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와 퍼포먼스의 불가분성을 이야기하기가 새삼스러우리만치 현재의 케이팝에서 퍼포먼스의 중요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다. 2019년 결산에 이어 <아이돌로지>는 작년 한 해 우리를 감동시킨 ‘퍼포먼스 Pick!’을 모아보았다. 순서는 ABC-가나다 순.
NCT U – Make A Wish
스큅: ‘Make A Wish’는 넓은 멤버 풀(pool) 가운데 곡에 맞추어 멤버 구성을 달리한다는 NCT U 포맷의 효용을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실하게 각인시킨 곡이다. 관능적인 휘파람 소리 아래 루카스와 재민이 각각 열정과 냉정으로 퍼포먼스의 기강을 세우면, 다수의 NCT U 유닛을 이끌어왔던 태용, 재현, 도영이 탄탄하게 길을 닦고, 압도적인 완급조절의 장력(壯力)으로 기량을 뽐내는 새 멤버 쇼타로가 펀치를 날리면, 유려한 선의 샤오쥔이 재간을 피우며 극적인 활력을 불어넣는다. 어느 하나 낭비되거나 남용되는 멤버 없이 완벽한 캐릭터 운용을 보여주는 7명의 퍼포먼스는 갖은 풍파와 제약 가운데서도 NCT U라는 포맷이, 그를 넘어 ‘네오 컬쳐 테크놀로지’라는 그룹의 표어가 지탱될 만한 근거를 몸소 제시한다. NCT의 미래를 계속해서 주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 퍼포먼스에 담겨 있다.
더보이즈 – 괴도 (Mnet <로드 투 킹덤>)
스큅: <로드 투 킹덤>은 관중이 사라지고 오로지 아티스트와 무대만 남은 자리에서 케이팝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탐구한 프로그램이었고, 그중에서도 더보이즈의 ‘괴도’는 <로드 투 킹덤>을 넘어 향후 숱한 비대면 퍼포먼스에 하나의 표준을 제시한 무대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더보이즈는 엑소 ‘으르렁’, 동방신기 ‘수리수리’, 소녀시대 ‘Holiday’와 같은 일부 곡에서 일시적으로 시도되었던 360도 무대 활용을 본격화하고 이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다. 뮤지컬 <시카고>의 ‘Cell Block Tango’에서 모티브를 얻은 도입부 이후 <로드 투 킹덤>을 재패하겠다는 호기로운 경고장이 던져지면, “로드 투 킹덤”를 형상화한 기다란 무대를 지나 메인댄서 큐가 독무를 펼치고, 독무를 270도로 훑고 난 뒤 프레임에는 11인의 멤버들이 담긴다. 관객석이 없어진 만큼 넓어진 무대 공간 곳곳에 현란한 아이디어와 안무를 흩뿌리고 이를 밀도있게 엮어낸 1분여의 오프닝 시퀀스는 뒤이어질 퍼포먼스의 티저에 불과하다. 더보이즈는 항공 캠까지 동원한 다각도의 카메라워크에 맞춰 그룹의 강점으로 꼽혀온 깔끔하게 제련된 군무를 선보이며 무대를 입체적으로 조직해나간다. 기예 수준의 고강도 동작은 물론, 왕관, 탁자 등 오브제를 착실하게 회수하며 서사를 완결하는 짜임새 역시 탁월하다. 첫 시작이 ‘괴도’가 아니었다면 ‘Reveal (Catching Fire)’, ‘도원경 (Quasi una fantasia)’, ‘Checkmate’, <2020 MAMA>의 ‘The Beginning of the End (Reveal + Checkmate)’로 이어지는 걸출한 연작도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더보이즈의 군더더기 없는 수행력, 안무가 백구영, 김석찬, 박성령의 창의적인 연출, 크레커 엔터테인먼트의 아낌없는 투자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최상의 결과물. 몇 년 째 도의마저 저버리는 아이돌 경연 프로그램이 결국 참가자들의 투혼으로 지탱되는 구도를 목도하며 착잡해지기도 하지만, 분명 빼어난 퍼포먼스와 그에 투여된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은 존중받고 인정받아 마땅하기에 더보이즈의 ‘괴도’를 주저 없이 올해의 퍼포먼스로 꼽고 싶다.
