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2023년 3월 – 앨범

조은재: 이 팀의 데뷔 앨범을 처음 들었을 당시, 이미 완성형 보컬이었던 메인 보컬 우빈 보다 리드 보컬 역할을 하는 멤버들이 어떤 보컬로 어떻게 성장해 나가느냐에 이 팀의 음악적 성장이 걸려 있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신인 시절을 지나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디스코그래피를 살펴보자면, 소화할 수 있는 장르의 스펙트럼은 상당히 확장됐고, 퍼포먼스 또한 동급의 타 아티스트에 비해 상당한 안정성을 자랑한다. 이러한 성장의 배경에는 기존에 팀을 리드하던 멤버들이 아닌, 잠재돼 있던 역량을 표현해내는 법을 터득한 멤버들이 있었던 듯하다.
"Master:Piece"는 '크래비티는 이런 음악도 할 수 있고, 이런 목소리도 갖고 있다'는, 뮤지션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아이덴티티를 소개하는 카탈로그 같은 앨범이다. 특히 이번 앨범에서는 멤버들의 보컬이 밴드나 스트링 등의 편곡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를 보여준다. 'Get Lifted'나 'Baddie', 'A to Z' 등 거의 모든 트랙이 상당한 수작인데, 전체 앨범이 좀 더 주목받지 못한 것이 아쉬울 정도로 잘 꾸려놓은 앨범이다. 여담이지만 보통 활동 3, 4년 차쯤에 자체 커리어를 갱신하는 명반이 한 번씩 나오곤 하는데, 퀄리티의 측면에서 봤을 때 "Master:Piece"에서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음은 여실히 느껴져 충분히 '명반'이라 할만하겠다. 남은 것은 시간에 의한 검증뿐일까.

마노: 도대체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 특유의 통속적인 보이스 컬러를 한껏 절제하고 최대한 담담하게 부르려고 노력한(그러나 곡의 분위기와 메시지를 생각했다면 훨씬 더 절제했어야 함이 맞는) 타이틀곡 ‘Without U’인지, 혹은 아예 통속성을 절제할 생각도 없다는 듯한 커플링곡 ‘복숭아꽃’인지. 한 EP 안에서 두 가지 상반된 콘셉트의 곡이 공존한다는 것에서 부터 이미 이 EP가 얼마나 일관성을 잃고 갈팡질팡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심지어 다른 수록곡에서는 어쩐지 레퍼런스가 노골적일 정도로 보이고 말아서 아티스트의 오리지널리티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극히 개인적인 의견이기는 하나, 후자인 ‘복숭아꽃’의 손을 더 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어쨌든 ‘통속성’은 아티스트 고유의 개성이며 강점이나 마찬가지이고, 그렇다면 이를 극한으로 끌어올려서 무기로 삼는 것도 좋지 않을지. 결과적으로 특유의 통속적인 창법으로 인해 다소 청승 맞을 정도로 구슬퍼진 멜로디는 노래 속 캐릭터와 가사의 메시지와도 잘 맞아 떨어지며 앨범에 있어서도, 솔로 커리어에 있어서도 하나의 터닝 포인트를 만든다. 여러모로 아티스트의 오리지널리티를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 온 듯 한데, 이 ‘복숭아꽃’의 존재감과 의의를 짚어보며 앞으로의 방향을 모색해봤으면 한다.

