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nderland’ 뮤직비디오는 바닷속의 ‘구구단 시어터’ 속을 엿보면서 시작한다. 바닷속에서 하필 천체망원경을 들여다보던 한 멤버(하나)는 안무의 시작 부분에서 여덟 명의 손 밑에 누워있고, 그의 모습은 렌즈의 왜곡으로 굉장히 멀게 보인다. ‘환상적인 일상’을 담은 이미지 위주의 준-드라마타이즈 인트로가 끝나면 기다리는 것은 텅빈 무대. 이 뮤직비디오는 ‘구구단 시어터’의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전제한다. 그것은 마치 놀이동산의 특별무대 같은 공간이다.
곡 또한 그런 분위기를 강하게 드러낸다. 농담처럼 ‘에버랜드 팝’이라 불러도 좋을, 웅장한 브라스와 힘찬 비트 속에 쉽고 명랑한 멜로디가 흐르는 곡이다. 비슷한 정조로 유례없는 히트를 기록한 것이 아이유의 ‘좋은 날’이었음을 떠올리면 브리지에서 미나의 “아이쿠”는 심상치 않다. 다만 이 놀이동산은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에버랜드가 아니라, 바닷속에 있는 ‘구구단 시어터’다. 화려한 신스 사운드와, 공간의 뒤쪽으로 몰려 왜곡된 스트링은, 비현실적으로 반짝이는 곡의 풍경을 효과적으로 구성한다. 마침 이 곡의 프로듀싱팀 Butterfly는 황성제를 중심으로 꾸려졌고, 그는 보아의 ‘아틀란티스 소녀’를 작곡한 인물이다. ‘Wonderland’는 아틀란티스에서 벌어지는 ‘좋은 날’의 세계를 좀 더 전자적인 질감과 저연령 취향으로 선보인다.
유치하다는 반응도 많지만, 곡은 세심한 디테일로 채워져 있다. 후렴의 꽉 짜여진 보컬 ‘덩어리’는 ‘샤하게’ 믹스되어 호흡 섞인 발음들이 귀를 긁을 듯이 달려드는데, “하나하나”에서 “하”에 액센트를 주어 더 공격적으로 찌른다. 그리곤 브리지 이후 재차 반복되는 후렴에서는 간소화된 반주 위에서 “하”를 일부러 조금 길게 누르며 지나가고, 백업 보컬마저 이 비정형적인 리듬에 연동된다. 백업 보컬의 확실한 서포트를 받는 “모든 걸”은 마지막에 음정을 과감하게 떨어뜨리면서 멜로디에서 ‘말’의 영역으로 들어서 버리고, 동시에 쉽게 흐르던 멜로디의 흐름을 테이프 스탑 이펙트처럼 휘어잡아 공중에 흩뿌린다. 아기자기한 요소들이 수시로 귀를 자극하면서도, 곡은 거침없이 앞으로 달려나간다. 이는 묵직하고 부드러운 사운드로 공간을 누비던 베이스가 후렴에서 탱탱한 타격감의 옷을 갈아입고 활약하는 덕분이기도 하다. ‘아틀란티스 소녀’에서도 그대로 활용된 패턴처럼, 사분음표로 두 번 찍어 눌러 임팩트를 확보한 뒤 빠른 리듬으로 잰걸음을 떼며 공간을 가속하는 것이다.
그렇게 흐르는 구구단의 노래는 사랑스럽다. 거기에는 무대를 향한 떨림이나 연습의 고통 같은 것은 없다. 놀이동산의 특별무대는 오로지 꿈과 환상에 마음껏 빠져들고자 하는 관객들만을 대상으로 하므로. 순서에 맞춰 격자로 뛰어오르는 안무처럼 마냥 신나면서, 그 대신 눈 돌릴 틈을 주지 않는다. 이미 뮤지컬 무대를 그대로 옮겨온 듯하던 빅스의 무대 연출을 좀 더 귀엽고 디테일하게 만들어 놓았다. 구구단은 극단이란 기믹이니까, 배우만이 아닌 무대장치까지 멤버들이 구현해버린다. 해초 또는 해류를 묘사하는 듯한 군무를 중심으로 멤버들의 대형은 수시로 대도구가 되고, 그에 따라 장면 전환이 이뤄진다. 여기에, 팔을 올리며 걷는 동작이나, 지느러미를 형상화한 듯한 동작 등 구상적인 안무들이 많이 포함되면서 이 무대가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텍스트의 양은 상당한 밀도를 갖는다.
