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아이돌팝 발매작 중 정규앨범을 중심으로 주목할 만한 앨범을 다룬다. 원필, 라비, 비비지, 태연, 에이핑크, 제이위버, 비투비, 빌리 등.
마노: 솔로 명의로서는 처음 발매하는 앨범인 동시에 사상 첫 풀 렝스 앨범이기도 한 본작에서 원필은 비교적 감정의 진폭이 적은, 담백하고도 진솔한 본인만의 이야기를 연이어 펼쳐 보인다. 타이틀곡 '안녕, 잘 가'가 가장 통속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산뜻하고 담백한 기조의 곡들이 주를 이루는데, 발라드를 기반으로 하되 약간의 재지함을 가미하거나('소설 속의 작가가 되어') 포크(Folk)적 요소를 넣거나('우리 더 걸을까') 하는 식으로 나름의 장르적 다채로움을 꾀했다. 덕분에 듣기 편하면서도 지루함이라는 함정은 최대한 잘 피해간 준수한 솔로 데뷔작이 되었다. 앨범 전곡 중 아마도 가장 업 템포의 곡일 '행운을 빌어 줘'는 당분간의 공백을 앞두고 새로운 미래에 내미는 야심찬 출사표이자 팬들에게 고하는 잠시간의 고별곡으로 읽히기도 하는데, 콘서트 엔딩곡처럼 신나게 내달리다 말미에 담담하고 씩씩하게 덧붙이는 "다녀오겠습니다" 일곱 어절에 마음이 뭉클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모쪼록 그의 앞날에 행운만이 가득하길, 그가 몸 건강히 잘 다녀와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길 빌어본다.
에린: 원필의 'Pil(필)'과 작품 목록을 뜻하는 'Filmography'를 합쳐 작명한 앨범 "Pilmography"는 일관적으로 이별을 주제로 한 트랙들을 배치하는 대신 감정 표현 방식에 변화를 주어 서정성을 갖춘 1인칭 주인공 시점의 단편영화 같은 모습을 띤다. 앨범 초반부 '안녕, 잘 가'에서는 이별의 순간을 애절하게 표현하고, '지우게'에서는 이별을 막고 싶은 미련을 노래하며 감정의 고조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후 앨범 중반부는 아련하고 편안한 기타 소리가 특징인 '우리 더 걸을까', "괜찮아질 거야 행복해질 거야"를 되뇌어 슬픈 마음을 다스리는 '언젠가 봄은 찾아올 거야', 잔잔하게 반복하는 기타 멜로디를 배경으로 담담하게 읊조리는 '휴지조각'과 같은 트랙들로 채워 아련한 단편영화의 독백 장면을 구현한다. 앨범 가장 마지막 '행운을 빌어줘'는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라는 진부하지만 당연한 어구를 활용해 경쾌하게 과거를 추억하고 새로운 시작의 설렘을 노래하며 마무리한다. 솔로로서 첫 정규앨범임에도 전체적으로 안온함을 담을 수 있는 원필의 섬세함이 돋보인다.
