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상반기 우리는 아이돌에서 몇 건의 청춘을 만났다. 샤이니는 ‘View’에서 처음으로 ‘연예인 샤이니’로 등장한다. 연하남, 탐정, 좀비, 기계인간 혹은 규정되지 않는 미남들이 아니라, 구체적 인간의 육체를 가진 존재다. 그리고 이들은 주거지 무단 침입, 절도, 기물파손 등의 ‘탈선행위’를 일삼으며 경찰에 쫓기는 일탈의 시간을 보낸다. 덧없는 꿈처럼 그려진 이 뮤직비디오는 그야말로 한 편의 청춘물이다.
빅뱅의 싱글 “M”도 특별하다. ‘Loser’는 초창기의 ‘Dirty Cash’ 이후 빅뱅의 곡으로선 ‘자연인 빅뱅’의 이야기로 이해할 소지가 매우 높은 편이다. 이를테면 멤버들이 슈퍼히어로로 등장하는 ‘Fantastic Baby’나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를 차용한 ‘뱅뱅뱅’과는 사뭇 다른 결을 보여준다. 또한 ‘Bae Bae’는 ‘슈퍼스타의 여자 놀이’라는 설정을 깔고서 치마를 들치거나 찹쌀떡을 찾는 등의 기행을 늘어놓으며, 힙과 오리엔탈리즘을 동시에 희롱하는 자의식을 내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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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음반이 여타의 케이팝과 조금은 다르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자연인으로서의 주체가 깃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뿐만은 아니다. 자연인에 가까워진 위치에서 이들이 보여주는 것이, 기성 질서와 화해될 수 없이 부딪히는 이상과 자아라는 점이다. 이는 곧 청춘물의 핵심이다. 이것이 지금껏 없었던 아이돌인 건 ‘청춘을 가진 아이돌’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아이돌에게서 즐기는 것들 중 매우 중요한 것이 바로 젊음의 싱그러움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에는 청춘이 결여돼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청춘물은 기성세대에 의해 구축된 제도권 세계와 성장 중인 자아의 이상과의 갈등으로 구체화된다. 반드시 저항의 메시지 따위를 보여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돌 콘셉트는 청자와의 관계나 매력의 전시에 집중함으로써 청춘과 세계의 접점을 생략한다. 그러니 이들은 파티의 주인공이거나 블링블링한 인기남녀, 까불까불한 여고생, 연인, 악동, 뱀파이어, 외계인, 또는 (어른들 보기에 좋은) 이상의 청춘상일 수는 있어도, 현실의 청춘일 수는 없는 것이다.
유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H.O.T.의 ‘빛’은 경제위기 속에서 십 대들이 느끼는 불안을 묘사했고, 티티마의 ‘Wanna Be Loved’, 티아라의 ‘너 때문에 미쳐’도 교육 제도에서 일탈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god는 다소 청소년센터의 질감은 있으나 ‘길’을 통해 미래에 대한 불안과 가치관의 갈등을 그린다. 완충돼 있지만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역시 방황과 불안을 함께하는 대상으로 청자를 설정하고, 2NE1의 여러 뮤직비디오는 대상을 철저히 피상화함으로써 현실감의 부담을 줄이지만 폭동과 혈기를 묘사하기도 한다. 난동이나 범죄를 묘사하는 뮤직비디오도 많지만 그 이유에는 늘 연인의 상실이나 집착적인 애정 등이 뚜렷이 자리한다. 이처럼 소수의 사례만이 존재하고 그나마도 완충 요소가 선명한 것은, 우리 사회가 아이돌의 ‘이유 없는 반항’으로서의 청춘을 받아들이기에는 어떤 이유에서든 한계가 존재함을 내비친다. (혹은 단순히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물론 이는 아이돌이 제도권 예술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이돌은 아니지만 싸이의 ‘챔피언’은 한국 대중음악에서 제도권과 청중 열광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제도권 킬러”라는 하위문화적 가사도 포함돼 있지만, 동시에 이 곡은 “소리 못 지르는 사람”에게 “술래”라는, “소리 지르는 너”, “음악에 미치는 너”에게 “챔피언”이라는 도장을 찍어주는 선생님 역할을 한다. (‘이 자리에서는’) 미치는 것이 허락되었으니 미치라는 내용에 다름 아니다. 그러고 보면 H.O.T.의 ‘전사의 후예’나 ‘열맞춰’ 또한 청소년의 스트레스 요인으로서 이미 기성세대가 합의한 내용(왕따, 획일적 교육)을 다루고 있다. 말하자면 ‘엄마가 허락한 반항’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아이돌에게 청춘이 부재한 것은 구조적으로 당연하다. 그들은 청춘을 이미 ‘지불’해버렸기 때문이다. IMF 이후 우리 사회에서 청춘은 어차피 구가할 수 없는 것이 되었고, 지금의 아이돌은 부도 가능성 높은 이 수표를 늦기 전에 기획사에 배서양도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선발’된 재능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케이팝 산업이 ‘만들어낸’ 인재들이기도 하다. 그렇게, 영미권 중심의 팝 시장에서 ‘제3세계’인 케이팝은, 지향점이자 도달 불가능한 지점이던 영미권 보이밴드들을 ‘따라잡았다’. 동일한 사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에 ‘못지않은’ 매력과 함께 한국 아이돌은 전혀 다른 방향성의 사본을 이뤘다. 그것이 바로, 만들어진 완벽성이었다.