레드벨벳 아이린&슬기 – 놀이
스큅: 1년에 3~4번 컴백을 할 정도로 주기가 빨라진, 돈 투자보다 시간 투자가 어려운 근래의 아이돌팝에서 근성의 결과물이 나오기란 생각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 되었다. 하지만 신문물을 들여오는 데에는 그만한 품이 드는 법. ‘놀이’는 보기 드문 근성으로 케이팝 퍼포먼스의 폭을 확장한 작품이다. 안무 제작에만 2개월, 기본기 트레이닝 1개월을 포함한 안무 트레이닝과 후보정 작업에만 4개월을 들여 완성했다는 텃팅 퍼포먼스는 경탄을 자아낸다. 냉정하게 뚝뚝 떨어지는 박자와 조소를 날리는 듯한 시니컬한 멜로디를 가르는 관절들의 세밀한 운신은 그 유명한 ‘손가락 권법’처럼 작은 움직임만으로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지닌다. 디테일한 움직임으로 결정되는 만큼 타이트한 카메라 샷이 주를 이루는데, 이러한 퍼포먼스의 특징은 실제 관객보다 카메라를 매개해 스크린 너머의 관중에게 어필하는 일이 많은 (특히 현 시국의) 아이돌팝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이는 카메라 트릭을 활용한 퍼포먼스가 더욱 큰 쾌감을 주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후렴구 안무를 계속해서 다르게 구성하며 반복을 최소화한 구성은 스크린 너머 청중의 주의를 1초도 흐트러뜨리지 않겠다는 야심으로 가득하다. “날 감당할 수 있겠니”라는 도발에 탄복할밖에.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챌린지’ 안무가 아닐까.
방탄소년단 – On
랜디: 방탄소년단은 분명 현재 케이팝 시장의 절대 강자이지만, 트렌드세터보다는 외골수의 인상이 강하다. 유행가를 만들어도 결국은 그들이 당시 골몰하는 메시지를 부어 넣어 고집스럽게 방탄소년단의 표식을 새겨넣고 만다. ‘ON’은 음악부터 퍼포먼스까지 그 표식 그 자체인 곡이다.
‘Dionysus’에 이어 또 한 번 안무가이자 댄서인 시에나 라라우와 함께 했다. ‘Dionysus’가 디오니소스의 예술에 잔뜩 취한 ‘광기’를 주제로 했다면 ‘ON’은 두려움을 온몸으로 들이받는 ‘결기’다. 바닥에 내딛는 발구름이나 상체의 팝 하나하나에 엄청난 힘을 싣는다. 본래도 방탄소년단은 몸이 부서져라 추는 느낌으로 유명했는데, ‘ON’은 그 특징을 극한까지 몰아붙였다.
마칭밴드 드럼 롤에 대형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방탄소년단 멤버들은 그 종횡 열 사이를 헤치고 모인다. 분명 클린하게 동작을 맞추고 있는데도 보고 있자면 균질한 느낌보다는 개개인의 생동감이 서로 엉켜 만드는 거대한 시너지가 먼저 느껴진다. 군악을 모티브로 했지만, 제복을 갖춰 입은 정식군이 아니라 마치 혁명군 같다. 댄스 브레이크에서 비트가 변주하면 이 혁명군은 트라이브가 된다. 이 기세를 몰아 마지막 후렴까지 전력으로 춤춘다. 기력을 남김없이 다 써버리고는 서로 의지한 채 허공 높은 곳을 보는 뒷모습으로 끝을 맺으면, 불과 화면으로 관전했을 뿐인데도 내 몸이 다 저릿저릿한 탈력감과 숙연함을 느낀다.
최고의 무대로는 새벽 시간 뉴욕 그랜드 센트럴 역을 빌려서 찍었다는 <투나잇쇼 위드 지미 팰런>을 꼽고 싶다. 현재는 안타깝게도 비공개 상태다. 후에 유튜브에 재공개 된다면 필히 일감할 것을 권한다.
