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아이돌팝 발매작 중 정규앨범을 중심으로 주목할 만한 앨범을 다룬다. 골든차일드, 김우진, 선미, 더보이즈, 온앤오프, 레드벨벳, CIX, 크래비티, 스트레이키즈, 베리베리 등.
마노: 팀으로서는 두 번째로 발매하는 정규 앨범. 소위 ‘청순-청량’을 전면에 내세웠던 초창기를 지나 일종의 ‘리부트’를 거치며 음악적 색채가 상당히 많이 변했다는 인상인데, 그럼에도 수록곡이나 싱글 발매작 등에서 청량 노선에의 의지(?)가 엿보이곤 했다. 이번 앨범 역시 그러하다. 타이틀곡 ‘Ra Pam Pam’이 후끈한 열감으로 가득한 뭄바톤이라는 것이 이질적일 정도로 다른 수록곡들은 대체로 청량 스펙트럼에 들어맞는 라인업을 선보이고 있다. 다만 전체적으로 부조화가 상당히 심한 편인데, 초창기의 One Direction을 연상하게 하는 팝 록(‘Bottom of The Ocean’)부터 숨이 벅차도록 내달리는 디스코(‘빵빠레’), 재지(jazzy)한 무드의 미디움 템포(‘Singing In The Rain’) 등이 연달아 이어지는 식으로 트랙 구성이 다소 들쭉날쭉하고 분절적이라 풀 렝스 앨범 특유의 유기적인 흐름이 감지되지 않는다. 유닛곡이나 솔로곡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각 멤버들에게 상당히 잘 맞는 재질로 맞춰져 있고 완성도도 각각 준수하나, 막상 모아놓고 보니 나쁜 의미의 ‘싱글 컬렉션’이 되고 말았다는 인상. 무엇보다 전체적으로 톤이 고르지 않아 마치 명도와 채도가 다른 상·하의를 입은 것처럼 어색하게 느껴진다. 첫 정규작 “Re-boot”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보였는데, 앞으로 디스코그래피를 확장하는 데 있어서 신중함을 기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하루살이: 앨범과 동명의 인트로 ‘Game Changer’가 기세 좋게 뻗어 나가며 장엄한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그 뒤로 이어지는 트랙들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 양을 가득 채운 ‘Game Changer’와 달리 타이틀 ‘Ra Pam Pam’은 중간중간 밀도를 빼 음각을 만든다. ‘Bottom Of The Ocean’은 10년 전 One Direction을, ‘Singing In The Rain (Joo Chan & Bo Min)’은 수지, 백현의 ‘Dream’을 연상케 한다. ‘빵빠레’, ‘POPPIN’ (Y & Jang Jun)’ 등 디스코 스타일도 얼핏 등장한다. 정규 1집에 이어 이번 2집도 거의 절반을 유닛곡과 솔로곡으로 채웠는데, 각기 다른 색으로 적당한 완성도를 갖췄으나 연결이 상그러워 팀의 전체적인 이미지는 모호하다.