스큅: “카르페 디엠!” 이번 앨범을 듣는 내내 맴돈 한 마디다. 재계약 이후 미국에서 연일 신기록을 세우며 최전성기를 맞고 있는 그룹의 위풍당당함이 여실히 느껴진다. 앨범의 포문을 여는 타이틀곡 ’Set Me Free’는 디스코 기반의 곡이지만, 대개 찰랑거리며 산들산들한 심상을 담아냈던 케이팝의 디스코 유행과는 달리 절도 있는 비트 위에서 그룹의 카리스마를 뽐내고 있다. 손목의 속박을 물어뜯는 포인트 안무는 야성적이기까지 하다. 수록곡들 역시 관록으로 가득 들어차 있다. 타이틀곡에 이어 2번 트랙으로 배치된 선공개곡 ‘Moonlight Sunrise’가 대표적이다. 사랑을 갈구하는 기존 트와이스 활동곡의 가사 문법을 따르고 있지만, 대개 메이저 스케일 그리고/혹은 질주감을 탑재해 낭랑한 전개를 보였던 과거와 달리 유려하게 흐르는 마이애미 베이스 비트 위에 단조 풍의 멜로디를 얹어 성숙한 변주를 이룬다. 이후에도 때로는 거만하게(‘Blame It On Me’) 때로는 은근하게(’Wallflower’) 도발을 걸어오거나, 후련하게 이별을 고하는 (‘Crazy Stupid Love’) 등 성숙한 내러티브가 돋보이는 곡들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근 몇 년 새 꾸준한 성장을 그려왔음에도 이번 앨범이 유독 더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이유는, 곡들이 하나같이 과거나 미래에 아랑곳 않는 오로지 “지금-여기“의 감각을 있는 그대로 만끽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겠다. 트와이스만큼 버블검 팝에 ‘야성미’라는 수식어가 어울리게 하는 팀은 앞으로도 드물지 않을까. 이다지도 맹렬한 버블검 팝, ‘Got The Thrills’를 미리 올해의 수록곡으로 꼽으며 지난 시간보다도 더 세차게 전진해 나갈 트와이스의 앞날을 기대해본다.

스큅: BPM 전환의 신호탄을 책임지던 멤버의 탈퇴 이후, 엔믹스는 소위 “믹스팝”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이질적인 접합 구조를 버린 말쑥한 댄스 팝을 타이틀곡으로 내세웠다. ‘Love Me Like This’는 사뭇 비장했던 과거를 떠올리기 어려운, 통통 튀는 가뿐함이 돋보이는 후크송이다. “스트릿 바이브의 바운시한 랩과 R&B 스타일의 보컬 라인을 믹스(MIXX)”했다는 부연을 달아두긴 했으나, 장르 배합의 ‘터무니없음’과 기획의 ‘웅장함’이라는 “믹스팝”의 기존 미학은 사실상 부재하다. 그나마 형이상학적인 논조를 유지하는 가사가 그룹의 서사를 잇고 있긴 하지만, “Love Me Like That”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후렴구는 그 인상을 다소 흐릿하게 한다. 선공개곡 ‘Young, Dumb, Stupid’를 포함한 수록곡들 역시 대체로 가벼운 팝 성향을 띠며 기존의 비장함을 상당 부분 희석한다.
그러나 그룹의 독보성과 서사 면의 선명도는 떨어졌을지라도, 멤버들의 퍼포먼스가 돋보이는 것은 여전하다. 영화 〈피치 퍼펙트〉를 연상케 하는 앨범 아카펠라 메들리 티저 영상부터, 쉴 새 없는 연기를 선보이는 퍼포먼스까지. 동세대 그 어떤 그룹보다도 ‘옹골차다’는 형용사가 잘 어울리는 그룹이라는 점은 아직까지 여실히 느껴진다. 더불어 무대 바깥에서 화제를 모았던 순간들이 대개 멤버들의 활달하고 왁자지껄한 면모들에 있었음을 상기하면, 보다 명랑하고 에너제틱한 분위기로의 전환이 자연스럽게 다가오기도 한다. 앞으로의 방향을 예측하기 어려운 탈피를 해낸 만큼, 이번 앨범이 그룹 정체성의 환기가 될지 희석이 될지는 가까운 미래에 보다 분명해질 듯하다.

에린: 엔믹스는 서로 다른 악곡을 이어 붙인 듯한 청각적 경험을 선사한 곡 ‘O.O’로 데뷔하며 자신들의 음악을 ‘믹스 팝(MIXX POP)’이라 이름 붙였다. 그러나 “expérgo”는 데뷔 1년여 만에 이 ‘믹스 팝’의 의도와는 대척점에 서 있는 듯한 모양새를 보여준다. 누구나 어렸을 적에 한 번쯤 노랫말을 흥얼거렸을 동요를 따온 ‘Young, Dumb, Stupid’, 반복적으로 읊조리는 후렴구로 중독성을 만들어내는 ‘Love Me Like This‘, 경쾌한 멜로디로 전개되다 급작스러운 안티-드롭을 사용해 무심하고 낮은 톤의 가사(“So keep saying now, keep saying my name”)를 강조하는 ‘Just Did it’과 같이, “expérgo”의 수록곡은 청자들이 기억해야만 하는 부분들을 상당히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도리어 빼곡하고 기세 강한 그룹의 보컬을 강조하며, 낯선 감각을 주는 데에만 치중했던 과거와 달리 ‘믹스 팝’의 주인공으로서 멤버들의 보컬을 조명한다. 이는 앨범 발매 전 아카펠라 형식으로 하이라이트를 부른 티저 영상에서부터 예고된 점인데, 복잡하고 난해한 배경 없이 오로지 목소리만으로 곡들을 소개하는 영상은 기존 ‘믹스 팝’의 정의를 뒤바꾼다. 높은 압력을 사용한 듯 빽빽하고 정직하게 내지르는 보컬은 후렴구의 간단한 반복 구조 가운데서도 힘에 힘을 더한 ‘과잉’의 감각을 사그라지지 않게 하는 원천이다. 쉽지 않은 그룹의 색채 변화를 이루었지만, 강력하고 생동감 있는 보컬은 앞으로의 새로운 가능성에 힘을 실어줄 것이다.

