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묘의 플레이버튼 : 사서A의 〈82년생 김지영〉 기고에 부쳐

이미지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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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A는 아이돌로지에 투고한 “아이돌이 페미니즘 책을 읽어야 할 이유”에서 십 대를 향한 아이돌의 영향력을 논했다. 평소와 다르게 이 글에는 많은 댓글이 달렸다. 제목의 “아이돌이 페미니즘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논증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많았는데, ‘아이돌이 페미니즘 책을 읽으면 십 대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라는 논지가 전달되지 않은 것은 수수께끼다. 다만 많은 댓글이 달렸고, 그중 아이돌로지가 페미니즘으로 ‘편향’되고 있음을 우려하는 독자가 많은 듯하기에, 편집자로서 응답할 필요를 느낀다. 일단 〈82년생 김지영〉이나 페미니즘에 대한 찬반여부를 배제하고 이야기해 보겠다.

레드벨벳 아이린이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고 말했을 때 반발한 팬들을, 편의상 ‘팬D’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리고 이 뉴스를 접한 ‘J’라는 다른 여성 아이돌이 있다고 하자. J가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 J는 생각할 것이다. D씨는 아이린이 페미니스트라서 화난 것이 아니다. 아이린이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그 내용에 대해 자신이 판단을 할 기회에 분노한 것이다. D씨는 아이린이 자아를 갖지 않길, 즉 사람이 아니길 원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문재인 대통령, 박원순 서울시장, 유재석, 방탄소년단 RM에게는 주어진 기회가 아이린에겐 극렬히 거부돼야 할 이유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어서 J는 생각할 것이다. 자신의 팬들 중에도 D씨와 같은 생각을 하는 E, F, G가 있을 수 있다고.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상식적인 상정이다. 팬덤 전반이 D씨를 어떻게 판단하는지와도 무관하다. 그저 확률의 게임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들도 J가 자아를 갖는 것에 반발해 극단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J에게는 세 가지 선택이 주어진다. 모든 것을 외면한다, 아이돌을 지속한다, 어떻게든 탈주한다. 모든 것을 외면한다는 선택은 행복한 무지와 고통스러운 자기부정 사이의 복불복이다. 아이돌을 지속한다는 선택은, 7년간 현장에서 만나는 남성 팬들 중에 자신이 인간의 껍데기에 불과하길 원하는 D씨가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는 의미다. J는 사람이기에, 이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일 가능성이 높다. 탈주한다는 선택을 하는 이가 많다면 아이돌 산업은 아마 무너질 것이다. 그러니 아이돌 산업에게 주어진 선택은 두 가지다. 지옥도가 되거나, 무너지거나. D씨가 한 일은 이것이다.

그렇다면 이 산업의 일원으로서 기획자 역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산업의 인적자원에 발생하는 불안요소를 줄이고자 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내가 만난 어떤 기획자는 젠더 의식을 담은 작품을 하고 싶다는 아이돌의 요구를 받는 일이 있다고 했다. 누군가에게는 전해질 것이라 믿으며 젠더와 관련한 메시지를 행간에 집어넣는 작업자도 있다.

산업은 변하고 있다. 올해 초부터 걸그룹들의 콘셉트와 애티튜드가 전반적으로 변하고 있는 것도 무관하지 않다. “Girls Can Do Anything”이라는 문구가 인쇄된 유명 브랜드의 휴대폰 케이스가 노출된 것만으로 극단적인 반응을 받는 산업이다. 당장 페미니즘 투쟁가를 발매하는 걸그룹을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안전한 선 이내에서, 때론 ‘더블미닝’을 통해 변화를 반영하는 기획의 출현은 충분히 상정 가능한 일이다. 이미 아이돌에게는 눈을 감지만 않으면 보일 수밖에 없는 하나의 문이 열렸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선 D씨가 열어준 문이다.

아이돌로지는 페미니즘 매체가 아니다. 아이돌 음악 웹진이다. 그러나 아이돌 산업과 젠더는 별개의 이슈가 아니다. 음악 산업 자체의 젠더갭에 대한 논의는 이미 몇 년 전부터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또한 아이돌은 기본적으로 젠더적 매력이나 성역할을 근간에 두고 때로 변주를 가하며 ‘매력적인 인물상’을 표현하는 산업이다. 그래서 어떤 아이돌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그의 젠더 감수성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렇기에 여성 아이돌을 노골적으로 성희롱하는 팬은 팬 커뮤니티에서 배제되기 일쑤이지 않은가.)

그러니 젠더의 관점에서 어떤 인물상을 표현하는가 하는 것은, 아이돌로지가 다루는 다른 영역들, 그러니까 음악, 안무, 의상, 가사 등과 마찬가지로 아이돌을 ‘비평’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다. 분량이 많지는 않지만, 음반 리뷰나 (더 전문적인) 외부 필진의 기고를 통해서라도 아이돌로지는 아이돌과 젠더라는 이슈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다. 그리고 성차별주의적이지 않은 관점을 유지하려 부족하나마 노력해 왔다. (그것이 못마땅하다면, 성차별주의자로 구성된 아이돌 음악 웹진을 만들길 권한다.)

그러나 행여 성차별주의자라 하더라도, 자신의 주제와 이렇게나 밀접한 이슈는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아이린과 〈82년생 김지영〉, 그리고 D씨의 행동을 놓치고서는, 크든 작든 아이돌 산업에 앞으로 일어날 수도 있는 변화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다. D씨의 희망과 무관하게, 아이돌들은 자신과 팬이란 존재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것을 요구 받고 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 궁금하다면 〈82년생 김지영〉 안에 있을지도 모르니 한번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변화는 가능성에 불과하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D, 당신은 이미 너무 늦었다.

미묘의 플레이버튼 시리즈

  1. 미묘의 플레이버튼 : 케이팝 유토피아의 항구
  2. 미묘의 플레이버튼 : 아이돌의 여성상은 지워지지 않는다
  3. 미묘의 플레이버튼 : 사서A의 〈82년생 김지영〉 기고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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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식과 내숭의 외길 인생. 음악 만들고 음악 글 씁니다. f(x)는 시대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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