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산 2020 : ②올해의 노래 20선

코로나19로 고전을 겪는 한편, 추리고 추린 ‘올해의 노래’ 후보곡만 76곡에 달할 정도로 양질의 작품이 쏟아진 한 해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웠던 투표 과정을 거쳐 선정된 20곡을 소개한다. ‘올해의 음반’ 부문이 미니앨범 이상의 발매작을 다루기에 싱글의 경우 가산점을 부여했다. 별도의 순위는 산정하지 않았으며, 순서는 ABC-가나다 순으로 정렬했다.

CL ‘+H₩A+’

조은재: 한국어 언어유희를 기반으로 만드는 펀치 라인은 어느 때보다도 날이 서 있다. 花와 火의 이미지가 교차하는 비주얼은 웅장하게 떨어지는 베이스와 결합해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낸다. 말하자면 정통 흑인 음악과 한국어를 1:1로 결합한 셈이다. CL이 추구하는 한국적 이미지는 이렇듯 직접적인 언어의 형태로 전달되는데, 이것은 수많은 K-pop 아이돌이 해온 피상적인 이미지 차용이나 탈맥락적 전유에 그친 오리엔탈리즘과는 다르다. CL의 작품 세계 안에서는 한국어 혹은 한국 자체가 음악적 세계관의 한 축으로 기능한다. 외국에서 보는 한국의 이미지가 아니라, 한국인으로서 말하는 한국의 정서를 외국의 문화를 매개로 전달한다. 음악적 진정성 이상의 가치를 추구해온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래서 다른 꽃도 아니고 무궁화꽃이 피었다고 선언하는 목소리는 부쩍 단단하게 들린다.

NCT 127 ‘영웅 (英雄; Kick It)’

서드: 늘 그랬듯 예상하기 힘든 전개로 듣는 이를 당황시킨다. 도입부부터 청자의 귀에 비트를 때려넣듯 저돌적으로 시작해 한 번 들으면 귓가에서 쉽게 떠나지 않는 후렴구를 발차기처럼 질러대더니, 천연덕스럽게 감미로운 멜로디의 보컬 파트로 이어진다. 쉴틈없이 쏟아지는 비트와 쿵푸 영화 속에서나 들릴 법한 추임새를 울려대며 쌓아올리는 사운드의 레이어는 그 사이를 뚜렷하게 가르고 들어오는 멤버들의 목소리로 자칫 산만해지려는 찰나에 절묘하게 중심을 잡는다.
마냥 내달리는 듯한 곡이지만 뜯어보면 섬세한 구성이 두드러진다. 마크와 태용의 랩이 여전히 키포인트 역할을 하면서도 적재 적소에 강조점을 찍듯 분배돼있고, 사이사이 보컬의 활용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밸런스를 맞췄다. 후반부 태일의 고음 애드립과 댄스 브레이크가 겹치며 전개되는 순간은 하이라이트라 해도 될만큼 짜릿하다.
현실보다는 영화 ⟨매트릭스⟩에서나 봤을 법한 동양풍 배경과 무술과 춤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현란한 안무 등의 요소가 총체적으로 합쳐진 뮤직비디오는 시각과 청각을 한껏 자극하며 뇌리에 각인된다. 이래도 되나 싶다가도 결국 굴복하고 마는 SM의 과잉. ‘영웅’이 상반기 가장 가슴을 뛰게 만들어준 케이팝 중 하나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방탄소년단 ‘Black Swan’

