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복제 미만
취향은 다양할 수 있지만, 때론 그것을 넘어서는 요소가 존재한다. 이를테면 지난 달까지의 에이핑크가 그렇다. 연초의 섹시 콘셉트 대란을 뚫고 발매된 “Pink Blossom”은, 흔들림 없이 소녀 풍을 고집해 온 에이핑크의 뚝심이 단지 미련함이 아니었음을 보여줬다. 섬세한 청아함을 탄탄하게 담아낸 이 미니앨범은 다소 식상함을 느끼던 사람들에게도 설득력 있게 다가왔고, 화사하기 그지없는 ‘Mr. Chu’는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 와중에 라붐, 러블리즈 등이 데뷔하며 ‘걸그룹의 원형’인 소녀적 감성이 다시 유행하는 듯했고, 그것을 가장 완숙하게 선보일 것으로 떠올릴 수 있는 에이핑크에도 다시 시선이 갔다. 드디어, ‘에이핑크의 시기’가 오는 것을 기대한 이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Pink LUV”는 그런 기대를 보기 좋게 배신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나요”라 묻는 타이틀 ‘LUV’는 ‘Mr. Chu’ 이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NoNoNo’, ‘My My’의 선례를 충실히 따른다. 조금 차이가 있다면, S.E.S.의 여러 곡을 짜깁기하던 과거와 달리 한 곡(‘꿈을 모아서’)을 집중적으로 가져온다는 정도일 것이다. 이 글이 표절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아님을 유념하며 읽어주기 바란다.
아래의 악보는 G 메이저인 ‘꿈을 모아서’를 ‘LUV’와 같은 A 메이저로 한 음(장2도) 올려 표기한 것이다.
로마숫자 표기로 옮기면 IV – V – iii – vi로, 흔하다면 흔한 코드 진행이다. 그러나 ‘꿈을 모아서’는 F#m9가 다시 반복될 때 F#7으로 변경되면서 서정적인 흐름을 밝게 바꿔주는데, ‘LUV’는 이마저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다만 C#m7을 G7으로 바꿔서 분위기 전환을 강조한 것이 차이다. 즉, 여기서 교체된 것은 단 한 마디에 불과하다.
탄력적인 리듬의 멜로디로 시작해 (“오래도록 기다려왔었던”) 차분한 리듬으로 빠지는 (“따뜻한 바람 타고”) 패턴도 “유난히 지치고…”에서 “내 편은 하나도 없죠”로 진행되는 흐름과 유사하다. 듣기에 따라서는 1절 두 번째 파트의 초롱은 유진에 이어 은은하게 깔리는 슈의 모창을 하는 듯이 느껴지기까지 할 정도다.
‘LUV’의 후렴 부분 역시 ‘꿈을 모아서’와 같은 코드 진행으로 이뤄져 있다. 차이가 있다면, C#m7에서 F#m9 혹은 F#7으로 진행되던 것을 C#m7-F#7으로 변화를 줄인 뒤, C#7을 삽입해 줬다는 것이다. “빛나고”와 “없나요”의 상승하는 멜로디 패턴도 매우 유사하다.
‘꿈을 모아서’의 “그대에게” 부분의 멜로디는 조성의 으뜸음인 ‘라’에서 시작해 DM7의 특징적인 세븐스 음정인 ‘도#’으로 흐르고(원곡에서는 ‘솔’로 시작해 CM7의 ‘시’로 이동한다), ‘LUV’의 “기억하나요” 부분은 ‘도#’에서 시작해 ‘라’로 흐른다. 방향은 반대지만, 멜로디가 활용하고 있는 화성적 요소와 흐름은 동일하다.
‘꿈을 모아서’의 0:45에 등장하는 간주는 신스 리드의 멜로디와 함께 오케스트라 히트로 리듬을 강조한다. 이 오케스트라 히트는 곡 전반에 걸쳐 등장하며 곡의 인상을 결정하는 테마가 된다. 신스 리드는 같은 톤의 다른 멜로디로 B 파트(“이제 태어나는 구름…”)부터 노래의 반주로도 사용되며 후렴을 인도한다.