마노: 긴장감 넘치는 웅장한 사운드 위로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비장하게 선언하는 내레이션이 지나간다(‘Intro : Alea iacta est.’). ‘폭력이나 억압과 같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나의 길을 꿋꿋이 걷겠노라’는 선언 바로 그 후, 힘차게 상승하는 멜로디를 빌어 앞으로의 희망을 노래하고(‘Ready Now’) 느긋한 리듬 위에서 성장통을 호소하다(‘My growing pains’) 불안 속에서도 꿈을 좇아 날아오르리라 다짐하고(‘Still dream’), 미니멀한 사운드 속에서 ‘나만의 우주’에 대한 소중함을 이야기하며(‘In my space’), 시간과 시간 사이에서 더 좋은 내일을 염원한다(‘Purple Sky’). 대동소이하나, 결국 관통하는 주제는 ‘꿈’이다. 고난과 역경이 있었음에도 결국 다시 일어서 날아오르고 말겠다는 의지의 발현 그 자체다. EP 전체를 이루는 기조 역시 이를 뒷받침하듯 대체로 힘차고 희망적이다. 아티스트 본인이 직접 손길을 더한 노랫말은 그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와 함께 무척이나 간명한 메시지와 내러티브를 그려낸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룹을 벗어나 홀로서기를 선언한 솔로 아티스트의 출사표로서는 상당히 훌륭하고 모범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메시지와 내러티브는 아티스트 본인에 의해 간단히 파훼되어 버리고 만다. 앨범 소개문이나 인트로 트랙의 나레이션은 착취, 학대, 폭력, 강압 등을 ‘결코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들’로 규정하지만, 이는 아티스트의 자가당착에 의해 설득력과 당위를 잃는다. 만일 ‘폭력은 결코 벌어지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적어도 그 자신이 폭력의 주체가 되진 말았어야 했다. 타인의 고통을 도구화하여 ‘역경과 고난’을 이야기해서는 안 됐다. 아티스트를 향한 불명예스러운 꼬리표를 나름의 방식으로 전유하고자 했다면, 그것은 완전히 다른 방식이어야 했다. 아니, 전유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말았어야 했다. 여기서 아티스트를 둘러싼 루머의 진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의 고통을 ‘꿈을 위해 극복해야 할 고난과 역경’ 쯤으로 도구화한 시점에서, 이 앨범의 메시지는 존재 자체가 이미 폭력이기 때문이다. ‘폭력에 반대한다’는 메시지가 역으로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되어버리는 자가당착에 의해, 앨범의 내러티브 역시 힘을 잃고 공허해지고 말았다. 반복하건대, 그런 ‘노이즈 마케팅’은 결코 해서는 안 됐다. 정말로 ‘꿈과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말이다.
예미: “WARNING” 이후 3년 만의 EP를 선보인 선미는 능숙한 디바의 면모를 뽐내는 동시에 행간에 자신을 흘려 넣어 진솔함을 보여준다. 오랜 파트너인 FRANTS의 곡이 앨범의 주를 이루는 반면, 타이틀곡인 ‘You can’t sit with us’와 ‘SUNNY’에서는 새로운 작가진과 협업하면서도 레트로한 댄스 팝 중심의 기존 색채를 이어갔다. 로맨틱 관계 속 여성의 여러 감정과 상황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한 가사는 이상향인 ‘good girl’과 실제 자신과의 간극, 타인의 시선과 자아의 관계 등을 다루어, ‘자연인 여성’과 ‘여성 셀러브리티’ 모두의 고민으로 읽혔다. 주목할 점은 ‘6분의1’, ‘Borderline’ 등에 등장하는 정신 질환 관련 언급이다. 여러 매체에서 자신의 정신 질환을 고백한 바 있는 선미는 “6분의1” 앨범 곳곳에 자신의 불안정함을 표현하는 동시에 질환을 품은 채 살아가는 분투를 그려냈다. 선미의 가사는 국내외 팝과 힙합 등지에서 통용되는 이모(emo)적인 표현 범주 내에 있지만, 케이팝 여성 아이돌에게는 보기 드문 파격인 동시에 진솔한 자기 반영이다. “WARNING”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정하고 선포한 선미는 부지런한 활동과 연구로 자신을 업그레이드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 결과물이 “6분의1”이다.
조은재: '놀이공원'이라는 대주제 아래 여러 가지 놀이기구처럼 연출된 트랙이 산재해있다. 다만 놀이공원치고는 지나치게 깨끗하게 표백되고 다듬어진 사운드가 아쉬운데, 마치 인파가 뜸해진 이 시국의 한적한 놀이공원을 메타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듯한 인상마저 준다. 이런 인상은 타이틀곡 'THRILL RIDE'의 뮤직비디오에서도 이어지는데, 바캉스룩으로 한껏 꾸민 패션과 세트 안에 연출된 인공 풀과 인공 바람 등이 이질감을 만들면서 어쩐지 사운드만큼 시원한 감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집콕 바캉스'를 연상하게 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로드 투 킹덤>과 <킹덤>에서의 더보이즈에 매료되었다면 'Nightmares'가 반가울 법하지만, 그마저도 더보이즈의 장점이었던 각 잡힌 퍼포먼스 없이 오디오 트랙으로만 접했을 때는 충분한 매력을 느끼기 힘들어 아쉽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적당히 레이드 백 된 애티튜드만큼은 누가 뭐래도 현시대의 '킹덤'은 더보이즈의 것이라는 사실을 유감없이 과시한다. 전보다 훨씬 담백하게 다듬어진 선우의 랩과 한층 단단해진 상연, 뉴의 보컬이 반갑다.