랜디: 음악과 인접해 살아가는 사람에게 ‘음악이 그 마법을 잃는 순간’이란 가장 큰 공포 중 하나가 아닐까. 번아웃을 겪고 예술과의 특별한 감정적 연결을 잃어버린 음악가의 자전적 이야기이지만, 예술 향유가 인생에 각별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입할 수 있을만한 보편성도 있다. 앨범 상 바로 전에 배치된 트랙 ‘Interlude: Shadow’와의 시퀀스가 훌륭하다. ‘Shadow’가 마지막 20초를 성공의 이면 뒤에 자라난 자아의 그림자가 악다구니를 쓰는 소리로 끝맺고, 그 직후에 멀리서 신화 속 멜로디처럼 들리는 로파이 기타 소리가 ‘Black Swan’을 시작한다. 쿵, 하는 베이스 뒤에 이어지는 무감한 고백은 20트랙이나 되는 대작 앨범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 부를만 하다. 후렴에도 등장하는 “모든 빛이 침묵하는 바다”라는 가사처럼 미니멀한 구성의 악기를 멀찍이 배치하고 보컬에 이펙트를 걸어 찌그러뜨리는 등, 사운드로도 수면 아래 숨이 막히는 심상을 충실히 재현해냈다. 앨범 시리즈가 “Map of the Soul: Persona”에 이어 예정대로 “Shadow”와 “Ego”로 나왔다면 단독 타이틀로 주목받았을 텐데, 못내 아쉽다.

밴디트 ‘Cool’

스큅: 요즘 케이팝은 다 거기서 거기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이 노래와 뮤직비디오를 쥐어주고 싶다. 뮤직비디오를 재생하는 순간 고드름같이 청명한 신디사이저 소리가 울려퍼지고, 시원시원하게 걸음을 내딛는 멤버 승은의 모습이 보인다. 이어지는 영상은 멤버들을 콜라주로 뒤덮으며 그저 ‘쿨’하게 거리를 활보하고 흥겹게 춤을 추는 사람들의 스케치를 익살스럽게 비춘다. 멤버들이 “걸그룹의 뮤직비디오가 맞나”라고 자평했을 정도로 통상의 아이돌 뮤직비디오와 달리 화면 너머 관중에게 그 어떤 어필도 하려 들지 않지만, 그만큼의 자유분방함에 도리어 더욱 사로잡히게 된다. 일렉 기타와 브라스로 긴장감을 고조시킨 뒤 더블타임으로 달리는 브릿지 구간 멤버들이 무표정으로 막춤을 추는 장면은 개인적으로 올해 케이팝 뮤직비디오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컷으로 남아있다. 케이팝에서 이러한 부류의 생기를 마주치는 일은 생각보다 드물다.
통통 튀는 808 베이스, 난잡하게 쪼개지는 리듬, 캔 따는 소리 등 “So now I’m playing it cool / with my lady crew” 라는 장난스러운 가사에 맞춰 넘실대는 갖가지 사운드의 중심에는 고무줄놀이하듯 곡을 주름잡는 다섯 멤버들이 자리한다. 이전 타이틀곡들에서는 중저음역이 두드러지는 멤버들의 목소리가 뭄바톤 리듬을 정박시키는 닻과 같이 활용되었다면, 산뜻하게 내달리는 ‘Cool’에서는 항해를 이끄는 튼튼한 돛대 역할을 한다. 무게감 대신 들어찬 여유를 통해 “Be Ambitious N Do IT”이라는 팀 슬로건에서 새로운 뉘앙스를 발견하게 된다. 음악의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겠다는 ‘new.wav’라는 프로젝트 이름에 걸맞는, 신선함으로 가득찬 싱글.

보아 ‘Better’