예미: 근래 힙합 뮤지션이 록을 받아들여 만들었을 법한 여러 가지 양상의 음악이 10곡에 걸쳐 담겨 있다. 타이틀곡 'WINNER'에 애쉬 아일랜드가 참여했다는 점이 앨범의 성향을 예고하는 듯한데, 일렉트릭 기타를 위시한 밴드 사운드를 적극 사용하고 오토튠을 씌운 보컬을 전 곡에서 구사한다. 개방감 있는 사운드에 오토튠과 잘 어울리는 음색, 괜찮은 보컬 역량이 합쳐져 강력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이 매력적이다. 애쉬 아일랜드 이외에도 저스디스, 나플라, 폴 블랑코 등 힙합 씬(scene)에서 입지가 탄탄한 아티스트가 다수 참여했다는 점은 전작들과 일맥상통하지만, 보컬 위주의 퍼포먼스 덕택에 라비의 존재감이 피쳐링 진을 압도한다는 점은 과거 낸 랩 위주의 앨범에 비해 "LOVE & FIGHT"가 갖는 큰 장점이다. 앨범 제목 그대로 모든 곡에서 연애 중의 갈등을 다루고, 신나는 곡들 사이 잔잔한 곡을 삽입하여 완급조절을 시도하는 등 대단히 직관적인 접근을 취했는데, 놀라울 정도로 단순한 구성이지만 청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에는 적합했다. 록스타 라비가 래퍼 라비 이상으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에린: 비비지는 여자친구의 멤버인 은하, 신비, 엄지로 결성된 그룹으로 충실하게 여자친구를 계승하는 방향을 선택한다. 다만, 멤버 수가 세 명으로 소수인 만큼 각 멤버의 존재감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디스코 트랙 'BOP BOP!'이 여자친구의 후반부 활동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이들의 역동성이 선명하게 나타나고, 특히 엄지와 신비의 파트가 늘어나면서 이들의 보컬이 자기 몫을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Bop Bop'과 'Fiesta'로 한껏 자유로운 비비지의 시작을 기념하고, 'Tweet Tweet'과 'Lemonade'의 몽환적이고 섬세한 세 명의 보컬 변주와 합은 세련미를 더한다. 앨범 후반부 'Love you Like'와 '거울아'는 새출발을 다짐하는 마음을 팬들에게 전달하는 팬송에 가까운데, 이 중 '거울아'의 도입부 전개는 오케스트라로 벅차오름을 유발하는 여자친구 활동 초기의 특징을 띄고 있다. 함께 6년이 넘는 기간의 그룹 활동의 내력이 있는 만큼 "Beam of Prism"은 그 과거를 충분히 활용하여 계승하면서 더욱 자유로운 활기를 발산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선포한다.
마노: 앨범 발매 후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된 수록곡 'Siren'의 레코딩 비하인드 영상에서 후렴구를 저음부터 고음까지 겹쳐 쌓아 올리며 풍성한 화음을 만들어가는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아마 다른 곡들 역시 이런 집요하리만치의 집중력이 발휘되지 않았을까 짐작하게 된다. 히스테릭하게까지 느껴지는 집요함 내지는 고도의 예민함(물론 모두 좋은 의미로). 태연의 세 번째 풀 렝스 앨범을 간략히 수식하자면 이런 표현을 쓰게 될 것 같다.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솔로로 활동을 시작한 이래 착실히 디스코그래피를 쌓아올리며 "본인이 얼마나 뛰어난 보컬리스트이며 아티스트인지를 온몸으로 증명해낸" 태연이지만, 아마 어느 시점부터는 그 이상을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적지 않게 작용했을 터다. 특히 그런 류의 부담감은 자칫 좋지 않은 방향으로 발현되기 십상임에도, 결국 본인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목소리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을 포기하지 않은 좋은 의미로서의 '집요함'이 본 앨범의 가장 큰 미덕이라 하겠다. 개인적으로 선공개 곡 'Weekend'와 'Can’t Control Myself'가 한 앨범 안에 함께 수록된다기에 우려에 가까운 의구심을 품었었는데, 별 무리 없이 유기적으로 봉합되는 것을 목도하고 나니 태연이라는 보컬리스트 그리고 아티스트에 대해 확신만을 갖게 되었다. "완벽의 경지에 이른 아티스트의 수행력과 그를 묵묵히 뒷받침하는 기획력"이 어떤 경지에 다다랐음을 다시금 우아하게 증명해낸 결과물. 추천곡은 'Siren'과 'Ending Credits'.
