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ies
Article

오마이걸의 ‘Closer’ – 걸그룹으로 환생한 지젤

콘서트에서 순백의 원피스로 선보인 ‘Closer’는 낭만발레 또는 백색발레의 고전 〈지젤〉을 연상시킨다. 어쩌면 오마이걸은 극중 윌리(Willi)들을 표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2016년 8월 20일, 오마이걸의 첫 단독 콘서트 〈여름동화〉에 참전했다. 정해진 시간이 되어 막이 걷히기 시작한 찰나, 흥분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흘러나오던 익숙한 전주가 다름 아닌 필자의 ‘최애곡’ ‘Closer’(2015)였고, 그다음 순간 등장한 멤버들이 새하얀, 말 그대로 순백의 원피스를 입고 나와 노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오마이걸  ⓒ WM 엔터테인먼트
오마이걸  ⓒ WM 엔터테인먼트
오마이걸  ⓒ WM 엔터테인먼트
ⓒ WM 엔터테인먼트

흔한 말로 천사가 내려온 듯한 아름다운 비주얼에 감격했던 것도 있지만, 내심 소름이 돋았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최근 ‘Closer’를 듣고 보면서 해온 여러 가지 생각들이 모두 하나의 점으로 수렴하는 순간이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극히 개인적으로 ‘Closer’와 발레극 〈지젤〉의 상관 및 평행이론을 여러 번 주장한 바 있었고, 그저 말도 안 되는 혼자만의 ‘궁예’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과장 조금 보태어 말하면 마치 공식 설정이라도 되는 양 보이기 시작한 순간이었던 것이다.

소오름
“소~오름(?)”

국내에서도 여러 번 무대에 오른 바 있는 〈지젤〉은 이른바 낭만주의 발레의 대표작으로, 주인공 지젤을 연기하는 발레리나의 섬세한 감정 연기가 중요시되어 많은 무용수들이 선망하는 발레극이다. 발레를 소재로 그린 만화 〈스바루〉(소다 마사히토, 2000~2002)나, 전직 피겨스케이트 선수 김연아의 2010~2011년도 시즌 쇼트 프로그램 곡으로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스탠다드이기도 하다. 대략적인 시놉시스 및 해설에 관해서는 위키피디아가 잘 소개하고 있으므로 일독을 권한다.

오마이걸의 데뷔작 ‘Cupid’(2015)의 떠들썩하고 들뜬 분위기나 가사가, 정체를 숨기고 평범한 마을 사람처럼 지내는 귀족 청년 알브레히트와 사랑에 빠진 지젤이 마을 사람들과 한데 어울려 춤추고 즐거워하는 1막과 유사하다면, 알브레히트가 사실 귀족이었으며 높은 신분의 약혼녀까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바람에 지젤이 크게 충격을 받고 상심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이후의 2막은 ‘Closer’와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하다. 안개가 깔린 듯한 신비롭고 차가운 분위기도 그렇고 (오마이걸은 해당 무대에서 드라이아이스를 활용하는 연출을 자주 선보인 바 있다), 가사 곳곳에서도 〈지젤〉의 모티브를 찾아볼 수 있다. 실제 ‘Closer’의 가사를 하나씩 짚어보자.

참 멀리 있나 봐 / 매일 다가가도 아득하기만 해
별똥별아 안녕 / 내 소원 들어주렴

한 걸음 closer 내 맘 / 한 뼘 closer to you
하늘을 스치는 별에 / 내 맘을 담아 보낼게

(…)

언제나 함께였던 공간에서
쓸쓸하게 빛나고 있는 넌
많은 별자리 중 / 널 닮은 자리를
저 하늘 위에 고이 담아 비춰주기를 바래
널 그리기 위한 꿈을 그리다
그리고 그리면 만날 수 있을까

화자인 ‘나’는 대체 어째서 그리도 누군가를 간절히 그리워하는가. 왜 그리도 ‘너’에게 가까이(closer) 다가가고 싶어 하는가. “널 그리기 위한 꿈을 그리”면서, “그리고 그리면 만날 수 있을까”라며, 아픈 가슴으로 상대방을 그리고 그리는 것일까. ‘나’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그 힌트를 다음 가사에서 얻을 수 있다.

