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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음악 사이보다는 나은 아이돌을 위해

성인 팬의 존재와 레트로의 의미를 간과하자, 복고풍은 음악 스타일의 차용이 아닌 과거 소환의 기술로 이해되었다. 그에 따라 기획자들은 앞다투어 아이돌을 자신들의 추억 여행에 이용했다.

이 글은 2018년 3월 23일부터 25일까지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진행된 〈한 줄도 쓰지 않았어요〉(기획 박준우, 전대한)에 전시된 원고를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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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아이돌은 전연령 문화다. 여기서 전연령 문화는 ‘성인 문화’의 반대말이 아니라 ‘십 대 문화’의 반대말이다. 어떤 평론가는 여전히 아이돌이라면 ‘코 묻은 돈’을 운운하지만 말이다. 이미 10년이 넘은 키워드 ‘삼촌 팬’을 들먹일 것까지도 없다. 어떤 걸그룹은 팬 사인회에서 음주를 금지한다는 공지를 해야 하고, 어떤 보이그룹 오디션은 많은 이들이 직장에서 투표를 독려한다. 인기 정상의 보이그룹 관련 포털 뉴스 댓글에 십 대의 비율은 대체로 10% 내외에 불과하고, 20대와 30대가 적게는 30%에서 많게는 70%까지 차지한다. 우리는 종종 개념을 대충 뒤섞어버리곤 하는데, 많은 아이돌이 십 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데뷔한다고 해서 그것이 ‘십 대 문화’인 건 아니다.

아이돌이 십 대 문화이던 시절도 있었다. 방송국에서 들리는 “희준 오빠”와 “재원아”의 간극이 화제가 될 수 있는 시대였다. (문희준은 1978년생, 이재원은 1980년생이다.) 1990년대 후반, 청소년이 소비사회의 중요한 주체로 등장했다. H.O.T.나 젝스키스의 가사에서 묘사되는 십 대의 삶과 생각은 성인이 이입하기에는 과격하고 갈팡질팡했으며 동시에 유치했다. 당시의 팬들도 지금은 목구멍이 간질간질한 느낌 없이 그 노래들을 좀처럼 회상하지 못한다. 음악은 90년대에 들어서 가요 시장에 지분을 차지하기 시작한 하우스 기반의 댄스음악을 바탕으로, 일본의 비주얼록이나 국내에서 자생을 시작하던 힙합을 뒤섞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교실 이데아’(서태지와 아이들)와 ‘전사의 후예’에 함께 반응한 것은 주로 1980년대 생이었다. 아이돌은 ‘새로운 음악’이었다. 기성세대를 배제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세대의 감수성을 겨냥했으며, ‘기성 가요와는 어쨌든 다른 음악’을 지향했다. 지금도 케이팝은 2000년대 초반까지의 가요와는 사뭇 다른 어법과 기술, 그리고 감수성을 지향하곤 한다.

무한도전 토토가3 ⓒ MBC
〈무한도전 토토가3〉 ⓒ MBC

20여 년이 흐른 지금 그때의 십 대들은 성인이 되었다. 아이돌을 호흡하며 자란 이들이 방송,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진출해 지금의 아이돌을 만들고 있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다. 그것이 아이돌 콘텐츠를 더욱 정밀하고 복잡다단하게 함으로써, 레거시를 버리지는 않으면서도 매너리즘을 피하는 비결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주지하다시피 2007년 원더걸스의 ‘Tell Me’를 기점으로 성인 남성 팬들의 존재가 가시화됐다. 기존에 화제가 되곤 했던 소위 ‘이모 팬’이나 ‘누나 팬’, 곧 성인 여성 팬들은 더 이상 키워드가 되지 않았다. 걸그룹이 맹위를 떨치기 시작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성에 비해 성인 남성이 더 ‘뉴스’가 되기 때문이었다는 혐의를 버리기는 어렵다. 그래서 ‘삼촌 팬’은 성인 팬보다는 남성 팬의 발견에 방점을 찍었다. 우리 사회는 성인 팬이라는 화두를 그런 식으로 잊고 넘어갔다.