스큅: 태연의 정규 3집 "INVU"에는 자신의 목소리를 다양한 장르의 프리즘에 투과시킨 1집 "My Voice"와 앨범에 걸쳐 처연한 모노드라마를 치밀하게 그려낸 2집 "Purpose"의 장점이 고루 담겨 있다. 타이틀곡 'INVU'는 댄서블한 튠을 견지하며 태연의 역대 리드 싱글 중 제일 화려한 비주얼을 보여주면서도 그 속의 정동은 가장 내밀하고 복잡다단하다. 사랑의 온도차에서 빚어지는 번민을 "INVU"라는 4글자 어구로 응축해낸 가사와 고도의 집중력으로 고요한 히스테리를 그려내는 태연의 보컬은 긴 여진을 남긴다. 신경이 곤두선 예민한 보컬이 곡에 입체성을 불어넣는 양상은 스타일을 막론하고 앨범의 모든 곡에서 두드러진다. 싱글 발매 당시 "한껏 누그러진 텐션으로 일관"해 "태연의 해석이 개입할 여지가 비교적 적다"고 느꼈던 'Weekend'마저도 내밀한 정동의 파고를 그린 앨범의 맥락 속에 놓이니 조심스럽고도 허심탄회한 마음 다짐의 뉘앙스로 들려 (핫펠트 "1719" 앨범의 중후반부에 자리한 'Sweet Sensation'이 떠오르기도 한다) 한껏 풍성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모든 곡이 준수하지만, 차분한 톤으로 요동치는 정념을 표현해낸 'Set Myself On Fire'와 냉혈한처럼 몰아치는 'Cold As Hell', 그리고 'Weekend'의 프리퀄을 마련하는 'You Better Not'을 특히 추천한다.
비눈물: 발매 전 대부분의 소속사 직원들이 성공을 쉽게 점치지 못했다는 'INVU'를 확신의 '대중 픽'으로 자리 잡게 해준 결정적인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복잡한 감정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도록 곡조의 명도는 낮추되 동시에 비트의 명료도를 뚜렷이 하여 곡이 가진 다이내믹을 잃지 않도록 섬세하게 조율한 편곡의 공로 역시 크겠으나, 하나의 코드 진행이 반복되며 평이하게 흘러갈 수도 있었던 구성에 감정의 파랑을 뒤흔드는 생동감을 불어넣은 주역은 단연 태연의 보컬이다.
그러나 앨범 "INVU"는 단순히 빼어난 리드 싱글 하나를 떠받치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싱글 'INVU'가 짧게 내비친,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사랑의 복합적인 감정을 심도 있게 확장하여 화자의 사랑을 대하는 태도와 자아의 변화 과정을 설득력 있게 풀어내는 장편 소설의 기능을 수행한다. 그 일환으로 가사 속에 다른 트랙의 제목을 삽입하여 트랙 간의 연계와 내러티브의 유기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Can't Control Myself' 中 "키만 훌쩍 커버린 어른아이 같아", 'Timeless' 中 "요란스러운 Siren 두려울 거 없어") 또한 서슴없이 가장 깊은 감정의 낙폭을 그리는 'Cold As Hell'을 기점으로, 감당 못 할 만큼 격한 감정을 표출하고 연정을 갈구하던 어린 마음의 전반부 화자와 마침내 내면을 똑바로 바라보고 포용할 수 있게 된 후반부 화자의 대비가 잘 드러나도록 트랙을 배치하였는데, 이는 문학 작품을 써 내려가는 작가의 안배와도 닮아있다. 이처럼 철저히 설계된 앨범의 흐름 덕분에 단일 싱글로써 앨범의 컬러 팔레트와 가장 거리감이 느껴졌던 'Weekend'마저 후회스러운 과거를 씻어내고('No Love Again') 단호히 새로운 '나'를 다짐하는 ('You Better Not') 후반부의 문맥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었다.
"INVU"가 일궈낸 결과물은 수록곡 'Siren'의 녹음 비하인드 속 태연이 겹겹이 쌓아 올린 코러스만큼 두껍게 축적된 대중의 지지와 믿음이 태연의 뚜렷한 자기 확신, 음악에 대한 고집과 만나면서 이뤄질 수 있었다. 더불어 목소리가 가진 장점을 적극 활용하거나 은은히 배어든 모던 록 텍스처를 통해 극적인 연출을 선보이는 등 지난 정규 1집 "My Voice"와 2집 "Purpose"가 남긴 족적까지 놓치지 않고 아티스트의 것으로 체화해냈다는 점에서 3집 "INVU"는 긴 서사를 그리는 정규 앨범의 모범 사례로서 태연의 디스코그래피 속 하나의 마일스톤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점해본다.
