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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다고 볼 수 있는 ‘케이팝’과 ‘한국 힙합’은 애증이라 부를 만큼 불가분한 관계를 맺어왔다. 우선 현대 케이팝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몰고 온 태풍의 눈에는 랩이 있었고, 아이돌 1세대라 할 수 있는 H.O.T.도 브레이크 비트 위에서 춤을 추었다. ‘힙합 아이돌’을 전면에 내세우던 빅뱅과 방탄소년단의 대성공은 현재 케이팝 풍경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 힙합의 관점에서 봐도 선발 랩 그룹 드렁큰 타이거나 에픽하이, 다이나믹 듀오 등부터가 대중가요와 적극 교류해 왔고, 알앤비 신(scene)을 매개하거나 소위 ‘발라드 랩’이라 불리던 팝 랩의 확대 등이 그 교류를 점차 촉진했다. 그리고 TV 프로그램 <쇼미더머니> 시리즈를 기점으로 랩 음악에 대한 수요가 대폭 늘어나며, 팝 음악 입장에서도 장르의 핵심 문법에 몇 발짝 더 다가서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본문은 바로 그 전후, 2010년대 이후로 케이팝이 힙합 문법을 적극 구사하며 서로의 영역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8곡을 가져와 다루고자 한다. 케이팝의 한 요소였던 랩이 점차 발전하며 케이팝의 중심에 서게 된 2010년대 이후의 광경을 보기까지, 그 과정을 조금이나마 함께 되짚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순서는 음원 발매일 기준이다.
지드래곤 ‘One Of A Kind’
힙합의 스테레오타입 중 하나로 소위 ‘스웨그(swag)’라 불리는 자기 과시 문화가 있다. 특히 재력을 과시하는 ‘머니 스웨그’ 가사가 본격적으로 유입된 건 힙합 신에서 일리네어 레코드를 필두로 일으킨 파급과 TV 프로그램 <쇼미더머니>의 유행이 공명한 현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보다 한차례 앞서 지드래곤(G-DRAGON)이 본곡, ‘One Of A Kind’로 일으킨 돌풍을 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노랜 건물을 올리지”라고 거만한 듯 재치있게 노래하는 지드래곤의 퍼포먼스는 케이팝과 힙합 팬의 구분을 넘어 모두를 매료하기에 충분하고도 넘쳤다. 통통 튀는 베이스와 끈적하게 귓가를 맴도는 찹드-앤-스크루드(chopped-and-screwed) 기법의 샘플, 촘촘하고 정신없이 변주하는 드럼 패턴 등은 (‘트랩’으로 대표되는) 미국 남부식 힙합과 EDM의 경계를 오가는데, 이후 힙합과 팝을 구분하지 않고 유행하는 트랩 열풍을 떠올릴 때, 한국 대중음악에서 나름 선구적인 위치에 둘 수 있는 곡이다. 지드래곤과 그가 속한 빅뱅의 근간이 되는 콘셉트가 ‘힙합 아이돌’이었던 것을 기억하면 그간 시행착오를 겪어온 콘셉트의 방향을 성공적으로 제시한 결과물이라고 볼 수도 있고, 팝의 수용과 배척 의견이 격렬히 충돌하던 당시 국내 힙합 신에 있어서도 그 경계 따위는 무력화하며 패러다임을 바꿔버린 등장이었다.
방탄소년단 ‘No More Dream’
이제 명실상부 세계적인 팝스타가 된 방탄소년단의 시작은 ‘힙합 아이돌’이었고, 초기 대표곡 중 하나인 ‘No More Dream’을 보면 그 방향은 상당히 확고했다. 비록 비중에 비해 퍼포먼스는 성긴 편이었지만, 어쨌거나 곡 대부분을 차지하는 랩 파트와 더불어, 당대 유행과 달리 90년대 스타 서태지와 아이들 ‘Come Back Home’을 연상시키는 재즈 붐뱁 느낌의 베이스와 킥 질감을 내세운 점(BPM을 늦춰 트랩 리듬을 혼용하기는 했다), 그리고 역시 서태지와 아이들 ‘교실 이데아’, H.O.T. ‘전사의 후예’ 등 1세대 케이팝이 힙합 장르 로컬라이징을 시도하며 다룬 교육 비판이라는 주제를 다시금 가져온 점에서 알 수 있다. 이를 단순히 회귀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청소년에게는 언제나 현재성 및 보편성을 띠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들의 성공 요인으로 종종 꼽히는 포인트 중 하나가 ‘진정성’임을 감안할 때, 가수와 곡 중 화자의 간극이 좁은 편인 힙합 장르를 중요하게 다뤄온 커리어 초기작들은 팬덤과 신뢰의 기반을 쌓은 토양이 된다.
