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색 재킷이 많아져 시원함을 선사하는 6월 중순, 열흘간 발매된 아이돌 언저리 신작들에 대한 아이돌로지 필진 단평. 윤하(feat. 핫펠트, 치타), 바다, 걸스온탑, 다이아, 에이션, D.T.E, 산이&레이나, 보아&빈지노, 소년24, 백예린, O21, 수빈의 새 음반을 다룬다.
미묘: 이우민, Frants와 함께 핫펠트가 만든 곡으로, 윤하의 곡이라지만 핫펠트가 윤하에게 제공한 곡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운드도 그렇지만, 키치하게 유쾌하면서도 위협적인 아이러니한 정서까지 꼭 그대로 '그 시절' 인디트로니카 풍이다. 뮤직비디오에서 윤하는 순진한 소녀에서 '무서운 누나'로 변하고, 그 변화의 촉매가 되는 예은도 귀여운 모습과 히스테리컬한 모습을 함께 보여준다. (치타의 경우는 유머와 시크의 공존이 비교적 평소에 자주 보여주던 것에 가깝기는 하다.) 사운드 역시 묵직한 베이스와 상큼한 벨, 다소 키치하게 들리는 드럼의 조합이 이 대조에 조응한다. 그렇게 보면 이 곡은 '무서운 여자'보다는 여성의 입체적인 양면을 보여주는 작품인 셈이다. 떠들썩한 외침이 곳곳에서 메인 라인과 연동하고, 비디오에선 특히 예은의 제스처들이 음악과 싱크를 이뤄 재미를 더한다.
햄촤: 윤하와 핫펠트(예은), 치타라는 다소 낯선 조합만으로 충분한 재미가 생긴다. 피아노를 치며 발라드를 부르는 윤하의 모습이 더 익숙한 대중도 많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윤하 음악은 처음부터 록 베이스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핫펠트의 색깔이 더해져 이제까지 윤하 노래들과는 묘하게 다른 분위기라 더 흥미롭다. '놀고 다니며 바람피우는 연하의 남친을 응징'한다는 가사의 스토리는 이제 와 딱히 신선하진 않지만, 남자 래퍼 여자 보컬의 말랑말랑한 사랑 노래가 무수히 쏟아지는 작금에 여성 아티스트로만 이루어진 이 조합은 심히 반갑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가능하다면 앞으로도 꾸준히 이런 프로젝트를 시도하여 앨범 한 장을 채울 수 있다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을 품어본다.
돌돌말링: 정말 오랜만의 신보. 정말 좋다. 데뷔 20주년을 맞은 감사 프로젝트 기념으로 평소와는 다른 스타일을 골라 봤다는데, 이게 너무 좋다. 타이틀곡 'Flower'의 작곡진에 엠블랙의 'Stay' 등에서 과잉을 자제하는 세련된 멜로디 구사로 기억에 남는 곡을 만들어온 원택(1Take)의 이름이 반갑다. 1번 트랙 'Amazing'의 90년대 팝 느낌도 그렇고, 'Flower'로 보여준 '요즘 스타일'로의 전환이 웬만한 '요즘 아이돌'들보다도 탁월한 것을 보면, 머라이어 캐리가 2005년 'We Belong Together'로 컴백하던 그때를 보는 것 같은 흥분감마저 있다. 이벤트성으로만 남기엔 너무 아까운 기획이다. 부디 앞으로의 방향성 결정에 이번 싱글컷을 깊이 염두에 둬줬으면 좋겠다. 이유는, 바다가 잘 하니까. 웬만한 아이돌 그 누구보다도.