조은재: 모든 아티스트가 그렇듯 에이핑크 또한 레퍼토리를 개발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한 차례 리부트를 감행했는데, 그 분기점이 됐던 곡이 바로 '1도 없어'였다. 'Dilemma'는 '1도 없어' 이후로 새롭게 정립된 에이핑크의 아이덴티티를 한 번 더 확고하게 강조하는 곡으로, '1도 없어'보다 좀 더 서정적인 멜로디 진행이 돋보인다. 2막을 열었던 '1도 없어' 이후의 색깔을 굳히는 타이틀곡과 달리 앨범은 그 이전의 디스코그래피까지 망라하는 듯 익숙한 분위기로 구성되었는데, 'Nothing'과 'Red Carpet' 등의 유닛곡이 기존의 에이핑크와는 또 다른 캐릭터로 앨범의 흐름을 환기한다. 에이핑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엿볼 수 있는 앨범.
에린: "HORN"은 스페셜 앨범으로 명명되어 10년이 넘는 활동을 추억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 한편, 11곡을 수록해 비교적 큰 볼륨을 갖추어 현재 에이핑크의 견고함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타이틀 곡 'Dilemma'의 경우 그간 블랙아이드필승과 함께 '1도 없어', '%%', '덤더럼'을 거치며 그룹의 변화에 설득력을 공고히 했던 기조를 이어간다. 'Dilemma'는 몽환적인 신스 사운드에 에이핑크 특유의 청승맞은 뉘앙스와 쫀득한 발음의 보컬을 사용하여 확실한 후렴구의 포인트를 만들어낸다. 이후 유닛 곡 'Nothing'과 'Red Carpet'은 유닛 곡임에도 앨범에서 동떨어지지 않고 각자 솔로 활동을 하면서 갖춘 내공을 발휘하며 그룹의 역동성을 강조한다. 'Nothing'에서는 주지롱(남주, 은지, 초롱)의 냉소를 엿볼 수 있고, 'Red Carpet'에서는 YOS(보미, 나은, 하영)의 화려하고 당당히 걸어 나가는 모습을 형상화한다. 'Single Rider'는 에이핑크로서 가장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내 앨범의 확실한 분기점을 만들어낸다. 멤버들의 서늘한 보컬과 트랙 중반부 드롭에서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신시자이저를 활용하여 에이핑크로서는 다소 색다른 오싹함을 보여준다. 'Single Rider'를 지나면 "HORN"은 이제까지 에이핑크의 활동을 기념하는 트랙들을 배치하여 아련한 서정성을 강조한다. 과거의 고단함을 기억하는 '그날의 봄'을 시작으로, 되려 활동을 유지하고 싶은 자기 다짐에 가까운 'Trip'과 10주년 기념 팬 송인 '고마워'에 이르기까지 앨범 후반부는 에이핑크로서의 이야기와 에이핑크가 팬들에게 할 수 있는 말에 집중한다. "HORN"으로 에이핑크는 지금까지의 활동을 압축적으로 기록하면서 팀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단단함을 자신 있게 알린다.
스큅: 〈소년24〉, 〈프로듀스 X 101〉, 〈TO BE WORLD KLASS〉, 〈믹스나인〉 등 여러 서바이벌 프로그램 참가 이력이 있는 멤버들로 구성된 신인 보이그룹 제이위버의 데뷔 EP. 타이틀곡 'Jtrap'은 비장한 도입부부터, 여백 없이 빡빡하게 구성된 파트 분배/전환, 극적인 장조 전환과 함께 펼쳐지는 다분히 차력스러운 보컬까지, 꽤나 멀끔한 케이팝의 정형을 들려준다. 보컬이 사력을 다해 쥐어짜는 반면 트랙의 타격감과 응집력은 다소 성기고 빈약해 전반적으로 겉도는 인상은 들지만, 의외의 즐거움을 발견하기에는 충분하다. 수록곡 역시 의례적인 인트로도, 관습적인 '팬 송' 발라드 트랙도 없이 정석적인 K-아이돌 댄스 팝으로 일관한다. 유행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스타일은 전형적이지만, 동시에 제법 안정적이기도 하다. 평범하다고 넘겨짚기에는 아쉬운 탄탄함이 자리하기에 이들의 다음 행보에 기대를 더 걸어 보고 싶다. 추천곡은 'Blue Fire'.