세븐틴 – Left & Right + HOME;RUN (Mnet <2020 MAMA>)
마노: 연말 시상식 무대라고 하면 으레 기대되곤 하는 요소들이 몇 가지 있다. 장중한 인트로, 빡빡할 정도로 힘을 준 어레인지, 보기만 해도 혀가 내둘러지는 댄스 브레이크 구간, 빳빳하게 각 잡힌 제복 스타일의 의상 같은. 일종의 ‘올스타전’인만큼 내로라하는 라인업 사이에서 어떻게든 새롭고도 ‘멋진’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에 의한 것이겠지만, 몇 시간을 지켜보는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자칫 피로감을 느끼기에 십상인 상황. 2020 MAMA를 시청하던 시청자들 대다수도 아마 그러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을지 모른다. 세븐틴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세븐틴의 상징이며 뮤직비디오에도 숱하게 등장해온 모티브인 다이아몬드를 손에 들고 나타난 버논이 스프레이를 흔들며 무대를 형형색색으로 물들이는 순간, 세븐틴이 10분여 되는 시간 동안 보여줄 퍼포먼스의 방향성은 확실해진다. 멤버들의 옷차림 역시 컬러풀하고 캐주얼하다. 댄서들을 동원해서 선보이는 군무는 빡빡하게 각 잡힌 대신 힘을 뺀 듯 자유분방하고 가볍다. 제목으로 붙여진 ‘Door to Youthtopia’가 표방하는, 자유로운 청춘 군상 그 자체를 그려낸다. 세븐틴이 무대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동안, 왠지 모르게 숨구멍이 트인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세븐틴의 무대는 편하고 캐주얼하게만 끝나지 않는다. 무드를 바꾸어 정장을 빼입고 구두를 신은 멤버들은 ‘HOME;RUN’의 스윙 재즈 리듬에 맞춰 한 편의 브로드웨이 뮤지컬 같은 무대를 선보인다. 몇십 명의 댄서들과 함께 일사불란하게 호흡을 맞추면서도 해맑은 발랄함을 잃지 않는 세븐틴의 표정은, 블록버스터급 스케일의 무대라고 해서 꼭 무게 잡을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스케일이 크면서도 가볍고 산뜻한 무대를 해낼 수 있다는, 쉬워 보이지만 누구나 선뜻 하지는 못하는 그것을 세븐틴은 해낸다.
아이즈원 – Fiesta
서드: 아이즈원의 군무는 늘 12명이라는 다인원 팀이어야 할 이유를 납득시켜왔고, ‘Fiesta’는 그 확인 서명 같은 퍼포먼스다. 만개하는 꽃과 축제라는 이미지를 빠른 리듬 위에 시각화해낸 안무는 화려한 사운드에 걸맞게 심심할 틈이 없다. 팔과 다리를 쭉 뻗는 동작을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해 최장신과 최단신 멤버의 신장 차이가 상당히 큰 팀임에도 대칭 구도의 균형감이 무너지지 않도록 안배되어있으며, 파트마다 멤버가 최소한 한 번 이상 중앙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도록 섬세하게 구성되어있다.
‘Fiesta’의 퍼포먼스에서 특히 눈에 띄는 점은 방향성의 활용이다. 다리를 뻗으며 앉았다 일어나고, 대형을 넓게 펼쳤다가 다시 가운데로 모이기도 하면서 상하좌우로 무대를 활용한다. 후렴에서의 턴 동작이나 엔딩 부분의 고개를 돌려 머리카락을 회전시키는 동작 또한 시각적으로 끊임없이 움직임의 변화를 주어 지루할 틈 없이 보는 이를 매료시킨다. 열두 명이 시간차로 팔다리를 뻗으면서도 박자를 맞추는 칼군무는 때론 눈을 의심하게 만들기까지 하는, 새삼스레 이들의 연습량과 팀워크를 선명히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오직 노래에 가장 어울리도록 구성된 춤의 움직임 그 자체로 매력을 100%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아이즈원의 ‘Fiesta’는 K-POP 걸그룹 퍼포먼스에 또 하나의 모범사례로 남을 만하다.
온앤오프 – It’s Raining (Mnet <로드 투 킹덤>)
마노: 흔해 빠진 말이지만,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는 격언을 굳이 가져오고 싶다. 마치 계단처럼 차근차근 상승세를 밟아올라간 팀의 포텐셜과 에너지가 기어코 정점을 찍은 배경에, 무엇보다 후회없이 무대를 즐기자는 팀의 긍정이 언뜻 엿보이기 때문이다. 후회없이 즐긴 그 결과물이 팀에게 가져온 값진 결실을 생각하면 (온앤오프는 본 경연 미션에서 전체 1위를 기록했다) 더더욱 저 오랜 격언의 의미를 되새겨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여섯 명의 멤버들은 그 누구보다 무대 그 자체를 진정으로 즐기는 듯 보인다. 너무도 당연한 소리 같지만, 수행자가 진정으로 즐기지 않는데 어떻게 보는 이까지 설득하고 매료시킬 수 있겠는가 말이다.