‘LUV’의 1:45에는 마찬가지의 간주가 등장한다. 신스 리드 멜로디와 오케스트라 히트와 스태브(stab)로 리듬을 강조하며, 곡의 인상을 결정하는 테마를 이룬다.이 중 스태브는 S.E.S.의 ‘Love’에 사용된 것과 동일한 사운드다. 신스 리드는 같은 톤의 다른 멜로디로 B 파트(“너와 나, 그렇지가 않던 그 시간…”)부터 노래의 반주로도 사용되며 후렴을 인도한다. 멜로디의 유사성은 말할 것도 없다.
엔딩에서 오케스트라 히트의 사용은 ‘LUV’와 ‘Love’가 매우 흡사한데, ‘Love’가 4분 음표로 5번을 때린 뒤 멀어진다면 ‘LUV’는 3번을 때린 뒤 한 박자를 쉰 다음 굳이 5번째를 다시 한번 때리며 멀어진다. 리듬을 조금 뒤틀고 4번째 박자를 지운 것 외에는 차이가 없다.
에이핑크가 S.E.S.를, ‘LUV’가 ‘꿈을 모아서’를 참조하면 안 된다는 법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이 글은 표절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쩌면 더 큰 문제는, 이 곡이 ‘NoNoNo’의 철저한 동어반복이란 점이다. 역시 ‘꿈을 모아서’를 짜깁기했다는 평판을 들어야 했던 ‘NoNoNo’와 비교해 보자. ‘NoNoNo’의 악보 역시 ‘LUV’에 맞춰 G 메이저에서 A 메이저로 한 음 옮겨 표기했다.
길이만 두 배로 늘어났을 뿐 DM7 – E7 – C#m7 – F#m7의 동일한 진행이 한 모티프를 이루고, 다시 DM7-E7이 이어진 뒤 멜로디가 도약하면서 변화를 준다. 그렇게 8마디(‘NoNoNo’의 경우는 그 절반인 4마디)가 이어진 뒤, 다음은 Bm7 – C#m7 – F#m7으로 진행된다. ‘NoNoNo’의 경우 Bm7, E7이 추가돼 있다. “Pink LUV”의 보도자료는 8마디가 아닌 12마디의 후렴이 독특하다고 ‘LUV’를 소개하고 있는데, ‘NoNoNo’의 8마디 전체를 고스란히 가져오면 16마디가 된다. 다만 화성 변화의 간격을 길게 잡았기 때문에, 후렴이 지나치게 길어지는 것을 경계해 마지막을 잘라냈을 뿐이다.
‘NoNoNo’의 멜로디는 “슬퍼하”의 ‘도#’으로 출발해 E7에서 ‘시’에 도달한다. “혼자가”는 같은 ‘시’에서 재출발, C#m7의 세븐스 음정인 ‘시’로, 다시 같은 음정을 밟고 F#m7의 제3음인 ‘라’로 내려온다. ‘LUV’는 “기억하”의 ‘도#’으로 출발해 “L O V E Luv”에서 ‘시’에 도달하고, “설레이”는 같은 ‘시’에서 재출발, C#m7의 ‘시’로, 다시 F#m7의 ‘라’로 내려온다. 같은 진행이다.
“슬퍼하”는 “기억하”는 완전히 동일한 멜로디이다. (다소의 리듬감 차이는 보컬리스트가 그루브를 준 것에서 비롯될 뿐이다.) 이후에는 변화가 생기는 듯 보이지만, ‘도#’에서 시작해 오르내리며 각각 하나씩의 경과음(passing note)을 거쳐 DM7 코드로 진입하는 것은 작곡 방법론적 시각에서 동일한 패턴이다. 또한 이 테마의 반복 전개 패턴도 같다. ‘NoNoNo’의 “혼자가 아냐 No No No”는 “슬퍼하지 마 No No No”를 한 음 내려서 반복하고, ‘LUV’의 “설레이나요 한땐 모든 것이”는 “기억하나요 우리 함께했던”을 한 음 내린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곡이라기보다는 차라리 ‘NoNoNo’를 변주한 것에 가깝다.
