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아이돌팝 발매작 중 주목할 만한 싱글에 대한 아이돌로지 필진 단평. 우아, 픽시, 드리핀, 라필루스, NCT 드림, 유키카, 선미, XG의 싱글을 다룬다.
우아 ‘단거’
예미: '단거'는 역동적인 베이스 라인 위 랩과 보컬로 에너지를 쌓아 올린 뒤, 드롭 자리에 포인트 안무를 집어넣어 그간 쌓아온 에너지를 각인시킨다. 강한 신스 베이스와 힘 있는 안무가 돋보이는 곡이라는 점에서 '단거'는 'Purple', 'Bad Girl' 등 이전 발매작들과 궤적이 맞닿아 있는데, '별 따러 가자' 이후 다시금 그룹의 본령인 에너제틱한 10대의 모습으로 돌아온 듯하다. 같은 궤적 속에 있는 곡들 속에서 ‘단거’가 차별성을 갖는 지점은 부담스럽지 않은 무대에서 느낄 수 있는 역량 발전이다. 우아는 움직임이 많은 안무를 요점을 확실히 짚으며 소화하는데, 박자와 밀착된 퍼포먼스 덕분에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요구 사항이 서로 다른 콘셉트 속에서도 안정감 있는 퍼포먼스를 꾸준히 보여주는 우아는 지금 궤도에 올랐다.
픽시 ‘Villain’
마노: 음산함과 컬트 요소를 다소 일차원적으로 풀어내던 초창기를 지나 이제는 이를 점점 세련되게 그리고 도회적으로 풀어나가고 있는 듯한데, 그 세련됨의 정점을 찍는 것이 바로 이번 발매작이 아닌가 한다. 멤버들의 수행력이야 늘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특히 본작에 이르러서는 절제된 동작이 주를 이룬 안무와 역시나 꾹꾹 눌러 삼키는 듯한 보컬이 오히려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팀을 돋보이게 하는 듯하다. 거기에 팀의 거창한(?) 서사와 세계관을 설득해야만 했던 초창기부터 꾸준히 갈고 닦아온 무대 연기력까지 더해지면, 보는 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는 퍼포먼스가 완성이 되는 것이다. 케이팝의 세계에 있어 '악당'은 많고 많았지만, 이렇게 멋진 '여성 악당'은 많지 않았다는 점에서 반드시 평가가 필요한 부분이다.
드리핀 ‘ZERO’
조은재: 레코딩보다 라이브 퍼포먼스가 조금 더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ZERO'는 히스테릭할 만큼 공격적인 기타 사운드와 한껏 다크하게 떨어지는 베이스가 소년의 미성과 어울릴 듯 말 듯 위태롭게 맞물려 비장미를 자아낸다. 이는 같은 레이블에서 십수 년째 보이그룹의 극적인 매력을 극대화할 때 쓰던 방식으로, 어딘가 또렷하지 않던 드리핀의 캐릭터를 결국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영점조정한 셈이다. 인피니트의 비장미보다 골든차일드의 처연미에 더 가까운 커플링곡 'GAME'이나 드물게 과격한 기타와 샤우팅까지 등장하는 'Trick and Treat'까지, 이 싱글을 아티스트의 터닝포인트로 삼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싱글의 볼륨이 아쉬울 정도로 기대감을 높인 수작.
라필루스 ‘HIT YA!’
마노: 갓 데뷔한 신인에게 있어 중요한 지표 혹은 미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단연 '기세'를 꼽고 싶다. 흔히 '패기'라 말하는 것과는 미묘하게 다른 요소로, 각이 잘 잡혀 있으면서도 무척이나 힘차고 보는 것만으로도 벅찬, 속된 말로 흔히 '빡세다'거나 '뿌순다'고도 하는 총체적인 퍼포먼스 수행력('퍼포먼스'라 함은 단순히 춤이나 무대만을 상정한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에서 나오는 어떤 기운이라고 할 수 있겠다. 때로는 이 기세가 좋다 못해 프로덕션이 다소 부족하거나 조악함에도 이를 훌쩍 상회해버리는 경우가 나타나기도 한다. 본작의 경우도, 취향에 따라서는 호불호가 명확히 갈릴 법한 곡임에도 멤버들의 뛰어난 수행력과 폭발적인 기세로 어떻게든 '되도록' 만들어 버린다는 점에서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프로덕션이 훌륭하면서 아티스트의 기세 역시 대단했던 경우도 있고, 프로덕션은 좋았지만 기세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었는가 하면, 이렇듯 프로덕션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데 비해 기세가 너무도 대단한 나머지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아지는 경우도 생겨버리곤 한다. 이들을 보고 있자니 한때 엄청난 기세를 떨치던 신인 시절을 거쳐 이제는 굵직한 브랜드로 자리 잡은 여러 이름들이 스쳐 지나간다고 하면 지나친 호들갑일까. 확실한 것은, 이렇게나 기세가 대단한 신인을 그것도 걸그룹에서 찾기는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반드시 주목해야 할 슈퍼 루키.
