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아이돌팝 발매작 중 정규앨범을 중심으로 주목할 만한 앨범을 다룬다. 오마이걸, NCT 드림, 태민, 공원소녀, 조이, 투모로우바이투게더 등.
예미: ‘살짝 설렜어’와 ‘Dolphin’의 흥행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오마이걸은 전작 “NONSTOP”의 방향성을 좀 더 굳히기로 했다. ‘Dolphin’의 작곡가 라이언 전이 전 곡에 참여한 “Dear OHMYGIRL”은 미디 기반의 현대적인 팝 사운드로 “THE FIFTH SEASON”까지의 오마이걸을 기억하는 이들을 만족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타이틀곡 ‘Dun Dun Dance’는 기타 사운드를 내세운 디스코 스타일의 팝이다. 디스코가 작년 한 해 팝계의 메가트렌드로 자리 잡은 탓에 비슷한 스타일의 타 가수 곡이 연상되기는 하나, 멤버들의 곡 소화력과 팀 컬러를 부각하는 데에는 트렌디한 스타일을 가져온 것이 효과적이었다. 효정과 승희가 고음역대의 후렴을, 비니와 유아가 “Dun Dun Dance”를 번갈아 외치고, 지호와 아린의 고운 음색과 미미의 싱잉 랩이 분위기를 환기하는 등 멤버들의 개성이 역할 분담 하에 시너지효과를 내어 매력적인 곡을 만들었다.
수록곡 ‘Dear You (나의 봄에게)’는 R&B 기반의 팝 사운드를 내세웠고, ‘나의 인형 (안녕, 꿈에서 놀아)’는 변칙적인 박자와 기계음이 돋보인다. ‘Quest’와 ‘초대장’은 트랩 사운드, ‘Swan’은 록적인 접근이 눈에 띈다. 여러 장르의 사운드를 차용하면서도 전반적으로 미니멀한 기조에 멜로디 반복이 잦다. 멤버들의 보컬은 음색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며 사운드에 안정적으로 녹아들었는데, 이러한 보컬 활용이 봄의 계절감과 잘 어울린다. 곡의 색에 따라 전 멤버가 일관된 톤을 가져가는 듯하면서도, 강조해야 할 포인트를 살리는 해석력이 전곡에서 돋보였다.
이처럼 사운드의 방향성은 크게 달라졌지만, 가사가 보여주는 정서적인 결은 그간의 커리어와 맞닿아 있다. 새싹이 깨어나는 벅참을 담은 ‘Dear You (나의 봄에게)’, 인형을 소재로 어릴 적 기억을 이야기하는 ‘나의 인형 (안녕, 꿈에서 놀아)’, 낯선 이에게 다가가는 마음을 표현한 ‘초대장’, 백조의 이미지에 용기를 주는 메시지를 담은 ‘Swan’ 모두 오마이걸이 보여준 서정성의 범위에 포함된다. 가사의 섬세한 문체와 보컬의 표현력은 동시대적인 사운드 위에서도 그룹의 고유성을유지했다.
“Dear OHMYGIRL”은 오마이걸의 새로운 방향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기존 지지자의 감성을 만족시킬 수 있는 작품이다. 멤버의 보컬 역량과 이를 적절히 활용한 프로듀싱, 가사의 방향성이 그룹의 색깔을 트렌디하게 풀어냈다. 이를 가능케한 팀의 탁월함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 “Dear OHMYGIRL”이었다.