마노: 데뷔작을 포함하여 네 번째로 여름 시즌에 발매한, 팀으로서는 처음 시도하는 시즌 스페셜 EP. 모든 곡의 제목에 ‘여름’이 붙어있다는 점이 상당히 이색적인데, 여름이라는 계절 안에서 느낄 수 있는 가지각색의 심상을 제목에서부터 암시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모든 수록곡이 그 가지각색의 심상을 나름의 방식과 장르로 표현해내며 제 몫을 하고 있다. “우린 보사노바에 취해”라는 가사 그대로 산뜻한 보사노바 리듬을 빌어 주체할 수 없는 설렘을 이야기하거나(‘여름 시’), 달콤하고 나른한 재즈풍 어쿠스틱 세션에 간결한 보컬 구성을 얹어 한여름의 낭만을 노래하거나(‘여름의 모양’), 까슬한 레게 리듬과 금속성의 퓨처 베이스 사운드를 날실과 씨실처럼 촘촘히 엮어내는 한편(‘여름의 온도’), 여름 끄트머리의 아련함을 멜로우한 AOR 사운드로 표현하는(‘여름의 끝’) 식이다. 도입부의 천진한 합창이 귀를 잡아끄는 타이틀곡 ‘여름 쏙’은 군데군데 흩뿌려진 명랑한 플루트 소리가 특히 인상적인데(이번에도 변함없이 프로듀싱을 맡은 황현이 직접 연주했다는 뒷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미 극강의 청량함을 자랑하는 곡에 또 한 번 한 꼬집의 청량을 더하는 역할을 하며 곡이 표현하는 공감각을 극대화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후반부에서는 브릿지 파트 끝 무렵의 전조와 함께 도입부의 합창을 변주하며 어떠한 ‘벅차오름’을 듣는 이에게 선사한다. 다양한 시간대에서 하나씩 따온 듯한 조각조각의 여름을 집중도 있게 그려내며 여태껏 쌓아 올린 음악적 세계관을 견고히 하고 있는데, 이후에 팀이 어떤 방향성을 갖고 이를 확장해나갈지 여부가 앞으로 중요한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음악적 세계관의 확장 여부가 앞으로의 팀 커리어에 있어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뜻도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름의 끝’은 반드시 놓치지 않길 강력히 권한다.
랜디: 레드벨벳은 워낙에 수록곡 맛집으로 소문난 팀이었다. 그래서 종종 '빨간 맛'처럼 애초에 타이틀곡으로 기획된 임팩트 있는 곡 말고, 조금 심심하더라도 세련된 수록곡이 타이틀이 되면은 어떤 느낌일까 하고 상상했다. 'Queendom'은 그 상상의 파일럿 운행 같은 곡이다. 후렴의 마법 주문 같은 스캣 가사 정도를 빼면 마땅한 후크가 없다. 그렇지만 곡의 구성 자체는 곡 속에 산재한 플루트 소리처럼 가볍고 세련돼서 흠잡을 곳 역시 없다. 재즈에서 빌려온 코드나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신스 덕에 시부야 케이 히트곡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장르는 다르지만 S.E.S가 한창 일본 활동을 하던 시기의 음악 같은 향수가 느껴지기도 한다. 적당히 희망적인 응원 가사에서 'めぐりあう世界' 같은 곡이 떠오른다.
레드벨벳의 보컬은 대체로 가볍고 깨끗하며 정확한 음감을 자랑한다. 멤버 대부분이 음역대에 관계없이 소리의 베이스가 적은 라이트한 음색이다. 이같은 특징은 'Psycho'와 같은 극도로 섬세하고 예민한 곡에서 특히 빛난다. 가장 완벽한 맞춤옷 같던 'Psycho' 활동이 뜻하지 않게 일찍 종료되며, 오랜만의 컴백곡에도 비슷한 지점을 노리기를 기대했지만, 계절 탓인지 기대보다는 훨씬 느슨한 앨범이 나왔다.