마노: 간만에 완전체로 선보이는 팀 사상 세 번째 풀 렝스 앨범. 팀의 가장 큰 무기인 가창력을 전면에 내세우는 발라드 장르의 곡과, 그 틈에 약간의 생동감을 불어넣는 비-발라드 트랙이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타이틀곡 '노래'만 보아도, 이전 타이틀곡에서 나쁜 의미로 돋보이곤 하던 랩 파트가 이제는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는 점에서 약간의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전곡을 멤버 임현식과 이민혁이 직접 채워 넣었다는 점이 또한 눈에 띄는데, 완연히 무르익은 송메이커로서의 저력을 각자가 다른 방식으로 증명해내며 앨범의 완성도를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인트로 트랙으로 조심스레 운을 떼고는 분위기를 조금씩 달구어가다 인털루드 트랙 'Interlude : Re'에서 한 번 환기한 뒤, 쓸쓸한 무드의 발라드 트랙 'Lonely'에서 그루브감 넘치는 '춤'으로 다시금 분위기를 고조시키고는 'Higher'로 크게 터뜨려버리는 흐름에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모던록 풍의 '흘려보내'와 콘서트장에서의 풍경을 가만히 상상해보게 되는 'Outro : Encore'에는 무심결에 코끝이 찡해지는 경험까지. 어느덧 10년차에 이른 팀의 농익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한 장. 추천곡은 앨범과 동명의 'Be Together'.
조은재: 미니 앨범 단위로 레퍼토리 확장을 모색하는 한편, 정규 앨범에서 아티스트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일정한 기조를 만드는 일은 무척 교과서적이지만 의외로 쉽게 지키기 힘든 정공법이다. 정규 1집 "Complete"를 통해 다인조가 쉽게 갖기 힘든 발라드 보컬 그룹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정규 2집 "Brother Act."를 통해서는 케이팝 씬 안에서 손꼽히는 보컬 그룹으로 비투비만의 영역을 공고히 했다. 정규 앨범 사이에 '기도'나 'MOVIE'와 같은 다양한 장르의 곡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직전에 발표한 'Outsider' 또한 비투비에게는 실험적인 곡이었지만, 정규 3집 "Be Together"에 와서는 다시금 본연의 음악으로 돌아왔다. 소년의 치기가 사라진 자리에는 완숙미가 돋보이는 보컬 퍼포먼스가 자리 잡았는데, 적당히 절제된 보컬과 감정선은 전체적으로 느린 듯 나른한 비트에 맞춰 13개의 트랙을 가볍지 않은 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어나간다. 마치 성장이 더딘 듯해도 결국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커리어를 쌓아왔던 비투비다운 앨범이다.
비눈물: 걸그룹의 세대교체가 가시권에 들어온 현시점에서도 꾸준히 커리어를 쌓아온 이전 세대가 그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만큼, 새롭게 시작하는 4세대 걸그룹은 어떻게든 차별점을 만들어 생존을 꾀할 수밖에 없다. 단순히 유행을 좇는 '뉴트로'나 '걸크러시' 등 단순한 콘셉트 변화만으로는 유의미한 반응을 만들기 어렵게 된 상황에서, 남은 주요 선택지는 과거의 빛나는 유산을 영민하게 계승하거나, 아예 전에 없던 '이상함' 혹은 '낯설게 하기'를 내세우는 방안으로 나뉘게 되었다. 빌리의 경우 기획부터 명확하게 후자의 방향성을 띠고 있다.
