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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가 배제된 채 멤버들의 보컬만 뚜렷하게 들리는 하이라이트 메들리 영상을 재생하자 단번에 “색안경을 끼고 보지 마요 / 난 좀 다른 여자인데”라는 가사가 귀에 훅 들어온다. 이 대목에서 “여자가 쉽게 맘을 주면 안 돼”라는 가사가 포함되었던, 블랙아이드필승이 제작한 곡 중 가장 크게 흥행한 트와이스의 ‘Cheer Up’이 떠올랐다.
케이팝이 다양한 취향을 가진 청자를 포섭하기 위한 전략은 점점 다채로워졌지만, 가사의 측면에서 활용되었던 전략 중 하나는 가사에 등장하는 인물의 성별 정보를 배제하는 것이었다. 단지 인물들이 ‘나’, ‘너’로서만 제시되어도 리스너들은 인물들의 성별을 자유롭게 상정해놓고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는 성별 정보가 인지될 수 있는 가수가 배제된 가사 그 자체의 텍스트로만 감상할 때 그 기능이 잘 살아나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나’와 ‘너’만 있다고 해도 우리는 음원 내에서 들려오는 가수의 목소리나 뮤직비디오에서 해당 가사를 외치는 가수의 외모를 통해 성별 정보를 추측하거나 감지하여 통상의 맥락과 접해 파악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스테이씨는 다시 ‘여자’라는 정보를 등장시킨다. 왜? 자신들의 음악을 향유할 이들에게 “going down”할 “STAYC ‘girls’”이니까. 스테이씨를 수행하는 멤버들의 비주얼에서 ‘여자’라는 정보를 연상시키기 좋은 ‘STEROTYPE’을 드러내고 있으니까. 역할이나 판단이 배제된 직관적인 뉘앙스로 다가가는 것이다. ‘Cheer Up’에서 보였던 다소 지엽적인 뉘앙스와 그것이 배제된 곡들이 즐비한 와중에 다시 직관적인 뉘앙스를 등장시킨 블랙아이드필승, 그리고 그를 소화하는 스테이씨는 현 케이팝 신(scene)에서 특유의 독창적인 면모를 발산하고 있다.
‘So Bad’, ‘ASAP’부터 이번 ‘색안경’까지 스테이씨의 역대 활동곡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나’와 ‘너’에 대한 정보의 비대칭성이다. 데뷔곡 ‘So Bad’의 “I want you so bad”와 같은 가사는 너에 대한 나의 감정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기폭제 같은 표현이었고, 속도감이 넘치는 사운드 만큼이나 내가 사랑을 얼마나 열정적으로 갈구하고 있는지에 대한 감정 정보가 반복적이고 분명하게 나타났다. 반면 너에 관한 정보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데뷔곡보다 속도감은 덜하면서도 더 면밀한 구성을 선보였던 ‘ASAP’에서는 그만큼 “참을성이 없”거나 “까탈스럽”거나 한 나의 취향이나 시선 같은 구체적인 정보를 더 조목조목 읊는 발화를 보였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너’는 ‘나’와 동일시된 대상 정도로만 등장할 뿐이다. 특히나 성별 정보를 설득력 없는 이유로 단정해놓고(“여자이니까”, “Be a man” 같은 표현) 자신의 위치나 행위를 수동적으로 제한했던 ‘Cheer Up’의 “더 다가와”와는 다르게, ‘ASAP’의 “눈앞에 나타나 줘”라는 표현은 단순히 (성별을 한쪽으로 확정할 수 없는) 대상이 나타나길 바란다는 의미를 넘어 인연이 이어지길 생생하게 바라고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색안경’에서는 ‘너’에 대한 정보가 극도로 최소화되어 “모두”라는 정보 안에 ‘너’를 뭉뚱그리기에 이른다. 그 뒤로 화자는 앞선 활동곡의 기조를 이어받아 자기에 관한 정보와 인식을 풀어낸다. 그리고 그를 보조해주는 이유가 곳곳에 배치되어있는 식이다.
‘예쁘다’라는 표현의 일종의 코르셋적인 기능에 있어 수많은 비판이 제기되었고, 여전히 제기되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스테이씨는 ‘예쁘다’에 수많은 수식처럼 결부된 이해관계를 걷어내고 단지 ‘내가 꾸미는 걸 좋아하니까’, ‘예쁜 걸 좋아하니까’, 내가 좋아서 하는 행위들에 대한 자기 긍정의 이유를 분명히 밝힌다. 브릿지 파트에 이르러서는 “드러나는 모습뿐”이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곳곳에서 훅 “색안경을 끼고 보지 마요”를 외치는 건 그럼에도 이를 파악하지 못하는 일부 리스너들을 위해 일종의 경계 기능을 작용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또한 “너무 세게 안으면 숨 막혀요”라는 표현에서 “세게 안”는 대상의 성별 정보가 특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혹여 리스너가 그 대상의 성별을 상정한다면 그것이 일종의 ‘STEROTYPE’이 아닐까 하는 경계 기능을 발휘되는 것 역시 흥미롭게 느껴진다.
뮤직비디오에서 가장 매력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수민과 시은이 서로 포옹하는 장면일 것이다. 어떠한 클리셰적인 연출 의도도 느껴지지 않고 단지 안아준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중고생 시절에 친했던 친구가 좋아서 안아주던 모습이 생각날 수도 있고, 누군가는 퀴어 코드를 연관 지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추측이나 판단이지 절대적인 정답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드러나는 모습”이자 그 행위 자체이다. 행위에 대한 정보는 최대한 당차고 솔직하게, 구체적으로 밝히되, 의미에 대한 정보는 리스너들에게 맡겨두는 것. 드러낼 것은 드러내고 드러내지 않는 것은 구태여 드러내지 않는 것. 이것이 스테이씨가 선도하려 하는 구체적이면서도 구체적이지 않은 문화다.
글: 차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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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부터 원.소.카. 트로이카 전성시대를 접하며 K-POP에 입문하였고, 동시에 3대 기획사라는 개념을 알게 되며 본격적으로 K-POP의 산업적인 매력에 빠졌다. K-POP에 대해 분석적인 댓글이나 블로그 글을 남기는 데에서 쾌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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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reply on “독자 기고 : 스테이씨가 선도하는 구체적이면서 구체적이지 않은 문화 – 스테이씨 ‘색안경 (STEREOTYPE)’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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