스큅: 일단 시인하고 넘어가자. 청소년 유닛(이었던) NCT 드림은 ‘청소년’이라는 단어에 으레 투영되는 편견만큼이나 꽤 단선적인 이미지를 표방해왔다. ‘Chewing Gum’, ‘We Young’, ‘We Go Up’이 그러했고, ‘Go’의 반항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이돌팝 전반에 해당하는 사항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심지어 멤버들의 존재보다도) ‘청소년 유닛’이라는 타이틀이 곧 그룹의 정체성이었던 NCT 드림에게서 유독 더 두드러진 것이 사실이다. 다만 NCT 드림이 그 프레임을 넘어선 생동감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해맑은 표정 아래 편견으로 결코 얕잡아볼 수 없는 치열한 퍼포먼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천연덕스러움이야말로 그룹의 가장 큰 강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멀리 돌고 돌아 마침내 나온 NCT 드림의 정규 1집 “맛”은 그 천연덕스러움이 가장 돋보이는 앨범이다. 티 없이 맑은 해사한 기조의 곡들(‘고래’, ‘우리의 계절’, ‘ANL’, ‘주인공’, ‘지금처럼만’, ‘Rainbow’)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이전에 비해 심지가 더 들어찬 혈기왕성한 트랙들(‘맛’, ‘Diggity’, ‘Rocket’, ‘Countdown’)로 포인트를 더하며 ‘청소년 유닛’으로 출발한 그룹의 정수를 선보인다. 안정적인 멤버들의 합 역시 언제나처럼 인상적이다. 이제는 멤버들 모두가 성인이 된 상황에 그룹의 초기 설정을 뒤엎고 나온 앨범이지만, “항상 우린 Irreplaceable”이라는 ‘주인공’의 절창을 들으며 아무렴 상관없다는 그 천연덕스러운 수행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오늘이 지나도 지금 느낌만은 이대로 영원할 테니까"라던, “이 밤이 가도 우리 이야기는 계속될 테니까”라던 ‘Dream Run’의 호언장담이 새삼 떠오른다. 이 정규 앨범을 가능케한 공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NCT 2020 때의 싱글 ‘무대로’에게 공을 돌리며 평을 마무리한다.
에린: NCT 드림은 이번 정규앨범으로 그룹 색을 재정비했다. NCT 드림은 ‘We Young’과 ‘We Go Up’을 거치면서 청소년 연합팀으로서의 젊음을 강조하였으나, 멤버 전원이 성인이 되고 마크의 합류가 결정되면서 변화할 시기가 되었고, “맛”은 그 변화의 분기점이다. NCT 드림의 “맛”에서의 변화는 작년 “NCT-RESONANCE Pt. 1” ‘무대로’의 연장선에 있다. ‘무대로’는 ‘Ridin’’의 비장함을 연결하기보다는 그룹의 활기를 강조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앨범 “맛”은 ‘무대로’의 방식을 활용하여 그룹의 색깔을 급격하게 바꾸기보다는 에너지를 극대화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먼저 타이틀 곡 ‘맛’의 아프리카 리듬 위에 외치는 후렴구, 후반부 댄스 브레이크 파트, 주술을 외는 듯한 사운드는 비교적 미니멀했던 ‘We Young’, ‘We Go’와 구별되고, 그룹의 에너지를 자극적이고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기조는 ‘Diggity’, ‘Countdown’으로 이어짐으로써 NCT 드림의 변화를 공고히 한다.
하지만 “맛”은 NCT 드림의 변화를 보여주면서도 그룹의 천진난만함과 서정성을 놓치지 않고, 기존 NCT 드림의 색깔을 유지한다. 아련한 감성의 보컬과 “I will dive into you” 후렴구의 청량감이 돋보이는 ‘고래’, 무대 위 넘치는 장난기와 자신감을 보여주는 ‘Rocket’은 그룹의 천진난만한 생동감을 담아낸다. 과거를 추억하는 ‘우리의 계절’과 ‘Rainbow’는 NCT 드림만의 서정적인 감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앨범 “맛”은 NCT 드림 본연의 에너지를 자극적으로 보여주면서 서정성과 청량함을 유지해 그룹의 제2막을 성공적으로 준비해냈다.