또 다른 설득점은 음악에도 있다. 원곡에서 과할 정도로 흘러넘치던 윤기와 습기를 최대한 씻어내고 대신 뽀송뽀송하고 산뜻한 새 옷을 입힌 편곡은, 만일 그런 상이 있다면 ‘올해의 편곡상’이라도 기꺼이 쥐여주고 싶다. 기발표곡 ‘Complete’의 색소폰 리프를 포인트로 첨가한 것은 가히 ‘신의 한 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발리우드 영화의 한 장면처럼 흥청망청한 에너지를 뿜어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무대가 부득이 언택트로 진행되어야만 했던 것이 못내 아쉬워질 정도.
그러나 한편으로 본 무대는 언택트 시대의 새로운 무대 연출법을 상당히 영리하게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새빨간 장막이라는 소품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마치 1인칭 게임처럼 퍼포머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카메라 워크는 시청자가 무대에 직접 참여하는 듯한 입체감과 몰입감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적재적소에서 장막 사이로 멤버들이 등/퇴장하는 연출은 뮤지컬의 그것이다. 거기에 피날레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대형 군무까지. 이 무대를, 이 편곡을, 이 팀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위클리 – Tag Me
스큅: 시작과 동시에 노래 가사처럼 “쟨 뭐니”를 외치게 된다. 신세대 아이돌 그룹의 신선함이 곧바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위클리의 ‘Tag Me’는 본격 뮤지컬 형식의 퍼포먼스를 표방하며, 무대 위에 교실을 옮겨와 한바탕 소란을 피우며 시작하는 퍼포먼스는 짜인 안무보다 멤버들의 연기에 상당한 비중을 내어준다. 후렴구를 제외하고는 멤버들이 통일되지 않은 각기 다른 표정과 모션을 취하고 있는 때가 많다는 것이 그 방증이다. 빠른 호흡의 파트 분배로 만담을 나누는 듯한 노래 구성에 맞춰 멤버들이 곳곳에서 푱푱 튀어나오는 핑퐁식의 구성은 “SNS를 일상적인 놀이터 삼아 뛰노는 여느 신세대의 소란한 활기”를 효과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군무에서는 데뷔곡의 미덕이라 할 수 있는 깔끔한 합도 돋보이며, (다소 뜬금없지만) 스웨거를 과시하는 브레이크 파트에서는 신인의 모든 것을 보여주겠다는 패기가 읽힌다. 세븐틴의 ‘아낀다’를 처음 봤을 때의 신선한 충격이 떠오르기도. 아이돌이 세대를 노래한다면 자고로 이래야 한다는 귀감이 될 만한 퍼포먼스다.
위키미키 – Cool
랜디: ‘이거지!’ 하는 감탄을 멈출 수 없는 무대. 근래 숱한 걸그룹들이 이런 밀리터리 부츠, 점프수트, 카고팬츠, 묵직한 EDM, 자신만만한 가사 등으로 컨셉 선회를 꿈꿨지만 가장 성공적인 전이를 이뤄낸 팀은 위키미키라 꼽고 싶다. 일명 ‘틴크러시’를 표방하던 데뷔 초 노선부터 특유의 스포티함과 역동성이 있었던 팀이기 때문에 더 자연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섹션마다 뮤지컬리티를 잘 살린 안무가 돋보인다. 20세기 슈퍼모델 포토슛에 나올 것 같은 드라마틱한 신스와 하우스 비트에 맞춰 모델처럼 워킹하거나 포징(Posing)을 할 때 여덟 명 다인원의 강점이 십분 살아난다. 잠시 메이저로 전조하며 멜로디 선율을 강조하는 파트에서는 가창자(1절은 수연, 2절은 도연)를 제외한 전원이 앉거나 뒤돌아서서 센터를 주목시켰다가, 이렇게 끌어모은 시선을 빌드업으로 전환하며 코러스로 달려 올라간다. (0:40) 무게 중심이 위에서 중심으로 또 아래로 쉴 새 없이 움직이고 풋워크도 많은 어려운 안무이나 전원이 흐트러짐 없이 이를 잘 맞춰낸다. 파트 연결구마다 자주 등장하는 바디 롤 동작은 텐션을 팽팽하게 감는 역할을 한다. 안무 완성 메이킹 영상을 보면 바스트 중심의 바디 롤을 좀 더 호전적인 느낌의 어깨 롤로 바꾸는 등, 당사자들이 적극적으로 디테일 수정에 참여하며 만들어낸 무대임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아쉬운 포인트는 코러스 직전의 빌드업에서 1절에선 루아가, 2절에선 유정이 카리스마 있게 시선 집중을 시켜놓고 그대로 빙 돌아 걸어 들어간다는 점. 그러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워낙에 조밀하게 짜여있는 안무이다 보니 이 부분의 90년대 방송 안무 같은 뉘앙스가 유독 튄다.
