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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몬스터의 믹스테잎 vs 슈가의 믹스테잎

방탄소년단에서 세 명의 멤버가 믹스테잎을 발표했고, 그중 두 멤버는 무려 열 트랙짜리를 내놓았다. 상업성을 배반한 선택, 더구나 대중이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아이돌리쉬’와는 거리가 멀다.

방탄소년단에서 세 명의 멤버가 믹스테잎을 발표했다. 그중 두 멤버는 무려 열 트랙짜리를 내놓았다. 아무리 기존에 있던 비트를 활용하는 것이라 해도, 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통상 공백기가 거의 없이 활동에 매진해야 하는 아이돌 그룹 입장에서 앨범 한 장에 버금가는 트랙 숫자를 채우기가 수월할 리 없다. 게다가 여기에는 아이돌이라면 ‘함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고 여겨지는 비속어 또한 쉴 새 없이 등장한다. 정제 과정을 거의 거치지 않은 듯 보이는 히스토리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일례로 과거에 저지른 부끄러운 행동을 반성하며 이를 ‘흑역사’라고 칭하는 모습(랩몬스터의 “RM” 중 ‘목소리’), ‘돈이 최고’라고 얘기하는 세속적인 태도(슈가의 “Agust D” 중 ‘치리사일사팔(724248)’) 같은 것들은 분명 대중이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아이돌리쉬’와는 거리가 멀다.

아이돌 입장에서 믹스테잎이라는 툴 자체는 철저히 상업성을 배반한 선택이다. 팬층이 어느 정도 형성돼 있기 때문에, 무료 배포를 전제로 하는 믹스테잎보다는 솔로 음원이나 앨범을 발표하는 것이 이득이다. 비상업적이라는 전제 하에서 허용되는 ‘표현의 자유’ 또한 혹시 모를 구설수를 유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라리 위험 요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믹스테잎이란 형태를 취한 이유, 그것도 한두 트랙이 아니라 열 트랙씩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새로운 성장 레퍼런스

두 믹스테잎의 주인공, 방탄소년단 랩몬스터와 슈가(여기서는 방탄소년단 내의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이므로 ‘Agust D’ 대신 ‘슈가’라는 예명을 사용한다)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 모두 팀이 결성되기 전부터 혼자 음악을 만들고 활동한 경험이 있는 멤버들이라는 것. 하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기 전에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했고, 따라서 채 정리되지 않은 과거의 자아가 남아있었다. 결국 이 두 개의 믹스테잎에 담겨있는 것은 아이돌과 래퍼라는 두 가지 정체성을 오가는 과정에서 비롯된 고뇌의 흔적이다. 데뷔 전후로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노래하기도 하지만, 방탄소년단의 정체성이 ‘힙합 아이돌’에서 트렌디한 ‘팝스타’이자 ‘아이돌 스타’로 바뀌는 과정 속에서 두 멤버가 느낀 감정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다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사실상 이것은 아이돌이란 장르와, 정반대에 놓인 힙합이라는 키워드가 중요하게 결합되기 시작한 2010년대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힙합’이란 장르가 아이돌 시장에 등장한 새로운 차원의 성장 레퍼런스임을 상징하고 있다. 아이돌을 깔보던 자신과 현재 최정상급 아이돌이 되어가는 과정에 놓인 자신을 두고 끊임없이 고민해왔다는 히스토리가, 실력적으로, 또 내면적으로 성장해 간다는 레퍼런스로 기록되고 있는 중이다. 세공된 보석처럼 다루어져 왔던 아이돌 커리어가, 반대로 흠이 많을수록 프로페셔널해 보인다는 역설적 특수성을 지닌 장르인 힙합을 만나면서 벌어진 재미있는 현상이다.

오리지널리티 vs 리얼리티

랩몬스터와 슈가는 각각 믹스테잎 “RM”과 “Agust D”를 통해 자신들이 수년 간 억눌러온 음악적, 다소 좁게 말하자면 장르적 욕구를 표출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 과정에서 전혀 다른 지향을 보여준다. 한 사람은 자신의 아이디얼 타입을 형상화했다. 다른 한 사람은 그동안 얹혀 있던 것을 모조리 다 비워내겠다는 다짐이 엿보이는 하드코어 노선을 택했다. 아이돌이라는 틀 밖으로 나오는 두 사람의 방식이 전혀 다르다.

