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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올해, 팬덤의 집단행동은 어느 때보다 과감하다. 가장 민감한 주제인 아이돌 멤버 구성에 대해서까지 팬덤이 말을 하게 되었다.

아이돌과 팬의 위상이 변화할 때

이미지: CC BY Fablo Sola Penna

올 2월 어느 팬덤에서는 한 멤버의 태도에 대한 팬들의 문제 제기가 있었다. 문제적 행동에 대한 시정 또는 피드백을 요구하는 형태를 띠기는 했으나, 곳곳에서 퇴출을 직, 간접적으로 주장하는 경우들이 발생했다. 다른 팬덤에서는 법적인 문제를 일으킨 특정 멤버에 대한 퇴출을 논하는 일도 있었고, 강력한 결속력을 보여 온 어느 팬덤은 한 멤버의 유흥업소 출입에 따라 그 멤버에 대한 그간의 지지를 전부 철회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 모든 사례는 분명 각기 다른 층위와 다른 배경을 갖고 있다. 그러나 단 한 가지에서만은 공통적이다. 아이돌 그룹에서 멤버의 소속이라고 하는, 매우 민감한 부분에 대해 팬덤이 말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이돌, ‘꿈과 희망’

〈아이즈〉의 작년 기획기사 “탈덕전야: 해체기부터 폭로기까지, 아이돌 팬덤 수난기”(한여울)는 참조하기에 좋은 틀을 보여준다. 글쓴이는 아이돌 시대를 세 개의 시대로 구분했다. “영원불멸 믿음”이 붕괴하며 해체 및 탈퇴에 대한 반대시위, 서명운동이 등장한 ‘해체기’(2001~2003), “멤버들 우정에 대한 믿음”이 붕괴하며 팬과 멤버 간의 간담회가 등장한 ‘분열기’(2009~2010.10), 그리고 〈디스패치〉 등장 이후의 ‘폭로기’가 그것이다. 이는 결국 아이돌이 제공하는 환상과 그에 대한 팬들의 기대치에 관한 것이며, 특히 앞의 두 시대는 멤버 구성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그런데 ‘해체’나 ‘탈퇴’에 비해 ‘방출’은 따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내보내려는 자’가 존재하기에 ‘꿈과 희망’이 파괴되는 정도가 다르다. 이를테면 2001년 god – 박준형의 경우, 그를 내보내고자 한 자는 소속사(싸이더스)였고, 이에 멤버들과 팬들이 모두 반발해 집단행동을 보였다. 반면 여러 가지로 한국 아이돌 역사에 마일스톤이 된 2009년 2PM – 박재범의 경우, 상황 초기에는 방출의 주체가 소속사였으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2010년 멤버 간담회를 통해 그룹 멤버들이 동료를 방출한다는 이례적인 상황을 빚었다. 2014년 소녀시대 – 제시카의 경우 직접적인 방출의 주체는 소속사였으나 잔류 멤버들이 방출의 주체로 부각되었다. 멤버들이 선을 그었고, SNS를 통해 은유적이지만 선명하게 8인 체제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려진 바와 같이 2PM은 잔류 멤버들의 팬들마저 동료를 방출한 멤버들에게 크게 반발했으나, 소녀시대의 팬덤은 일찌감치 제시카 지지파와 8인 지지파로 갈라섰다.

‘꿈과 희망’을 깨는 손

그런가 하면, ‘꿈과 희망’의 파괴를 승인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 경우도 생겨났다. 엑소의 경우 세 명의 멤버가 팀을 ‘이탈’했고, 팬덤은 충격을 받았지만 신속하게 분리되었다. 여기에 마침 이탈 멤버들이 모두 외국인인 점이 얽혀 제노포빅한 반응을 보이는 팬들이 생겨났고, 급기야는 남은 외국인 멤버들의 방출 또는 자진 이탈을 요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행동으로 구체화된 것은 제한적이고, 그 배경에도 바로 멤버 변동에 민감하기 때문에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논리가 작용했다. 그러나 순차적인 세 명의 멤버 이탈의 과정에서 이 주장은 점차 목소리가 커졌고, 마지막 한 명의 외국인 멤버가 남은 9인 체제에 대해서도 8인 체제를 주장하는 세력이 존재한다. (체감상으로는 많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이 사례는 여타 팬덤에서 통칭 ‘악성 개인 팬’의 ‘분탕질’로 간주되는 특정 멤버 비토 행위와는 궤를 달리한다.

글의 서두에서 살핀 사례들은 이 맥락 위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분명 각각의 사례는 맥락에 차이가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방향성을 감지할 수는 있다. 한때 팬들은 ‘꿈과 희망’의 일방적인 파괴를 인정할 수 없었지만, 서서히 이를 승인하게 되었고, ‘꿈과 희망’의 더 큰 파괴도 수용하게 됐으며, 이제는 더 나아가 (그룹 그 자체라고 하는 다른 ‘꿈과 희망’을 지키기 위해) 멤버들의 결합이라는 ‘꿈과 희망’에 스스로 금을 내게 된 것이다. 큰 변화다.