이쯤 되면 ‘LUV’의 브리지 중 “그렇게 남아있죠”와 ‘NoNoNo’의 “정말 이런 기분 처음이야”가 사실상 같은 멜로디인 것은 차라리 지엽적이다. 앞서 살펴본 ‘LUV’의 간주가 ‘꿈을 모아서’의 패턴을 그대로 가져왔다면, 신스 톤은 ‘NoNoNo’의 그것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다.
어디를 보아도 표절은 아니다. 그러나 보기에 따라서는 표절보다도 더 나쁘다. ‘NoNoNo’와 ‘LUV’가 ‘꿈을 모아서’를 ‘우라까이’할 때, 그것은 기본적으로 ‘추억팔이’다. 그것도 남이 노력해 만든 추억을 갈취해 팔아치우는 일이다. 그리고 ‘LUV’는 염치의 수위를 한번 더 낮춘다. 기획사 데모의 두 가지 버전 같은, 동일한 곡을 두 번에 나눠서 발매하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대놓고 리패키지를 내는 편이 양심적이다. 용감한 형제가 동어반복이 심하다고 했던가. 그는 편곡에 사용할 모든 사운드 소스를 프리셋화하여 올려놓고 작곡을 시작하는 듯한 모습은 보여도, 이미 발표한 곡을 트레이싱하여 표절 기준에서만 벗어나도록 조금 비틀어서 다시 내지는 않는다.
과자 봉지에 질소가 많이 들었다고 국민적 공분을 사는 시대에, 에이큐브와 신사동 호랭이는 팬과 대중을 무엇으로 보고 있는지 묻고 싶어진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유지하고 있던 신사동 호랭이에 대한 팬심마저 싸늘하게 식는 곡이다. 부디 그에게 부끄러움이 있길, 그것이 그에게 가진 마지막 애정의 발로이다.
기사에 사용된 악보 이미지는 인용과 비평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습니다.
에이핑크의 ‘LUV’가 수록된 “Pink LUV”에 관한 아이돌로지 필진들의 단평은 1st Listen : 2014년 11월 중순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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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replies on “에이핑크 – ‘LUV’ (2014)”
정성있는 글이네요
추천을 누르고싶지만
추천 버튼이 없어요
정성스럽게 글을 써놔도 “우라까이”라는 표현이 일반적으로 쓰인다고 해서 그냥 그걸 그렇게 쓰는걸 보면 글에 대한 편견이 생기네요. 아무리 여기가 신문이나 잡지처럼 실물로 내놓는데가 아니라고 할지언정, 읽는 사람들의 언어습관이나 보는 독자층이 청소년 혹은 아이돌을 좋아하는 사람들인만큼 좋은 표현방법을 썼으면 합니다.
좋은 지적이십니다. 저도 그리 좋아하는 말은 아니어서 되도록 쓰지 않으려 해보았지만, 달리 더 적확한 표현이 없다 싶어서요. :) 좀 더 예민하게 고민하며 쓰도록 하겠습니다. :)
동의합니다. 또한
SES – Love의 ‘The girl that I used to be, you’ll be changing my heart – baby, I’d like that 꿈같은 시간, 변함없는 사랑만을 네게 줄께. 우리약속을 잊지 말고 기억해줘요 I always be there, my baby~언제까지나 ‘ 이 부분과
에이핑크 – MY MY의 ‘내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난 널 부르고 싶어 MY MY MY You’re MY 넌 항상 내 마음속에 변치 말고 그 자리에 딱 거기 있어주면 돼~ 이렇게 널 사랑해’
너무하네요 진짜
[…] 출처:http://idology.kr/2834 […]
딱 보자마자 드는 생각이 90년대 걸그룹같다는 느낌. 또 곡이 굉장히 촌스럽다는 느낌이었는데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이 리뷰에서 정확하게 알고 가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