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 12월 아이돌팝 발매작 중 주목할 만한 싱글에 대한 아이돌로지 필진 단평. 트렌드지, 카라, 주니엘, 뉴진스의 싱글을 다룬다.
트렌드지 ‘VAGABOND’
예미: ‘VAGABOND’는 트렌드지가 데뷔 첫 해 활동을 통해 다진 내실을 보여주는 곡이다. 트렌드지는 올해 세 차례 음반을 발매했는데, 타이틀곡과 후속곡을 막론하고 강한 비트와 랩, 갱보컬, 팀합을 위시한 퍼포먼스로 비장미를 내세웠다. 이러한 요소들이 현 보이그룹 생태계의 주류 요소들이기는 하나, 그 외의 다양한 선택지가 있는 상황에서 일관된 방향성을 추구하는 것은 팀의 지향점을 선명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년간 많은 활동을 통해 역량을 쌓아, 무거운 컨셉과 멤버 역량 간 간극이 비약적으로 줄어든 결과물이 ‘VAGABOND’다. 이 곡에서 엿보이는 팀의 발전상과 내공이 앞으로의 트렌드지를 기대하게 만든다.
카라 ‘When I Move’
예미: ‘WHEN I MOVE’는 우리가 기억하는 카라 히트곡의 미덕을 2022년의 사운드로 보여주는 곡이다. 디스코 기반의 비트와 수려한 멜로디, 저음으로 시작하여 고음으로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직관적 구조는 카라 히트곡 특유의 댄서블함을 현재에 맞게 보여준다. 특히 메인 멜로디보다 높은 음의 코러스로 흥을 더하는 구성이나 후반부의 랩은 카라의 음악을 주의 깊게 들어 온 이들에게 향수를 더하는 요소다. 이 댄서블함에 초점을 맞춘 소재와 어법으로 ‘재도약’을 그려내는 가사를 들으면, 자연히 무대에 선 이들을 보며 카라의 역사를 떠올리게 된다. 이 15년의 역사를 화려하게 자축하는 곡으로서 ‘WHEN I MOVE’는 큰 의미를 갖는다.
주니엘 ‘Dear.’
비눈물: 데뷔 10주년을 기념하는 싱글이며 동시에 보통의 나날을 꿈꾸며 관계에서 온 상처를 노래한 "Ordinary things" 이후 약 5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음악 활동의 신호탄이다. 팬들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하는 팬송뿐만 아니라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고 새롭게 다짐하는 자기성찰의 역할로도 기능하고 있다. 편지의 받는 이를 적는 머리말, 'Dear.'의 대상은 응원해 준 팬일 수도 있고 잠시 외면해온 음악 혹은 지난 시간을 견뎌온 주니엘 본인일 수도 있다. 곡의 가사는 그 상대방에게 전작의 '편지'를 닮은 애틋한 감성을 전하고, 지금껏 부닥쳐온 현실의 어려움을 함축하여 표현하고 있다. 또한 어쿠스틱 기타를 비롯한 밴드 사운드가 주를 이뤘던 이전 작들과 달리, 현악기 위주의 대곡 스타일과 새로운 가창법을 선보이고 있다. 이는 어쩌면 전에 못 본 낯선 모습이지만, 적절히 안배된 익숙함과 합쳐져 근래 작품 중 가장 알맞은 옷을 입은 듯 안정감이 드러난다. 새 둥지에서 앞으로 활발하게 펼쳐나갈 주니엘의 음악 방향성을 예고하는 작품.
뉴진스 ‘Ditto’
스큅: 뉴진스의 활동곡 대부분을 작곡한 메인 프로듀서 250은 케이팝에서는 이례적인 차원의 미니멀리즘을 보여주고 있다. 블랙아이드필승 등 미니멀한 사운드 편성을 기조로 하는 프로듀서들은 줄곧 있었으나, 250이 유독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가 많은 것들 중 군더더기를 '빼고' 간추리는 방식이 아닌 무(無)의 상태에서 하나씩 신중하게 '더해가는' 방식을 택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보컬 찹 루프로 시작해 몽롱한 신스와 클랩 사운드가 더해지는 'Attention'의 전주처럼, 3분박으로 떨어지는 화한 메인 테마와 2분박으로 떨어지는 간명한 비트로 곡의 분위기를 조성한 'Hype Boy'처럼, 아카펠라로 윤곽을 잡고 가벼운 킥과 스네어, 은은한 코드 반주로 골조를 세워가는 'Hurt'처럼, 250은 줄곧 '다듬다'는 단어보다 '채우다'는 단어가 어울리는 미니멀리즘을 선보여왔다. 뉴진스의 꿈결처럼 산뜻한 이미지는 이로써 빚어진 여백의 미(美)가 두드러지는 초경량 음악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Ditto'는 동일한 작법에 기반하되 전작에서 보여준 산뜻함을 애틋함으로, 가벼움을 공허함으로 뒤집어보이는 싱글이다. 분주한 볼티모어 클럽 비트와 살포시 얹어지는 코드, 나지막하게 울려 퍼지는 보컬이 대비를 이루며 복잡미묘한 감상을 자극하고, 인트로와 아웃트로에서 곡을 감싸는 고요한 허밍은 7도 음을 짚으며 사뭇 쓸쓸하고 공허하기까지 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일견 낙천적으로 보이는 가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돌아오지 않을 응답("Ditto")을 구하며 오랜 기다림을 감내하는 ("널 보는 내 마음은 어느새 여름 지나 가을", "아침은 너무 멀어", "내 길었던 하루 난 보고 싶어") 달곰씁쓸한 내러티브를 지니고 있다. 팬송을 암시한 곡이 담아내는 정서가 감사나 행복이 아닌 그리움과 외로움이라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차후 ‘OMG’의 뮤직 비디오에서 두드러진 문제와는 별개로, 개인적으로 ‘Ditto’의 뮤직 비디오 속 ‘반희수’를 기획자 및 제작자와 등치하는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러한 곡의 정서를 효과적으로 증폭시킨 뮤직 비디오의 풍성함을 쉬이 짓눌러버리는 해석이기 때문이다. "내 지난 날들은 눈 뜨면 잊는 꿈"이라는 것을 모두 알면서도 그 환상 속에 스스로를 투신하고 마는 ("꿈에서 깨워주지 마"), 아이돌 팝과 그 팬덤의 핵심 정서를 섬세하게 담아낸 'Ditto'의 뮤직 비디오는 작년도 가장 인상적인 영상 중 하나였다. 환상이 가장 애틋해지는 순간은 그것이 환상임을 시인할 때, 그리고 그러면서도 공상을 멈추지 않을 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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