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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기고 : 아이유가 노래하는 20대

마침내 대중은 내면의 짓궂은 아이와 깊은 울림을 전하는 어른을 모두 사랑하게 되었고, 이로써 드디어 아이유는 “돌아오는 길 (‘아이와 나의 바다’ 中)”을 찾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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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LAC
EDAM 엔터테인먼트
2021년 3월 25일

작사가로서 아이유는 자신의 나이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노래들을 발표해왔다. 스물셋에서부터 올해 스물아홉까지, 아이유의 진솔한 이야기들은 이 글을 읽고 있는 많은 20대 대학생들에게도 나이별로 자신의 모습과 비교해볼 수 있는 대상 텍스트였으며, 나이와 성장에 대한 기대감과 영감을 채워주는 응원가였으리라 짐작해본다. (매년 1월 1일마다 음원 차트에 ‘스물셋’ 노래가 등장한다는 사실이 신빙성을 더해줄 수도 있겠다.) 지난 3월 발매된 20대에 대한 작별 인사와 다가오는 30대에 대한 환영 인사를 담은 정규 5집 ‘라일락’을 통해서 아이유의 20대 나이 시리즈는 결말을 맞았으니, 일련의 곡들에서 서사적 지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른과 아이 사이를 오가는 많은 청춘들에게 아이유는 건넬 말이 많은 듯하다.

아이 같은 어른 같은 아이, 스물셋

한 떨기 스물셋, 처음으로 프로듀싱에 나선 앨범 <CHAT-SHIRE>의 쇼케이스 현장에서 아이유는 스물셋이라는 나이가 20대 초반이라고 우길 수 있는 마지막 나이 같다며, 스물셋의 자신이 본 일들과 느낀 생각을 담은 이 앨범 속에서 함께 소통하기를 바란다는 소감을 밝혔다. 아이이면서 어른일 수 있는, 그 둘의 경계가 모호해 방황할 수 있는 나이를 아이유는 스물셋으로 상정했지만, 성인이 되면서 사회를 맞닥뜨린 20대 초반이라면 누구나 혼란을 많이 겪을 것 같다.

“난, 그래 확실히 지금이 좋아요

아냐, 아냐 사실은 때려 치고 싶어요

아 알겠어요 난 사랑이 하고 싶어

아니 돈이나 많이 벌래”

‘스물셋’ 中

개인의 소망과 세상의 기준, 규범은 너무나도 쉽게 어긋나기 때문에 청춘은 방황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 주어진 선택지의 간극에 고통받기도 하고, 선택지를 늘리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이 성장 과정에 타자의 잣대가 개입되면 필요 이상의 고통이 어깨를 누른다. 이 추가적인 고통은 성장을 더욱더 어렵게 하며, 사회적 기준과 법칙만을 강조함으로써 개인의 소망을 잃기 쉽게 만든다. 개인이 어떤 꿈을 그려왔는지와는 상관없이 사회적 기준과 원리에 부합한 것만이 개인의 소망이라고 주입하는 것은 지배, 통제 편리성을 대변하는 관점이다. 같은 앨범에 실린 곡 ‘제제’에 대한 논란도 이와 같은 관점을 반영한다.

소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재구성한 곡 ‘제제’는 꼬마 제제에 대한 그의 친구 나무 밍기뉴의 말이 가사로 옮겨져 있다. “넌 아주 순진해 그러나 분명 교활하지 / 어린아이처럼 투명한 듯해도 어딘가는 더러워”라는 가사처럼 제제의 양면성에 대해서 표현하기도 하고, “제제, 어서 나무에 올라와 / 여기서 제일 어린잎을 가져가 / 하나뿐인 꽃을 꺾어가 Climb up me”의 가사를 통해 제제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다. 하지만 위의 가사들이 꼬마 제제를 성적 대상화했다는 담론이 형성되면서, 제제(객체)와 밍기뉴(주체)가 모두 아이유일 법 한 가사는 아이유의 더러운 욕망으로 치환되기에 이른다. 당시 공개적인 연인이 있던 아이유가 진정 소아성애자라고 우려되었기에 대중의 비난을 샀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보다는 기능적 역할에서 벗어난 측면, 잘못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기에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 이처럼 개별 사례에 대한 고려가 부족한 법칙화된 세상은 지배, 통제적 편리성을 위해 개인을 쉽게 재단하고, 기능적 차원에 방해가 되는 모든 개별적 요소는 제거하고자 하는 경향성을 가진다. 다양한 지향을 가진 청년에게도 이는 일괄적으로 적용되는 법칙으로 많은 어려움에 부딪히게 한다. 다양성을 억압하고자 하는 세상에 지배되지 않을 수 있는 방식을 아이유는 ‘스물셋’에 담아냈다.

