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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2021 Winter SMTOWN : SMCU EXPRESS〉 (이하 ‘SMCU EXPRESS’) 앨범 속 레드벨벳의 미약한 존재감으로 인한 실망감을 달래고자 본고를 작성하게 됐다. ‘SMCU EXPRESS’는 사내 대부분의 아티스트 별로 피지컬 앨범을 제작했지만, 대부분의 팬들이 트랙리스트 구성에 원성을 높일 정도로 ‘내 가수가 참여하지 않은 내 가수의 앨범’이다. 그럼에도 앨범 판매까지 가능한 이유는 굿즈에 정통한 SM의 ‘비주얼만으로도 소비하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아닐까? 아쉬움은 뒤로 하고 신년 무료 온라인 공연에서라도 팬들의 갈증을 채워주기를 바라본다. (*본고는 2022년 1월 1일 이전에 작성되었다.)
정규 1집 “The Red”를 거쳐 정규 2집 “Perfect Velvet”, 정규 2집 리패키지 “The Perfect Red Velvet”에 이르렀을 때 레드벨벳은 이미 마치 사춘기를 지나 어른이 되었다는 듯, 멤버들조차 그룹의 정체성에 더 이상 헷갈림이 없다는 듯 당당한 성숙함을 보여주었다. “Perfect Velvet”의 타이틀곡 ‘피카부’의 뮤직비디오에서는 너무나도 사랑이 가벼운 풍속 속 천연덕스러운 플레이어가 ‘남성 주체-여성 대상’의 구도를 전복시켜 피자 배달부들을 살인-소유하며, 여성도 이기적인 사랑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냐는 흥미로움을 남겼다. (가사는 보다 열려 있다. 여성 화자가 ‘너는 좀 다르다며 게임을 멈추고 새로운 얘기가 펼쳐질 거’라는 사랑이 성숙할 여지를 남겨둔다.) 이어서 리패키지 앨범의 타이틀곡 ‘Bad Boy’에서도 비슷한 자세가 강화되어 있다. 영문 가사에 보다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는데 ‘나의 매력은 플레이보이인 너를 무릎 꿇리기에 충분하다’는 가사이다. 또한 “I shot another bad boy down”과 “Hit em with my love”라는 가사가 병치되면서 그 유혹의 끝이 사랑일지, 죽음일지 알 수 없는 레드벨벳식 호러의 진가이다.
문화를 주도하는 감응성의 주체
SM에서 기획한, 특히 전 비주얼 디렉터 민희진의 손길이 닿은 걸그룹들은 그룹명부터 이른바 ‘여성성’을 강조한다. ‘소녀’시대, f(x)의 ‘f’는 ‘여성을 연상하는 꽃’, ‘x’는 ‘여성 염색체 XX의 x’, 레드벨벳은 ‘강렬하고 매력적인 레드’와 ‘여성스럽고 부드러운 느낌의 벨벳’이라고 소개했다. 근대적 이분법은 남성과 여성, 이성과 감성, 정신과 신체의 구분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보고, 전자가 후자를 지배한다고 주장한다. 정신이 신체를 지배한다고 한 대표적인 철학자 데카르트에게 맞서서 정신과 신체는 하나임을 주장한 철학자가 스피노자이다. 그는 ‘느끼고 응한다’는 뜻의 감응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이때 감응은 “이질적인 것과의 마주침에서 우리가 우리 아닌 것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세상과 나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전복적인 역량이다.” (최진석, 『감응의 유물론과 예술』, 2020, p.7) ‘빨간 맛’, ‘달빛 소리’, ‘바다가 들려’ 같은 공감각적 표현이 빛나는 노래들은 ‘감각의 전이’를 통해 ‘없지만 있는’ 시공간을 창조한다. 레드벨벳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면, 그것은 쌓여 있는 관념으로부터 탈피해 그 너머로 가기 위한 ‘감응적 장치’였던 셈이다. ‘여성성’을 내건 SM의 걸그룹들은 감응적 주체로서 근대적 이분법에 맞서 왔다. 대중적 인기가 필수적인 아이돌 산업에서 어떻게 가능한 일이었을까?