바비 ‘가드올리고 Bounce’
<쇼미더머니> 시리즈는 국내 힙합에 커다란 지각변동을 일으켰고, 그 인기는 대중가요에 힙합 장르를 안착시키는 데에 이르렀다. 해당 프로그램의 포맷이 본격적으로 갖춰지기 시작한 시즌 3의 우승자는 훗날 보이그룹 아이콘(iKON)에 소속해 데뷔하는 바비이고, 방송에서 프로듀서 역할로 참여한 일리네어 레코드 멤버들(도끼, 더콰이엇)과 함께 제작/공연한 경연곡들은 음원차트를 강타하며 국내에도 본격적인 트랩 열풍을 부르는 데 일조했다. ‘가드올리고 Bounce’는 중독적인 훅 메이킹과 더불어, 전형적이되 다양한 플로우를 벌스(verse) 내에서 조합하고 긁는 목소리를 십분 활용한 퍼포먼스로 강렬하고도 단단한 랩 뱅어를 만들어낸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우선 수많은 케이팝 아티스트가 여러 채널을 통해 랩 필드의 ‘인정’을 받고자 하던 흐름의 시작점이라는 것이다. 이는 “너네가 똥칠한 아이돌이란 타이틀 왜 내가 지우고 내가 닦어”로 대표되는 1절과 “힙합 신에 아이돌로 언더부심 다 깨부신 그런 놈이야”로 대표되는 2절 사이의 교집합, 즉 케이팝과 힙합의 경계를 부순 자리에 남은 ‘실력 증명’ 메시지로 알 수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랩 뮤지션 스윙스가 <쇼미더머니>와 컨트롤 디스전 등을 통해 제시한 국내 힙합의 새 패러다임과 오디션 프로그램 난립과 더불어 실력 경쟁이 요구되던 가요계의 니즈가 <쇼미더머니>가 확대 재생산한 장르 스테레오타입을 통해 맞닿은 걸 확인할 수 있다.
CL ‘Hello Bitches’
케이팝에 ‘팝’적인 면모를 듬뿍 담고 소위 ‘걸크러쉬’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케이팝 팬에게 특별한 위치에 자리 잡은 그룹, 2NE1 소속의 메인 래퍼 CL. 미국 시장 진출을 목표하며 충격적인 제목과 더불어 이목을 끈 ‘Hello Bitches’는 사실, 첫 소절(“엉덩이 빵빵빵”)을 듣자마자 좋은 곡이 될 수 있을 거란 기대는 도저히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본곡을 중요하게 뽑는 이유는 몇 가지 전형성에 있다. 우선 동시대 케이팝 랩의 절대 강자였던 YG 엔터테인먼트의 메인 프로듀서 테디가 주조한 랩 트랙의 몇몇 클리셰—과장된 브라스 샘플, 평면적인 전개와 갑작스러운 변주, 맛깔난(?) 비속어 사용 등—를 확인할 수 있는 점. 그리고 2010년대 여성 랩 아티스트군에게 거대한 영향을 미친 니키 미나즈(Nicki Minaj)의 스타일과 가장 맞닿아있고도 이를 ‘케이팝스럽게’ 재소화하는 CL의 존재감이 십분 발휘된 점을 꼽을 수 있겠다. 프로모션으로 댄스 퍼포먼스 비디오를 선택한 것은, 어쨌든 ‘Hello Bitches’가 랩 트랙인 동시에 댄스 팝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 또한 중점적으로 내세운 곡이라는 증거이고, 적어도 CL의 랩 벌스(verse)가 시작하고 그 차진 라임에 휘감기는 순간, “Wake up in my private jet”이라고 곡에서 화자가 노래하는 위치는 단번에 설득력을 얻는다.
