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아이돌팝 발매작 중 주목할 만한 싱글에 대한 아이돌로지 필진 단평. 아이브, 에버글로우, T1419, 엑스디너리 히어로즈, 에이티즈, 이효리, 빌리, 에스파, 오마이걸, 더 로즈, 아이즈의 싱글을 다룬다. 2021 연말결산 필진 대담에 참여했던 비눈물이 이번 회차부터 정식으로 필진에 합류했다.
아이브 ‘ELEVEN’
심댱: 데뷔곡은 소화할 아티스트가 너무 묻히지 않을 만큼, 하지만 뚜렷한 질감의 팔레트로 이들을 멋스럽게 치장하곤 한다. 그와 달리 'ELEVEN'은 의아할 정도로 단출한 사운드로 시작하며 청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심심한 벌스에 무방비해진 청자 앞에 강력한 덫을 꺼내 놓는데, "난 몰랐어 내 맘이 이리 다채로운지"라는 펀치라인이 그것이다. 무드를 한순간에 뒤바꾸는 이 한 줄은 "ELEVEN"을 대중의 눈과 귀를 천천히 물들이는 수채화보다 캔버스를 클릭한 순간 단색으로 뒤덮는 페인트 툴로 인식하게 한다. 'ELEVEN'은 마치 한 번 저장하면 수정이 불가한 레이어처럼, 아이브가 청자를 사로잡을 만반의 준비가 된 그룹으로 변모하게 만든다.
'ELEVEN'에 있어 보컬 디렉터 Kriz의 역량에 주목하고 싶다. 벌스의 여백을 흥미롭게 채우면서도 드라마틱한 전환이 어색하지 않아야 하는, 까다로운 미션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이 곡을 들을 때 아이유의 시니컬하고 투명한 하이 노트가 빛난 '낙하', 민니와 우기의 저음을 글래머러스하게 연출한 (여자)아이들의 'DUMDi DUMDi'가 연상되었다(공통점이 없어 보이겠지만, 두 곡 모두 보컬의 매력에 집중한 곡이라 할 수 있다). 고음과 저음, 그리고 단순함과 출렁이는 화사함의 교차가 인상적인 'ELEVEN’의 멜로디를 아티스트가 잘 소화할 수 있게 이 두 곡만큼이나 섬세하게 디렉팅한 것만 같다.
한편, 7을 그린 손가락을 물 때 드러나는 찡그린 얼굴은 '걸크러쉬'라는 단어로 채 담을 수 없다. 7에서 11로 뛰어오르는 과감함과 함께 휘몰아치는 감정을 "사랑하게 됐거든"이라며 고백하는 여유로움으로 미뤄보면, 아이브의 몸짓은 맹수의 그것을 닮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펀치라인에 맞춰 활시위를 겨누는 짧은 순간이나, "Heaven"을 발음하는 입 모양에 따라 손에 쥔 것을 한입에 삼키는 안무, "Aya aya aya"에서 손톱을 드러내는 동작은 'ELEVEN'의 '화사한 야성'을 한껏 표현해냈다.
모든 활동곡이 그러하겠지만, 데뷔곡은 아티스트의 매력을 한 번에 이해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 'ELEVEN'은 매력적인 곡과 안무, 그리고 이 둘을 너끈히 수행하는 아티스트의 조화가 대중의 시선을 단단히 붙들기에 정석적인 데뷔곡이라 할 수 있겠다. 연말의 늦은 데뷔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돌로지 올해의 신인 8선에 자리한 아이브는 대중의 마음을 "한 칸"씩 점령하는 중이다. 흥미로운 반전이 가득한 'ELEVEN', 그리고 아이브의 매력에 너무 늦지 않게 포섭되길 바란다.