“여우인 척 하는 곰인 척 하는 여우 아니면 아예 다른 거 어느 쪽이게

뭐든 한 쪽을 골라 색안경에 비춰지는 거 뭐 이제 익숙하거든”

‘스물셋’ 中

아이유가 노래한 ‘스물셋’은 어느 하나로 규정될 수 없는 상태이다. “영원히 아이로 남고” 싶다가도 “물기 있는 여자가” 되고 싶고, “죽은 듯이” 살고 싶다가도 “다 뒤집어” 보고 싶어 한다. 이 가사들이 가진 힘은 아이의 전복성에서 유래한다. 법칙에 따른 합리성 준수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추구하는 어른이 아닌, 다양한 가능성을 시험하며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맞추지 않는 아이가 세상의 법칙에 지배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세상에 맞추지 않고 사는 것이 가능하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물론 가능하지 않다. 개인의 소망도 세상의 기준과 법칙에 의거해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 맞추며 사는 것과 세상에 맞춘 존재로 사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수행성 높은 어른으로 살지언정 내면의 아이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이유는 ‘스물셋’이라는 곡 전체에서 미성숙함의 긍정성을 조명하기 위해 아이 같은 어른 같은 아이를 표방하고 있지만, “색안경에 비춰지는 것이 익숙”하다는 가사에서는 대조적으로 이미 어른의 단계에도 진입했음이 나타나기도 한다.

어린 날의 나도 안녕, 팔레트

극명하게 호오가 갈리고 말도 많았던 ‘스물셋’ 이후 2년이 지난 스물다섯, 정규 4집 “팔레트”가 발매된다. “팔레트”는 이름 그대로 곡들을 통해 그린 그림을 대중에게 그대로 전시하기보다는, 물감의 상태 그대로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데뷔 10년 차 아티스트 혹은 스물다섯 살 ‘이지은’의 작은 순간순간이 예쁜 물감이 되어 차곡히 채워진 ‘아이유’의 ‘이 지금’, 새하얀 ‘팔레트’에 그녀가 새롭게 배합해 낸 이 음악, 이 물감으로 어떤 그림을 완성할지는 오랜 시간 그녀의 새 앨범을 기다려온 청중의 몫으로 남겨두고자 한다”는 앨범 소개글처럼 아이유는 어느 때보다 감상의 자유를 넓혔다. 본인이 정해둔 이야기 속으로 청자들을 초대했던 “CHAT-SHIRE”보다도 성장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묵시적으로라도 창작자 아이유가 곡들을 선정하고 만든 데에는 본인만의 그림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그림을 숨겨 폭넓은 감상을 가능하게 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기에 단일하게 “팔레트” 앨범만 보아서는 그림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다소 그림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스물셋과 스물아홉(“라일락”) 아이유의 텍스트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스물다섯 아이유의 이야기(“팔레트”)를 그려보고자 한다.

“I like it I’m twenty five 날 미워하는 거 알아

I got this I’m truly fine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날”

‘팔레트’ 中

동명의 타이틀곡 ‘팔레트’는 일종의 자기 고백으로 시작한다. ‘요즘엔 그냥 쉬운 게’ 좋다는, 또 ‘단추 있는 파자마’와 ‘짓궂은 장난들’을 좋아한다는 심심하면서도 솔직한 고백들로 곡을 연다. 이어 “I like it I’m twenty five 날 좋아하는 거 알아 (2절에서는 “날 미워하는 거 알아”) I got this I’m truly fine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날”이라는 후렴이 이어진다. 다른 사람들이 날 좋아하든, 미워하든 그 평가와는 무관한 자신에 대한 애정이 나타나며, 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노래한 앞부분과도 유기성을 가진다. 자신의 ‘짓궂은’ 면이 타인의 기준과 법칙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그것에 일희일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부로서 긍정하는 자세는 ‘색안경에 비춰지는 게 익숙해졌다’는 스물셋의 태도에서 보다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타자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자신을 사랑해도 괜찮다는 아이유의 경험적 이야기가 많은 청춘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전부 알 것 같아도 더 이상의 이해는 없었음 좋겠어