에린: 태민의 “Advice”는 이전 두 장의 정규 앨범 “Never Gonna Dance Again” 시리즈와 연결된다. ‘Criminal’이 무대 위 춤추는 자아와의 분리로 인한 혼란을 표현하였다면, ‘이데아’에서는 서로 다른 자아 간의 합일을 바탕으로 새로운 존재로 구성되었음을 선언한다. ‘Advice’에 이르러서는 ‘Criminal’과 ‘이데아’의 자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매듭짓고 공격적인 어조로 상대방에게 충고하지 말라 경고한다. 그가 피아노 선율 위로 내지르는 “Best take my own advice”는 곡의 폭발력을 절정에 이르게 하면서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자신의 존재를 앞세운다. 타이틀곡 ‘Advice’는 이전 정규앨범들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고 있으나, ‘Advice’의 폭발력은 앨범으로 이어지지 않고 앨범 후반부로 갈수록 연약한 태민의 모습을담아낸다. ‘Light’는 ‘Advice’가 주는 휘몰아치는 카리스마를 중화 시켜 ‘Advice’의 공격성을 약화하고, 이 기조는 포근함이 돋보이는 ‘If I could tell you’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는 ‘SAD KIDS’를 수록해 서툴렀던 과거의 방황을 담담히 인정하며 앨범을 마무리하고 지난 1년 동안의 활동을 정리한다. 긴 휴지기를 맞이하기 전 태민은 “Advice”로 케이팝 내 퍼포머로서의 위치와 이미지를 공고히 했다.
마노: 케이팝 씬을 장악한 수많은 ‘소녀’들 속 공원소녀만의 변별점은 단연 이들의 “재잘거림”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자신들만의 암호와도 같은 언어를 주고 받고 속닥거리며 키득대는 소녀들의 심상을 공원소녀는 데뷔 초부터 전작 “the Keys”까지 꾸준히 그려왔다. 그런 공원소녀의 모습을 기대하고 이번 앨범을 재생했다간 아마 크게 놀라버리고 말 것이다. 기대했던 소녀들의 끊임없는 ‘재잘거림’이나 ‘키득거림’ 대신, “과거의 나를 모두 태워버리겠다”는 비장한 외침(‘Burn’)이 들려오니 말이다. 이어지는 ‘I Can’t Breathe’ 역시 공원소녀가 꾸준히 추구해온 딥 하우스 장르 댄스곡이되, 마치 그림자가 드리워진 달의 이면을 보는 듯 어둡고 묵직하다. 다음으로 따라붙는 타이틀곡 ‘Like It Hot’ 역시 비슷한 기조를 이어받고 있는데, 공원소녀에게 지금껏 없었던 서늘한 우아함을 시도하고 있으면서도 특유의 아이덴티티를 잃지 않은 채 계속해서 그려나가고 있다는 점이 반갑게 느껴진다. 그 외에도 공원소녀 특유의 장난기와 “재잘거림”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e i e i o’, 밤하늘에 흩뿌려놓은 별무리를 그대로 곡에 풀어놓은 듯한 ‘Starry Night’, 블루지한 ‘I Sing (lalala)’까지, 공원소녀의 “뒷면”을 만끽할 수 있는 트랙으로 가득하다. “밤의 공원” 3부작 이후, 팀의 커리어에 있어 어떤 의미로는 꼭 필요했던 적절한 변화구를 성공적으로 던진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공원소녀만의 어떠한 ‘다움’을 잃지 않은 변화였기에 그것이 더욱 기껍게 느껴졌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조은재: "달의 뒷면"이라는 제목 그대로 서늘하고 신비로운 무드가 짙게 깔린 앨범이다. 데뷔 때부터 꾸준하게 하우스 음악만을 고집해온 '근성'에 컨셉츄얼한 이미지를 더해 소화할 수 있는 레퍼토리의 외연을 넓혀나가고 있다. 신비감을 더하는 장치를 앨범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인트로 트랙 'Burn'의 과장된 리버브 효과라든가, 'I Sing'에 포함된 일본어 랩 가사처럼의식하지 않으면 놓치기 쉬울 정도로 평이하게 흘러가는 부분같은 것들이 노래를 한 번 더 곱씹게 만드는 장치로 작동한다. 청량하게 울리는 보컬과 “살짝 이지러진 채(‘Like It Hot’)”, “아스라이 번지는 꿈들(‘Starry Night’)”과 같은 서정적인 어휘로 포인트를 준 가사 또한 공원의 밤 혹은 새벽을 산책하는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 앨범을 모두듣고 나면 타이틀곡 'Like It Hot'이 수록곡 중 가장 어둡고 차갑게 울리는 베이스가 돋보임에도 불구하고 반어적인 제목을 달고 있는 것조차 신비로워 보인다.
