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에 나오는 아이돌들이 태어날 때부터 완벽하게 예쁘고 잘생기고 귀엽고 섹시하진 않았다는 걸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물론 본바탕의 우월함이 기본적으로 필요하겠지만, 그들도 “OO 과거”라는 검색어 앞에서 살아남기란 쉽지가 않은 것이다.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키워드로 성형, 다이어트, 서클렌즈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메이크업’이라는 키워드를 좀 더 파헤쳐보기로 한다. 1편, 2편에서 이어진다.
가요계를 뒤흔든 골반 춤의 ‘아브라카다브라’, 찬사가 쏟아졌던 강렬한 눈화장의 ‘돌이킬 수 없는’, ‘손 사령관’이 되어 무대를 지배했던 ‘Sixth Sense’. 다음은 얼마나 더 강한 언니가 나올 차례였을까? 가인은 차세대 섹시 디바였을까? 아이라인은 어디까지 더 그려야 했을까?
놀랍게도 가인은, 굳이 ‘성인식’을 선언한다. 한국 나이 26세의 경력 7년 차 여가수가 이제 와서 활짝 ‘피어난’단다. 거기다가 ’S’에 대해 우리 한 번 얘기해봐요, 속삭인다. 이미 알 것 다 아는 나이의, 하지만 소녀처럼 가녀린, 깨끗한 얼굴을 가진 하얀 가인이 순진무구한 목소리로 “이렇게 좋은데 날 갖고 뭘 했냐”고 한다.
이건 ‘주민등록상의 성인이 되었으니 우리도 이제 한 번 가슴골을 드러내고 장사 좀 해볼까’하는 식의 성인식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 와중에 성인식 분위기에 맞게 스모키 화장을 하자니 이미 가인은 아이라인으로 유명했다. 짧은 하의? 원래 입고 다녔다. 블랙 일색의 가죽옷? 이미 ‘아브라카다브라’에서 입고 춤까지 다 췄다. 이제 와서 뭘 해야 하나.
‘피어나’에서 가인은 사실 남자를 유혹하는 섹시 콘셉트라기보다는, “나 이렇게 섹시하니 너무 좋다”고, “섹시한 게 이렇게 좋은 걸 몰랐네!”라고 환호를 지르는 콘셉트에 가깝다.
그런데 이미 20대 후반을 향해 달려가는 그녀가, 이미 한참 전에 골반 춤을 추고 바닥에 드러누워 섹시한 안무를 하던 그녀가, 정말 몰라서 그랬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다 알지만 모르는 척’하는 것이었을까?
사실 그녀는 ‘피어나’의 콘셉트가 정말 이제 막 성인이 된 여성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젊은 시절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에 더 맞닿아있음을 고백한 바 있다**. 대부분의 20대 초반 아이돌들은 성인으로 거듭나는 콘셉트 변화에서 ‘섹시함’을 보여주기 위해 풋풋한 이미지를 최대한 덜어내곤 한다. 가인 또한 ‘아브라카다브라’에서 과감한 의상과 춤을 선보였고, ‘돌이킬 수 없는’ 무대에서 금방이라도 뛰어내릴 것처럼 사랑을 부르짖었다. 이제 갓 성인이 되어 하는 사랑은, 모든 게 서툴고 어색해서 끝날 때조차 생살점을 떼어내는 것처럼 아프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는 다 그렇다. 남자 하나 가지고도 밤새 울 수 있었고 세상이 다 무너졌다.