그러는 사이 원더걸스와 함께 ‘복고풍’은 걸그룹의 문법으로 자리 잡았다. 원더걸스, 특히 ‘Nobody’ 등의 직접적인 레퍼런스가 슈프림스를 다룬 영화 〈드림걸즈〉(빌 콘돈, 2006)였고 세계적으로도 레트로 사운드가 유행했다는 사실은 잊혔다. 복고풍은 음악 스타일의 차용이 아닌 과거 소환의 기술로 이해되었다. 그에 따라 기획자들은 앞다투어 아이돌을 자신들의 추억 여행에 이용했다.

어떤 걸그룹은 7~80년대 한국을 배경으로 한 뮤직비디오에서 공교롭게도 소속사 사장과 이름이 같은 어떤 남자를 열띠게 기다렸다. 어떤 90년대 가요 작가는 대가족이 동거하는 집안의 “철부지 삼촌”이 귀엽다는 노래를 어린 여성 가수에게 부르도록 제공했다. 어떤 소속사의 그룹들은 자사 대표가 속해 있던 과거 그룹의 히트곡을 부지런히 레퍼런스로 인용했다. 1995년과 1996년에 각각 태어난 어느 보이그룹 멤버들은 1996년에 연재 종료한 타케히코 이노우에의 만화 〈슬램덩크〉의 주인공들이나 1990년에 해체한 서수남하청일에 자신들을 비유했다. 생년 평균이 1994년인 어떤 걸그룹은 소속사 대표의 1989년 곡을 리메이크했다. 어떤 보이그룹의 뮤직비디오는 명목상 1990년대를 배경으로, 사실상 전후 세대의 청춘 방황을 묘사했다. 이름마저 아재 개그의 전형에서 가져온 어떤 걸그룹의 뮤직비디오는 초등학생 같은 의상을 입은 멤버들을 1980년대 초등학생의 방에 앉혀 1989년 출시된 닌텐도 게임보이를 즐기게 했다.

〈슬램덩크〉의 한 장면 ⓒ 대원씨아이
연재 시작 시점(1990)을 기준으로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와 동세대 팬은 지금, 작중 안선생의 나이에 더 가깝다. ⓒ 대원씨아이

아이돌만의 문제는 분명 아니다. 1978년 작품인 〈태권브이〉를 재조명하는 것이 ‘힙’이던 1990년대에 성장한 X세대는 지금 키덜트가 되어 여전히 그것이 가장 쿨하고 재미있는 것이라고 삶의 실천을 통해 주장하곤 한다. 공개 코미디는 지금도 2000년대 생 시청자들의 앞에서 1991년 출시된 캡콤의 아케이드 게임인 〈스트리트 파이터 II〉를 레퍼런스 삼는다. 그러나 아이돌의 큰 문제는 콘텐츠를 연행하는 아이돌 당사자들이 X세대도, ‘8090’도 아니라는 데 있다. 기획자의 결정에 커리어의 많은 부분이 좌지우지되는 아이돌은 자신이 태어나지도 않은 시절을 추억하길 강요당하고, 이를 통해 자신이 연행하는 작품으로부터 소외당한다. 대중음악에서 과거 유산을 재해석하는 일은 비일비재하고 이는 과오보다는 차라리 미덕에 가깝다. 그러나 과거를 끌어오는 작품은 그것에 새로운 옷을 입혀 의미를 창출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응당 마주해야 한다. 이에 대한 입증을 해내지 못하는 작품이 있다면, 그것은 과거에 대한 집착에 불과하다. 또한 이를 위해 새로운 세대를 착취한다면 그것은 세대적 식민화다.

아이돌을 통한 기획자의 자아실현 시도를 의심하게 하는 사례는 왕왕 있다. 또한 기획자에겐 투자자나 광고주에게 작은 기쁨을 선사해야 할 필요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추억팔이’의 유난한 끈적함은, 소비자도 이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케이팝이 세계화하면서 부각되는 과장된 국가적 자부심이 직격하는 것은 팝에 대한 변방의 열등감을 가장 크게 느낀 세대다. 1990년대 팝을 우아하게 현재화하는 음반의 타이틀 곡에 〈스트리트 파이터〉의 레퍼런스가 끝내 섞여 들어가고야 마는 것은, 음반의 음악적 성취마저 십 대를 배제하면서까지 3~40대에게 소구하는 일이다. 〈무한도전 ‘토토가’〉를 통해 과거의 스타들은 현재의 ‘전연령’이 공감하고 즐겨야 할 대상으로 조명된다. 그들이 당대에는 기성세대를 배제하고 십 대만을 겨냥했던 사실은 삭제된다. 세대별로 객석을 배치하고 옛 노래에 어리둥절해 하거나 감동하는 십 대를 집요하게 비추는 〈슈가맨〉은 보다 노골적이다. 누구의 추억팔이에 누구의 무엇이 지불되고 있는가?