스큅: 리메이크 앨범인 “안녕 (Hello)”은 높은 해상도를 자랑한다. 특이한 점은 높은 해상도가 원곡과 리메이크의 시차가 아닌 오롯이 조이의 목소리로부터 비롯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오직 조이의 청명한 보컬에 초점이 맞춰진 선곡과 편곡은 이 리메이크가 이벤트성의 커버, 원곡(자)에 대한 헌정, ‘추억팔이’ 식의 단순 레트로를 넘어 조이의 솔로 커리어를 열어젖히는 첫 앨범으로서 기능함을 확고히 한다. 과거의 답습이나 손쉬운 선택이 아닌 사려 깊은 기획의 결과임이 느껴진다. 꽤 실험적인 편곡을 다수 선보였던 브라운아이드걸스의 리메이크 앨범 “RE_vive”와 달리 원곡에 충실한 재해석을 선보였음에도 그러한 지점이 느껴졌다는 것이 놀랍다. 모든 곡이 빼어나지만, 조이의 사근사근한 가창이 만개하는 ‘Day By Day’를 특히 추천한다.
예미: 리메이크 앨범으로 솔로 데뷔를 한다는 것은 범상치 않은 선택이었다. 자칫 단발성 기획일까 했던 우려는 잠시, 조이의 음색과 캐릭터에 꼭 맞는 선곡이 뒷받침되어 ‘조이’의 역량을 보여주는 앨범이 만들어졌다.
앨범의 선곡은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가요 위주다. 대형 메가트렌드를 이끌었던 이들보다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있지만 지겨울 정도로 들리지는 않았던 곡을 가져와 반가움과 신선함을 자아냈다. 또한 멜로디가 예쁘고 가수의 음색이 부각되는 곡, 특히 여성 가수의 곡을 다수 가져온 점이 눈에 띄었다.
“안녕 (Hello)” 앨범은 해당 곡의 특징을 현대적으로 구현하며 조이의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 박혜경의 ‘안녕’을 리메이크한 타이틀곡 ‘안녕 (Hello)’은 밴드 사운드와 브라스 위주의 원곡을 최대한 살리되, 드럼과 기타를 정교하게 배치하여 파워를 더했다. 힘을 주는 가사와 유독 힘 있는 가창을 보여준 조이의 목소리가 귀에 쏙쏙 들어와 인상적인 타이틀곡이 되었다. 반면 헤이의 곡을 리메이크한 ‘Je T’aime’는 힘을 빼고 가성을 활용하여 전 트랙 ‘안녕 (Hello)’과 대비된다. 애절함과 담백함을 함께 담아낸 ‘Day By Day’, 차분한 분위기의 ‘좋을 텐데’, 로맨틱함과 두근거림을 살려낸 ‘Happy Birthday To You’와 ‘그럴 때마다’까지, 조이의 목소리는 상반된 듯한 여러 곡을 일관되게 묶어냈다.
이 앨범에서 조이의 가창과 사운드는 그간 활동에서 보여준 면모를 풍성하게 풀어내 ‘조이’라는 캐릭터를 선명하게 각인하는 장치로 작용했다. 젊은 청자를 위해 만들어진 이전 시대의 가요, 긍정적인 메시지 및 연인과의 관계를 노래하는 가사, 맑으면서도 색깔 있는 목소리가 합쳐져 ‘조이’라는 인물로 귀결된다. 비록 통상적인 아이돌 팝의 영역을 벗어난 음악을 가져왔지만, 음악을 통해 캐릭터를 부각한다는 점에서 “안녕 (Hello)” 앨범은 아이돌팝의 미덕을 충실히 구현하였다.