**<아이즈>, 2014년 2월 “남들이 이상하다고 해서 중간에 멈추기는 싫다”
하지만 나이가 든다는 것은, 하나하나 세상이 끝장날 것처럼 아파하던 일보다는 작은 것조차 신기했던 그 처음의 두근거림이 그리워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즉, ‘다 알지만 모르는’ 게 아니라, ‘다 아니까 마냥 예쁘고 소중했던’ 기억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26세의 가인은 남자 때문에 울부짖던 기억보다도,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듯했던 첫 경험의 아름다움을 더 이야기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20대 중반만 넘어가도, 어린 애들이 참 예뻐 보이고, 동시에 스스로의 모습에 단속을 하게 된다. 조금만 나이가 들어도 과감한 메이크업이나 스타일을 시도하기가 꺼려지는 것이다. 차라리 더 짙고 어두운 화장을 하면 했지, 나이 들어 캔디 컬러의 알록달록하고 뽀얀 메이크업을 하기엔 눈치가 보이게 된다. 그렇다, 가인의 ‘피어나’ 메이크업 콘셉트는 마치 ‘어른이 상상한 어린아이의 화장’ 같다.
사실 가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짙은 아이라인은 날렵한 턱선에 굴곡이 적은 가인의 얼굴에 잘 어울렸지만, 귀엽거나 풋풋해 보이기는 어려웠다. 뮤직비디오와 무대, 콘셉트 모두 확 밝아진 조명 아래에서 모든 객체의 채도와 명도를 높이는 와중에, 어딘가 모르게 어두침침한 느낌을 내는 짙은 아이라인을 그대로 가져갈 수는 없었다.
‘피어나’에서는 첫 경험의 놀라움, 그 다음 날 달라진 자신에 대한 묘한 흥분, 그 자신감을 비비드 컬러의 눈 화장으로 표현했다. 원래도 하얀 피부였지만 베이스 톤을 최대한 밝게 가져가서 뽀얀 느낌을 강조하고, 아이라인은 아주 굵고 심플하게 그렸다. 아이홀 부분에는 조금 어두운 컬러로 음영을 넣어주어서 눈이 부어 보이지 않게 했다. 여기에 길고 풍성한 속눈썹을 촘촘하게 붙여 장난감 같은 느낌을 내는데, 때로는 컬러 아이섀도 대신 눈꼬리에 비비드한 컬러의 속눈썹을 붙였다. 아이브로우는 헤어 컬러에 맞춰 흐리고 아치 없이 부드럽게 그려서 소녀 같은 인상을 연출했다.
캔디 컬러의 립 메이크업은 남자를 유혹하기 위한 색상이라기보다는 장난감을 갖고 노는 듯한 느낌으로 발라주었다. 이제 나도 소녀가 아니니까, 이런 핫한 색깔을 입에 베어물어도 된다는 것처럼. 당시 한창 유행하던 투톤 립 메이크업인데, 입술 전체 윤곽을 흐릿하게 누드 컬러 혹은 흐린 핑크로 채워주고, 입술 안쪽부터 쨍하게 진한 색을 발라서 블렌딩하여, 색이 물들어 나오듯이 연출한다. 일상 메이크업에서도 부담 없이 진한 컬러를 쓸 수 있는 방법이다.
한편 무대 밖에서는 2013년부터 가인의 얼굴에 브라운 계열의 펄 비중이 늘어났다.
가인은 당시 모 국내 메이크업 브랜드 모델이 되면서 아예 여름을 타깃으로 한 브론즈 메이크업 화보를 많이 찍었는데, 브론즈 컬러가 가인의 흰 피부에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원래 썸머 메이크업은 전통(?)적으로 태닝과 연결되어 있고, ‘태닝’하면 브론즈, 이런 식이었다. 이 땅에서 태닝 따위는 절대 팔리지 않는데도 십 년이 지나도 포기 못 하는 해외 메이크업 브랜드들의 융통성 없는 원칙이었겠지만. 그런데 가인은 흰 피부를 그대로 밀었다.