'GingaMingaYo'는 세대를 거쳐오며 어느 정도 정형화된 아이돌 음악의 표준에서 (의도적으로) 한 칸씩 엇나가면서, 데뷔 앨범부터 선보였던 예상 밖의 생경함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브릿지에서 빌드 업을 위해 의례적으로 나와야 할 고음 파트가 갑자기 고장 난 테이프처럼 늘어지더니 멋쩍은 듯 한 번 웃고 천연덕스럽게 넘기는 구간은 엉뚱함을 넘어 발칙함까지 느껴진다. 바로 다음에 어린 시절 한 번씩 흥얼거려본 동요의 멜로디('Old MacDonald had a farm')를 차용한 후렴구가 나오면서 돌연 친숙함을 마주하게 하는 방식은, 고막에 꽂아 넣는 사이렌 소리의 낯섦과 후렴구의 낯익은 히트곡식 보컬 운용이 서로 부딪치며 익숙함을 해체하고 끊임없이 혼란함을 강조하던 ‘RING X RING’의 모습과 닮아있다. 하지만 전작과 달리 사운드에 난해함과 긴장감을 다소 덜고, 고른 파트 분배를 통해 멤버 개개인의 존재감과 포지션에 따른 강점을 부각함으로써 대중적 접근과 팬덤 구축에 한층 신경을 쓴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특이함'으로 시선을 모으고 그 속에서 새로운 매력에 눈뜨게 하는 이러한 전략은 10년대 케이팝을 휘어잡은 '선 병맛 후 중독' 공식을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정제한 셈이다. (실제로 최근 멤버 츠키의 직캠이 독보적인 표정 연기로 알고리즘을 타고, 그 화제성이 후렴구의 중독성과 함께 엮여 곡에 대한 관심과 인지도로 이어지고 있다.)
한편 앞서 'snowy night'을 맡았던 밍지션 작곡가가 이번 앨범에서는 총 3곡에 참여하였는데, 트랙의 배치를 살펴보면 타이틀 곡과 팬 송 'believe'가 그 3곡을 액자처럼 앞뒤로 감싸는 듯한 묘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재밌는 점은 단순히 형식뿐만 아니라 세부적인 내용 및 청각적 관점에서도 앨범이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뮤직비디오와 세계관 영상에서 보이듯 'GingaMingaYo'가 멤버들이 현실(외부)에서 꿈과 무의식(내부), 혹은 '이상한 세계'로 진입하는 입구라면, 이어지는 'a sign ~ anonymous', 'overlap (1/1)', 'M◐◑N palace' 3곡은 밍지션 특유의 유려한 화성과 신비한 무드를 조성하기 적합한 여러 장르를 활용하여 꿈결 같은 이미지를 연출해낸다. 그리고 'believe'는 폭죽놀이처럼 반짝거리는 악곡과 팬덤의 이름을 직접 불러주는 (현실과 맞닿은) 가사를 통해 팬 송과 클로징 트랙의 역할을 다하며, 마치 영화 〈인셉션〉 속 꿈을 깨워주는 킥과 같이 청자들을 다시 액자 밖 현실로 돌려놓는다. 그렇다면 작가진을 비롯한 트랙 간의 거리감 역시 앨범의 내부 설정과 외부 요소와의 동기화를 위해 처음부터 의도된 장치로 볼 수 있다.
'GingaMingaYo'의 콘셉트 아트와 티저에 비친 첫인상은 제목 그대로 정말 "긴가민가"해 보였지만, 결국 발매된 결과물은 그야말로 기획 혹은 장인 정신의 승리라고 말하고 싶을 만큼 그 만듦새에서 치밀함과 섬세함이 짙게 드러났다. 그러한 배경에는 세계관 영상을 만들고 그 OST 앨범을 따로 발매할 만큼의 진심이 담긴 프로듀싱의 몫이 적지 않겠으나, 문수아의 카리스마, 츠키의 풍부한 무대 해석력 등을 보여준 'GingaMingaYo'의 퍼포먼스 역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또한, 첫 앨범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미스터리하고 몽환적인 분위기와 빌리의 장점인 풍부하고 다채로운 보컬을 고스란히 담아낸, 'a sign ~ anonymous'를 비롯한 3곡의 수록곡에 가장 큰 공을 돌리고 싶다. 앞으로도 철저하게 기획된 미스틱 스토리의 프로덕션과 퀄리티에 대한 꾸준한 고집이 계속된다면 세대를 넘나드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빌리의 이름이 결국 빛을 발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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