차이를 가장 뚜렷하게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와 ‘리얼리티(reality)’다. 이 차이는 트랙 구성에서 우선적으로 드러난다. 랩몬스터는 총 11개 트랙 중 8개 트랙에서 이미 잘 알려진 해외 유명 래퍼, DJ의 비트를 활용했다. 제이 콜(J. Cole), 드레이크(Drake), 제이 딜라(J. Dilla), 빅 K.R.I.T.(Big K.R.I.T.), 메이저 레이저(Major Lazer) 등 익숙한 뮤지션들이 그의 믹스테잎을 채우고 있다. 앞서 랩몬스터는 스스로 서구 힙합에 대한 갈망이 강하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피력해온 바 있다. 따라서 이는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선택이었다. 그가 방탄소년단 앨범에서 플로우 타입이나 딕션을 통해 구현하려고 애썼던 본토(미국) 취향이 믹스테잎에 더욱 뚜렷이 담겨 있다. 스스로 오랫동안 오리지널리티를 답습하기 위해 꾸준히 연습해왔다는 점이 여기서 드러나는데, 우선은 한국어와 영어가 혼용되는 데서 오는 어색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트랙과 래핑이 따로 노는 것 같은 이질감도 거의 없다. ‘목소리’에서처럼 그는 낯선 정서를 자신의 것으로 체화할 줄 안다. 덕분에 단순한 래핑을 얹은 것만으로도 세련된 무드가 형성된다. ‘God Rap’에서는 래핑에 몇 가지 사운드 이펙트를 추가해 트랙의 공간감을 확장하는데, 세심한 연출이 매력적이다.

반면에 슈가는 자신의 활동반경을 반영해 최대의 현장감을 구현하려고 노력한다. 일종의 ‘리얼리티’를 추구하고 있는 셈이다. 랩몬스터가 택한 트랙이 한국적인 정서에서 다소 붕 떠있는 느낌을 풍긴다면 슈가의 트랙은 흡착식인 것은 그래서다. 방탄소년단 앨범에서도 그는 자신이 대구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음악을 시작했다는 점 등을 여러 차례 가사로 옮긴 적 있다. 생활 터전을 자신의 정체성과 동일시하는 태도를 드러내고, 이런 마인드를 입증하듯 모든 트랙에서 자신을 포함해 국내 작곡가, DJ 등이 만든 소스를 사용했다. (예외라면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의 ‘It’s Man’s Man’s Man’s World’를 샘플링한 ‘Intro : DT sugA’가 있는데, 이는 소위 ‘외힙(외국힙합)’의 오리지널리티를 더하기 위해 넣은 것이라기보다는 격렬한 정서를 부각시키기 위한 사운드 소스에 가깝다.) 과거 한국 래퍼들이 구사하던 투박한 사운드와 유사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것 또한 이런 특징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인다. 특히 마지막 트랙 ‘so far away’ 후반부를 장악하는 기타 리프는 상당히 한국적인 멜로디 라인인데, 최근에는 래퍼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방식이라 묘하게 ‘촌스러우’면서도, 그가 원하는 정서적 도착점이 무엇인지 또렷하게 그려내는 효과를 갖는다는 장점이 있다.

여기에 슈가는 피처링진으로 국내 아티스트 얀키(Yankee)와 수란(Suran)을 택했다. 반면에 랩몬스터는 미국 래퍼 겸 싱어송라이터 크리즈 칼리코(Krizz Kaliko)를 데려왔다. 아마 정규 음반이었다면 ‘콘셉트 차이’로 설명했겠지만, 자신의 의견이 절대적으로 반영된 믹스테잎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지향의 차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세밀한 디렉팅 vs 폭발적 타격감