조성민: 사운드는 전보다 한층 더 산뜻해졌지만, 파워풀한 보컬은 놀라울만큼 여전하다. 솔로 1집이었던 "A Day Of Renew"에서는 가득 찬 악기를 압도하는 쨍한 보컬이었다면, 이제는 보컬이 가진 힘으로 전체 앨범을 지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가창력이 완성형이었다고 해도 그 안에서 성장과 성숙은 분명 이루어질 수 있고, 이것이 좋은 가수의 덕목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몇 안 되는 '아이돌 이후'를 보여주는 여성 뮤지션이기 때문에, 오랜만의 음반 발매가 너무나 반갑고, 그 내용이 최근에 등장했던 여성 아이돌 솔로들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없을 정도라는 점에서, 팬으로서는 어떤 자부심까지 느끼게 된다.
미묘: 여성 3인조 걸스온탑의 데뷔 싱글. 보컬 트레이닝과 코러스 세션, 실용음악 전공으로 실력을 쌓은 팀이라고 하는데, 과연 전공자다운 탄탄한 힘이 느껴진다. 진하고 강한 여성 보컬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꽤 즐겁게 들어볼 수 있을 싱글. 목소리의 울림이 좋고, 템포감 있는 트랙이 적재적소에서 힘 있고 시원한 요소들을 터뜨려주기 때문이다. 보컬이 탄탄하니만큼, 멤버들의 음색이 좀 더 조화나 대조를 이루는 것을 보고 싶다. 곡의 애티튜드가 묵직하다 보니 주류 시장보다는 오디션 무대에서 멋지게 폭발할 것 같은 느낌이 있는데, 다소 예스럽게 쓰여진 가사도 그래서 자꾸 아쉬워진다. 이 기세 좋은 느낌을 살리면서 조금 더 팝적인 명쾌함을 꾀한다면 어떨까 상상해 본다.
미묘: 전작 '왠지'는 활기찬 이미지와 구식 멜로디가 뉴잭스윙으로 조우했다면, '그 길에서'의 멜로디는 '왠지'를 확실히 연상시키면서도 보다 산뜻한 라인을 그린다. 예빈의 음색을 주된 팔레트로 활용하는 듯한 후렴은 유쾌하면서 선량한 깍쟁이 느낌을 내는데, 그것이 전체의 틀 속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언캐니한 감상을 준다. 그 일부는 카드보드 질감이 강조된 스네어에서도 오지만, 수록곡들이 남기는 뒷맛이 크게 일조함을 부인하기 어렵다. 앨범 전체는 어쿠스틱 기타, 특히 아르페지오가 두드러지는데, 내추럴한 느낌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의도로 보이지만 아무래도 곡들이 어둡고 칙칙하다. 랩이 등장할 때마다 타악기가 빠지는 것은 나름 신선할 순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곡도를 더욱 무겁게 만든다. 하모니카가 등장할 때마다 어깨가 움츠러드는데, 시타르가 이렇게 강한 '뽕' 악기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성취라고 할까. 서울 교외의 특정 지역을 연상시키며 '겉으론 발랄하지만 속은 서글픈' 캐릭터를 구사하는 것이 지금 시장에서 유효한 전략일 수는 있겠지만, 굳이 '연습생'이란 제목의 청승 튠을 넣는 대목에 오면 악취미라고밖에 할 수 없다. 시각적으로도, 파트 분배 면에서도 조금은 집요할 정도로 정채연을 중심에 세우는데, 〈프로듀스 101〉을 통해 매력을 확인한 멤버를 잘 활용하는 걸 비난할 순 없지만 그 외의 경로로 매력을 보여주려는 시도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 음반에서 기희현의 자리를 찾아보면 분명해지는 이야기다.
돌돌말링: 첫 트랙 'Happy Ending'부터 타깃이 분명하게 느껴지는 포크 풍이다. 타이틀곡 '그 길에서'는 제목에서부터 고의로 수수한 느낌을 내려는 느낌이 가득하다. 최근 유행하는 여자친구 등 일명 청순 걸그룹들의 행보를 의식하지 않았나 싶다. 다만 충분한 설득력이나 기획의 구심점이 느껴지지는 않아 아쉽다. 3번 트랙은 MBK가 많이 해온 뽕삘이 가득한 발라드인데, 여기까지 들으면 청자 타깃이 더욱더 명확해진다... '내 친구의 남자친구'의 뮤직비디오에서 보였던 코믹한 센스가 꿈이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없다.