마노: 일정한 톤 앤 매너로 매끈하게 깎인, 마치 스포티파이 인기 차트에서 흔히 볼 법한 최신-첨단 유행 장르의 트렌디한 곡들이 차례로 스쳐 지나간다. 큰 고조 없이 대체로 평이한 텐션으로 흘러가는 와중에 그나마 드럼 앤 베이스 장르의 타이틀곡 ‘Sour & Sweet’과 팝 록 장르 ‘GHOST’가 정점을 찍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소위 ‘마라 맛’이라는 용어로 대표되는 작금의 케이팝 평균 데시벨에는 한참 못 미치는 느낌이다. 그래서 혹자는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밍숭맹숭한 맛이라고 볼멘 소리를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조차도 어찌 보면 가창자 특유의 캐릭터에 꼭 걸맞는 온도와 다이내믹을 갖춘 컬렉션이라고 봐야 할 것만도 같다. 가만 생각해보면 ‘마라 맛’의 사운드와 콘셉트가 썩 어울릴 만한 캐릭터는 아니지 않은가. 하여 아무래도 아티스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을 영리하게 골라 입었다고 봐야 할진대, 평가는 개인의 취향과 판단에 맡겨야 함이 옳을 듯하다. 가장 기억에 남은 트랙은 느긋하고 그루비한 리듬감의 ‘Tippy Toe’.