곡의 만듦새부터 무대 구성까지, 관객과 만나기도 어려웠던 2020년 단 3주만 활동하고 접기에는 아까운 곡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곡으로는 한 일 년씩 활동해주면 좋겠는 심정이다.
있지 – Wannabe
랜디: 멤버들이 워낙에 걸출한 댄서들이기에 가능했을, 다시 봐도 말도 안 되는 안무다. 초장부터 류진의 16비트 어깨 동작으로 기선을 제압하고 들어가며, 곧장 멤버 전원이 같은 수준의 아이솔레이션으로 같은 동작을 해내는 모습에 입이 떡 벌어지고 만다. 4박의 하우스 리듬 위로 프레임 수가 두 배, 네 배는 많은 동작들이 지나간다. 태엽이나 스프링 소리 같은 사운드 소스에 반응하는 기민한 디테일과 온몸을 내던지듯 쓰는 큼직큼직한 동작들이 정신없이 교차하는 고난도의 안무지만 이들은 단순한 동작 소화에서 그치지 않는다. 엄청난 박진감이 느껴진다.
있지는 함께 서는 댄서들 없이 오로지 다섯 명으로 무대를 꽉 채운다. 이는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반경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채령처럼 상체를 우아하게 쓰며 화려한 헤어 플립으로 무대 상부를 채우는 멤버가 있다면 예지처럼 아래 무게 중심을 딱 잡고 전체 하부를 지휘하듯 운용하는 멤버도 있다. 다섯 명이 같은 동작으로 움직여도 멤버 별 스타일의 차이가 전체적인 시야 위아래를 빈틈없이 채운다. 단순히 각을 맞추는 정도에서 나오지는 않는, 각자의 내공이 어우러져 만드는 시너지다.
청하 – Play
스큅: 다양한 성별과 장르의 교차점 위 가장 중립적인 지대를 점하는 청하는 이 ‘Play’의 호스트로서 자리한다. 호스트 청하는 힙합부터 비보잉, 하우스, 삼바까지 <댄싱9> 올스타전을 방불케 하는 다채로운 댄서들을 끌어들여 흥겨운 춤판을 벌인다. (여담이지만 실제 <댄싱9> 참가자였던 왁커 최리안이 안무를 짜고 댄스스포츠 선수 김홍인이 댄서로 참여했다.) 군계일학이 아닌 낭중지추가 되길 택하는 결단은 그를 도리어 더욱 빛나게 만든다. 왁커다운 남다른 손과 팔의 활용은 물론 힘찬 스텀핑과 바디 롤, 까다로운 리프트, 삼바 롤 동작까지 그때그때 함께하는 댄서에 맞춰 몸놀림을 자연스럽게 동기화하는 수용성은, 파소도블레에서 힌트를 얻은 듯한 케이핑 동작이 시사하듯, 결국 이 플로어를 거느리는 주인이 청하임을 분명히 한다. 마지막 하이라이트를 댄서들에게 내주고도 그의 존재감이 돋보일 수 있는 이유다. 댄서들을 꾸준히 ‘백댄서’가 아닌 ‘(백업) 댄서’로 호명해온 청하의 애티튜드가 빛난다.
크래비티 – Break all the Rules
조은재: 소녀시대, 트와이스 등 9인조 그룹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직 대중은 9인조를 제법 많은 인원으로 여긴다. 그러나 퍼포먼스를 연출하는 방식에 있어 9인조는 10인 이상 그룹보다 안정적이고 전통적인 형태의 군무를 만들기 쉬우며, 이는 곧 6~8인조 그룹이 가지는 특징이기도 하다. 크래비티는 이 장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고 있는 그룹이며, ‘Break all the Rules’의 안무는 그중에서도 가장 잘 짜여있다. 곡의 파트 분배에 맞춰 기계적으로 움직이기보다, 파트 싱어를 포함한 모두가 노래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완결성 있는 퍼포먼스를 수행한다. 숨 가쁘게 달리는 빠른 비트에 맞춰 자잘하게 쪼개진 동작에 집중하다 보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재배치되는 다양한 대형에도 자연스럽게 시선이 옮겨진다. 뮤직비디오에 등장했던 큐브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멤버들은 모였다가 퍼지기를 반복하면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동선으로 훌륭한 수행력을 보인다. 많다고 여겨지기 쉬운 인원의 멤버를 골고루 대중에게 소개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구성으로, 그 어떤 데뷔곡 퍼포먼스와 비교해도 손색없다.