랜디: 마침내 “케이팝 4세대”라 할 만한 사운드가 등장했다. 지금까지 TXT를 비롯해 다양한 회사의 팀들이 각자 “우리가 바로 4세대 선두 주자”라고 주장해왔으나, 3세대 대표 주자들이 전례 없이 롱런하며 정작 4세대는 3세대와 마땅히 구별되지 않았다. 특히 경쟁이 치열해진 탓에 당사자들이 데뷔 때부터 보여주는 콘셉트의 복잡성이나 수행 능력의 수준은 이전보다 훨씬 더 높아졌지만, 막상 음악은 3세대의 연장선상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변별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다름의 정도가 미미했다)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새 음반 “혼돈의 장: FREEZE”, 특히 타이틀 ‘0X1=LOVESONG’이 던지는 긴장감은 각별하다. 밀레니엄 이상 세대가 자신들이 젊은 시절 듣던 이모(emo) 록 이야기를 한들, 주 청자인 Z세대는 그런 정보를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케이팝을 기준으로 했을 때 이는 분명히 예상을 깨는 신선한 사운드다.
긴 시간 케이팝은 주로 하우스 EDM과 힙합 R&B 사이에서 돌고 돌며 성장했다. 예외적으로 등장한 ‘백전무패’의 클릭비와 같은 팀들은 최소한 댄스 그룹이 아닌 밴드의 외형을 갖추고자 했다. 이는 록 사운드(특히 20세기 말부터는 록의 주류가 된 얼터너티브)에는 춤을 추기 어렵다는 생각, 그리고 록은 밴드의 음악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탓으로 본다. 오래된 로키즘 담론을 굳이 꺼내오지 않더라도, 아이돌에게 록 사운드란 진정성 투쟁을 감수하며 굳이 쫓기엔 부담스러운 음악이 되어갔다. 심지어 21세기 초부터 힙합이 팝의 주류로 떠오르며 이내 그 진정성 투쟁 담론마저 힙합으로 자리를 옮겼다. 드림캐쳐 같은 팀이 케이팝 씬에서 일본의 베비메탈 같은 도전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좀처럼 후발주자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 팀만의 고유한 색깔로 굳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근래 팝에는 이모나 그런지 인플루언스가 꾸준히 등장하고 있었다. 머신 건 켈리가 록에 투신하게 된 것도, 포스트 말론이 오토튠 밑에 기타와 드럼을 깔던 것도 단기적 징조는 아니었다. 신예 팝스타 올리비아 로드리고는 인디 로커 출신의 프로듀서와 손을 잡았다. 빌리 아일리시 등의 젊은 아티스트가 이 세대로부터 정의하고 유도해낸 무드, 그러니까 자기인식적이며 동시에 파괴적인 정서가 팝 록 리바이벌과 결합했음을 느낄 때, 그 순간의 스파크에서 새 조류의 시작점을 본다. TXT의 ‘0X1=LOVESONG’ 역시 그 좌표 위에 있는, 동시대적인 곡이다. 베이스와 탐이 주가 되는 웅장한 리듬 위에서 보란 듯이 핸드 마이크를 들고 케이팝 안무를 춘다. 록이 아이돌을 허락하지 않았던 일은 이제 그저 과거일 뿐이다.
전원의 보컬 퍼포먼스 향상 역시 두드러진다. TXT의 재능은 베일에 쌓인 천재성보다는 실증적 접근 능력에 있는 것 같다. 성실한 연구의 결과물을 듣는 즐거움이 있다. 태현이 아직도 덜 자란 목소리로 도전하는 ‘0X1=LOVESONG’ 프리-코러스의 유사-브루털 창법이나 휴닝카이가 야심 차게 내놓은 작업물 ‘디어 스푸트니크’ 같은 것에서 앞으로 이들 음악이 갈 방향의 힌트를 얻어본다.
