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빈집털이’를 말한다. 아이돌 ‘비성수기’ 시즌을 절묘하게 활용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어설픈 여성향’을 말한다. 노골적으로 남성 팬만을 겨낭한듯하던 전작들에 비해, 애매하게 ‘여성향’ 코드를 섞은 것이 삐걱거린다고 말이다. 또 누군가는 노력주의와 관음이 빽빽하게 결합하여 견디기 힘들다고도 한다. 중소기획사의 소박한 작품으로 시작해 여전히 그러한 여자친구의 약진에는 분명 실력과 퀄리티만으로 말하기 어려운 경이가 있다. 이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여자친구의 키워드를 정리해 본다.
청순의 개량형
여자친구를 수식하는 ‘파워 청순’은 다소 촌스럽지만 상당히 적절한 표현이다. 청순은 섹슈얼리티의 부재가 아니라 제거다. 0이 아닌 음수다. 누군가를 청순하다고 말하는 것은, 살아 숨 쉬는 웬만한 인간이라면 갖고 있는 성적 맥락을 탈색하고 바라보는 행위다. 남자들의 환상 속의 여학생을 고스란히 담은 ‘유리구슬’이나 ‘오늘부터 우리는’이 바로 그렇다. 뜀틀이나 체육복, 흰 티셔츠에 물 뿌리기 등은 성적 함의를 갖지만, 정작 그 주체는 아무런 의도 없이도 할 수 있는 행동들이다. 이것이 성적인 것은 오로지 바라보는 시선에 의해서다. 그리고 뮤직비디오는 이 시선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 그러니까, 성적인 시선을 향해 성적인 어필을 하고 있지만 거기엔 성적 의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완벽한 장치다. 그래서, 청순하다.
그에 비해 ‘시간을 달려서’는 보다 섬세한 접근이다. 무엇보다, 대중적 설득력이 높아졌다. 성적인 맥락은 (음수에서) 0을 향해 상당 부분 이동했고, 의상과 소품, 연출은 여성 팬에게도 예쁘게 보일 만한 방향성을 채택했다. 주제 표현 역시, 상호 간의 친밀함이 단지 전제되어 있던 ‘오늘부터 우리는’에 비해 졸업을 앞둔 여학생들의 애틋한 우정이란 형태로 구체화되어 이입하기 좋아졌다. ‘청순’의 탈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이것은 남성들만을 위한 콘텐츠’라는 외침이 줄어든 것이다. 더 넓은 대중이 좋아할 수 있다는 직관적 감각은 안도감을 제공한다. 이 곡은 팬층의 외연을 넓히면서, 코어 팬덤에게도 일종의 명분을 부여한다. 지금의 ‘애매한 여성향’은 취향의 전략적 균형점이다.
수수한 열정
그리고 여자친구는 여전히 수수하다. 웹진 아이즈에 기고한 “여자친구, 낮은 데로 달려온 ‘파워수수’ 걸 그룹”에서도 다룬 이야기지만, 이들은 시시한 현실과의 접점을 공격적이고 집요할 정도로 만들어댄다. 비인간적으로 번쩍이는 아름다움이 아닌, 무인양품에서 샀을 듯한 물방울무늬 카디건을 걸친 여고생이다. 그런 여고생이 넘어질 듯한 안무를 하며 충격적일 정도로 리얼한 서울의 공간들을 배경으로 달리는 것이 ‘파워’의 정체다. 그래서 여자친구에게는, 예를 들어 외유내강의 카라가 쏟아내는 거대한 사운드의 화려함 같은 것은 없다. 시종일관 지져대는 기타 리프와 숨 가쁜 16비트의 스트링, 쏟아내는 듯한 멜로디가 쉴 틈 없이 서로 맞붙은 이 곡은, 동시에, ‘애이불비’에 근접하는 감성을 진득하게 쌓아 올려서 뒤늦게 폭발시킨다. 거의 촌스러울 정도로 담백한 접근으로, 무려 기타 솔로를 삽입하기도 한다. 청순의 표백으로 땀 냄새만을 날려보낸, 수수한 안간힘이다. 여자친구의 달리기는, 운동장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는 그런 류의 열정이다. 청순과 수수함, 그리고 흙먼지는 여자친구의 외연이 아닌 근본 요소로서 서로 맞물려있다.