1991년작 〈스트리트 파이터 II〉의 등장인물 ‘블랑카’ ⓒ CAPCOM
1991년작 〈스트리트 파이터 II〉의 등장인물 ‘블랑카’ ⓒ CAPCOM

지금 아이돌 문화는 일정 부분, ‘밤과 음악 사이’ 같은 7080 클럽이나 되살아나는 롤러장, 또는 노래방에서 옛날 히트곡을 부르며 “너희는 이런 노래 모르지? 이런 게 진짜 음악이야.”라고 으스대는 아저씨 같은 구석이 있다. 십 대나 청년 세대는 엔터테인먼트나 여가와 유흥에서까지 기성세대의 가르침을 받으며 그들과 놀아드리는 입장으로 전락하려는 참이다. 평균 연령 24세의 걸그룹이 팬들에게서 채집한 아재 개그를 노래로 만들어 몸 던져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아이돌 소비자에서 2~30대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해서 십 대와 아이돌이 무관한 것은 아니다. 식민화되는 것은 아이돌만이 아니다.

나는 성인이 아이돌을 즐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아이돌이 십 대만을 위한 존재이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고, 이제는 어쩌면 구조적으로 성인 팬 없이 케이팝 산업이 지탱될 수 있을지를 물어야 할 때다. 끝없이 과거를 되살리는 것 역시 대중음악의 속성에 가깝다. 그러나 매번 새로운 과거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 쌓아 나갈지, 식민의 유산의 식민을 반복하며 질척하게 부패해갈지는 지금 결정해야 할 일이다. 아이돌은 ‘추억팔이’보다는 나은 존재가 될 가치가 있다. 성인들도, 곡에 수시로 차용돼 들어가는 동요처럼 산업이 던지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라’는 신호에 헐레벌떡 모든 걸 내려놓는 것보다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미묘

By 미묘

가식과 내숭의 외길 인생. 음악 만들고 음악 글 씁니다.
f(x)는 시대정신입니다.

5 replies on “밤과 음악 사이보다는 나은 아이돌을 위해”

그런 식의 가사는 때에 따라서는 재미를 주는 요소가 되기도 하는 반면, 가상적으로나마 만들어왔던 진정성이 깨져버리는 측면이 있죠.
음악 스타일의 차용에 있어서도 재해석으로서의 레트로와 단순한 과거의 재현이 갈리는 지점이 존재하죠. 소속사 사장과 이름이 같은 남자를 기다리는 뮤비는 뭐죠?

43세 여성입니다. 트와이스의 최신곡 왓스 러브를 보면서 그룹타겟이 바로 우리세대로구나 란걸 느꼈습니다. 가수들 자신이 그 영화들을 알고서 표현하는건지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더군요. 가수들이 안됬다는 생각이들더군요