햄촤: 앨범을 처음 듣고 무척 당황했다. 여름이 코앞인데 신나는 곡이 하나도 없다니. 멤버 탈퇴와 합류 등 재정비가 있었던 것으로 봐선 발매 시기가 예상보다 꽤 미뤄진 건 아닐까 하는 어림짐작도 해본다. 살짝 헷갈리는 계절감을 지우고 듣는다 해도 미니앨범치고는 꽤 이례적인 구성이란 생각이 드는데, 타이틀곡 '그 길에서'를 제외하면 대부분 어쿠스틱한 사운드와 느린 템포의 곡들이다. 제목에서 연상되는 팬 헌정곡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신파조 멜로디의 발라드 '연습생', 예빈 솔로 버전과 다이아 버전 두 곡이 실린 예빈의 자작곡이라는 '널 기다려', 그사이에 새 멤버 은채의 심경을 담은 듯한 가사의 솔로 곡 '기억할게요'까지, 따로 듣기엔 모두 준수한 곡들이지만 미니앨범치고는 그룹의 히스토리가 너무 많이 담기다 못해 넘친다는 인상을 준다. 팬들에겐 어떤 느낌으로 다가갈지 모르겠지만, 신규 팬들의 입덕(?)을 노리기엔 조금 진입장벽이 있는 앨범이 아닐까.
햄촤: 2000년대 초반 인디고라는 그룹이 불러 반짝 히트했던 여름 노래를 리메이크한 곡이다. 당시 원곡을 꽤 즐겨들었던 입장으로선 편곡이 썩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보단 원곡의 청량감이 많이 없어진 것 같아 아쉽지만, 기억에서 잊혔던 노래가 단순한 추억에 기댄 1회성 이벤트가 아닌 새로운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면 언제든 반가운 일이다. 아예 작정하고 클럽 댄스 스타일로 편곡한 버전과 어쿠스틱한 버전 두 가지를 내놓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미묘: 인트로까지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실제로 트랙 자체에는 크게 무리가 없어서, 나름 괜찮은 사운드로 나름 기운차게 흘러간다. 비트가 이어지다가는 한 번씩 전환해 주는 방식도 나쁘지 않다. 다만 어떤 신비한 이유로, 이 사람들이 부를 곡이 아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자. 곡 전체에 보컬에 대한 컨트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우선 녹음 단계에서부터 디렉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던 것 같고, 녹음된 소스도 전경과 배경의 구별 없이 구름처럼 한 덩이로 뭉쳐 있다. 메인 멜로디가 무엇인지도 들리지 않을뿐더러, 독창을 할 때도 보컬이 잘 들리지 않는다. 실은 작곡 단계에서부터 보컬리스트들의 음역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보도자료에 믹솔리디안이란 용어가 등장하는데, 예술적 시도에 대한 집착으로 보기에는 상투적으로 팝하다. 트랙은 혼자서 앞으로 나아갈 뿐이라, 보컬이 빠졌다면 차라리 무난하게 들렸을 것이다. 음악적 배경이 없는 사람들도 아닌 모양인데, 이것이 진심인지 궁금하다.
