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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핑크 – KILL THIS LOVE (2019)

“Kill This Love”는 장르의 혼종성과 명징한 캐릭터 활용법을 특징으로 하는 케이팝의 거푸집에 주물을 전부 미국 팝으로 채워 넣은, 빌보드 리스너들의 폐부를 찌르는 순간들로 가득 찬 종합선물세트 같은 앨범이다.

‘핑크’빛 전망과 ‘블랙’의 그림자 사이 번민

아직도 모종의 이유로 케이팝을 내키지 않아 하는 미국 젊은이들이 있다면, 이 앨범을 들려주어라. 어쩔 수 없이 굴복하게 될 것이다. “Kill This Love”는 빌보드 리스너들의 폐부를 찌르는 순간들로 가득 찬 종합선물세트 같은 앨범이다. ‘Kill This Love’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고 묵직한 비트들을 쉴 새 없이 쏟아붓고 있고, ‘Don’t Know What To Do’는 산뜻한 팝에 짜릿한 EDM식 드롭을 이어붙이고, 단연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Kick It’은 기타반주와 808 베이스를 능수능란하게 오가면서 카운터펀치를 날리고, ‘아니길’은 안정적인 머니 코드의 뼈대 위에서 적절한 코드 변용과 파트 전환으로 관습성을 피한다. 여기에 한층 더 강력한 뱅어(banger)를 만들려 작정한 듯한 ‘뚜두뚜두’의 리믹스까지 더해지니 더할 나위 없다.

각기 다른 멤버들의 개성은 여기에 설득력을 더한다. 팀의 시그니쳐와도 같은 제니, 생동하는 리듬감으로 낭중지추 같은 존재감을 뽐내는 리사, 비디오 면에서 폭발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오디오에서는 차분히 무게중심을 잡는 지수, 입을 떼는 순간 공기를 뒤흔드는 로제까지. 4명은 상호보완적인 동시에 명확하게 구분되는 매력을 지닌다. 컴백 때마다 두각을 보이는 멤버가 달라지는 것 역시 강점인데, 이번 앨범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건 로제. 넘실대는 진폭으로 잔 파장을 쏘아붙이는 보컬의 파동이 주요한 변곡점마다 자리하며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뽐내고 있다. 케이팝에 대한 비판의 주요 근거로 사용되던 ‘공장제 아이돌’ 내지는 ‘마네킹’ 내러티브는 블랙핑크 앞에서 무력해질 뿐이다. 물론 ‘공장제’ 공업방식에는 변한 것이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들이 ‘마네킹’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감각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장르의 혼종성과 명징한 캐릭터 활용법을 특징으로 하는 케이팝의 거푸집에 주물을 전부 미국 팝으로 채워 넣은 꼴. 쉽게 말해, Cardi B부터 Taylor Swift까지를 한 곡에서, 한 앨범에서, 한 팀에서 맛볼 수 있게 한 셈이다. ‘Kill This Love’에서 리사가 “문을 박차고” 들어올 때, ‘Don’t Know What To Do’에서 지수가 드롭 가운데 멜로디를 아득히 뻗어낼 때, ‘Kick It’에서 제니가 심드렁하게 808 베이스를 뚫고 나올 때, ‘아니길’에서 로제의 목소리가 습도 높은 기타 반주와 함께 공명할 때 등, 보통 취향의 북미 대중이라면 어느 한순간에라도 ‘stan’을 외치게 될 것이다.