조은재: 아이브의 데뷔곡 'ELEVEN'은 에스닉한 무드의 퍼커션 사운드가 강조되어 있어 얼핏 가볍고 청량한 느낌을 의도했는가 싶기도 하지만, 그 어느 데뷔곡보다 카페인 함량이 높은 에너지 드링크 같은 곡이다. 미니멀한 전개를 지나 갑자기 느려지는 프리-코러스 이후에는 전에 없이 웅장한 사운드가 드롭되며 힘찬 보컬과 속도감 있는 퍼포먼스가 등장한다. 2절에서는 코러스가 확장되면서 다이내믹을 더하고 브릿지로 넘어가는데, 이 흐름이 무척 매끄러워 거슬리거나 걸리는 부분 없이 힘차게 흐른다. 리듬의 변주 외에 가사가 주는 역동성 또한 주목할만하다. "1, 2, 3, 4, 5, 6, 7 / You make me feel like eleven"에서 느껴지는 리듬감은 곡의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그뿐만 아니라 "내 안에 빼곡하게 피어나는 Blue", "그날 향기로운 보랏빛의 Mood", "난 몰랐어 내 맘이 이리 다채로운지" 등 설레는 마음을 시각화한 공감각적 표현들은 강렬한 타악기 소리 사이에서 만화경처럼 "다채롭게" 빛난다. 예쁘게 다듬어진 가사는 파워풀한 보컬을 통해 곡의 기세를 고조시키는데, 앞서 언급한 대로 에너지가 가득하다 못해 에너지 드링크처럼 응축된 곡 안에서도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렇듯 사운드가 강한 색채를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주얼 퍼포먼스 또한 사운드 못지 않게 눈에 띄는 포인트를 만들며 좋은 균형을 이룬다. 화려하게 연출된 안무는 시종일관 쿵쿵 때리는 비트에 결코 묻히지 않고 오히려 강한 흡인력을 발휘하며 아이브의 다양한 얼굴을 청자에게 꼼꼼하게 소개한다. 개인적으로 꼽는 킬링 파트는 "감히 누가 이렇게 날 설레게 할 줄"인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데뷔곡에는 '새로운 시작을 앞둔 설렘'을 표현하는 것이 정석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에린: 멤버 장원영과 안유진이 3년에 가까운 아이즈원 활동으로 대중에게 다양한 모습을 보인바, 자칫하면 두 멤버에게 이목이 쏠릴 가능성이 높아 전체 그룹의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약해질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브는 데뷔 전부터 멤버 개개인의 캐릭터성을 소개하는 티저를 순차적으로 공개하며 멤버 모두에게 이목이 쏠릴 방법을 사용했고, 그룹 자체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이와 더불어 'ELEVEN'의 곡과 퍼포먼스는 그룹으로서의 시너지를 극대화한다. 전반적으로 미니멀한 사운드를 사용해 멤버들 개개인의 보컬 색채를 뚜렷하게 만들고, 프리-코러스 "난 몰랐어 내 맘이 이리 다채로운지"에서 급격하게 변화하는 날카롭고 내찌르는 듯한 보컬의 쓰임새에 힘을 실어준다. 곡이 멤버들의 존재감을 선명하게 만드는 한편, 퍼포먼스에서는 그룹으로서의 조화가 돋보인다. 미니멀한 사운드에 맞춘 터팅 동작의 정확한 수행은 그룹으로서의 합일을 보여주고, 코러스에서는 화려한 전개에 따른 역동적인 안무로 변화하는 부분을 확실하게 전달하며 그룹 전체의 생동감을 또렷하게 만든다.
이미 인지도를 갖춘 멤버들이 두 명이나 있음에도 모든 멤버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보여준 아이브의 데뷔. 2021년 'ELEVEN' 단 한 곡으로도 아이브는 눈도장을 확실히 찍었다. 단연코 올해의 신인임이 확실하다.
에버글로우 ‘Pirate’
에린: 아이돌에게 촘촘히 짜인 세계관과 서사를 만들어내는 시도들은 일관된 그룹의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한 방안이지만, 세계관은 아이돌 그룹의 퍼포먼스와 곡, 이미지와 부합했을 때 비로소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부차적인 요소이다. 에버글로우는 거대한 서사를 구축하는 대신 일렉트로닉 비트의 드롭 구성으로 강렬한 포인트를 만들어냈고, 여기에 각이 잡힌 퍼포먼스 수행력이 더해져 짧은 시간 안에 전사와 같은 그룹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그룹의 이미지가 확연히 도드라진 덕분에 에버글로우에게 이색적인 배경을 덧입히더라도 모두 전사로서의 정체성으로 수렴하게 되는 특징이 있다.