스큅: 하이라이트 메들리를 틱톡 클립으로 공개한 바와 같이 곡을 넘길 때마다 틱톡 FYP 스크롤을 내리는 느낌이 든다. 알고리즘은 10대~20대 SNS 크리에이터에 맞춰져 있다. 미니멀한 사운드에 캐치한 멜로디가 돋보이는 ‘Anti-Romantic’(현재 틱톡에서 한창 챌린지가 유행 중이기도 하다), 팝 펑크 리바이벌을 케이팝에 이식한 ‘0X1=LOVESONG’와 ‘디어 스푸트니크’, “Evolution of Boy Bands”라는 부제를 달아도 좋을 듯한 ‘Magic’, 장난기 넘치는 -그러나 가사에는 마냥 장난스럽지 않은 음울함이 서린- ‘소악행’, ‘밸런스 게임’, ‘No Rules’, 몇 년 전부터 뜨겁게 떠오른 하이퍼 팝의 힌트가 담긴 ‘Frost’까지. 한 곡 한 곡에서 빅히트 뮤직이 ‘Z세대’로 불리는 신세대의 조류를 기민하게 읽어냈음이 여실히 느껴진다. 핸드 마이크를 들고 등장한 타이틀곡 ‘0X1=LOVESONG’의 퍼포먼스에서는 새 시대의 록스타를 보여주겠다는 결의마저 읽힌다. 크레딧을 확인해보면 그 인상은 더욱 또렷해진다. ‘Anti-Romantic’에는 틱톡에서 ‘Mad at Disney’ 챌린지를 유행시킨 싱어송라이터 Salem Ilese와 Troye Sivan의 싱글을 다수 프로듀싱했던 Alex Hope가, ‘0X1=Love Song’에는 팝 펑크 리바이벌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Mod Sun이, ‘Frost’에는 틱톡 크리에이터들의 BGM으로 사랑받은 Ashnikko가 참여했다. Z세대 당사자인 멤버들이 수록곡 곳곳에 참여했음은 물론이다.
앨범의 서사 역시 세대론의 내러티브를 고스란히 옮겨왔다. 예기치 못하게 불어닥친 재난에 도망치고 맞서기를 반복하다 결국 얼어붙어 버리고 마는 콘셉트 트레일러의 스토리는 위기 상황 시 적극적인 대처를 포기하고 투쟁-도피-동결 반응(fight-flight-freeze response) 중 동결을 택하는 현세대의 패배감과 무기력을 반영한다. “세상 모든 게 선악과”인 “펑크이고 싶”던 나(정규 1집 수록곡 ‘New Rules’)는 “내 선택이 곧 현실”이지만 “어느 쪽도 난 안 확실”하기에 “나을지도 복불복이”라고 자조하기 시작했고(‘밸런스 게임’), 이럴 바엔 차라리 “다 같이 망”하자고 외치는(‘소악행’), “펑크이고 싶은 나였는데 펑 하고 터질 것만 같은 나”가 되었다(‘No Rules’). 그리고 “꿈의 장”이 “혼돈의 장”으로 뒤집힌, “꿈의 섬엔 혼란만이(‘Frost’)” 찾아온 상황에 멤버들은 “어느 날 내게 나타난 천사(‘0X1=LOVESONG’)”로 상정된 청중에게, 그리고 멤버들 서로에게 손을 뻗는다. “인물을 중심으로 리얼리티와 판타지를 교차시키는” “TXT의 메르헨적 스토리텔링”은 4월 공개한 애니메이션 필름 ‘끝날의 밤’을 거쳐 정규 2집에 이르러 절정에 치닫는다.
하이브 소속 가수의 앨범을 사면 별첨된 QR코드를 통해 위버스샵 애플리케이션에서 앨범과 콘셉트 등에 대한 만족도를 세세하게 묻는 설문조사를 할 수 있게 되어있다. (설문조사 완료 시에는 위버스샵에서 이용 가능한 포인트가 적립된다) “혼돈의 장: Freeze”는 하이브가 그러한 철저한 R&D 끝에 내놓은 답안처럼 보인다. 줄곧 내세워온 “4세대 아이돌”이라는 타이틀을 뒷받침하기 위한 빅히트 뮤직 A&R과 멤버들의 노고가 번뜩인다. 올해 이 정도 수준의 상업 음반을 더 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 “혼돈의 장: Freeze”는 케이팝 아이돌 4세대와 전 세계 Z세대 청중이 함께 감응하는 2021년의 케이팝을 독해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텍스트로 자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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