그러나 힘을 덜 준 음악에도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기에 그대로 즐기기에 무리가 없다. 마돈나를 연상시키는 수록곡 'Pose'는 호기로운 인트로와는 달리 꽤 단순한 멜로디가 이어지는데, 제목에서 f(x)의 Rude Love 같은 시카고 하우스를 기대한 탓에 그러한 후렴이 반전처럼 느껴졌다. 랩에 좀 더 묵직한 펀치감을 실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레드벨벳의 보컬과 가장 상성이 잘 맞는 곡으로는 'Knock on Wood'를 꼽고 싶다. 앞서 말한 가볍고 깨끗한 보컬이 잘게 쪼갠 리듬에 어우러져 중력을 거슬러 상승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일본 싱글 'Sappy'에서도 보여줬듯 변칙적인 리듬을 수월하게 소화하는 점은 레드벨벳의 또 다른 강점이기도 하다.)
심댱: “The ReVe Festival”이 지나고 난 후, 호화로움 대신 등장한 것은 레드벨벳이 쌓아 올린 레거시의 조각들이었다.
‘Queendom’은 약간 흐린 날의 공기 마냥 무게 있는 신스에도 가라앉을 듯 가라앉지 않는 멜로디로 구성되었다. 높은 기세로 돌진하지 않아도 오묘하게 고조되는 이유는 자칫 울적하게 들릴 무드를 상쇄하는 긍정적인 가사와 이들의 텐션 때문으로 보인다. 이 구름 사이로 비치는 무지개(‘Queendom’) 너머에는 뮤직비디오 곳곳에서 보이던 이들의 발자취를 살펴볼 수 있다. ‘Pose’에는 '멋있게'와 같은 스왝과 담대함이 느껴지고, ‘Knock On Wood’는 ‘Somethin Kinda Crazy’의 로맨스에 마법스러운 설정을 더했다. ‘Better Be’, ‘Pushin' N Pullin'’에서는 청자를 어르는 능청스러움과 솔직함이 교차하며 관계를 주도하는 그들의 성장을 엿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여름 앨범에 들어갈 법한 노곤한 아웃트로 ‘다시, 여름’까지 이미 아는 레드벨벳 팔레트에 레이어를 살짝씩 가감해냈다. 낮은 채도의 타이틀곡과는 달리 수록곡으로 던지는 분위기는 “Russian Roulette”이나 “Rookie”의 수록곡처럼 따스해서, 레드벨벳의 정다운 보컬을 좋아한다면 반가울 법하다.
다만 ‘Pose’처럼 번쩍이는 존재감을 드러낼 트랙 두엇이 더 들어갔더라면 이 익숙한 낯섦을 더 즐길 수 있었겠다는 아쉬움은 있다. 공백기를 너끈히 메울 최선으로 보여도 이들의 최대치나 베스트로는 보이지 않기에, (참 쉬운 말이지만) 이들의 다음을 조금 더 기대하게 된다.
하루살이: 밸런스 좋은 오 드 코롱같다. 살짝 타격감 있는 ‘BAD DREAM’으로 시작해, 타이틀 ‘WAVE’부터는 상쾌함을 유지하다 ‘Here For You’로 잔잔하고 깔끔하게 마무리되기까지 자연스럽게 흐른다. 전반적으로 전작 ‘Cinema’의 무드를 잇는 것에 상당히 신경 쓴 듯 들린다. 청량을 추구하되 톡 쏘는 사운드보다 안개 낀 듯한 신시사이저와 아득한 리버브 사용이 잦다. 선명하게 시선을 끄는 부분은 없으나 크게 허전한 구석을 찾기도 힘들다. ‘WAVE’는 변화무쌍한 파도와 번개를 형상화한 안무로 선명도를 조금 더 확보한다. 다만 CCM스러운 주제와 이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가사의 무게/길이가 리듬감을 떨어뜨리는 감이 있는데 발음을 가볍게 흘려 어느 정도 무마한다. 개인적인 취향으론 은은한 여운을 남기는 ‘ICE’를 추천한다.