사실 그렇다고 가인이 밝은 피부 톤의 브론즈 메이크업을 시도한 최초의 연예인은 아니다. (그렇게 말하면 피를 토할 메이크업 실장님들이 한 부대일 터.) 다만 길고 가는 눈에 어울리는 브론즈 펄 섀도의 사용법을 제시했달까. 눈가 전체에 피부 컬러와 거의 같은 베이지 섀도로 깊이감을 넣어주고, 라인은 아래위로 다 채워주되 예전보다는 가늘게 넣은 후 펄 섀도로 둘러싸듯 발라주었는데, 훨씬 눈매가 부드러워 보이면서도 답답하거나 눈가가 작아 보이지 않는다. 같은 2013년 여름에 발표된 ‘Kill Bill’에서 빨간 립 메이크업이 가미된 브론즈 메이크업이 무대용으로 좀 더 화려하게 변주된 것을 볼 수 있다.
가인은 얼굴형이 갸름하고 눈 윗부분 굴곡이 없기 때문에, 아이라인을 눈 좌우로 길게 빼준 후 아이홀에 컬러감을 겹겹이 넣어도 부담이 없다. 쌍꺼풀이 진한 눈이라면 아이홀 부분의 컬러를 좀 더 좁게 써주는 게 좋겠다.
*관련한 메이크업 하우투는 블로그 검색 시 자세히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기본적인 음영은 펄이 없는 섀도로 베이스를 깔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터라, 비슷한 방식으로 한 블로거를 한 명 꼽았다. 물론 일단 예쁘시다. (…) (http://blog.naver.com/highkick_/100196796440)
같은 해 싸이의 ‘Gentleman’ 활동도 있었지만, 특별한 콘셉트와 메이크업을 했다기보다는 평소 쌓아온 섹시 이미지의 연장 선상에서 밝은 헤어에 맞는 밝은색 아이브로우와 가인 표 아이 메이크업으로 평이(?)하게 마무리 지었다.
2013년에는 활동을 길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인의 팬들에겐 기다림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2014년 초부터 가인은 영화 시사회장부터 활발하게 외부 행사에 노출되었다. 그리고 2월, 세번째 미니앨범 발표.
원래 가인은 팬들 사이에서 야속하기로 유명한데, 비활동 기간에 워낙 조용히 지내는 데다가 팬들에게 살갑게 대하지 않는 편이라고 한다. 연예인 친구도 많지 않은지라 별다른 스캔들도 없었고, 섹시한 춤을 춘다고는 하지만 무대 밖에서의 가인은 딴 사람 같기만 하다. 하지만 조용히 지낸다고 마냥 마음이 고요했던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별다른 반응이 없으니 오히려 간혹 도는 말이 진짜인 양 돌아다니기도 했을 테고, 대담한 행보를 놓고 그게 그 사람의 전부인 양 얕잡아 치부해버리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었으랴.
2014년 2월, “진실 혹은 대담”이라는 사뭇 고전적인 타이틀을 들고 돌아온 그녀는 ‘19금 이상의 19금’이란 표현으로 홍보를 시작했다. 이미 모두가 시원하게 벗어제끼고, 어디든지 흔들 수 있는 건 다 흔들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의 섹시함이 과연 대중들에게 ‘먹힐 것인가’에 대한 의문 어린 걱정이 사실 많았다. 하지만 가인이 이제껏 어디 뻔한 섹시함을 추구해 왔던가. 역시나 그녀는 흔들림 없이 꼿꼿하게 “저 하고 싶은 거 가지고 돌아왔어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소문이 별로 없는 연예인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건, 소문을 진짜라고 믿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 그건 진짜잖아. 소문이 아니라.” 늘 파격적인 섹시함을 들고 돌아오는 그녀, 무대 위에서 끼를 폭발시키는 그녀, 하지만 무대 밖에서는 마냥 수줍은 그녀는 이런 그녀의 아이러니를 오히려 대놓고 말해버린다. 뒤에서 내 얘기 맘대로 해요, 어차피 진실이 뭐건 믿을 테면 믿어, 라고 애써 센 척 말하면서도, 그녀는 있는 힘껏 관능적이고 요염한 모습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건 성가시지만, 섹시한 차림을 하고 무대에 올라 나를 봐줬으면 하는 마음, 세상 모든 거 다 알 것처럼 한껏 오만한 표정이지만 어딘가 불안하게 떨려오는 내면.