비눈물: "the Billage of perception: chapter three"은 빌리의 두 메인 세계관 중 현실과 맞닿은 perception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다. 마치 정반합의 3부작 구성을 염두한 듯, 전작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 문제점을 말끔히 해결하고 탄탄한 디스코그래피를 통해 꾸준히 쌓아온 특장점은 계승하여, 전에 없던 새로운 단계에 다다른다. 지금까지 빌리의 앨범은 디테일한 세계관을 주축으로 수록곡이 각각 생명력을 가지면서 동시에 서로 연결되는 유기적 구조를 구축해왔다. 그러나 콘셉트가 뚜렷한 타이틀곡이나 정형적 구성을 갖게 되는 팬 송의 경우 간혹 수록곡 사이에서 조화를 온전히 이루지 못하고 홀로 튀어나오거나, 맥을 끊기도 하였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이번 앨범은 'EUNOIA'와 'various and precious'를 포함, 전체적인 사운드를 하나의 결로 동기화하여 어긋난 Z축을 바로 세운다.
이러한 방향성은 트랙 리스트를 따르는 앨범의 흐름에서도 나타난다. 인트로 'enchanted night ~ 白夜’는 그루브와 긴장감을 이끌어내는 베이스와 드럼 비트를 일관되게 배치함으로써 다이내믹을 잃지 않고 앨범 전반에 높은 밀도를 유지해낸다. 이처럼 Y축으로 흐르는 일관성은 물론, 한 앨범과 다른 앨범 사이를 X축으로 관통하여 이어지는 서사 역시 드러난다. 특히 'the rumor'—'Mcguffins ~ who's the Joker?'로 이어진 시리즈의 아웃트로 곡은 복잡하고 혼란스런 감정과 서스펜스를 구축해왔는데, 'nevertheless'는 역대 가장 극적인 보컬 퍼포먼스로 이를 확장하며 숨이 턱 막힐 만큼 급변하는 감정의 거대한 낙차를 그리며 듣는 이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킨다.
"the Billage of perception: chapter three"가 앨범으로서 전방위 균형을 이뤘다면 싱글로서의 'EUNOIA'는 활동곡들의 특색을 흡수하여 하나의 '아름다운 생각'(eunoia), 진정한 합일을 이룬다. 'EUNOIA'는 수록곡 등지에서 보여준 신스 팝의 부드러움을 메인으로 삼고, 여느 타이틀곡과 같이 리듬을 티키타카 저글링하는 백 보컬과 더블링, 곡이 진행되며 겹겹이 쌓여가는 화음 레이어 등 빌리의 절기(絕技)를 아낌없이 펼쳐낸다. 그 보컬 플레이가 하나 둘 2분대 브릿지의 여백에 모여서 이내 발산되는 진행을 예상할 찰나, 수아와 시윤이 방심하던 청자의 고막에 비트를 꽂아 넣으며 'RING ma Bell'의 강렬함을 연상시키는 랩 섹션으로 텐션을 다시금 환기한다. 이에 호응하여 수현과 하람 두 메인 보컬이 섬세한 하모니를 하늘로 풀어 올리는 절정의 순간, 멈추지 않고 댄스브레이크를 통해 한 단계 더 밀어붙이는 구성은 'RING X RING'을 닮아있기도 하다. 그리고 츠키의 추임새로 엉뚱하고 또 능청스럽게 다른 두 파트가 확 뒤집히는 구간은 문득 'GingaMingaYo'가 떠오르기도.
빌리는 매 활동마다 콘셉트와 장르를 넘나드는 변화 속에서도 멤버들의 분투와 디테일에 대한 집착 등을 통해 조금도 안주하지 않는 진취성과 어떤 이미지든 소화할 수 있는 적응성을 증명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아직까지 대중에 인식되는 그룹의 고유한 이미지를 정착하지는 못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빌리가 누군데?" 빌리의 세계관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실종된 '빌리 러브'의 정체에 대한 존재론적이고 근원적인 물음이다. 하지만 이는 단지 세계관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보고 듣는 현실의 빌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아직까지 풀지 못한 이 질문의 해답을 빌리는 이번 앨범과 'EUNOIA'로 제시한 것은 아닐까.
꼭 하나의 키워드가 아니더라도, 쉼 없이 변하는 독특함과 다채로움 이외에 그룹의 정체성을 확정지어야 하는 이 타이밍, 글로벌 활동 등 성과를 조금씩 일궈가는 이 순간에, 빌리는 고른 파트 분배로 멤버 개인의 역량과 매력을 고루 노출시키고 그룹으로서 빌리가 가장 잘하고 안정적인 모습을 선보였다. 이러한 전략이 알맞게 적용되었음을 앨범으로 증명해냈다면, 앞으로는 그룹의 모든 것을 이끄는 핵심 메커니즘이 된 세계관을 시류에 알맞게, 조금 더 유연하게 활용하는 방안을 고민하여 유효한 프로모션으로 귀결하는 것이 그룹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이번 앨범으로 디스코그래피의 정점을 찍었음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 빌리가 앞으로 더 뻗어나갈 가능성은 이미 흘러 넘치게 보여준 만큼, 그룹의 다음 행보를 기쁘게 기다려 봄직 하다.

마노: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오래된 속담이 떠오른다. 준수한 트랙들을 갖췄지만 마무리감이 어설퍼진 바람에 전체적인 완성도를 해친 꼴이 되고 만 모습이 사뭇 안타까워 드는 생각이다. 우선은 트랙 배치가 아쉽다. 팀 특유의 스웨거와 당찬 슬로건을 전면에 내세운 ‘XIKEY’를 후반부 대신 전반부에 배치하고, 로킹하고 에너제틱하면서 뒷맛이 깔끔한 ‘ROCKSTAR’로 EP를 마무리했더라면 어땠을지. 팀에 있어서 소위 ‘키 플레이어’가 아직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한창 성장해 나가야 할 신인으로서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노래와 춤 그리고 무대 전반을 아우르는 의미로서의) 퍼포먼스에서 구심점 역할을 할 멤버의 존재는 신인에게 앞으로의 성장세와 팬덤 확장세에 있어서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인데, 이러한 ‘키 플레이어’가 부재하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이 팀의 포텐셜이 한정되어 버리는 면이 있다. ‘다이내믹 청량’이라는 다소 와닿지 않는 콘셉트보다는, ‘아이돌의 본질’에 대한 고민이 우선이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장 즐겁게 들은 트랙은 뻔뻔할 정도의 에너지와 패기로 밀어 붙이는 ‘XIK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