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걸그룹의 새로운 길
SM의 새로운 걸그룹 레드벨벳의 신곡 ‘행복’은 여러모로 저에게 큰 흥분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들의 등장이 2007년부터 이어온 걸그룹 붐의 흐름을 바꿀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유를 말하자면 꽤 길고 복잡하지만 천천히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으면
레드벨벳의 신곡 ‘행복’은 4명의 소녀들이 자기들의 행복의 비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내용이죠. 즉 기본적으로 이 아이들은 행복한 겁니다. “너희들도 행복해지고 싶으면 나를 따라 하면 돼” 하는 식이죠. 조금 미묘한 부분이긴 한데, 행복과 만족의 자급이란 이들을 지난 세대의 걸그룹과 구분하는 하나의 척도가 된다고 봅니다. 이를테면 말이죠,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같은 경우엔, 다시 만날 세계를 앞둔 두려움에 “변치 않을 사랑으로 지켜”달라고 하죠. 지금까지의 많은 걸그룹들이 리스너와의 짝사랑 관계를 설정해두고 사랑하는 마음을 알아주길 바란다거나 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겠죠.
돌이켜보면 지금까지의 많은 걸그룹들이 리스너들에게 끊임없는 구애를 해왔죠. 즉 아이돌 걸그룹이란 유사연애를 바탕으로 한다는 어떤 원칙에 충실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몇 년간 이런 도식은 너무 선명하게 적용되어 왔고, 최근의 경우엔 성적인 함의를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 이슈가 된 경우도 많았죠. 이런 도식이 지속되며 굳어지다 보니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아 씬 자체가 정체되는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었고요. ‘나를 가지지 못하면 네가 불행해진다’거나, ‘너를 가지지 못해서 내가 불행하다’거나. 행복과 만족의 자급이란 포인트는 여기서도 유효하죠.
하지만 레드벨벳은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웃음보가 터지는 소녀들인 거죠. 이들은 구애를 하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나오지도 않고, “너”라는 단어는 노래를 통틀어 단 한 번 등장할 뿐이죠. 리스너는 철저히 외부에 존재하고 이 소녀들을 바라보는 존재가 됩니다. 손을 내밀거나 사랑 고백을 하지 않는 소녀들이라니, 과거의 아이돌 도식으로는 상상하기 힘들죠. 저는 이게 굉장히 큰 변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가 간절하게 원하는 것
한편 ‘행복’이라는 것은 이 시대가 가장 간절하게 원하는 어떤 것이기도 합니다. 현실의 세계는 험하고 가차 없지요. 한국 사회의 아이들은 세상 물정을 익히기도 전부터 경쟁사회에서 살도록 던져지고 그런 프레임에서 죽을 때까지 벗어나기 힘들지요. 이 프레임 안에서 행복이란 누구나 꿈꾸지만 닿을 수 없이 먼 곳에 있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머니와 파워가 행복의 길이라고 하지만 레드벨벳은 행복은 바로 옆을 보면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어른과 아이들의 가치의 대립이란 건 아이돌 씬에선 자주 쓰여왔던 겁니다. 세대갈등이 아이돌의 단골 소재였던 때도 있었죠. 서태지나 H.O.T.까지 떠올릴 필요도 없이, 량현량하의 “학교에 안 갔어!”라는 외침이 준 임팩트가 지금까지 남아있는 걸 보면 말이죠. 어른들은 머니와 파워 같은 지루한 이야기만 하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라 상대조차 하기 싫은 겁니다. 다만 세대갈등이란 소재가 아이돌의 초창기 시절에나 존재하던, 지금은 잊혀진 것이라는 점은, 어쩌면 레드벨벳이 가져올 변화는 생각보다 클지도 모르겠다는 예상을 하게 합니다. 지금의 아이돌들이 어른 흉내를 내면서 성인들에게 손짓하고 있는 데 비해서 레드벨벳은 시치미 떼며 성인들을 밀어내고 있으니 말이죠.
하지만 아이들의 세상이라는 것은 지친 어른들에게는 가장 간절하게 원하는 곳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누구나 한때 지나왔으나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니 말이죠. 재잘대며 웃어대는 소녀들을 바라보는 삼촌들의 표정은 아마도 사랑과 동경 그 자체일 겁니다. 끊임없이 구애하는 성인 지향의 아이돌들이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여기 있는 겁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행복하게 웃어주면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조차 행복해지는 것 아닐까요. 레드벨벳의 차별적인 포지셔닝, 그리고 그 파워는 이런 데에 있는 겁니다. 어쩌면 이건 새로운 세대의 시작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라는 느낌으로 앞으로 여러 아이돌 그룹들의 데뷔곡 이야기를 써보려고 합니다. 네, 시리즈 연재입니다. 좋은 출발이든, 나쁜 출발이든 이야기할 거리가 있다면 조금씩 다뤄보려고 합니다. 아이돌 그룹의 포지셔닝과 내러티브는 매우 중요한 요소인 데 비해서, 이제껏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기 때문에 저라도 이야기를 시작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해서요. 비록 제 이름으로 올리는 것이지만 많은 부분이 강동과의 일상적인 덕담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강동도 기억해주시고 연재물 주경야덕도 많이 좋아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다음 업데이트를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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