앞서 언급했던 비주얼 디렉터 민희진은 최근 tvN 〈유퀴즈 온 더 블락〉에 출연해 ‘정(正)-반(反)-합(合)’ 공식을 즐겨 사용했다고 밝혔다. 민희진이 기획, 담당한 소녀시대는 “오빠를 사랑”한다는 반복적인 후렴의 ‘Oh!’ 뮤직비디오 말미에서, 또 다른 소녀시대 자신의 모습과 조우한다. ‘Oh!’와 같이 걸그룹에게 ‘정’이라고 상정되어 있는 모습과는 반대되는, ‘나쁜 남자에게 복수할 테니 도망가라’는 내용의 ‘Run Devil Run’ 활동을 예고한 것이었다.
이렇게 상반된 모습을 통해 ‘감응적 역동성’을 키운 SM 걸그룹의 역사에서 ‘걸그룹의 위치적 위험’ 같은 어른들의 사정은 무관하다는 듯이 ‘강렬한 레드’와 ‘부드러운 벨벳’으로 ‘자신의 행복을 찾겠다’는 레드벨벳의 데뷔는 ‘온전한 감응적 주체’의 탄생을 의도한 것이었다. 이러한 기획은 선배 걸그룹의 역사와 인기 대물림으로 가능했다. (소녀시대는 초기 ‘Gee’ 이후 ‘각선미’ 등의 수식어가 드러내듯 항상 걸그룹을 기능적으로 수행해야 했던 측면이 컸었다.) ‘행복한 걸그룹’이라는 기획은 실제 아이돌 개인의 행복감과는 거리가 있기에 기만적으로 비칠 수 있지만, 대중에게 전달될 때는 레드벨벳이라는 가상의 아이돌 자아를 통해서 감응을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렇게 기획된 바가 분리를 통해 실제 멤버 개인을 보호한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레드벨벳은 자신의 행복에 골몰한 캐릭터를 통해 입체적인 여성상을 그렸고, 따라서 당대의 사회적 여성상 진전의 움직임을 함께할 수 있었다. “The Perfect Red Velvet”에서는 앨범 이름대로 레드벨벳으로서의 유물론적 자아를 완성해야 했는데, 이는 감응적 주체가 기능적 주체-나쁜 남자와의 대결에서 승리함으로써 이행되었다. 상징적으로 나쁜 남성을 살해했다는 암시가 ‘피카부’, ‘Bad Boy’에 연이어 나타났는데 모든 기능적 주체가 나쁘기만 한지, 진정 살인이 가능했는지의 의문에 대해서는 그 다음의 디스코그래피를 축제와 연관지어보며 살피도록 하겠다.
죽음과 부활의 축제
‘Bad Boy’ 이후 발매된 여름 미니 앨범 “Summer Magic”의 타이틀곡 ‘Power Up’은 사이보그처럼 기계음 위를 비행하며 “놀 때 제일 신나니까요”라는 외침으로 데뷔곡 ‘행복’을 연상시켰다. 본래의 컨셉을 강고히 한 후, ‘Really Bad Boy’라는 뜻의 미니 5집 “RBB”와 동명의 타이틀곡으로 돌아왔다. ‘RBB’의 뮤직비디오에서는 무덤의 늑대인간과 레드벨벳의 승부가 펼쳐진다. 여기서 늑대인간은 레드벨벳이 상징적으로 살인한 남성의 부활한 모습으로 볼 수 있는데, 쫓고 쫓기는 장면 끝에, 레드벨벳은 늑대인간의 입안에 갇히고 늑대인간은 보름달 아래에서 울부짖는다. ‘피카부’에서 감응적 주체가 승리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면, ‘RBB’에서는 감응적 주체가 패배하고 기능적 주체가 승리할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이로써 문화에서는 감응성의 가치가 높게 평가되지만, 현실적으로 기능성의 가치도 배제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멤버 아이린의 비명 같은 고음이 특히 인상적인데, 기능적 쾌감을 주기 위해 주로 사용되는 고음이 비명이라는 감응적 역동으로 치환된 것이다. 여기서 감응성이 역동으로 극화될 수 있었던 이유가 비명의 ‘기능적 강화’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감응적 주체에게도 기능성은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전복성이 주를 이루는 ‘기호계’와 현실 법칙이 지배하는 ‘상징계’를 끊임없이 오가야 한다고 주장했던 철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견해와 일치하는 지점이다. ‘RBB’ 뮤직비디오는 기능성이나 감응성 어느 하나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리얼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RBB” 이후로는 “The ReVe Festival” 앨범 시리즈가 펼쳐진다. 꿈의 축제라는 뜻을 가진 “리브 페스티벌”은 “Day 1”, “Day 2”, “Finale”로 구성되는데, 여름 미니 앨범이 그랬듯 미니 혹은 정규 ‘몇’ 집으로 세어지지 않는다. 말 그대로 ‘꿈’의 축제이기 때문이다. (여름 미니 앨범도 비슷한 성격을 가진다.) 