이번 'Pirate'에서도 에버글로우의 전사 이미지가 그대로 녹아있다. 다만 여기에 우주를 항해하는 선장의 역할을 부여하여 그룹의 카리스마를 강화했고, 분절적인 EDM식 전개로 속도감이 떨어지는 부분을 곧 "Cause I’m Pirate" 후렴구의 반복으로 전환하며 기억에 남는 포인트를 만들어낸다. "Girls all over the world / 춤춰봐 Tonight / And we could anything"와 같은 가사와 그에 맞춘 대규모 퍼포먼스에서 사람들을 이끌어나가는 리더의 모습을 형상화하며 진취적인 전사로서 에버글로우의 팀 색깔을 다시금 굳건히 했다.
T1419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조은재: 사이렌과 함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반복하는 멜로디는 리코더 멜로디를 활용했던 〈오징어 게임〉 OST를 연상하게 한다. 긴박하게 흐르는 비트와 프리-코러스의 보컬 화성은 서스펜스를 놓치지 않고 무사히 후렴의 "술래"에게 가서 닿는다. 대규모 백업 댄서를 활용한 퍼포먼스는 방탄소년단의 'MIC DROP'이나 'ON'의 라이브 무대가 생각나는데, 특히 다인원 그룹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연출이 아니라 특기할만한 부분이다. 대인원을 동원한 퍼포먼스 연출에 비해 안무 동선이 단조로운 감이 있어 규모감과 공간감이 충분히 부각되지 않은 점은 다소 아쉽다.
엑스디너리 히어로즈 ‘Happy Death Day’
하루살이: 초기 데이식스와 완전히 같은 편성이지만 전혀 다른 방향성을 보여준다. 펑크 사운드 기반에 짧게 분절된 구간들을 접붙이고 단2도와 증4도가 강조된 멜로디로 기괴함을 연출한다. 보컬도 정석적인 창법을 따르지 않고 모호하게 뒤섞여있다. 비주얼이나 가사는 영웅보다 세상에 불만 많고 비뚤어진 빌런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 그러나 터질듯한 소란을 피우지는 않는다. 구간마다 악기의 조합을 달리하는데 어딘가 허전하다. 멜로디는 귀에 맴돌지만 지닌 힘, 추구하는 가치 그 무엇도 보여주지 않아 의아함만 남은 등장.
에이티즈 ‘멋 (흥:興 Ver.)’
마노: Mnet에서 방영한 서바이벌 경연 프로그램 〈킹덤〉의 파이널 곡을 새로이 편곡했다. 자잘한 편곡 이외에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단연 곳곳에서 힘차게 울리는 태평소를 닮은 신시사이저 소스인데, 이런 국악적 요소가 곡에 한껏 웅장함을 더하는 한편 팀이 꾸준히 추구해온 모종의 무국적성을 되려 강조한다는 점이 상당히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또한 경연 당시에는 부재 상태였던 민기가 팀에 합류하며 특유의 파워풀한 래핑을 더했다는 점과 후반부를 대폭 확장하여 러닝타임을 무려 20초나 늘렸다는 점도 큰 변별점. 압도적인(!) 스케일을 자랑하는 뮤직비디오의 영상미 역시 흥청망청 신명 나는 곡의 기조와 빈틈없이 맞물려 돌아가며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나 큰 만족감을 선사한다. 경연곡을 타이틀곡으로 삼았다는 소식에 사실 큰 의구심을 품었는데, 그런 의아함을 해소하고도 남는 싱글이라 할 만하다. 팀의 가장 큰 무기 중 하나인 에너지를 한계까지 밀어붙이며 시리즈의 종장(終章)을 멋지게 장식해낸 에이티즈의 이 다음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예미: 넥타이를 풀어 헤친 교복과 야구 점퍼, 라이더 재킷을 오가는 패션이 합쳐져 한국 학교의 여느 잘 노는 학생을 그려낸다. "우리 춤을 봐"라며 신나게 끼를 선보이기까지의 과정에서 "Humble and Kindness"를 외치는 것은, 한없이 발산적이면서도 단단한 팀워크를 자랑하는 에이티즈의 모습과 닮았다. 국악기 소리를 닮은 신시사이저,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더하는 한복과 사자탈은 "한국적"이라는 점에서 원 컨셉과 위화감 없이 녹아든다. "이런 게 바로 멋인기라", "이것이 멋이여", "이런 게 바로 멋입니다"의 뉘앙스 차이가 보일 때면 한국어 화자로서는 꽤나 짜릿해지는데, '멋'은 글로벌 팬덤을 사로잡는 강렬함을 유지하며 한국 문화에 익숙하기에 파악할 수 있는 디테일을 놓치지 않아 더욱 흥미로운 곡이 되었다.