미묘: 좋지 않게 볼 만한 요소들이 참 많다. 키덜트 아재들만 신나 하는 달고나 같은 소재부터, 영상 속 김도연이 (익명 처리된 남성과 함께) 보여지는 방식까지. 그리고 무엇보다 여름을 맞이하는 레이나와 산이의 듀엣이란 포맷과 기조의 동어반복이 그렇다. 하지만 약 오르게도 곡과 뮤직비디오는 영리하고 준수하게 잘 만들어졌다. ('여성이 좋아하는 것'으로 설정된) 달콤한 음식들이 '여성성'의 클리셰로서 채용되었음에도 그것이 일상으로서의 연애를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부터 그렇다. (산이는 여전히 자극적인 래핑을 방송 수위로 맞추는 데에 자신의 '랩 지니어스'를 사용한다.) 16비트의 리듬으로 잘 흘러가는 비트는 내추럴계 여름 트랙의 클리셰를 비껴가고, 블루노트와 마이너 코드를 잘 활용한 멜로디는 푸근한 사운드와 함께 느긋한 분위기 속에 고혹적인 공기를 조금씩 불어 넣는다. 그것이 여전히 만화적으로 또렷한 레이나의 이미지와 부딪히는 순간도 흥미롭다. 다만 곡은 커플송의 외연을 취하되 뮤직비디오와 시점과 가사, 곡의 구조, 사운드까지 철저히 남성의 시선으로 만들어졌다. 그럴 때, 이 성적 은유 많은 곡이 레이나의 '우아함'과 공기 같은 보컬을 그의 똘망똘망한 얼굴과 어떤 식으로 분리해 놓는지는 재고해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런 불편함이 없었다면, 극 중 익명 남성이 사실상 산이와 동치되면서 김도연과 커플을 이루고, 커플송을 부르는 레이나가 작품 외부의 보컬리스트로 자리함으로써 '아이돌십'을 비껴가는 것을 흥미로운 시도로 즐길 수 있었을지도.
햄촤: 솔로인 입장에선 너무 달달해 짜증 나 못 들어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랑말랑하게 잘 뽑힌 사랑노래다. '한여름밤의 꿀'의 속편처럼 썸을 타던 두 사람의 관계가 진전된 가사의 내용만큼 산이와 레이나의 합도 이전보다 더 편하고 좋아진 듯하다. 애프터스쿨과 오렌지캬라멜에서의 레이나 보컬을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이 노래에서의 창법은 다른 가수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귀에 편하게 들려와 그녀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게 된 곡. "달고나처럼 우린 달구나"라는 오글대는 가사도 어찌나 자연스럽게 불러버리는지. 오렌지캬라멜 활동이 레이나를 단련시킨 걸까?
김윤하: 트로피컬 하우스를 베이스로 부유감과 공간감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곡조 위 보아 특유의 비음과 빈지노의 제멋대로라 어쩐지 더 끌리는 플로우가 분분히 흩어진다. 트렌드로 보나 계절감으로 보나 부족함이 없고, 여름 한 철 좀 더 자주 듣고 싶은 출중하고 편안한 팝 넘버. 척 하면 탁 하는 느낌은 아니지만 어쩐지 조금 수줍어하며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는 듯한 두 사람의 콜라보가 자아내는 분위기가 (좋은 의미로) 꽤나 신경 쓰인다.
미묘: 부쩍 느긋해진 보아에게 트로피컬 하우스가 이렇게 잘 어울릴 줄 몰랐다. 이국적 청량함으로 꿈틀대는 비트에 넓은 공간이 교차하면서 연달아 변화하는 곡조 속에서, 나긋나긋하지만 만만치 않은 보아의 보컬이 안성맞춤으로 들어앉는다. 3분 10초에 끝마치기엔 조금 아쉬워, 좀 더 확장된 버전을 감상하고 싶은 욕심도 든다. 후반을 전환하는 빈지노의 랩은 어수선하게 매력적이어서 곡의 흐름 속에 정확하게 꽂힌다는 느낌인데, (더구나 보아의 보컬이 부드럽게 처리된 것에 비해) 갑자기 너무 앞으로 튀어나와서 반주를 다소 잡아먹고, 그 때문에 비트의 흐름이 산만해지는 면이 있다.