랩몬스터의 래핑은 감정을 세밀하게 디렉팅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데, 특히 두드러지는 장점은 그가 호흡이나 플로우를 조절하는 과정에서 섹슈얼할 필요가 있는 순간을 직감적으로(든 의도적으로든) 잘 캐치한다는 것이다. 또 랩몬스터는 언어 유희적 요소가 들어있는 가사를 즐기면서, “끝없는 냉소 but im 랭보 지옥에서 보낸 네 철”(‘각성’)처럼 문학적 요소를 끌어오거나 “고개 똑바로 들고 지어봐 / 부처님의 미소 / 예수님의 걸음, 알라신의 기도”와 같이 상당히 감각적인 표현을 활용한다. 하지만 이로 인해 오히려 단점이 부각되기도 한다. 믹스테잎 전체에 걸쳐 깔끔하게 정돈된 느낌이 강하기 때문에 작은 흐트러짐이 불러오는 아쉬움이 유독 크다. 믹스테잎 중반부에 이르면 감정이 최고조로 격앙되고, 이때 플로우와 발음이 동시에 흔들리는 순간이 종종 있다. 예를 들면 6번 트랙 ‘농담’에서 랩몬스터의 감정은 트랙이 갖는 본연의 에너지를 지나치게 초과해버린다. 베이스 리듬과 비트, 발음이 한꺼번에 묻히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빠른 래핑’만이 부각되고, 메시지 전달력은 반감되는 역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단점은 트렌디한 작품이 주는 만족을 다소 아쉽게 만든다.
한편 슈가는 타율을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면서 내키는 대로 공을 쳐내는 타자를 연상시킨다. 트랙 자체가 이미 넘치는 타격감을 보유하고 있으며, 래핑 또한 그에 상응하는 에너지로 대응한다. 불안정한 심리적 스탠스를 그대로 드러내고도 남을 정도로 신경질적인 기운을 발산하는데, 온갖 거친 워딩과 합치돼 쾌감을 자아낸다. 하지만 스킷을 제외하면 시작부터 8번 트랙까지 일관되게 게워내는 식의 전달을 하고 있다는 점이 다소 부담스럽다. 강-강-최강으로 몰아붙이는 래핑이 트랙 흐름에 따라 점차 심연에 가까워지는 스토리 요소와 결합되는데, 이런 식의 접근은 청각적, 심리적으로 청자를 금세 고갈시킬 가능성이 높다. 특히 7번 트랙 ‘마지막(The Last)’이 유발하는 피로감은 상당하다. 신경정신과 의사와의 만남 장면을 회상하는 구절 “의사 선생님이 내게 물었어 / 주저 없이 나는 말했어 그런 적 있다고”에서 ‘그런 적’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는 태도가 암시하는 것은 극도의 우울과 신경증이다. 이처럼 슈가의 믹스테잎에서는 기존 아이돌들에게서 절대 나올 수 없는 수준의 자기고백과 더불어, 자신을 독하고 어두워지게 만든 주변부를 겨냥한 하드한 표현이 꽤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지점이 힙합 신에서는 ‘믹스테잎에 어울리는 수준’의 거칠고 매력적인 워딩 정도로 읽힐 수 있되, 팬덤 입장에서는 멤버 개인에 대한 애정과 결합돼 그 이상의 진솔한 스토리텔링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또 제멋대로인 타자에게서 볼 수 있는 자신감은 때에 따라 과도하게 느껴질지언정, 깊은 내면적 울림을 자아낸다. 슈가의 믹스테잎이 가진 최고의 장점은 이것이다.

원하는 것 vs 원하는 말

두 사람의 온도 차이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트랙으로는 랩몬스터 믹스테잎 1번 트랙 ‘목소리’와 슈가 믹스테잎 5번 트랙 ‘치리사일사팔(724148)’을 추천한다. 똑같이 지난 시절을 회상하고 있지만 이를 표현하는 방식이나 무드는 전혀 다르다. 자신이 갖고 있는 래퍼로서의 뛰어난 장점과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갈망을 배합해 내놓은 랩몬스터, 그리고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마음껏 하기 위해 극강의 에너지를 담은 트랙을 직접 만들어낸 슈가. 즉, 랩몬스터가 믹스테잎에서 ‘원하는 것’을 했다면, 슈가는 믹스테잎을 통해 ‘원하는 말’을 한 쪽에 가깝다.

어쩌면 무경계의 이미지를 띈 ‘비상업적’이라는 용어를 오히려 팬덤을 위한 툴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매우 영악한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믹스테잎으로 통해 보여준 ‘진정성’이라는 영역은 돈으로 환산될 수 없을 것 같은 매력 포인트이지만, 도리어 이것이 팬덤을 결집시키는 효과를 발생시키면서 견고한 상업적 툴로 활용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상업적 이윤을 발생시킬 수 있는 다른 여러 아이템이 무궁무진한 상황에서 굳이 아이돌로서의 이미지 메이킹에 마이너스가 될 수 있는 요소를 택했다는 점, 그리고 이를 통해 실제로 팬덤을 결집하는 효과가 발생했다는 것은 유니크한 시도와 그에 따른 긍정적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결점은 있되, 오점은 아니 될 것 같은. 두 장의 믹스테잎에 대해 요약하자면 이렇다. 2010년대로 접어들며 연기와 예능 출연에 맞춰져 있던 멤버별 브랜딩의 방식을 음악적인 영역으로 끌어왔다는 점이 무엇보다 인상 깊다. 따라서 두 장의 믹스테잎, 도합 21개 트랙이 갖고 있는 우선적 가치를 여기서 찾는다. 소제목마다 ‘vs’라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상 이것은 ‘+’에 가까운 두 개의 결과물이다.

박희아

By 박희아

음악기자. 사랑스런 콘텐츠들을 골라 듣고, 보고,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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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replies on “랩몬스터의 믹스테잎 vs 슈가의 믹스테잎”

엄청 공감되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분석을 되게 잘하신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