이것은 지난 20년간 아이돌 팬덤이 학습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탈의 움직임을 보이는 멤버가 있을 때 그를 최대한 빨리 잘라내야 그룹과 팬덤이 안정되더라 하는 식의 경험적인 것들이다. 이를테면 제시카나 엑소의 경우, 해외 팬덤은 꽤나 오랫동안 이탈을 거부하고 ‘완전체’에 대한 미련을 보여 국내 팬덤과 정서적 마찰을 빚기도 했는데, 이는 아이돌 산업에 대한 직접경험의 차이로밖에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아이돌과 팬, 누가 ‘갑’일까

그러나 당연하게도, 아이돌 산업의 풍경이 어떤 ‘집단지성체’로서의 팬덤의 결정에 의해서만 변화하지는 않는다. 과거의 아이돌은 무대 위에서 팬들에게 메시지를 송신하는 존재였고, 이는 대중음악 담론의 차원에서 보자면 ‘팔루스적’인 록스타의 지위에 가까웠다. 2006년부터 TV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 과정을 대중에게 그대로 노출한 아이돌들은, 이들 역시 더할 나위 없이 멋진 스타들임에도, 개념적으로는 과거보다 ‘낮은 자리’에 위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실체가 어떻든 표면적으로는 ‘대중이 직접 뽑은’ 〈프로듀스 101〉의 I.O.I까지 온다면, 팬에 비한 아이돌의 지위는 더 낮아진다.

아이돌과 팬, 아이돌과 팬덤의 권력적 위계는 늘 복합적이어서 단순한 갑을 관계로 표현하기 곤란하다. 이를테면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아이돌은 여전히 수직적인 우위를 갖지만, 아이돌과 팬덤 집단이 만나는 팬 사인회에서는 집단으로서의 팬들이 서비스를 제공받는 입장을 부분적으로 취한다. 이는 보다 소수의 팬이 관여하는 통칭 ‘출퇴근길’이나 사생활에서의 조우 등의 경우 또 다른 역학을 지닌다. 그러나 전체적인 구도에서 보자면, 아이돌과 팬의 위계는 일정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상징적으로, 아이돌의 지위는 점차 낮아지고 팬의 지위는 점차 높아지는 것이다. 아이돌은 군림하는 록스타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문직으로, 팬은 ‘숭배’하는 군중에서 ‘돌보는’ 존재로 말이다.

우리 세상이 변했어요

멤버 변동이라고 하는 가장 민감한 사안이 다뤄지고 있다는 것은, 팬들이 메시지를 발신할 수 있다는 의식이 점차 강해지면서 도달한 지점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올해, 다른 주제들에 대한 팬덤의 집단행동 역시 어느 때보다 과감하다. 제대로 서포트 해주지 못한다고 느끼는 소속사에 피드백을 요구하는 경우도 여러 번 있었고, 개중에는 (비정규 앨범이기는 하나) 예정된 앨범의 불매를 선언하는 일도 있었다. 그룹이 가사나 SNS를 통해 전달해 온 문제적인 젠더 의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팬덤도 있고, 공연장 시큐리티의 팬 성희롱 의혹이 서명운동으로 이어진 일도 있으며, 이중소속인 아이돌의 활동에 대해 한쪽 팬덤이 단체로 성명을 내기도 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 모든 사례는 서로 다른 층위에 있다. 각각의 행동이 얼마나 합리적인지, 얼마나 윤리적인지, 얼마나 적확한지 역시 모두 다르다. 받아들여지는 정도 또한 다르다. 그러나 아이돌의 위상과 팬의 위상이 모두 달라지고 있는 지금, 팬들의 목소리를 들을 일이 앞으로 더 많아질 것이라는 예상은 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발신돼야 하고 어떤 것이 그렇지 않아야 하는지, 아이돌과 기획사는 어떤 것을 수신하고 승인해야 하는지, 담론을 통한 합의점 도출의 중요성 또한 앞으로 더욱 커질 것이다.

미묘

By 미묘

가식과 내숭의 외길 인생. 음악 만들고 음악 글 씁니다.
f(x)는 시대정신입니다.

One reply on “팬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데뷔와 기획을 회사가 담당한다면 팬덤이 그 불씨를 더 큰 불로 키우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같아요.
팬덤이 자신들이 어느 정도 “갑”임을 인식하게 되는 시점에서 아이돌과 팬덤의 관계는 서로에게 의지하는 관계가 아니라 팬덤이 아이돌을 특정 계층 서비스업 종사자 정도로 취급하는 경향성을 보인다는 게 참 안타까운 현실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