미니앨범 전체가 그렇다. 수록곡 전반이 상당한 밀도의 좋은 아이돌팝을 선보인다. 설레는 마음을 표현한 ‘구름 위로’는 비틀린 싱코페이션 리듬과 센서블 노트가 매혹적으로 얽혀 돌아가면서 최근 몇몇 걸그룹들의 음반 수록곡에서 선보여지는 ‘음악 덕후 취향’을 반영하지만, 동시에 ‘Wonderland’의 번쩍이는 디지털 질감으로 이를 마무리해낸다. ‘Good Boy’는 비교적 평이한 ‘걸그룹 곡’이지만, 가장 고전적인 취향의 발라드 트랙인 ‘Maybe Tomorrow’(Melodesign)마저도 동아 기획, 김형석, 데이비드 포스터 등의 취향을 오가며 자극의 빈도를 높임으로써 느끼함을 덜어낸다. ‘일기 (Diary)’(영광의 얼굴들 외)는 모던록 풍의 텍스처와 액센트로 감성이 처지지 않도록 속도감을 준 채 또랑또랑하게 꽂히는 보컬로 “감당할 수도 없이 내게 와” 같은 가사를 펼쳐 놓다가는 선명한 결론을 내리지 않고 공중에서 멈춘다. 소속사 젤리피쉬 엔터테인먼트가 빅스에서 익히 선보인 탄탄한 퀄리티의 지향과 함께, 일부 멤버의 다른 그룹 활동으로 인한 이미지 소모를 쇄신하겠다는 의욕도 엿보인다. 적지 않은 경우, 아이돌은 ‘빈틈’이 있어야 흥행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빈틈’을 음악에 두지는 않겠다는 이 음반의 의지는 분명 미덕이라 할 만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밀도 높은 프로젝트에 ‘빈틈’은 어디에 있는가. 화려하게 엉성한 의상이나 그룹의 네이밍, 마스코트 ‘뀨’ 등이 아닐까. 이를테면, 에버랜드지만 삼성의 자본력이 아니라 소녀들이 준비한 무대이기에 의상이 조금 엉성하지만 귀엽게 봐 달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 실효를 논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주위에서 꾸려지는 이 곡의 전략은 다소 우려되는 구석이 있다. 아이돌이 드러내는 기호는 물론 당사자의 그것이지만은 않지만, 때로는 팬 또는 타깃층의 눈에 비친 인물상을 반영한다. 구구단의 마스코트 크리처인 뀨는 (소속사 대표의 얼굴을 닮았다는 농담을 제하면) 초자연적 생명체의 조력을 받는 〈세일러 문〉부터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까지의 일련의 마법소녀물, 또는 〈포켓몬스터〉 계통의 맥락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구구단은 뀨와 함께하는 그룹인 동시에, ‘뀨와 같은 것들을 좋아하는 소녀’로 표상된다. 아동물의 세계는 신비로워서 비전문가인 성인이 함부로 재단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뀨와 구구단의 뮤직비디오가 성인들에게 어떤 연령대의 소녀를 제시하는지는 알 수 있다. 단순하고 쉬운 멜로디 역시 팝의 미덕일 따름이지만, 그것이 동요적 색채를 띠며 학예회를 연상케 하는 콘셉트와 결부될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멤버들과 콘셉트의 부조화가 갖는 상업 전략의 리스크를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이 전략이 의도대로 성과를 거둔다고 했을 때, 이 그룹이 이미 어느 정도 확보한 성인 (남성) 팬층에게 어떤 이미지로 포지셔닝 되기를 노리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플레디스걸즈가 백일몽을 꾸는 현실을, 에이프릴이 메르헨 세계를, 오마이걸이 만화적 비틀림을, 여자친구가 소년 만화, 러블리즈가 판타지 소녀 만화를 각각 지향하고 있을 때, 구구단은 극단을, 그중에서도 놀이동산 또는 어린이극의 무대를 선택했다. 안무에서 멤버들이 몸으로 표현하는 무대의 배경은 뮤직비디오에서 아예 (조악한) 실제 대도구로 등장하고, 영상 속 공간은 드라마타이즈 파트에서도 바닥 타일이 보인다. 그렇게 뮤직비디오는 매트한 2차원으로서의 무대 위에 펼쳐지는 극이 아니라, 이 뒤에 극단이 춤추고 연기하고 있다는 ‘일종의 소격효과’를 구사한다. 이런 무대를 관람하는 이는 환상적이고 과장된 연출, 그리고 수시로 등장하는 비눗방울이나 투명한 구슬처럼 마음껏 왜곡이 일어나길 기대한다. 그렇기에 ‘Wonderland’의 유치해 보일 수 있는 과장은 전략의 실패가 아니라 정확히 기획의 의도다.
극단 기믹의 장점으로, 많은 이들이 변신 가능성을 말한다. 한 팀의 아이돌은 사실상 극단과 마찬가지여서, 이들이 매번 새로운 콘셉트를 선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어있다. 그럼에도 극단이라는 이름은 어쩌면 콘셉트 변화에 조금 더 명시적인 정당화를 부여할 여지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다 큰 무기는 아마도, 때론 캠피(campy)할 정도로 과장된 콘셉트를 구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일 터이며, 그것이 ‘Wonderland’가 보여준 것이다. 다만 그런 과장의 허용이 저연령 취향 또는 그 이미지에 기대고 있다면 그것은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 뮤직비디오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구구단 시어터의 모습이 예고하는 초원 속에서 펼쳐질 다음 무대가 이 딜레마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사랑스럽게 잘 만들어진 이 미니앨범을, 그때가 되면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길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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