태민 – Criminal
스큅: 손을 결박한 채로 진행되는 1절 안무, 중간중간 공허하게 허공을 응시하는 시선, 미라처럼 팔을 내뻗는 동작들. 관중보다는 노래 속 “Criminal”을 앞에 두고 펼치는 듯한 퍼포먼스는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보는 듯하다. ‘Move’와 ‘Want’가 한층 극화되어 나타난 결과물이라는 느낌도 든다. ‘Criminal’의 높은 몰입감은 태민이 그려오던 원초적인 “느낌적인 느낌”에 실체가 부여된 데에서 오는 압도감에 기인하기도 할 것이다. “더 망쳐줘”(혹은 “도망쳐줘”) 4글자로 폭발해 장렬히 산화하는 후반부의 흐름은 “아프면서 황홀”한 미혹을 흡사 성화처럼 숭고하게 펼쳐 보인다. 십자가에 매달리는 듯한 자세로 마무리되는 퍼포먼스를 보며 예수의 유언 한 마디가 떠오른다. 아, “다 이루었도다.”
트와이스 – More And More
스큅: 티저로 공개된 20여 초의 도입부만으로 압도적이었던 ‘More And More’의 퍼포먼스는 그룹 트와이스의 정수를 보여준다. 110 BPM이 채 되지 않는 박자를 잘게 쪼개 분주하게 발을 놀리고 팔다리를 곧게 내뻗는 움직임은 ‘Signal’의 통통 튀는 리듬에 ‘Fancy’의 질주 본능을 탑재한 듯하다. 자칫 산만해지기 쉬운 안무지만, 기합이 바짝 들어간 듯 일사불란한 멤버들의 합은 리듬감과 질주감 둘 중 어느 쪽도 놓치지 않고 퍼포먼스를 착실하게 쌓아나간다. 박력과 여유가 동시에 느껴지는 팽팽한 텐션은 이제 트와이스의 전매특허라 해도 좋지 않을지. 한편으로는 ‘굳이 이렇게까지 어려울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지만, 2019년부터 이어진 그룹의 전진에 박차를 더하겠다는 결의라 생각한다면 납득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연은 ‘I Can’t Stop Me’ 컴백 라이브에서 그간 어려운 안무를 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해왔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데뷔곡 ‘우아하게’의 댄스 브레이크에 한층 무게감을 실은 듯한 댄스 브레이크에서는 투지마저 느껴진다. 트와이스의 프로페셔널리즘이 읽히는 퍼포먼스.
펜타곤 – Dr. 베베
조은재: 드라마틱한 전개가 인상적인 곡과 어울리게 뮤지컬을 보는 듯한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연기하는 배우 한 명 한 명을 조명하는 스포트라이트처럼, 구간마다 보는 이가 집중해야 할 부분을 확실하게 강조한다. 적은 인원의 그룹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백업 댄서를 통해 스케일을 확장하고, 그만큼 넓어진 무대를 곡이 가진 서사로 채워놓음으로써 뮤직비디오, 그리고 전체 앨범 컨셉과의 연계성 또한 갖추고 있다. 곡의 주제와 컨셉이 ‘광기’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것에 비해 퍼포먼스는 놀랍도록 이성적으로 깔끔하게 설계되어 있으며, 연기 또한 정교하고 절제된 톤으로 수행되고 있다. 메인 댄서 한두 명의 ‘신들린 연기’로 짧은 무대를 압도하려고 하기보다는 대극장 뮤지컬처럼 타이트하게 짜 맞춰진 퍼포먼스로 조금 더 클래시컬한 무드의 공연을 긴 호흡으로 보여준다. 어느새 중견급으로 성장한 멤버들의 탁월한 연기력 또한 주안점으로 둘만한데, 특히 클라이맥스에서 뒤로 쓰러지는 고난도의 동작을 선보인 키노의 발군의 실력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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