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래비티 “HIDEOUT” 3부작 세계관 리뷰
有緣千里來相會(유연천리래상회). 인연이 있으면 천 리를 가더라도 만난다. 만나야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만나게 된다는 운명론이다. 서로 거리를 두고 만남을 피하게 된 이 팬데믹의 시대에도 만나야 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나게 된다.
다수의 대중을 집중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활발한 인터랙티브를 통한 참여형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다. 이 상호 작용만이 줄 수 있는 경험치가 있기 때문에, 대중음악에 있어 공연이란 산업은 물론 음악 자체의 퀄리티 향상과 아티스트의 성장을 위해 필수적이다. 가장 오래된 공연 예술인 연극은 통상적으로 대본(콘텐츠), 배우(퍼포머)와 함께 관객(오디언스)을 필수 3요소로 규정한다. 관객이 없는 공연이란 이론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셈이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존재해온 공연이 사라질 순 없으니, 관객 없이도 공연은 이어져야 한다. 그래서 퍼포머는 끊임없이 오디언스를 부른다. 이 콘텐츠는 당신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고 어떻게든 설득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설득하지 않으면 ‘만나지 않음’에 익숙해진 관객이 더 이상 콘텐츠를 경험하려 하지 않고, 경험해오던 습관마저 잃기 쉽기 때문이다. 팬데믹이 장기화하면서, 초기에는 단순히 ‘무관객이라 아쉽다’에 그치던 퍼포머의 소감이 이제는 ‘익숙해질까봐 두렵다’는 불안으로 심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편리를 위한 적응 상태일 수도 있지만, 누적된 고통에 무감해져 치명적인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환경에서 어렵게 데뷔한 크래비티의 첫 번째 3부작은 ‘만남’을 키워드로 전개된다. 앨범 발표에 앞서 공개된 Prologue Film에는 세계관을 설명하고 연결하는 곡이 하나씩 삽입되었다. 1집의 ‘낯섦’, 2집의 ‘Realize’, 그리고 3집의 ‘Call my name’은 서로 떨어져 있던 이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만나게 된다는 서사를 가사와 영상을 통해 표현한다. ‘낯섦’이 고독과 방황을 직접 언급하며 만남 자체를 소구했다면, ‘Realize’에서는 ‘이 낯선 현실도 두렵지 않아, 날 숨 쉬게 한 너와 함께면’이라는 가사로 운명적 만남을 전제한다. 그러나 ‘만남’으로 귀결될 것 같았던 전개와 달리 ‘Call my name’은 여전히 과거의 만남을 회상하며 앞으로의 만남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Realize’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음에도 실질적인 만남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다. 세 번째 Prologue Film의 말미에서는 아홉 명의 크래비티 멤버가 한자리에 모두 모인다. 마지막에 합류한 세 멤버가 먼저 모여있던 여섯 명과 인사를 나누는 장면으로 마무리된 뒤 ‘Call my name’이 정식 발표되었다. 그러니까 이 문장은 세계관 안에서의 서로가 아니라 이제 막 모인 이들이 그들만의 세계 안에서 바깥을 향해 외치는 메시지다. 만날 사람들은 언젠간 반드시 만나게 되므로, 잊지 말고 이름을 불러 달라는 부탁은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지내는 사람이 많아진 시대상과 맞물려 그 어떤 아이돌이 던졌던 어필보다 강렬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크래비티의 3부작 시리즈 타이틀이 ‘은신처’를 뜻하는 “HIDEOUT”이라는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크래비티의 모든 콘텐츠는 빅네임을 과시하기보다는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라는 순수한 메시지를 성실하게 전달하는 데에 집중한다. 