틀에서 벗어나 무의식의 세계에 진입하라는 ‘짐살라빔’, 몸이 기억하는 리듬에 맞춰 날아가자는 ‘음파음파’ (기호계에 대한 묘사와 상당히 일치한다), ‘싸이코’여도 괜찮다는 피날레 앨범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축제에 참여함으로써 우선 ①도덕적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는다, ②이렇게 죽어 있는 ‘신성한 시간’ 동안 일상에서의 권리와 의무로부터 벗어나 타자들과 우정과 평등성을 획득하는 자유를 얻는다, ③일상으로 다시 태어난다, ④세속적인 일상으로 복귀하지만 축제가 남긴 초월성으로 삶의 양태는 사뭇 달라진다. (류정아, 『축제인류학』, 2003, p.25)
하지만 피날레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리브 페스티벌은 끝나지 못했다. 멤버 웬디가 불의의 사고를 겪으며 ‘Psycho’ 무대는 물론, 완전체 활동이 장기간 휴식기에 들어가야 했던 것이다. 완전체 휴식기에 멤버 아이린과 슬기는 유닛을 결성해 감응성과 기능성 모든 측면에서 극한을 시도한 앨범 “Monster”로 활동했지만, 아이린이 구설수에 휩싸이며 그룹은 고초를 겪었다. 이러한 상황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회복과 치유를 동반하는 축제의 성숙한 마무리가 필요했다.
부상에서 회복한 웬디는 “나 알게 됐어 나처럼 빛을 기다리는 많은 것들이 늘 함께였다는 것을”이라는 가사의 ‘When This Rain Stops’와 ‘아픈 상처를 물과 같은 사랑으로 채워주겠다’는 내용의 ‘Like Water’, 동명의 앨범으로 솔로 데뷔를 했다. 이어 조이도 리메이크 앨범으로 솔로 데뷔를 하며, 타이틀곡 ‘안녕’의 뮤직비디오에서 길 잃은 원주민 아이의 집을 찾아주는 ‘타자를 향한 환대’를 보여주었다. 이후 완전체 레드벨벳은 미니 6집 “Queendom”과 동명의 타이틀곡으로 컴백했는데, 모두가 각자의 인생에서 퀸이자 킹이며, 함께 하면 보다 아름답게 빛나는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Queens’가 아니라 ‘Queendom’인 이유는 단순한 집합이 아니라 팬들과 레드벨벳의 ‘없지만 있는 시공간’-코뮤니타스이기 때문이다. 지난 여정을 통해 “함께 만들어온 Paradigm 확실히 다른 Stereotype” 속에서 우리가 “룰을 만들어내는(“makin’ the rules”)” 엄연한 감응의 왕국인 것이다. 팬들은 기획사가 제작하는 대로 소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일방적이며 그저 자본주의의 기능을 수행하는 왕국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항상 팬들은 기획사와 싸우며 자신이 바라는 아이돌-이상을 제작하기를 요구한다. 소비자들의 요구와 총체적인 환경에 제대로 응하지 못하는 기획사는 잔존할 수 없기에 환류의 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고, 좋은 환류가 나타날수록 소비자들은 그 산물인 아이돌을 좋아할 것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Queendom”은 레드벨벳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축제의 끝자락이자, 좋은 환류의 포부를 밝힌 앨범이다.
나가며
위 글에서는 실제 아이돌로서의 직업을 수행하는 멤버 개인과 기획된 아이돌로서의 가상 정체성을 별도의 것으로 분리해서 보았다. 레드벨벳의 후배 그룹으로 데뷔한 에스파는 자신의 이상향이 반영된 가상의 존재 ‘ae’와 교감한다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이는 팬과 아이돌의 관계를 바탕으로 한 메타적인 기획이다. 가상의 존재를 좋아하는데 시간을 쓰는 것이 소모적으로 느껴지는가? 우리가 소설이나 영화 속 캐릭터를 좋아하는 것과 별 다를 바 없는 일이다. 아이돌 멤버를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것에 괴리감을 느낀다고 해도 이미 그들은 훌륭한 가수이자, 댄서이며, 연기자이지 않은가.
글: 박하운
행정학을 전공하고 있는, 아이유와 레드벨벳을 좋아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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