지코 ‘BERMUDA TRIANGLE (Feat. 크러쉬, 딘)’
퍼포먼스와 프로듀싱을 모두 해내는 지코는, 개인적으로 케이팝 아티스트 가운데 독보적인 랩 테크니션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솔로 프로젝트는 종종 (전) 소속 그룹 블락비의 음악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그중 가장 하드 보일드한 색채를 담은 곡을 꼽으라면 바로 이 ‘BERMUDA TRIANGLE’을 떠올릴 수 있다. 차가운 가상 악기와 미니멀한 짜임새로 서늘하게 주조한 비트 위로, (훗날 그와 함께 ‘팬시 차일드’ 크루를 결성하는) 딘과 크러쉬 또한 날선 랩 싱잉으로 코러스를 채우는 가운데, 지코는 빽빽하고 변칙적인 라임 배치, 독특한 언어유희 펀치라인 등을 이용해 훌륭한 랩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그의 솔로 데뷔곡 ‘Tough Cookie’부터 보이는 지점이라 새삼스럽지만, 댄스 팝의 특징이 사라진, 그야말로 순도 높은(?) 랩 트랙이 당시 ‘케이팝 아이돌’에게서 나오는 광경은 오히려 장르 마니아층에서 더 신기하게 여겨지곤 했다. 2010년대에 이르러 랩 뮤직이 점차 가요 영역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케이팝 내에서도 각 장르와 정체성이 충돌하는 여러 시도가 있었는데, 장르에 온전히 수렴하는 쪽을 택한 ‘BERMUDA TRIANGLE’은 그 성공 사례 중 하나로 들 수 있겠다. 반면, 후일에 본 곡을 수록하는 “TELEVISION” 앨범은 재차 ‘케이팝’ 프로모션 방식을 취한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NCT 127 ‘Cherry Bomb’
NCT 127은 명시적으로 ‘힙합 아이돌’을 표방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 어떤 그룹보다 힙합에 진심이다.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Tyler, the Creator)의 음반 이름과 동일한 본곡은, 메인 프로듀서 뎀 조인츠(Dem Jointz)의 과감한 미니멀리즘 터치로 긴장감 있는 리듬을 만들며 그 제목이 지니던 실험성도 덩달아 전유했다. 이를테면 베이스와 불협하는 희미한 신시사이저 사이에 랩 챈트로 훅을 채우는 대담함은 처음엔 솔직히 당혹스러웠는데, 거기에 마크와 태용의 랩 퍼포먼스는 설득력을 부여한다. 그들이 부르는 가사는 공허하다. 인용과 상투 표현으로 점철되었는데, 바로 그런 명확한 메시지의 부재가 역설적으로 추상적인 심상을 덧씌우는 데 성공하는 요인이 된다. 이는 장르를 팝에 맞게 변용하는 대신, 그 장르 신 내부에서조차 감히 흉내 내기 힘든 코어를 이식하려 시도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동 레이블 출신 그룹인 f(x)의 “4 Walls” 앨범이 일렉트로닉 장르를 운용한 모습처럼 말이다. ‘Cherry Bomb’은 NCT가 케이팝 랩을 새로운 경지로 이끌어낸 방식이자, 섣불리 예측하기 힘든 ‘네오’에 그들이 다가가는 방식이다.