가시적인 성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콘텐츠의 내용과 퀄리티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팬덤이 형성된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예컨대 지나치게 무거운 주제 의식이나 공격적인 마케팅 구호에 지친 대중에게는 ‘세상에 없던 신선한 것을 보여주겠다’는 야망이나 ‘역대 최고 스케일로 압도하겠다’는 패기보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언젠간 꼭 만나자’는,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동시에 당장은 성사될 수 없는 약속이 그 어떤 슬로건보다도 비현실적인 판타지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팬덤의 다수가 경연 프로그램으로 인해 번아웃한 경험이 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이전까지 해오던 절박한 호소보다는 한층 절제된 태도로 일관하는 담담한 메시지가 훨씬 효과적일 수밖에 없다. 직접적으로 ‘힐링’을 표방한 적이 없음에도 이들을 보며 ‘무해하다’, ‘힐링 된다’는 반응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기인할 것이다. 세계관 영상에서나 무대 위에서나, 이들이 가진 초인적인 능력을 과시하기보다는 멤버 간의 상호작용이나 케미스트리를 부각하는 연출을 자주 활용하는 것 또한 이 그룹이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당신이 있어야 완성되는 서사
‘만남’이라는 테마는 여러모로 크래비티 멤버에게 큰 의미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결성 단계에서부터 여러 차원의 우려를 사기도 했던 그룹이었기 때문에 팀워크가 무엇보다도 중요했고, 어렵게 형성한 팬덤을 사수하기엔 비대면의 장벽이 어마무시한 상황이었다. 녹록지 않은 환경에서 내놓은 크래비티의 데뷔곡 ‘Break all the Rules’의 첫 소절은 ‘(Turn it up) 시간이 없어’라는 구호였고, 3부작을 마무리하는 앨범의 타이틀곡 ‘My Turn’은 ‘시간이 됐지 Answer’라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무모해 보일 정도로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한 음악은 어쩔 수 없이 ‘언젠가 만나게 될 때’를 기대하게 만든다. 이 팀에 유독 오프라인 라이브 공연을 기대하는 팬들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겠다. 9인조 다인원 그룹만이 만들 수 있는 다이내믹한 포메이션을 통해 속도감을 구현한 퍼포먼스는 물론, 짧은 시간 안에 비약적으로 성장해 이제는 안정적으로 곡을 운용하는 보컬까지 갖춘 크래비티는 누구에게 물어봐도 쉽게 흠을 찾기 힘들 정도로 잘 만들어진 그룹이다. 이런 이들에게 완성도를 더해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세계 밖에 있는, 언젠간 만나겠지만 아직은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다. 서사의 마침표를 이야기 밖에 서 있는 사람이 찍도록 만든, 어찌 보면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참여형 콘텐츠를 만들었다.
크래비티 멤버 원진은 여러 인터뷰를 통해 ‘(데뷔 준비 과정에서) 아홉 명의 멤버로 결성이 확정됐을 때 가장 행복했다’고 밝혀왔다. 멤버 정모 또한 최근 인터뷰에서 ‘지난날을 되돌아봤을 때 가장 잊지 못할 순간’으로 ‘처음 멤버가 정해졌을 때’를 꼽았다. 데뷔 자체만큼이나 지금의 멤버들과 함께 하게 된 것을 기뻐했다는 언급은 이들에게 무엇보다 ‘만남’과 ‘(공동체로서의) 우리’가 절실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데뷔 하나만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내던질 것 같은 보통의 아이돌 연습생의 이미지와는 조금 괴리가 느껴지는 태도이자, 동시에 이 팀이 지향하는 바가 남다를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하게 되는 대목이다. 또 다른 인터뷰에서도 리더 세림은 ‘조금씩 다른 부분이 있어도 팀으로 보면 합이 엄청 잘 맞는다’고 팀워크를 어필했다. 신인 그룹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향상심 또한 당연히 있겠지만, 그보다는 서로 다른 점을 찾고 어떻게 상보적인 관계로 만들어나갈지 고민하는 모습에서 막연한 공명심이 아닌 조금 더 섬세한 지향성을 느낄 수 있다. ‘만나야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만나게 된다’. 크래비티는 이 오래된 운명론에 가장 잘 어울리는 팀이고, 그래서 언젠가 마주칠 순간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아이돌로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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