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상반기를 돌아보며, 월별로 기억에 남는 케이팝 발매작에 대한 리뷰를 3주간 발행한다. 해당 포스트에서는 5월 발매된 앨범 중 르세라핌, 에스파, 더윈드, 드림캐쳐의 앨범을 다룬다.
마노: 앞서 발매된 두 장의 EP에서 가져온 6곡의 기발매곡을 다듬어 재수록하고, 거기에 7곡의 신곡을 보태 완성한 사상 첫 풀 렝스 앨범. 멤버 이탈로 인해 재녹음 과정을 가지게 된 첫 EP ‘FEARLESS’ 수록곡이야 그렇다 치고, 별도의 재정비 과정조차 없었던 ‘ANTIFRIGILE’ 수록곡까지 함께 다루고 있어 의아함을 감추기 어려웠는데, 나름의 서사를 부여하고 싶었던 시도는 짐작할 수 있으나 그것이 다소 과했던 것이 아닌가 싶은 우려가 드는 것도 사실이다. 덤으로 각 EP의 인트로와 이번 앨범에 새로이 수록된 ‘Burn the Bridge’(앨범 발매 이전에 트레일러로 공개된 바 있다)가 일종의 인털루드 역할을 하고 있는데, 다소 분절적으로 기능하고 있어 서사 역시 뚝뚝 끊겨 인지되는 부분이 아쉽게 느껴진다. 신곡 파트를 이루고 있는 트랙들은 모두 준수한 퀄리티를 자랑하고 있으나, 각각의 스타일과 장르가 판이하게 다른데다 트랙 간 일관성을 읽기 어려워 풀 렝스 앨범으로서 갖춰야 할 유기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상당히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특히 응당 마지막 트랙으로 자리하며 마무리 역할을 하곤 하는 팬송(‘피어나’)이 다소 뜬금없게도 끝에서 두 번째에 위치해 있어 그나마 있던 흐름마저 끊어먹는 느낌을 채 지울 수 없다.
타이틀곡 ‘UNFORGIVEN’의 경우도, 곡에 너무 지나치게 힘을 준 나머지 곡을 수행하는 팀 멤버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무거운 과업을 부여한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곡이 표방하고 있는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다’, ‘금기를 깬다’는 메시지도 파격적이거나 대단히 탁월하다기보다는 어딘가 안전하다는 느낌이 드는데, 비단 타이틀곡 뿐만 아니라 후속곡인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 같은 곡에서도 가사 속에서 줄곧 내세우는 ‘나에게 금기된 것을 소망한다’는 표어 역시 어딘가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데뷔 이래 시도되어 온 ‘서사 부여하기’ 작업과 그 방식에 어떤 오류가 있었는지 재점검할 시점이 온 것은 아닌가 싶다. 모든 작업물이 소위 말하는 ‘진정성’을 담보할 필요는 없지만, 기껏 야심차게 내건 슬로건과 메시지가 겉돌기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말이다.
스큅: 에스파는 거창한 세계관 놀음과 장엄한 사운드로 현 SM 내 이수만과 유영진의 논조가 가장 지배적으로 작동하는 그룹이었다. 그렇기에 메인 프로듀서와 작곡가를 떠나보내고 맞이한 SM 3.0 시대의 실질적인 개막작이 다름 아닌 에스파의 앨범이라는 점은 꽤나 큰 도전이었을 테다.
회사를 둘러싼 정쟁 끝에 맞이한 포스트-이수만(&유영진) 시기, 에스파는 광야에서의 전투 이후 리얼 월드로 복귀한 포스트-광야 시기의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본래 예정되어 있던 타이틀곡과 정규 앨범 볼륨의 수록곡 상당수를 잘라냄은 물론 에스파의 시그니처와도 같았던 세계관 용어들을 완전히 들어냈지만, 앨범은 놀라우리만치 에스파의 정수를 고수해낸다. 타이틀곡 'Spicy'는 하이틴 이미지와 더불어 청량한 여름 댄스곡으로 곧잘 소비되었으나, 뜯어볼수록 기존의 에스파가 보여주었던 불친절한 사운드를 알아차리게 된다. 공격적인 타격감의 스네어로 귀를 두드리고는 고막을 찢어발길 듯한 신스 베이스 사운드를 난사하는 전주부터, 래퍼 멤버들의 탄탄한 빌드-업에 이어 걸출한 보컬 멤버들이 등장해 플랫 음을 짚으며 아슬아슬함을 더한 뒤("Cause I’m too spicy for your-") 이를 해소함("heart-")과 동시에 터지는 후렴구까지. 삐죽삐죽한 사운드와 전개법으로 청자를 쥐락펴락하는 위용은 'Next Level', 'Savage' 때와 동일하다. 'Spicy'에 이어지는 트랙 'Salty & Sweet' 역시 이러한 기조를 이어받은, 덜컹이는 사운드가 매력적인 댄스 팝 넘버이며, 뒤이은 'Thirsty'는 ‘자각몽’ 등으로 보여주었던 뭉근하고 서정적인 수록곡 레퍼토리를 확장한다. 세계관 역시 명시적인 용어들 없이도 여기 저기 단서들을 흩뿌려 놓았는데, 나이비스가 피처링한 웅장한 시네마틱 팝 넘버 'Welcome To My World', SNS 시대의 피로감을 담은 'I’m Unhappy'가 대표적이다. 더불어 확대 해석일 수 있으나 트랙 배치 자체가 일종의 세계관 스토리텔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인트로 'Welcome To My World'로 에스파의 리얼 월드에 청자들(그리고 나이비스)을 초대하고, 현실적인 감각을 노래하는 트랙들로('Spicy'-'Salty & Sweet'-'Thirsty') 리얼 월드의 삶을 만끽하다, 이에 회의를 느끼고('I’m Unhappy'), 광야에 있는 ae-멤버들과의 재회를 그리며('’Til We Meet Again') 마무리되는 식이다. 스탠더드 발라드 '’Til We Meet Again'이 에스파의 음악적 색채와 조금 동떨어져 있긴 하나, 세계관 서사의 일부 내지는 콘서트 엔딩 넘버로 이해한다면 충분히 납득되는 선택이다.