“Kill This Love”의 노림수는 명확하다. 코첼라와 북미투어를 앞둔 시점, 부족한 트랙 수를 보강하고 결정타를 날리고자 마련된 앨범이다. 이는 동명의 타이틀곡 ‘Kill This Love’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쌍권총에서 바주카포로 바뀐 포인트 안무가 말해주듯, ‘Kill This Love’는 ‘뚜두뚜두’의 확장판이다. 똑같은 구조를 공유하는 가운데 비트와 베이스는 더 둔탁하게, 파트 간 낙차는 더 대담하게 배치하며 화력을 증강했고, 뮤직비디오와 퍼포먼스 역시 시각적 충격의 스케일을 한층 업그레이드해 보여준다. 예측 가능한 구조가 감상의 재미를 반감시키고 트렌디함을 과하게 인식한 듯한 부분들이 종종 이물감을 자아내지만, 이마저도 결국 퍼붓는 폭발력으로 덮어버린다. 반향은 어마어마하다. 뮤직비디오는 24시간 내 역대 최고 조회 수를 기록했고 38시간 만에 1억 뷰를 돌파했다. 여타 케이팝 릴리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국적 불문 언어 불문의 리액션 비디오가 쏟아졌고, 그중 몇몇은 웬만한 신인 그룹의 데뷔곡 조회 수를 훌쩍 뛰어넘기도 했다. 곡 자체의 절대적/상대적인 완성도를 떠나 전략은 확실히 성공했다.

다만 문제는 YG가 블랙핑크에게 부여하는 팀의 방향성에 대한 회의를 떨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째서 4년 차가 되도록 2NE1의 그림자가 떨쳐지지 않을까. 곡과 뮤직비디오의 스타일은 물론 멤버별 캐릭터 부여까지 블랙핑크는 2NE1과 완벽히 일치한다. 멤버들의 개성이 유의미한 차이를 만들어내고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10년 전 기획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원타임부터 빅뱅, 위너, 아이콘에 이르기까지 YG 보이그룹의 작법과 화법은 시대와 그룹에 따라 달라졌지만, 걸그룹만큼은 인하우스 프로듀서 테디의 지휘 아래 같은 길을 고수하고 있다.

더군다나 단일곡 내에서 ‘블랙’과 ‘핑크’를 비교적 동등하게 느낄 수 있던 이전과 달리 “Kill This Love”에서 ‘블랙’과 ‘핑크’는 곡 단위로 분철 된다. “사랑의 숨통을 끊”고 (‘Kill This Love’) “너라는 세상을 부숴버리”겠다 (‘Kick It’) 선포하는 ‘블랙’과 “너 없이 어쩔 줄 모르”고 (‘Don’t Know What To Do’) 상대방의 행복을 빌며 “날 잊을 만큼은 아니길”이란 애달픈 단서를 다는 (‘아니길’) ‘핑크’로 단면이 극명하게 갈리며 블랙-핑크의 2차원은 1차원적으로 변모한다. 물론 이러한 단편적인 구분은 2NE1에도 있었고, 분명 획기적인 파문을 불러왔었다. 하지만 이는 당대에 양면적인 콘셉트를 그리는 걸그룹 자체가 몇 없었기 때문이고, ‘내가 제일 잘 나가’와 ‘Ugly’의 진폭이 기존 아이돌 내러티브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2NE1 이후 걸그룹 상이 고도로 분화되어 3차원, 4차원을 그리고 있는 현시점에서, 상투적인 1차원 간의 진자운동만을 보여주는 것이 그때만큼의 감흥을 불러일으킬 리 만무하다.

결국, 유독 걸그룹에 있어서만 같은 패턴을 답습하고 되레 더욱더 납작해지기까지 한 기획은 필연적으로 최근 YG를 둘러싸고 불거진 일련의 사태를 연상시킨다. 이러한 기획이 여성을 타자화/도구화해가며 체제를 공고히 해온 회사에서 나왔다는 게 과연 우연일까. 예정되어있던 북미 프로모션 일정에 맞춘 것이라고는 하나, 하필 이 시점에 블랙핑크를 내세운 것 역시 이들을 방패막이로 이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패밀리’의 가부장제에 발목이 붙들린 이 그룹을 도대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멤버들을 향한 지지와 회사에 대한 회의 사이에서 좀처럼 갈피를 잡기가 힘들다.

KILL THIS LOVE
YG 엔터테인먼트
2019년 4월 5일
스큅

By 스큅

머글과 덕후 사이(라고 주장하는) 케이팝 디나이얼 러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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