NCT 드림 ‘버퍼링 (Glitch Mode) (JINBO Remix)’
에린: NCT 드림 '버퍼링'의 리믹스 버전은 메이플 스토리와 같은 MMORPG 게임 속 캐릭터의 모험을 압축적으로 담아낸다. "iScreaM" 프로젝트에서 발매하는 리믹스 버전들의 통상적인 특징은 원곡의 후렴구를 해체하고 클럽 믹스의 전개를 사용하는 점이다. 이번 '버퍼링'은 원곡을 해체하는 대신에 그 전개와 후렴구를 그대로 살리되, 게임 스테이지가 전환되듯 곡 내 각 부분 간 특징을 구분하려는 시도들이 인상 깊다. 금속성을 한껏 강조하는 부분에서는 게임 속 캐릭터가 고난을 헤쳐 나가는 장면을 상상케 하고, 벌스 부분의 아기자기한 신스사운드는 캐릭터가 달려 나가며 차곡차곡 포인트를 쌓는 장면을 형상화한다. '버퍼링' 원곡이 간단한 베이스와 리듬의 반복으로 게임의 배경을 비유하였다면, '버퍼링 (JINBO Remix)'는 실제 게임의 과정을 재현한다. 이에 따라 두 곡을 연이어 청취하였을 때 전자는 무대를 떠오르게 하고 후자는 애니메이션을 상상케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유키카 ‘향기’
비눈물: 스페이스카우보이와 뮤지를 비롯한, '애월 (愛月)'의 제작진이 다시 모여서 만든 싱글이다. 꽤 공격적인 인트로와 빠른 템포를 제한다면 유키카의 음악, 혹은 'K-시티팝'에서 기대할 법한 스탠더드 트랙으로 볼 수 있다. 다만 보컬 측면에서 특기할 변화와 발전을 엿볼 수 있어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면 벌스 "너의 향기들이 닿으면", "넌 늘 기다리지" 구간의 끝처리에서 나타나는 섬세한 힘 조절은 균일하게 호흡을 닫거나 열기만 했던 이전 가창 방식과 차이를 보인다. 한편 미니 앨범 이상의 볼륨 대신 프로모션 없는 디지털 싱글 두 번으로 얼렁뚱땅 시리즈를 끝내는 모양새에서 소속사의 (재정) 상황이 그다지 온전치 못하다는 사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라도 음악 활동과 한국 시티팝의 흐름이 이어질 수 있기를, 유키카의 향기가 점차 옅어지지 않고 앞으로도 오랜 기간 잔향(殘香)이 남아있기를 바란다.
선미 ‘열이올라요’
예미: 뜨거운 여름에 걸맞은 화사한 스타일링 속, 평범하게 흘러간다면 사랑스러운 이성이 되어야 할 퍼포머 선미는 관객에게 대체 어떤 사건이 벌어질 지 종잡을 수 없는 으스스함을 선사한다. 무대 연출의 주도권과 무대 속 사건의 주도권을 모두 선미 본인이 쥐고 있다는 것을 관객 모두가 알고 있으니, 대담한 동작을 선보이는 선미가 일으키는 불길함은 더더욱 커진다.
지금은 쉽게 떠오르지 않을 수 있지만, 선미 솔로 커리어의 시작은 9년 전 발매된 '24시간이 모자라'다. 선미에게는 타인이 연출한 섹슈얼리티를 연기하며 커리어를 시작했다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직접 연출한 자신의 욕망을 선보여 그것으로 자신의 모습을 다시 각인시킨 이력이 있다. '열이올라요'가 다루는 섹슈얼리티는 솔로 가수 선미의 시작인 만큼, 전복의 이력을 강하게 연상시키며 주도권이 주는 쾌감을 증폭하는 테마다.
'열이올라요'의 충격을 가장 온전히 전하는 매체는, 현재까지는 무대 영상이다. 음원이나 뮤직비디오로 만족하지 말고, 반드시 무대를 볼 것을 권한다.
XG ‘MASCARA’
스큅: XG는 에이벡스에서 내놓은 한일 협력 레이블 XGALX 소속의, 2.5세대 케이팝 그룹 DMTN 출신의 제이콥스(당시 활동명 사이먼)가 프로듀싱한, 멤버 전원이 일본인으로 구성된, 그러나 가사는 전부 영어로 된 노래를 부르는(!) 케이팝(?) 걸그룹이다. 최고조로 미니멀한 사운드 위에 집중도 높은 퍼포먼스를 뽐냈던 데뷔곡 'Tippy Toes'도 인상적이었지만, 혼종적인 배경 탓에 당시에는 이들을 아이돌로지의 아카이브 대상으로 다뤄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이 있었다. 그러나 'Mascara'를 기점으로 한국 음악방송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해 XG의 활동 본거지가 한국임이 확실해진 고로, 더 이상 이들의 케이팝-성(性)을 부정하기는 어렵게 된 듯하다.
'Mascara'는 'Tippy Toes'의 간명한 편성은 그대로 갖추되 응축되어 있던 수렴적 에너지를 예리한 발산적 에너지로 뒤집은 곡이다. 극도로 절제된 톤에 상대적으로 감춰져 있던 멤버들 개개인의 음색과 개성이 생동감 넘치게 표출되고 있는데, 래퍼의 비중이 높은 팀인 만큼 멤버 주린과 하비를 중심으로 맹렬한 기세를 뽐내는 랩 파트가 특히 압도적이다. AOA 이후 이렇게까지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팀의 오디오를 주도하는 경우는 오랜만인 듯해 더욱 흥미롭다. 독특한 팀 구성에 기반한 직관의 미학이 그룹의 최대 무기라 할 수 있겠다. 사운드와 구조 상의 복잡성부터 국적과 언어에 기반한 잣대까지. 근래의 ‘케이팝’을 둘러싼 모든 군더더기를 덜어낸, 2022년 가장 대담한 데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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