조성민: 〈프로듀스 101〉의 남자 아이돌 버전은 따로 준비 중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소년 24〉를 〈프로듀스 101〉과 비교하지 않긴 힘들 것 같다. 'Pick me'에 비해서는 확실히 준수해진 곡의 퀄리티와, 인원이 49명으로 줄어들어 좀 더 개개인 멤버의 매력을 어필할 기회가 많아졌다는 점, 그래서 단순한 떼창이 아닌, 파트 분배에 의한 개인 기량의 과시에 주안점을 두었다는 것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방송 내용에 대한 여러 담론들이 오가는 상황이지만, 'Rising Star' 뮤직비디오로만 한정해서 보자면 확실히 이전보다 더 '잘 차려진 밥상'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프로듀스 101〉과 달리 기획사 소속 연습생이 아닌 철저히 개인 신분으로 참가한 〈소년 24〉의 멤버들은 어쩐지 좀 더 날 것의 느낌이 많이 나는데, 일단 뮤직비디오 안에서는 그것이 어떤 순수한 열정 따위를 표현해내기에 좋았던 것 같다. 부디 최종 결과물까지 준수함을 유지하길 빌어본다.
김윤하: 전작 "FRANK"를 함께 작업했던 CHEEZE/바이바이배드맨의 구름과 다시 한 번 호흡을 맞춘 미니 앨범. 따라서 큰 변화보다는 전작의 기조를 그대로 이어 심화/확장해 나가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다. 편곡 상의 소소한 변화들을 제외하면 세 곡의 수록곡 모두 한 곡을 변주한 곡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같은 온도와 같은 채도를 유지하고 있는데, 전작에 비해 한층 짙어진 감정 덕에 팝으로서의 매력이 다소 감소한 점이 조금 아쉽다. 백예린의 목소리와 감성이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확인했으니, 이제 조금 더 선명한 마스터플랜을 만나고 싶다.
미묘: 이 음반에서 백예린의 보컬은 무척 안정적이다. 그것은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존재감을 확보한 채 감정의 섬세한 결을 충분히 담아내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는 자신감이다. 타이틀 'Bye bye my blue'는 소문자로 표기한 제목처럼 IM7 코드에 안정적으로 주저앉아 가지만, 오히려 바로 그것이 이 곡의 간절한 마음에 담담한 품위를 담아낸다. 그 걸음은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짧게 때리고 입을 다무는 스네어, 가끔씩 아슬아슬하게 엇나가버리는 리듬, 자신이 잊혀도 좋다는 듯이 몸을 비트는 베이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비집고 들어오는 노이즈, 그리고 후반의 간주에서 비틀어진 신스가 치고 들어오면 순식간에 풍경은 넓어진다. 침착하고 멜로디 고운 노래에, 폭넓은 팔레트에서 고른 과감한 사운드 운용이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한껏 깊이를 더하는 방식. 이 곡이 가슴 한켠을 시리게 훑는다면, 비슷하게 이뤄진 '그의 바다'는 벅차게 감정을 끓여 올린다. 'Zero' 역시 좋은 취향과 단정한 기세를 갖췄지만 너무 전통적인 록으로 들리기도 하는 것은, 앞의 두 곡이 워낙 참신하고 감동적이며 R&B 발라드와 가요의 틀 자체를 새롭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운 여름밤에 어쩐지 마음이 허해질 때면 몇 번이고 돌려 듣고 싶어지는 트랙들이다.
미묘: 꽤 괜찮은 곡이다. A, B, C 세 파트 모두가 각각 두 구역으로 나뉘는데, 모든 구역이 앞뒤와 확연하게 차이를 보이면서도 집중력 있게 기세를 끌고 나간다. B 파트의 멜로디에 다소 공백이 있어 에너지가 새어나갈 수 있음에도 말이다. 정작 후렴의 마무리를 비롯해 각 파트 이후의 연결은 임팩트가 약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파트가 꿈틀대는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이 곡이 케이팝 대중에게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면 일부는 그 지점에서 유래할 수도 있겠는데, 이는 각 구역을 각각의 멤버가 거의 전담하는 구성과 더불어 취향의 영역일 수 있다. 나의 경우에는, 조금 서운하지만 흥미롭다는 쪽이다. 후렴이나 브리지에서 사운드가 다소 지저분해지는 것이 아쉽다.