이효리 ‘Do The Dance’
에린: 2021 MAMA 시상식에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댄서들과 이효리의 합동 무대가 펼쳐졌다. 한 해 주목받은 댄서들이 모인 무대인 만큼 'Do the Dance'는 치열한 경연의 배경을 걷어내고, 반복적인 비트와 익살스러운 "그냥 내가 제일 멋있으면 된 거야"라는 랩을 사용해 서로 다른 색채를 가진 댄서들이 다 같이 흥겹게 즐길 수 있는 춤판을 벌인다. 이 춤판의 한 가운데에 이효리가 함께한 점은 하나의 아이콘으로서 그의 의미도 되새기게 하는데, 새롭게 대중의 주목을 받은 댄서들을 위한 곡을 부르고 함께 무대에 오르는 이효리의 모습에는 긴 시간 동안 시시각각 달라지는 트렌드의 변화를 흡수해본 경험이 녹아 있다. 대중의 취향이 변화하는 상황을 반영함과 동시에 20년이 넘는 기간의 아이콘을 다시금 보고 싶은 마음이 반영되어 이효리와 댄서들이 함께한 화려한 무대는 2021년 MAMA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꼽을 수밖에 없다.
빌리 ‘snowy night’
비눈물: 데뷔 곡 'RING X RING'은 오히려 미스틱 스토리이기에 가능한, 아이돌 팝의 전형을 비트는 전략을 통해 빌리만의 당돌하고 색다른 음악과 개성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대중들이 떠올리는 '미스틱스러움'과 거리감이 전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이 간극을 채우기 위해 빌리는 소속사의 정체성을 잇는 장르적·음악적 계통을 새로 보여주는 전략을 취했다. 'snowy night'는 징글벨처럼 시즌 송이라면 으레 갖출 법한 요소들 없이도 겨울에 어울리는 부드럽고 따스한 멜로디를 훌륭히 구현해낸다. 곡의 주축이 되는 아날로그 EP와 재지한 바이브는 공원소녀의 '공중곡예사'를, 모난 곳 없이 편안하게 흐르는 탑라인은 레드벨벳의 'Queendom'을 연상케 하는데, 모두 밍지션 작곡가의 손길이 닿은 작품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프로덕션에서 특히 돋보이는 지점은 심플한 악기 구성과 적절한 장르 선택을 통해 청자가 하람, 수현의 보컬 라인 등 멤버들의 목소리에 집중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준다는 점이다. 또한 곡 전반에 그루브를 채워 넣으며 존재감을 뽐내는 리듬 기타는 통상적인 R&B 트랙과의 차별점을 만드는 키 포인트다. 꿈과 현실을 양분하는 세계관을 활용하여 소속사의 아티스틱한 이미지와 그룹의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모두 보여주는 투 트랙 체제는 현재까지 유효한 듯하다. 이러한 기조가 무사히 (좋은 퀄리티와 함께) 지속된다면 이 그룹이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기대감과 신뢰를 안겨주는 싱글.