이 완벽성이야말로 아이돌이 ‘틴 아이돌’과도, ‘아이도루’와도 차별화되는 지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청춘과 교환해 얻어낸 것이었다. 물론 앞에서 말한 청춘물의 요소를 영국, 미국과 일본의 아이돌들이 구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청춘의 방황과 불안을 담아낼 수 있는 유스컬처(youth culture)가 장르 음악의 형태로 존재하는 시장에서 안전한 매력을 뽐내는 이들과, 언더그라운드를 제외하면 유스컬처 자체를 대체한 한국의 아이돌을 동항비교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또한 아이돌 연습생이 이제는 사실상 직업 훈련이나 사교육, 미래에 대한 투자의 차원으로 간주된다는 점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자연인으로서의 자신의 옷을 벗고 직업인의 옷을 입은 아이돌에게, 자연인의 삶, 세계와의 관계에서 배어 나오는 청춘의 생동감은 설 자리가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빅뱅과 샤이니가 보여주는 청춘은 새롭다. 샤이니는 (납치범이란 권력 관계가 전제돼 있지만) 눈앞에서 여자가 옷을 벗어도 손 하나 대지 않는다. 빅뱅의 ‘Loser’와 ‘Bae Bae’도 ‘뱅뱅뱅’에서처럼 파괴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의 일탈과 자학, 기행에는 별다른 동기가 없다. 또한 ‘여자들이 좋아하는 나쁜 남자’, ‘사랑에 미쳐서 폭주하는 남자’ 같은 핑계도 없다. 그저 세상과 갈등하는 젊음이 잠시 도피하는 이야기를 보여주거나, 세상과의 갈등을 전제로 청춘의 객기를 부릴 뿐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이 신인이기는커녕 정상급의 베테랑들이라는 점이다. ‘완벽성’ 대신 청춘을 선택한 게 아니라, 완벽성의 성취 이후에야 되찾은 청춘인 것이다. 샤이니는 마치 이 연금술이 정점을 찍으면 이미 사용한 청춘이란 이름의 ‘마법사의 돌’도 연성해낼 수 있다는 듯, 빅뱅은 마치 이만큼 인정받고 나면 청춘의 자격도 주어진다는 듯한 모습이다. 닮은 듯 서로 조금 다른 두 어프로치는 그러나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우리를 찾아왔다. 마치, 케이팝이 이만큼 성숙했으면 상실했던 것을 되찾을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방탄소년단은 살펴볼 만한 또 다른 관점을 제공한다. 이들의 통칭 ‘학교 3부작’은 청춘 드라마라고는 고등학교 배경의 학원물만이 남은 한국을 연상시킨다. 뒤를 잇는 앨범인 “화양연화 Pt.1”이 ‘청춘 2부작’ 중 첫 편이라고 소개되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마침 첫 트랙인 ‘Intro : 화양연화’가 소재로 삼는 농구가 사라진 1990년대의 청춘 드라마 〈마지막 승부〉를 연상시키는 것은 아마도 기분 탓일 것이다. 그러나 학교 안에서 패기 넘치게 뛰어다니던 이들이 청춘을 노래하면서 절망과 방황을 이야기하는 것은, 세상을 알아갈수록 성장통에 시달린다는 청춘물의 공식과 겹쳐진다.
힙합은 착실하게 유스컬처로 자리 잡아가고, 아이돌은 이와 결합해 성공적인 결과물들을 보여주고 있다. 지드래곤은 자의식 쏟아지는 솔로 작업을 통해 (아이돌이자 아티스트로서) 방황 표현의 가능성을 시험해 왔다. 빅뱅과 샤이니와 방탄소년단, 혹은 YG와 SM과 빅히트는 청춘물의 실현가능성이 임계점에 가까워졌음을 감지한 걸지도 모른다. 반대편에서는 청자들의 변화도 상정할 수 있다. 지금까지 청춘물을 감상할 여유가 없던 이들이 서서히 준비가 돼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반대로, 방탄소년단의 ‘쩔어’에서 들리듯 ‘삼포세대, 오포세대’로 꾸준히 늘어가기만 하는 청년층의 절망이 기존의 포맷에서는 수용되기 힘들 정도로 커진 것일 수도 있다.
일시적인 유행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변화의 시작점일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이십 대의 방황은 보다 제도권에 갇힌 십 대의 그것보다는 수용의 문턱이 낮다. 청춘물이 ‘도입’된다면 이십 대 주체에서 시작해 십 대로 옮겨가는 것도 있을 수 있다. 1990년대 십 대들에게 대학생들을 주인공으로 한 청춘 드라마가 보였던 강력한 파급력을 감안하면, 이십 대의 청춘물로 자리잡을 가능성도 있다. 어찌 되었든 이제 ‘힘들어도 씩씩하고 희망찬’, 어른 보기에 건전한 청춘이 아닌, 불안에 시달리고 일탈하는 청춘의 상이 아이돌계에 제시되었다. 청춘을 지불함으로써 시작된 케이팝에게 이것은, ‘포스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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