묻고 싶지만 끝내 그 대답을 듣지 못했음 좋겠어

변함없이 정직한 두 눈도 약속한 겨울바다도

못 잊게 행복했던 어린 날의 나도 안녕

모두 안녕 안녕 모두”

‘마침표’ 中

이러한 자기 긍정은 일종의 이별을 통해서 실현된다. “팔레트” 앨범에는 동명의 타이틀곡 이후 이별, 사랑 노래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이별과 사랑은 대중가요에서 주요소재이기 때문에 무난한 곡 선정으로도 볼 수 있지만, 아이유가 기획한 많은 곡들이 발화 대상을 대중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별·사랑 노래의 대상-연인을 대중으로 해석하면 흥미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듯하다. ‘팔레트’ 다음 트랙인 ‘이런 엔딩’과 ‘사랑이 잘’은 이별 노래이다. “사랑해줄 거라며 다 뭐야 어떤 맘을 준 건지 너는 모를 거야”, “피곤해 그만 오늘은 놔 줘 / 더 이상 반복하긴 싫어 / 또 다 내가 나빠 / 아마 그래 난 널 미워하나 봐 / 사랑이 잘 안 돼”라는 가사들 속의 연인을 아이유와 대중으로 상정한다면 얼마나 흥미로운가. 솔직하게 자신의 내면을 그대로 표현한 아이유와 그러한 아이유를 법칙적 틀로 재단한 대중의 갈등. 실제로 이러한 성격의 관계를 가진 연인이 있다면 어떠할까? 아마 그 둘은 이별해야 할 것이다. 한쪽이 추구하는 사랑은 모든 면을 공유하고자 하는 사랑이고, 다른 쪽은 합리적이며 사회적 기준을 내재화한 사랑을 원한다. 꿈보다 해몽일 수 있지만, 자신의 양면성에 대한 노래 ‘제제’를 사랑해달라고 한 아이유와 그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고려했을 때 충분히 적용해볼 수 있는 이야기일 것 같다. 그다음으로는 스물셋에서 “속마음과 다른 표정을 지는 일”이 “아주 간단”하다고 했던 아이유가 거짓에 대해서 자조하는 트랙 ‘잼잼’, 만취 상태에서 부르는 컨셉인 곡 ‘Black Out’, 그리고 이별 인사를 담은 ‘마침표’가 등장한다. 그토록 나를 행복하게, 또 괴롭게도 했던 연인과의 이별은 ‘어린 날의 나’와의 이별이기도 하다. 사랑도 결국 나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것 아닌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상대에게 집착하는 것도 아이가 가질 수 있는 부정적인 속성이다. 충분히 다른 사람을 만나도 되고, 모두에게 사랑받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사랑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대안을 제시해준다.

“수없이 잃었던 춥고 모진 날 사이로

조용히 잊혀진 네 이름을 알아”

‘이름에게’ 中

스물다섯의 아이유는 이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아이유가 사랑한 건 누구였을까. 실연을 겪었다고 해서 내가 사랑하는 대상은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일까. ‘마침표’ 이후 연이은 깊은 사랑 노래들은 이를 방증한다. 내가 사랑하는 건 너만이 아니었고, 수많은 타자들이었다. 내가 너를 사랑한 것은 오직 너만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네가 수많은 타자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고, 그런 너를 아끼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아이유의 사랑도 모두를 향한다. “수없이 잃었던 춥고 모진 날 사이로 조용히 잊혀진” 무수히 많은 이름들을 호출하며 사랑을 노래한다. 자신의 소망과 세상의 법칙을 중재해나가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자취는 남겨야 하는 것일까. 어느덧 아이유는 어른이 되었다.