돌돌말링: 한중 합작 그룹이고 멤버들도 한국인과 중국인이 섞여 있다더니 뮤직비디오에서 보이는 스타일링 등이 정말 조금 낯선 느낌이다. 이게 중국 본토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인 걸까…? 아직까진 어설프게 들리는 멤버들의 역량에 비해 노래는 굉장히 캐치하고 좋다. 뭣보다 낯선 신인돌의 데뷔곡이라기엔 편곡이 매끈해서 놀랐다. 갓세븐의 'Fly' 등의 편곡으로 만났던 OBROS의 작사 작곡 편곡이라고 한다. 아, 중국의 방송국 자본이 만들었다면 여타의 낯선 신인돌들과 같은 입장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으려나. 뮤직비디오도 자니브로스가 만들었다고 하고.
미묘: 겸허한 자기주장처럼 느껴졌던 지난 싱글 이후, (그 두 곡을 모두 수록한) 신작은 훨씬 야심 차다. 리조네이터(resonator)로 광활하게 일그러지는 신스와 이국적인 챈트가 합창으로 이어지는 'Nothing'과, 로킹한 느낌과 표현력의 범위를 크게 확장하는 '이 곳'을 전작들 틈새에 배치하고, 보다 부담 없는 '역시 혹시 다시'로 마무리하여 균형을 시도한다. (여담이지만 규모로 보나 짜임새로 보나 이 음반은 EP라 봐도 좋을 듯하다.) 'Nothing'이 콜드플레이(Coldplay)를 출발점으로 콜드플레이의 참조점들을 찾아 날아간다면, '이 곳'은 무려 토리 에이모스(Tori Amos)를 재현해낸다. 피아노가 저역에서 역동적으로 몰아치며 만드는 로킹한 그루브, 클래시컬한 솔로, 살짝 이식된 이국 취향까지. (그러고 보면 숲 속의 파자마스러운 드레스 역시 토리 에이모스가 '대선배' 아니던가.) 그리고 그것은 수빈의 멜로디 색채나 보컬에 매우 잘 들어맞는다. 이 곡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공간을 넓혀가는 것이 수빈의 곡들에 담긴 정서와 적절히 어울리기도 하고, 심지어 가성과 진성을 오가는 부분에서는 목소리마저 비슷하게 들린다. 소품이었던 전작에 비해 스케일이 커지면서 스타일 변화의 폭도 커졌지만, 여전히 수빈은 작품의 결을 손안에 쥐고 통제하며 영리하게 조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과감하게 영역을 넓혀가는 행보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조성민: 담담하게 시작했다가 가스펠 풍의 합창으로 마무리되는 'Nothing'이 일단 청자를 무장해제시킨다. 이미 수작으로 꼽아 추천한 바 있었던 '미워'와 '꽃'도 반갑지만, 새로운 타이틀곡 '이 곳'도 주목해야 한다. 피아노 멜로디를 기본으로 흐르다가 곡을 끝까지 받쳐 나가는 베이스와 드럼이 합류하면서 공간감과 다이내믹을 구현해낸다. 그냥 흔한 팝 발라드 트랙들이라고 하기엔, 어딘지 모를 에너지가 느껴져서 좋다. 하지만 역시 가장 좋은 것은 자칫 균형을 잃기 쉬운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중심을 잡고 있는 수빈의 보컬이다. 피아노나 어쿠스틱 기타의 여린 멜로디와 수빈의 차분한 보컬이 각 트랙의 전반부를 무척 조화롭게 리드하고, 후에 빌드업 되는 사운드와도 전혀 파묻히는 느낌 없이, 오히려 적당한 에너지를 내서 균형을 맞추고 곡을 지휘해나가는 수빈의 능력은, 자작곡을 수록하기 시작한 지 이제 2년 된 아이돌의 것이라고 하기엔 경이로울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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