성장보다는 이별로서의 졸업
그런 정황을 놓고 보면 ‘시간을 달려서’에는 묘한 지점이 있다. 고백하건대, 처음 이 곡을 접했을 때 나는 졸업이란 콘셉트를 무려 ‘전학’으로 오해했다. 졸업이 이별과 성장을 동시에 내포한다면, 이 곡은 이별에만 집중한다. 마지막으로 둘러보는 캠퍼스나 친구들과의 이별, 꽃다발 등은 분명 졸업과 호환되는 모티프지만, 비디오는 물리적으로 어디론가 떠나가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 교정에서의 아련한 표정이 한강철교 북단 고수부지나 반포대교로 쓸쓸하게 이어질 때는 마치 서울을 떠나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여행 가방을 들고 국철을 기다리기도 한다. 사는 지역이나 졸업 후 진로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보통은 졸업이 반드시 물리적인 이별을 의미하지만은 않는다. 하지만 롤링페이퍼에는 “졸업 후에도(혹은 대학 가서도) 자주 보자”가 아닌 “그곳에 가서도 잘 지내”, “너무 보고 싶을 거야”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졸업에 임하는 여러 가지 모습을 담으면서 유학이나 이민도 포함한 것이라 봐야겠지만, 소원이 들고 있는 이 쪽지는 유난히 그리고 명시적으로 눈에 들어온다.
반면 성장은 매우 비현실적인 이미지로 그려진다. 가사에서 “손을 잡아줄게”의 전제조건은 “마치 기적처럼 / 시간을 달려서 어른이 될 수만 있다면”이다. 이별을 넘어 소녀들의 마음을 다시 이어주는 매개체는 종이비행기나 눈송이 등, 상징적이거나 거의 초월적인 존재들이다. 인간의 약속인 타임캡슐은 재회의 이유가 아닌 결과로 표현된다. 이쯤 되면 졸업은 학제에 의한 ‘엇갈림’이 아니라, 불가피하고도 거의 불가역적인 이별이다. 곡과 뮤직비디오의 심상을 드라마틱하게 과장하면서 애타는 마음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로 보이는데, 이는 마침 작은 일에도 세상이 끝날 것 같은 십 대의 격한 마음과 맞아 떨어진다. 일부 해외 팬들이 ‘유리구슬’을 두고 “대체 무슨 십 대 소녀가 이런 말을 하겠느냐”며 이해하지 못했던 ‘소녀성’이 다른 옷을 한 꺼풀 입고 돌아온 것이다. 동시에, 졸업 모티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여전히 소녀로 남아, 아직도 우리 아이돌계에서 명쾌하게 해결하지 못한 여성의 ‘성장’이란 테마의 무게를 잠시 회피한다.
여자친구는 한 사람
다분히 의도된 과거의 가요 느낌과 선명한 국내 레퍼런스 등을 통해 여자친구는 마치 과거의 환영을 재조합한 듯한 모습으로 출발했으며, 이를 지금도 유지한다. 그러나 이들의 실상에는 매우 파격적인 구석이 있다. 일견 ‘다양한 매력의 멤버들을 조합한다’는 전통적 아이돌 문법을 따르고 있는 듯하지만, 유니폼과 균질성을 활용하는 최근의 흐름을 비가시적으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체육복이나 교복 등 일관성 높고 기호성 강한 일련의 의상, 드라마타이즈 시퀀스에서도 합을 맞추는 몸짓(‘오늘부터 우리는’), 일렬종대 대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군무 등이 그렇다. ‘오늘부터 우리는’의 노골적인 외부자 시선이나 ‘시간을 달려서’에서의 납작하게 매트한 화면은 이들을 하나의 상자 안에 담는다. 멤버들은 다양한 표정과 행동을 보여주지만, 다양한 인물의 조합보다는 한 인물의 다양한 면모로서 전달된다. 팀 이름이 ‘걸프렌즈’가 아닌 단수형 ‘여자친구’인 것도 그래서 심상치 않다. 앞에서 링크한 나의 글에서 논했던, ‘낮은 데로 내려오는’ 지향성 역시 씬의 미래를 지향하는 방식이다. 이 모든 것에 대한 호불호나 찬반을 떠나서 말이다.
결국 지금 여자친구의 성공은 단순히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시간을 달려서’는 꼭 지금이어야 했다. ‘오늘부터 우리는’이 콘셉트와 시즌을 결합했듯, 졸업의 테마는 연초여야 했다. 빠르게 변하는 흐름 속에서 2017년 초에도 여자친구가 교복을 입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2014년부터 시작된 ‘소녀풍’ 걸그룹의 유행이 바로 지금 정점에 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자친구는 확실히 자신들의 조건과 가능성, 시장의 동향을 면밀히 관찰하며 움직이고 있고, ‘시간을 달려서’의 성공은 분명 그러한 엔지니어링의 결과다. ‘졸업’ 이후의 여자친구가 어떤 의상과 콘셉트를 보여줄지는 예언할 수 없지만, 이들이 가진 카드는 단지 교복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흙먼지 청순과 납작한 균일성, 그리고 졸업 테마를 미세하게 조정할 수 있는 기획력이다. 그렇다면 다음 수가 없을까 봐 걱정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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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reply on “여자친구를 이해하기 위해”
여자친구 멤버들이 직접 라디오프로나 언론사와 인터뷰에서 밝힌 시간을 달려서에서의 소재는 졸업이아니라 종업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