히 괴작/대작을 향한 야심을 드러내곤 했지만, 이 정도로까지 작정한 듯 현혹하려는 느낌을 뿜어낸 적은 흔치 않았다. 이 노골성을 두고 누군가는 유치하다 할 수도 있겠고, 누군가는 "오히려 좋아"를 외칠 수도 있겠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후자에 더 가까웠음을 부정하지 않겠다.) 'RING X RING'이 다소 부담스러웠다면, '작정함'이 한 꺼풀 덜어진 'flipping a coin', 'everybody’s got a $ECRET' 같은 수록곡이 이 그룹에 기대를 걸 만한 실마리가 될 수도 있겠다. 몇몇 인상적인 구도를 포착해내긴 하나 동작 자체는 다소 성기게 구성되어 곡의 긴장감을 폭발시키지 못하고 늘어뜨리는 퍼포먼스엔 아쉬움이 남는다. 〈걸스 플래닛 999: 소녀대전〉에서 퍼포먼스로 존재감을 과시했던 수연(빌리에 합류하며 활동명을 '션'으로 변경했다)의 합류가 팀에 긍정적인 작용을 하기를 기대해본다.
스큅: 이렇게까지 저음역이 강조된 트와이스의 타이틀곡을 들은 적이 있던가. 하이톤으로 내지르며 애교를 마구 표출하거나 사근사근한 속삭임으로 귀염성 있는 모습을 연출하던 과거와 달리, 'Scinetist'는 사뭇 무게감까지 느껴지는 타이틀곡이다. 그러나 트와이스 특유의 지루할 틈 없는 캐릭터 플레잉은 여전하다. 심드렁하게도 느껴지는 미나의 낮은 보컬이 살며시 도발을 걸어오면, 정연과 채영이 장면을 환기하며 생기를 더하고, 사나와 쯔위가 밝은 보컬로 프리-코러스의 텐션을 끌어올리면, 나연과 지효가 탄력 있게 코러스를 주무른다. 다현과 채영의 통통 튀는 랩 뒤에 모모가 저음으로 이어나가는 브릿지 파트는 역대 모모의 독특한 톤을 가장 잘 활용한 파트로 기억될 만하다. 군더더기 없이 꽉 짜여진 'Scientist'는 굳이 과장해 보이지 않더라도 트와이스는 그 자체로 사랑스러울 수 있음을 역설하는 듯 보인다.
수록곡에서도 부러 '척'하지 않는, 어느 때보다도 편안한 목소리의 트와이스가 돋보인다. 무리하지 않는 단단한 팝 넘버들이 줄줄이 이어지며, 때로는 여유와 관록을 과시하고('MOONLIGHT', 'CRUEL', 'REAL YOU', 'F.I.L.A.' 등), 힘찬 타격감으로 새로운 패기를 과시하기도 한다 ('LAST WALTZ', 'ESPRESSO', 'HELLO' 등). "Feel Special" 때부터 꾸준히 감지되었던 기존의 동어반복적인 버블검 팝을 환기하려는 시도가 끝내 결실을 맺은 듯하다. 의심의 여지 없는, 트와이스 역대 최고의 앨범이다.
스큅: 2018 평창 동계올림픽 폐막식에서 선보였던 '미래를 향한 노래' 퍼포먼스에서 착안한 것일까. 신선 놀음을 보는 듯한 콘셉트와 한복을 현대적으로 풀어낸 스타일링이 발레에 뿌리를 둬 힘차면서도 유려한 춤선을 가진 카이에게 맞춤옷처럼 딱 맞아떨어진다. 타이틀곡 'Peaches'는 '음' 때와 마찬가지로 퍼포먼스를 위한 여백을 남겨둔 채 '느낌적인 느낌'을 조성하는 데에 치중하는데, '음'과 비교했을 때 퍼포먼스만으로 채워나가기엔 그 여백이 너무 큰 감이 있다. 그래서인지 듣는 맛에 보다 더 집중한 수록곡들에 오히려 눈이 간다. 수록곡 전반에 걸쳐 호흡량과 발음의 역점에 신경을 기울인 보컬 디렉팅이 느껴지는데, 음량과 잔떨림을 한층 세밀하게 조정한 보컬로 미니멀한 트랙을 응집력 있게 끌고 가는 'Vanilla'나, 툭툭 내뱉는 저음역의 벌스가 귀를 잡아채는 'Domino'가 그 대표적인 예시다. 다만 알앤비 성향이 짙어진 앨범 후반부에서는 백현의 앨범과 변별점이 흐려지는 인상도 든다. 완연한 퍼포머 멤버였던 카이가 오롯이 자신만의 목소리로 음반을 꾸려가는 것에 대한 카이 본인과 SM 엔터테인먼트 양측의 부단한 고민이 역력히 읽히는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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