조은재: 아이돌 앨범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백화점식 구성임에도 제법 준수한 퀄리티를 자랑했던 데뷔 앨범 "HIDEOUT: REMEMBER WHO WE ARE"가 떠오르는데, 유기성의 측면에서는 그때보다 훨씬 발전했다. 데뷔 앨범에서는 장르에 따라 톤 앤드 매너가 바뀌었던 보컬도 이제는 일정한 톤으로 변화무쌍한 트랙 사이에서 자기 색깔을 드러낸다. 보컬이 전반적으로 힙합보다 팝에 더 어울리기 때문에 앨범 후반에 배치된 'Grand Prix', 'Divin'', 'GO GO'나 커플링 곡이었던 'VENI VIDI VICI'가 귀를 잡아당기는데, 두 래퍼마저 정통 힙합보다 팝에서 기량을 더 훌륭하게 발휘하는 듯하다. 다양한 비주얼 콘셉트와 퍼포먼스를 소화하는 능력은 이미 충분히 보여준 듯하고, 보컬과 랩 스킬도 안정 단계에 접어들고 있는 듯하니,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음악적 방향성을 설계해도 좋겠다는 기대가 생긴다. '어디로든 간다'는 메시지는 여러 곡의 가사에서 이미 여러 번 나왔는데, 그래서 어디로 갈지에 대해서도 슬슬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아직은 맥거핀으로만 가득하다는 인상이다.
예미: 크래비티의 첫 정규 앨범은 팀이 “HIDEOUT” 3부작을 거쳐 첫 정규 앨범에 이르기까지 벼려 온 특유의 바이브가 인상적이었다. 날카로운 사운드와 역동적인 퍼포먼스 속에서도 일련의 평정을 견지하는 멤버들의 인상과 보컬 톤, 코러스 운용 방식은 타 팀과 구별되는 확실한 차별점을 만들었다. 이러한 개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표출된 곡이 타이틀곡 ‘Gas Pedal’과 커플링 곡 ‘VENI VIDI VICI’라는 점이 고무적이다. 다양한 스타일의 수록곡을 일관된 톤으로 소화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 멤버들의 역량이 보이는데, 무엇이 그중 자신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지 파악해가고 있다는 점이 앞으로 크래비티를 더 기대하게 만든다. 크래비티가 낼 수 있는 독보적인 무드에 빠져들게 되는 첫 정규앨범.
마노: 약 1년 만에 발매하는 사상 두 번째 정규 앨범. 직역하자면 ‘쉽지 않음’을 의미하기도, 읽기에 따라 ‘시끄러움(noisy)’을 의미하기도 하는, 다분히 언어유희를 의도한 중의적인 타이틀처럼 앨범의 구성 역시 종잡을 수 없이 소란스럽다. 시작하자마자 거칠게 긁어대는 일렉트릭 기타 리프 위에서 “뚜뚜뚜뚜뚜뚜 웃겨? / 머리가 아픈 게 웃겨?” 하며 팀을 겨냥한 조롱 어린 반응에 일침을 놓아버리는(‘CHEESE’) 특유의 패기와, 의태어 ‘씩’과 감탄사 ‘Sick’을 이어버리는 뻔뻔할 정도의 재기발랄함(‘SSICK’) 역시 여전하다. 힘 있는 텐션으로 몰아치는 초반부에 비해 중반부는 다소 평이하게 흘러가다, 후반부는 유닛곡들이 유기성 없이 난잡하게 뒤섞인 인상을 주어 전체적인 흐름은 아쉬운 편. 초반부-중반부-후반부-보너스 트랙 구간(‘킹덤’ 경연곡 ‘WOLFGANG’, 믹스테이프 ‘애’)과 같은 식으로 분절되어있는 구성이 과연 의도였을지 아니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러닝타임 내내 흐르는 애티튜드만큼은 차마 외면하기가 어려워 결국 설득당하고 마는 면도 있다. ‘4세대 아이돌’의 어떠한 정수를 보여주는 앨범.