지겨운 세상을 즐기는 어른, 라일락

“강자에게 더 세게 I love gamble”

‘Coin’ 中

스물아홉 아이유는 20대에 대한 작별 인사와 다가오는 30대에 대한 환영 인사를 담은 정규 5집 “라일락”을 발매한다. 그동안 아이유는 스물여덟의 상실을 다룬 ‘에잇’을 발매했고, 배우로서도 왕성히 활동했다. 20대 동안 아이유는 소망한 바를 이루었을까. 확실한 것은 많은 사람들은 소망을 실현하지 못하고 세상에 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아이유도 세상에 지지 않고 자신의 소망을 지키는 일이란 쉽지 않았을 터이다. 앨범 “라일락”에는 세상에 맞서기 위한 자극적인 소망 지키기에 대한 성찰과 이별이 담겨 있다. 이는 방법에 대한 성찰일 수도 있다. 자신의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 ‘대충 속아줘요’라는 ‘스물셋’의 태도, 스물다섯 아이유는 이를 자조했다 (‘잼잼’). 스물셋의 이런 건강하지 못한 태도는 자신을 억압하는 세상이라는 ‘더 나쁜 악을 제거하기 위해 악으로 위장한 급진적 악 (권택영, 『잉여 쾌락의 시대』. 2003. p.165)’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가 영원히 아이일 수 없는 것처럼, 악이 승화되지 못한 상태로 남는다면 그것은 그저 악에 불과하다. 청소년기의 반항이 가진 긍정과 부정의 양가성이 있겠지만, 그것이 성인기에도 끝내 그 형식을 답습하는 것에 그친다면 일탈자에 불과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라일락”의 더블 타이틀곡 ‘Coin’은 자극적이고도 위험한 게임에 중독된 자신을 성찰하는 노래이다.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되기 위해서 건강, 행복과는 무관한 세상과의 게임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것이다. 건강, 행복과 소망 실현 중 무엇이 절대 우위에 있다고는 누구도 답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스물아홉 아이유가 건강, 행복 쪽으로 기운 이유는 소망을 실현했고, 20대 동안 건강과 행복의 측면에서 결여를 많이 경험해서이지 않을까. 다른 청춘들은 어떤 선택을 내릴지, 또 그 선택에는 변함이 없을지 궁금해진다.

“아프던 너의 이름도 이제는 미련이 아냐

하얗게 잊어버리는 듯 살다가 또 한번 마주치고 싶은 우연이지

낮게 부는 바람결이 희미한 계절의 기척이 내게는 전혀 낯설지 않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을 뻗어보네

봄 그대가 내게 봄이 되어 왔나 봐”

‘봄 안녕 봄’ 中

세상이 지겨운 이유는 소망을 완벽하게 실현할 수 없고, 만약 그 의의를 지킬 수 있는 선에서 자신의 소망을 일부 실현하더라도 다른 수많은 이들은 세상에 처참히 지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이 모든 것이 반복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스물아홉 아이유는 이 지겨움에서조차 긍정성을 발견한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기에 그리운 얼굴들을 볼 수 없지만, 역설적으로 그래서 계절은 돌아오기 때문에, 이 계절들이 서로 주고받은 시간과 마음을 회상하게 만들기에 이 지겨움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진정한 회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진공이 아닌 시간의 지속이다.

“어 또 보네 다음에 다시 만날 때까지

부디 행운을 빌어 지겹게 보자고”

‘어푸’ 中

스물다섯의 “다섯 번째 미안하단 말이 이젠 너에게는 지겨운 건지”라는 가사(‘사랑이 잘’)가 스물아홉의 “선 넘을 뻔 했던 건 인정해 근데 이제 아홉 번째”라는 가사(‘돌림노래’)가 될 정도로 지겹게 타자 및 세상과 희비를 교환해온 아이유가 20대 마지막 앨범 후반 트랙 ‘어푸’에서까지 장난스럽게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한다고, 지겹게 보자는 말을 청자에 던지면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대상은 이토록 짓궂은 아이 아이유일지, 길고도 험난한 20대에 작별을 고한 어른 아이유일지 미궁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서사를 통해 청자는 이제 아이의 모습보다 어른의 모습을 기대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마침내 대중은 내면의 짓궂은 아이와 깊은 울림을 전하는 어른을 모두 사랑하게 되었고, 이로써 드디어 아이유는 “돌아오는 길 (‘아이와 나의 바다’ 中)”을 찾은 것 같다. 그러므로 아이유는 나아갈 수 있다. 나아가기 위해 어른과 아이 사이를 헤매고 있는 청춘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 돌아오는 길일 수 있다.

글: 박하운

행정학을 전공하고 있는, 아이유와 레드벨벳을 좋아하는 사람

By Editor

idology.kr 에디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