‘진실 혹은 대담’의 그녀는 흔해빠진 스모키 따위는 우습다는 듯이, 이례적으로 채도 높은 컬러를 아이홀 위에 잔뜩 바르고 등장했다. 컬러를 눈꼬리에 빼거나, 브라운 계열의 톤 다운된 섀도를 좌우로 길게 라인에 덮어씌우던 과거 방식에서 벗어나, 아예 아이홀 정 가운데에 파란 섀도를 넓게 발라버린 것이다. 아이홀 컬러에 맞춘 흐린 컬러 렌즈도 잊지 않았다. (사실 눈동자 색이 밝으면 스모키 메이크업이 더 근사해 보인다.) 마치 80-90년대 핀업걸처럼 한껏 선정적이고, 어른스럽고, 아슬아슬한 느낌을 주는 아이 메이크업이었다. 여기에, 머리카락에 가려 잘 보이진 않지만, 살짝 힘이 들어간 직선 아이브로우를 연출했는데, 딥 블랙 헤어 컬러에 맞춰 아이브로우 컬러도 검은색이다. 립 메이크업은 선정적이기 그지없는 핫 체리 컬러. 물기가 떨어질 것처럼 촉촉하게 마무리했다.
무대에 따라 그린-핫핑크 컬러 조합도 사용되었다. 컬러가 많이 사용되었기에 여기에서도 볼 터치 색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눈을 떴을 때 안 보이는 부분까지는 거의 검정에 가까운 아이섀도를 바르고, 눈을 떴을 때 보이는 부분부터는 비비드한 녹색과 파란색 펄 아이섀도를 그라데이션 해주었다. 사진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눈 아래 라인의 앞뒤에도 같은 컬러의 펄 섀도를 발라주었다.
몸단장은 때로는 사람의 행동과 생각을 바꾸기도 한다. ‘아브라카다브라’에서 굵은 아이라인의 날카로운 메이크업을 하고 나오기 이전에도, 그녀는 훌륭한 보컬리스트였으며 귀여운 매력이 넘치는 소녀였다. 하지만 그 유명한 아이라인 메이크업을 기준으로 가인이 보여준 매력은 또 다른 차원이 되었고, 이제까지 주어지지 않았던 스포트라이트가 가인에게 쏟아졌다. 만일 그녀가 똑같은 콘셉트를 반복하고 늘 같은 메이크업만 유지했다면 그렇게 급히 쏟아졌던 스포트라이트는 또 서둘러 떠났을 것이다. 영리한 그녀는 성실하게도 그 매력에 얽매이지 않고 과감한 솔로 앨범 발표, 늘 과감한 콘셉트, 늘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무대로 또 다른 차원의 ‘가인 표’ 섹시함을 보여줬다. 오로지 가인만이 할 수 있고, 가인의 무대에서만 유효한 메이크업과 함께.
2010년대에 들어서 가요계는 아이돌이 지배하게 되었고, 별별 콘셉트와 섹시함, 진한 화장이 브라운관과 거리를 휩쓸고 있다. 그 한가운데에 흔들림 없이 진하게 그어진 가인의 아이 메이크업은, 흔들림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과 무대를 고집했던 가인의 행보와 닮아있다. 2014년까지 숨 가쁘게 달려온 가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섹시 디바’라는 닉네임을 가인에게 붙이기에는, 그녀는 진한 아이라인을 한 얼굴로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말아요”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보는 이를 압도한다거나, 건강한 섹시함이라든지, 그런 류의 섹시함이 아닌 또 다른 섹시함의 길을 보여준 그녀가, 앞으로 어떤 메이크업을 한 채로 돌아올지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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