스큅: “뚜뚜뚜뚜뚜뚜 웃겨? / 머리가 아픈 게 웃겨? / A급 감성이 웃겨? / 하 CHEESE” 지난 활동곡들에 대한 일각의 비웃음을 도마 위에 올리며 시작하는 스트레이키즈의 2집 “NOEASY”는 유쾌한 도발로 들어차 있다. 14곡에 달하는 볼륨부터도 도발적이지만, 특히 ‘CHEESE’에서 ‘씩’으로 이어지는 초반부 흐름이 괄목할 만하다. 범상치 않은 가사를 뻔뻔하게 내뱉는 보컬과 그에 걸맞은 장난스러운 사운드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신나게 이기죽거리는 곡들의 면면에서 4세대 대표 아이돌의 반열에 오른 그룹의 기백이 느껴진다. 여러 뉘앙스의 곡들이 이리저리 뒤섞인 중후반부는 미처 교통정리가 되지 않은 듯한 느낌도 들지만, 설득보다는 선언에 방점이 찍힌 “NOEASY”한 앨범인 만큼 이마저도 결국 스트레이키즈의 두둑한 객기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국악기의 활용으로 신선함을 더하려 했으나 ‘신메뉴’의 답습이라는 인상이 더 강하게 남는 타이틀곡 ‘소리꾼’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스큅: 상투적인 소재와 패션에 방심하는 것도 잠시, 까끌까끌한 글리치 합 사운드가 귀를 잡아챈다. 음산하고 미스터리한 이미지로 노선 변경을 한 이후 무작정 완력만 늘려나갔던 작년의 “Face” 3부작(‘Layback’, ‘Thunder’, ‘G.B.T.B.’)의 흐름에 비하면, 올해 ‘Get Away’로 시작된 “SERIES O”에서는 완급조절에 신경 쓰는 가운데 새로움을 더해보려는 기색이 분명하게 감지된다. 수록곡들도 ‘Trigger’의 뉘앙스를 준수하게 이어가는 가운데, 이전 앨범들과 동일하게 멤버들이 작사/작곡에 참여한 곡(청량한 디스코 무드의 3번 트랙 ‘Prom’)만이 유독 튀는 행색을 하고 있다. 회사가 내세우는 그룹의 이미지와 멤버들 개개인의 캐릭터가 상충하는 구도가 반복적으로 두드러지는 것은 분명 보다 주도면밀한 프로듀싱이 필요하다는 신호일 터. 아무리 좋은 곡과 콘셉트라도 그를 수행하는 퍼포머가 고려되지 않는다면 그 효력이 온전히 발휘되지 못할 것이다. 괴위(魁偉)한 비주얼과 날카로운 보컬/랩을 지녔던 자사 선배 그룹 빅스에게는 파괴적이고 콘셉추얼한 음산함이 곧잘 어울렸지만, 반대 성향을 지닌 베리베리에게까지 그를 적용할 수 있을지는 아직도 모호해 보인다.
심댱: 게임 효과음과 귓속을 굴러다니는 자잘한 쇠공 사이, 청량감이 살풋 깃든 인트로 리프는 ‘Get Away’의 똑딱거리는 효과와 엇비슷하게 연출된다. 이 리프를 기반으로 텐션이 오르내리면서 서늘하고 날렵한 느낌을 더해냈다. 베리베리가 소화할 수 있는 스케일과 무게감으로 적당히 배합된 것으로 보아 전작에서 어느 정도 감을 잡은 듯하다. 뮤직비디오는 큐빅으로 장식된 해골 모형, 민찬의 등장 전 빠르게 노출되는 ‘Get Away’ 뮤직비디오의 장면 등 전작의 요소를 차용하며 “Series ‘O’”의 연결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수록곡 ‘Prom’에 있다. 속도감 있게 쏘아대고 꼬아대는 ‘Underdog’, ‘Heart Attack’ 사이 배치된 'Prom'은 맥이 조금 빠질 정도로 이들에게 잘 녹아든다. 프롬 파티 속 왕자님이 2년 가까이 구현하려 했던 다크한 아이돌보다 더 자연스럽게 들리다니. 심지어 다시금 앨범을 들을 때, 이들이 특정 이미지로 가고자 하는 완력이 도드라져 야속해 보일 정도다. (너무 잘해서 아쉽다는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청량에서 다크로 콘셉트 방향성을 크게 바꾼 만큼 그 반동이 거셌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트랙리스트에 통일성이 조금 더 부여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파도처럼 부서지는 킥, 단조의 멜로디로 비릿함이 감도는 ‘Heart Attack’으로 얼추 수습된다. 이들이 제시하는 새로운 콘셉트에 확신이 들 수 있게, 정돈된 모양새와 뾰족한 방향 설정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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