(…)
날 비추는 달님 (들어봐) / 간직했던 나의 비밀
(…)
Can you hear my cry
어느 늦은 밤 / 긴 꿈을 꾸는 나

한 걸음 closer 내 맘 / 한 뼘 closer to you
태양이 지우기 전에 / 너에게 닿길 기도해

달님이 ‘나’를 비춘다. 태양이 ‘나’를 지운다. 그 전에 ‘너’에게 닿지 않으면, 영영 다가갈 수 없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너’에게 닿기를, ‘나’는 바라고 또 바란다. 달님이 비추는 동안은 존재하고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하면 사라져야만 하는 ‘나’. 그렇다. ‘나’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다. ‘너’와 채 이루지 못한 사랑에 영원히 구천을 떠돌며 ‘너’의 주위를 맴돌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달빛이 어스름 비추기 시작하면 나타나서, 태양이 떠오르면 사라져야만 하는 존재이다.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지젤〉에 등장하는 처녀 유령 윌리(Wili)다. 전생에 춤을 몹시도 좋아한 처녀들이 결혼 전에 이른 죽음을 맞이하여 구천을 떠돌다, 지나가던 행인을 유혹하여 함께 춤추며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는 윌리들이, 그리고 알브레히트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잊지 못한 채 윌리가 된 지젤이, 오마이걸의 ‘Closer’에서 환생했다고나 할까. 지나가는 행인을 ‘사냥하는’ 한 많은 유령으로 비춰지는 윌리들의, 원작에서 채 다뤄지지 않은 숨겨진 뒷이야기와 속마음을 그들의 시점에서 재해석했다고 하면 조금 과한 것일지.

포메이션 변화의 다이내믹함과, ‘백색발레’의 신비로움이 느껴지는 직캠.
‘Closer’ 무대만 감상하기를 원한다면 0:16~3:55 구간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다시금 오마이걸의 무대를 보면 많은 것이 달라 보인다. 우선 뮤직비디오와 공식 퍼포먼스 비디오에서 입었던 의상은 다름 아닌 새하얀 투피스이며, 스커트는 플레어 라인으로 빳빳하고 풍성한 디자인이 발레 의상인 튀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거기에 콘서트에서는 멤버별로 조금씩 다른 디자인의 하얀 원피스 안에 패티코트를 덧대어 한결 풍성하게 연출한 것이 정말로 로맨틱 튀튀(〈지젤〉에서 윌리들이 입는,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긴 기장의 튀튀) 같아 보이기도 했고, 거기에 일부 멤버는 머리에 깃털 장식을 달기도 했다.

CC BY-NC-SA Andrej Kunka
CC BY-NC-SA Andrej Kunka

오마이걸 - Closer ⓒ MNET America
오마이걸 - Closer ⓒ MNET America
ⓒ MNET America

센터인 유아를 제외하고 모두가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유아를 포함한 모두가 같은 포즈로 끝나는 수미쌍관 안무는 ‘달이 뜨면 나타났다가 태양이 뜨면 사라지는’ 윌리들을 연상하게 한다(심지어 뮤직비디오에서는 페이드아웃 되며 모두가 ‘사라진다(!)’). 억지 하나 더 보태자면, 하반신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웨이브를 극도로 절제한 대신 자잘한 손동작이나 골반의 움직임을 강조한 안무도 묘하게 ‘떠다니는’ 듯한 느낌을 주어 신비로운 분위기에 힘을 더한다. 따지고 보면 19세기 낭만주의 발레, ‘백색발레(Ballet Blanc)’에서 추구하는 ‘신비감을 주기 위한’ 요소들이 전부 들어가 있는 셈이다. 어스름한 달빛이 비치는 공간, 새하얀 의상을 입고, 창백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마치 공기의 요정처럼 가볍게 나풀대며 춤추는 소녀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이는 공교롭게도 케이팝 칼럼니스트 야콥 도로프(Jacob Dorof)가 오마이걸 프로덕션팀과 인터뷰한 내용과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데, 키 아티스트 에이전시(Key Artist Agency) 대표이며 WM엔터테인먼트와 협업하고 있는 최재혁 대표는 “신비롭기를(Mysterious) 원했으나, 호러 장르가 되기를 원하지는 않았다”며 ‘Closer’에 기대한 이미지에 대해 밝히고 있다. 차갑고 신비롭지만, 음산하거나 기괴하지는 않은, 이를테면 ‘스산한 우아함’을 추구했다고나 할까.

영영 이룰 수 없게 된 사랑을 그리며, 그 그리움을 땅바닥에 별자리를 그리는 춤을 추는 것으로 달래는, 결국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하늘을 스치는 별님에게 마음을 담아 그 사람에게 보내는 것밖에 없는 가련한 윌리들, 혹은 지젤들은, 가사에서도, 표정으로도, 직설적으로 ‘슬픔’이나 ‘절망’을 노래하지는 않는다. 그저, 서늘하고 건조한 표정으로, 마치 공기가 떠다니듯 가볍고 우아하게 춤을 추며, 간절한 그리움을 노래로 표현할 뿐이다.

참고자료

필자 주: 독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원작 설정상 ‘빌리(Wili)’가 올바른 표기이나, ‘윌리’라는 표기로 널리 알려진 만큼 편의상 ‘윌리’로 통일하기로 한다.

편집자 주: 야콥 도로프의 K-Pendium은 현재 웹사이트에 기술적 문제가 있어 링크하지 않으며, 추후 복구되면 링크를 추가한다.

마노

By 마노

음악을 듣고 쓰고 말하고 때때로 트는, 싫어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반짝이고 싶은 사람. 목표는 지속 가능한 덕질, 지속 가능한 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