방탄소년단 ‘MIC Drop (Steve Aoki Remix) (Feat. Desiigner)’
*본문은 음원과 뮤직비디오 버전을 모두 다룹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방탄소년단의 시작은 ‘힙합 아이돌’이었다. 그 콘셉트에 맞게 종종 앨범에 ‘싸이퍼(Cypher; 여러 래퍼가 차례로 돌며 자유롭게 랩하는 형식)’ 트랙을 삽입하기도 했고, ‘MIC Drop’ 원곡 또한 (더 발전된 기량으로) 초기 콘셉트를 다시금 상기시키는 붐뱁 넘버였다. 스티브 아오키(Steve Aoki)가 EDM 트랩으로 리믹스한 트랙의 발표 시점(2017년)은 이미 ‘피 땀 눈물’, ‘DNA’ 등의 일렉트로닉 팝 넘버로 해외에 널리 알려진 이후지만, ‘DNA’ 이후 얼마 안 가 발표한 이 곡의 뮤직비디오는 그들의 ‘랩 트랙’ 중에서 가장 높은 유튜브 조회수를 기록하며, 그들이 표방해온 ‘힙합’ 콘셉트 이미지 또한 굳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음원 버전에서는 독특한 추임새와 발음의 멈블 랩 스타 디자이너(Desiigner)가 참여하면서 동시에 많은 가사가 영어로 수정되었는데, 이는 이후 ‘Dynamite’, ‘Butter’ 등 온전히 미주 팝 시장을 겨냥한 영어 트랙 행보의 시작을 가늠하게 한다.
전소연 ‘Is this bad b****** number? (feat. 이영지, 비비)’
케이팝 아티스트 중 손꼽히는 랩 테크니션을 논할 때, (여자)아이들 소속 전소연의 이름을 빠뜨리기란 쉽지 않다. 랩, 보컬, 댄스를 비롯한 퍼포먼스는 물론 프로듀싱까지도 겸하는 놀라운 기량의 보유자로, 솔로 앨범 “Windy”의 발표 소식은 그녀의 넓고 깊은 스펙트럼을 기대하게 했다. 그 마지막 트랙 ‘Is this bad b****** number?’는 전화 다이얼 소리로 탑 라인을 짠 간결하고 재치 있는 비트 위로, 근래 가장 핫한 세 여성 블랙 뮤직 아티스트의 기량을 감상할 수 있는 흥미로운 곡이다(비슷한 콘셉트의 케이팝 랩 곡으로 지드래곤과 타블로, 도끼가 참여한 ‘불 붙여봐라’가 떠오른다). <고등래퍼 3> 우승자 출신 이영지가 묵직한 톤으로 밀어붙이는 랩과, 알앤비/랩 필드 초신성 비비의 몽롱한 듯 호러틱한 랩 싱잉, 그리고 전소연이 리듬을 수축하고 이완하며 “제트[세대]를 이끄는아이돌 래퍼”라 자랑하는 스웨그까지, 팝은 물론 랩 팬 모두 만족할 만한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점이 몇 가지 있는데, 먼저 여전히 쉽게 보기 힘든 여성 싸이퍼 트랙이라는 점이 그렇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바로 ‘bad bitch’라는 민감한 소재를 다루는 방식으로, 이는 그동안 남성 아티스트가 여성을 규정하던 프레임이면서도, 동시에 이를 역이용해 여성 아티스트의 아이덴티티로 구축해온 소재이기도 했다(앞서 CL ‘Hello Bitches’ 파트에서 서술한 니키 미나즈가 그 대표적인 경우다). 본 곡에서는 ‘bad bitch’라는 표현에 세 뮤지션이 대응하는 방식이 모두 다른데, 이영지는 자신의 행보를 내세워 호명 권위를 전복하고, 비비 파트는 ‘bad’라는 형용사를 재해석한다. 이 작업이 이뤄진 뒤 “눈앞에 두고 전화를 했네” 하며 일갈하는 전소연 파트에 이르러서 그 수식어의 비하 의도는 힘을 잃는다.
Honorable Mention
- 슈프림팀 ‘땡땡땡’
- 지드래곤 ‘불 붙여봐라 (Feat. 타블로, 도끼)’
- 에픽하이 ‘Born Hater (Feat. 빈지노, 버벌진트, 비아이, 송민호, 바비)’
- 박재범 ‘몸매 (Feat. 어글리덕)’
- 송민호 ‘겁 (Feat. 태양)’
- NCT U ‘일곱 번째 감각’
- 지코 ‘FANXY CHILD (Feat. 딘, 크러쉬, 페노메코)’
- Agust D ‘대취타’
글: 만능초보
네이버 블로그, 포스타입에 리뷰와 픽션을 씁니다. 동인음악팀 “Illusion World”에서 개사 활동을 합니다. Epik High brought me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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