제가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본 바로는 본문은 성인 문화의 이식으로서 아이돌을 이용하는 것에 대한 비판인데, 그렇다면 키위님께서 말씀하시는 트와이스의 what is love는 반대되는 예시 같습니다. 본문의 논리구조를 따라간다면 과거 문화에 대해 진정성을 획득한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일종의 문화 권력구조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요…? 게다가 해당 M/V는 분명 꽤 노골적인 상업적 노림수들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만(남성의 배제, 대놓고 제시되는 ppl, 누가 봐도 한국인 삼촌감성의 영화 선택 등), 이 뮤비의 본질은 패러디이며 그 선을 넘지 않습니다. 나아가 패러디한 영화들이 담고 있을 당시의 문화와 환경에 대한 고려도 배제합니다. 잔인한 19금 영화 펄프빅션은 앞뒤 자르고 낭만적인 댄스영화가 되며, 오겡키데쓰까~?를 기대했더니 사탕처럼 달콤하다는데라며 속삭여버려요. 전혀 진정성을 추구하지 않고, 가볍게 소비해버립니다. 그 문화의 메시지를 수용하지않고 그저 피상적으로 제시할 뿐이며, 이를 통해 소위 아재팬의 향수는 불러일으키면서도, 비교적 연령대가 어린 트와이스의 주력 팬층에게 어렵다는 감상을 안기려고 들지 않습니다. 가벼움은 여기에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영화는 그저 패러디의 대상일 뿐이며 중요한 것은 이미 치얼업, TT에서 보여준 트와이스의 캐릭터의 반복입니다. 해당 영화와 그 맥락에 낯선 어린 팬층과 해외팬은 오답을 내면서도 어렵지 않게 분장한 트와이스를 즐겨요. 그리고 저는 이게 패러디가 갖춰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Why so serious? 진지해버리면 표절이지 패러디가 아니니까요.
그리고 이러한 가벼운 태도는 칼럼이 제시하는 일련의 관점을 회피해버립니다. 칼럼의 논리구조가 도출하는 정답지를 내는 대신, 그냥 슬쩍 돌아가서는 얄밉지만 사랑스럽게 웃어버려요. 가사에서도 마찬가지 태도를 보입니다. 하트셰이커의 능동적인 자세가 희미해졌지만, 그렇다고 수동적이지도 않습니다. ~는데 라며 말끝을 흐리고, 사랑이 뭔데? 라며 모르는 척을 해버립니다. 저는 이것이 JYP가 10년간 걸그룹 명가로 불리면서 쌓은 노하우라고 생각합니다. 답을 제시하기 곤란하다면 아예 다른 방법을 제시해서 슬그머니 문제지를 바꿔치기 하는 거죠. 사탕처럼 달콤하다는데, 이건 그냥 상상해본 것일 뿐이야. 과거의 유물에 이입해서 등장인물이 되어 보지만, 그냥 패러디일 뿐이야. 이러한 능글맞은 태도에 진정성은 역으로 최악의 선택이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짧게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이런 키치함은 꽤 케이팝스러운 그리고 아이돌다운 선택이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돌려 말하면 그간 업계가 쌓아올린 전형적인 케이팝 아이돌식 문법이다. 그것이 제 결론입니다.
꽤 길어졌네요. 키위님께서도 나름의 경험과 논리로 쓰신 댓글이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틀렸다고 말하면 그릇된 일일 것입니다. 다만 저는 해당 뮤비가, 그리고 위 칼럼이 정 반대의 관점에서 보였기 때문에, 키위님의 댓글을 부정하는 형태로 쓰게 된 점 사과드립니다.

네, 그것이 트와이스의 성공 공식이기도 했는데요. 그래서 이제는 별로 재미가 없기도 하구요. 패러디 나열 형식의 뮤비도 세번째라서요. Likey 뮤비는 꽤 재밌게 봤는데

저는 키위님의 이 댓글이야말로 글쓴이가 언급한 ‘식민화’를 잘 나타낸다고 봐요. 왓이즈러브의 패러디 소재 영화는 누가 봐도 박진영 세대의 추억의 영화잖아요. 그 추억을 트와이스에게 재현하게 만드는 것이 세대적인 ‘식민화’인 거지요. 당대 최고 인기 걸그룹이, 젊은 세대는 딱히 모를, 혹은 몰라도 될 요소를 걸치고 나와서 삼촌 세대 앞에 추억 소환을 시켜준다는 바로 그 지점이요. 그치만 그 밑에 이사람님이 말씀하신 ‘진정성이 필요한가’의 문제 제기도 이해가 갑니다. ‘진정성’이 느껴지게 해야 한다손 치면 이 문제가 마치 트와이스 멤버들의 퍼포먼스가 미진해서 일어나는 일처럼 보일테니까요. 글쓴이의 포인트를 거친 언어로 요약하자면 ‘아재들이 젊은 사람들 문화에 끼어들었으면 자기 주장은 좀 덜 하고 새로운 것이 태동하도록 응원이나 하자’로 보입니다.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