기대만큼 우려도 큰 컴백이었으나, 결과적으로 과거의 유산에서 취할 부분만 영리하게 취한 앨범이 되었다. 그러나 제작 자체는 SM 3.0 시기 이전에 이루어진 곡들을 취합한 앨범이기에, 완전히 새로이 제작될 에스파의 미래 작업물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커지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인상적인 반환점을 만들어낸 만큼 이들의 미래 역시 그러하길 바라본다.
스큅: 최연장자가 19세(04년생), 막내가 14세(08년생)인 어린 멤버 구성의 그룹답게 풋풋한 소년미가 전면에 내세워져 있다. 앨범 내내 변성기가 채 다 지나지 않은 하이톤의 목소리들이 별다른 기교 없이 고음역의 음을 합창하고 있고 노래들은 과잉될 정도로 해맑은 톤에 순진무구한 가사를 실어나르고 있어, 단순 청량함을 넘어 청순가련하다는 인상마저 안겨준다. 어린 멤버들로 소년성을 그렸던 과거 그 어떤 그룹들보다도 풋풋함을 넘어선 미숙함을 노골적으로 강조하듯이 드러내고 있어 다소간의 주저함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소년 합창단이 인류의 유구한 엔터테인먼트였음을 상기하게 되기도 한다. 보도자료에서는 “5세대”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동원했으나, 새로운 세대를 열어젖히기보다 완연한 클래식을 선보인 데뷔 앨범.
비눈물: 환경 보존의 필요성과 자연 파괴에 대한 분노를 노래한 ‘Apocalypse’ 3부작. 그 끝을 맺는 'BONVOYAGE'는 은유를 품은 서정적인 가사와 시리즈 중 가장 밝고 희망찬 멜로디를 통해 외적으로 새로움과 친화력을 더하고 환희로 가득 찬 해피엔딩을 그린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세계관 속 드림캐쳐의 희생으로 귀결되는 비장한 (또는 잔혹한) 트루 엔딩과, 기타를 대표로 라이브로 구현해온 밴드 사운드를 레코딩 전면에 내세우며 그룹의 근본으로 수렴하는 음악적 방향성을 품고 있다. 이러한 양면적 구성를 통해 드림캐쳐는 거침없이 변화를 수용하고 발전하면서 동시에 그룹이 견지해온 아이덴티티를 단단히 세우는 행보를 이어간다.
'Intro : From us'와 'BONVOYAGE'는 그룹의 음악적 방향성과 기승전결을 올곧게 그리는 조화로운 보컬 배치를 통해 슬픔을 꾹 머금고 미소로 인사를 건네는, 그룹 특유의 가슴 벅찬 서사와 감정을 써내려간다. 그리고 그 양가감정의 동력을 그대로 앨범의 두 핵심 트랙으로 전달한다. 각각 고전 모티프나 전작을 연상시키는 키워드('DEMIAN') 혹은 뒤틀린 사랑 등 익숙한 소재를 활용('Propose')하여 디테일을 살리고, 공통적으로는 멤버들의 특색 있고 강직한 목소리를 강조함으로써 선뜻 닿기 어려워 생경하고 진중한 (혹은 '네오'한) 감성을 어렵지 않게, 하지만 날카롭게 벼려내어 익숙함을 이끌어낸다. 한편 본래 랩 파트를 주로 맡아 드림캐쳐만의 개성을 일구는 다미에게는 샤우팅과 후렴구 싱잉을 맡기는 등 색다른 보컬 운용과 파트 스왑 등을 통해 신선함 역시 놓치지 않는다. 더불어 지속적으로 새로운 프로듀서진을 수혈하는 등의 노력까지 더해지며 실질적 볼륨은 작지만 드림캐쳐의 핵심이 응축되어 꽉 찬 내실과, 지난 시리즈에서 부족했던 앨범의 일관성을 구축할 수 있었다.
사실 드림캐쳐가 매번 뚜렷하고 독보적인 개성을 구현해왔기에 시리즈의 끝에 도달할 때마다 과연 앞으로 무슨 이야기를 더 할 수 있을지, 또 어떤 다음에 이를 수 있을지 의문과 걱정이 함께 떠오르곤 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 드림캐쳐는 매번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악몽부터 현실까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밟아간 진보의 끝에 다다른 건 결국 그룹의 기원(起源)이었다. 간결함과 짧음만이 모두의 미덕이 되고 누구도 기나긴 빌드업에 신경쓰지 않게 된 숏츠의 시대에서 드림캐쳐는 변화를 두려워 하지 않는 용기와 역사를 잊지 않는 꾸준함으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고 고유한 정체성을 증명해냈다. 여행을 떠나고 다시 돌아옴을 약속하는 '본 보야지(Bon Voyage)'의 인사말과 함께 드림캐쳐 앞에 펼쳐질 새로운 여정을 앞에 둔 지금,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부푼 기대감에 한껏 몸을 기울여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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