에스파 ‘Dreams Come True’
에린: SM이 최근 구축하고자 하는 SMCU(SM Culture Universe) 속 가상의 'KWANGYA'는 SM 소속 그룹들을 통합하기 위한 세계관으로, 최근 소속 가수들의 뮤직비디오나 가사 속에서 'KWANGYA'를 직·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시도를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를 고려했을 때, 에스파의 'Dreams Come True'는 과거 SM의 작업이 현재에 다시금 생명력을 갖도록 만들어 시공간을 가로지르고자 하는 SMCU의 특성을 강화한다. 기존 S.E.S. 'Dreams Come True'의 뮤직비디오 속 SF적인 공간은 새로운 'KWANGYA'라는 공간에 편입하여 과거와 현재의 SM 작업을 같은 세계관으로 연결되었다. 또한 'Dreams Come True'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나비 문양과 곡 후반부 변조된 목소리로 가상 로봇이 부르는 듯한 인상을 남기는 부분 역시 에스파의 리메이크를 거쳐 사이버와 실제 세계의 경계를 허무는 서사가 덧입혀진다. 'KWANGYA'라는 공간이 갖는 과거와 현재, 실제 공간과 사이버 공간의 연결성과 통합성의 이미지를 구현한 리메이크 작업.
예미: 1998년 S.E.S의 컨셉을 2021년 에스파의 어법으로 그려냈다. '소녀'스러운 이미지와 뉴질스윙의 에너지를 같은 톤의 옷을 입고 선보인 원곡과 달리, 에스파는 서로 상반된 요소들을 전부 다른 배경으로 보여준다. 그 결과 현시대 걸그룹이 보여주는 역동성이 걸그룹의 시초 S.E.S 시절부터 이어졌다는 것이 명징하게 드러난다. 네 멤버의 고른 파트 분배는 원곡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힘 뺀 바다처럼 트랙에 녹아드는 지젤과 카리나의 보컬은 에스파 활동에서 보지 못한 의외의 모습이지만, "더는 슬픈 노래 듣지 않을 거예요"를 부르는 닝닝의 고음은 에스파가 SM의 오래된 미래임을 각인시킨다. 원곡의 미래지향적 이미지가 레트로가 되었는데도 SM의 레거시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걸 보여준 리메이크.
오마이걸 ‘Shark’
마노: 꾸준히 양질의 결과물을 내놓고 있는 팬덤 플랫폼 '유니버스'에서 처음으로 발매하는 오마이걸의 싱글. R&B 신(scene)에서 크게 활약하며 다양한 아이돌과도 협업하고 있는 콜드(Colde)와의 만남이 상당히 이색적이다. 훵키한 기타 리프와 경쾌한 건반음 같은 요소가 (소위 '빠다'로 표현되곤 하는) 잘 빠진 팝 넘버 같은 세련된 기조를 풍기는데, 이런 점에서 초기작 중에서 팀의 명-수록곡 중 하나로 꼽히는 'KNOCK KNOCK'이 떠오르기도 한다. 한편 앨범 자켓 이미지에서는 "CLOSER"의 그것을, 제목에서는 'Dolphin'을 연상시키기도 한다는 점이 팬의 입장에서 상당히 재미있는 관전 포인트가 아닐까. 여러모로 팀의 세계관을 총망라한 느낌이 드는데, 단순한 이벤트성 발매를 넘어 앞으로의 음악적 세계관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기도 한다.
더 로즈 ‘미녀와 야수’
하루살이: 단순하고 차분하되 가라앉지 않도록 플럭 사운드로 가벼움을 더했다. 까슬까슬한 기타가 곡을 담백하게 지탱하고 브릿지에서는 오케스트라와 콰이어가 성스러움을 극대화한다. 클리셰를 충실하게 구현하면서도 다양한 이펙트 사운드를 가미해 아주 약간 낯설게 만들었다. 이처럼 더 로즈는 꾸준히 준수한 퀄리티의 모던 록을 선보이며 나름 독보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렇기에 길었던 소속사와의 분쟁 끝에 공개된 이 곡이 이들의 마지막이 아니길 바라본다.
아이즈 ‘미운 꽃말’
하루살이: 이번엔 부담 없는 소프트 록이다. 싱그러웠던 전작 'Missing U'의 흔적은 찾기 어렵고,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어 유감이지만) 여러모로 잔나비의 몇몇 곡이 연상된다. 리버브 많은 빈티지 기타 아르페지오에 편하게 내뱉는 벌스는 그런대로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보컬은 북받쳐 오르는데 다른 사운드가 충분히 받쳐주지 못하는 인상이다. 드럼 라인이나 기타의 활용이 단조로워 입체감이 떨어진다. 다양한 시도의 일환으로 이 곡을 긍정하기엔 고질적인 약점들이 보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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