마노: 올해 12월 6일에 거행된 ⟨2020 MAMA⟩에서 보아는 ‘Inspired Achievement’ 상을 수상하며 남긴 소감을 통해 유영진을 “음악적 동료”로 호명한 바 있다. 그에 앞서 앨범 “BETTER”를 발매하며 가진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는 데뷔곡 ‘ID; Peace B’를 작곡했던 유영진이 이번에도 타이틀곡을 작업했다는 사실에 남다른 감회를 밝히기도 했다. 그만큼 ‘Better’의 핵심은 바로 이 둘의 오랜 파트너십과 그로 인한 시너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프로듀서로서의 유영진의 역량과 퍼포머이자 싱어로서의 보아의 수행력을 간과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둘의 역량과 수행력은 물론, 그것들이 맞물려 들어가는 합이 어떠한 경지에 올랐음을 논하고자 하는 것이다. 햇수로만 정확히 20년, 그간 수없이 쌓였을 상호간의 끈끈한 신뢰와 각자의 성장을 바탕으로 둘은 그 누구보다 자신다운 모습을 3분 19초동안 그려낸다.
보아가 자체제작 콘텐츠 ⟨모두가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아 (Nobody Talks To BoA)⟩를 통해 스스로 밝힌 바 있듯, ‘Better’는 “비어진 리듬의 멜로디가 리듬을 리드하고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시작하자마자 언뜻 미니멀하게까지 들리는 심플하고 둔탁한 베이스음이 귓전을 울리고, 그 위를 보아의 멜로디가 날렵하게 유영하며 곡 전체를 이끌어간다. 이어서 기타와 신스가 차례로 합류하고 상승하는 기조의 코러스가 덧붙여지지만, 그럼에도 곡의 구조는 화려하기보다는 차라리 투박하고 단출하다. 마치 보컬이 곡 전체를 리드하기를 염두에 두고 일부러 비워둔 것만 같은 모양새인데, 바꿔 말하자면 곡 자체가 보아의 존재감에 온전히 기대고 있다는 뜻도 될 것이다. 20년을 쉼없이 달려온 한 가수의 궤적을 경배하며, 동시에 그에게 경의와 찬사를 보내는 최고이며 최선의 방식이었으리라. 그에 화답하듯 ‘Better’를 넘어 ‘Best’를 선보이는 보아의 수행력에 대해선 논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 그의 2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이 씬을 살아내고 있는 그에게 한없는 경애를 보낸다.

세븐틴 ‘HOME;RUN’

서드: 올해 세븐틴의 ‘Left & Right’과 ‘HOME;RUN’으로 이어지는 유쾌함은 ‘독 : Fear’나 ‘HIT’ 같은 곡을 발표했던 다소 진중한 분위기의 2019년과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HOME;RUN’을 들으며 언뜻 데뷔 초의 청량감 넘치던 분위기가 생각나면서도 이전보다 세련되고 성숙한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단순히 브라스 가득한 스윙재즈 풍의 사운드나 멋들어지게 정장을 맞춰 입은 겉모습 때문만은 아니다.
세븐틴은 청춘의 들뜸과 기쁨만이 아닌 동세대의 고민과 공감을 주제로 삼으면서도, 굳이 어두워지거나 무거워지지 않고 여전히 쾌활한 웃음을 띤 채 자신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응원과 격려의 메시지를 건넨다. ‘아낀다’와 ‘예쁘다’를 노래하던 소년들이 “삶은 숨 막히게 쫓아 도망치느라 모두 바”쁘기에 “오늘은 잠깐 쉬고 가도 돼”라고 말하기까지, 새삼스레 그들의 데뷔 후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체감한다. “평소처럼만 하면 돼 뭐가 그리 걱정돼”라는 가사는 팬들과 청자에게 건네는 격려인 동시에 어쩌면 지금껏 쉴새 없이 달려온 그들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기에 ‘HOME;RUN’의 유쾌한 응원은 가벼운 빈말이 아닌 진심어린 공감으로 다가온다. 세븐틴의 대체불가한 매력은 아마도 이런 순간들에서 비롯된다.
모든 아이돌에게 시간은 흐르고 성장과 변화의 순간은 반드시 찾아온다. 그때 무엇을 변화시켜야 하며 무엇이 변하지 않은 채 남겨두어야 하는지, 쉬워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세븐틴은 이미 찾은 게 아닐까. 이토록 흥겨운 동시에 이만큼 위로가 되는 케이팝은 흔치 않다.

스트레이키즈 ‘神메뉴’

스큅: 아이돌과 힙합과 마라탕과 나그네와 까마귀의 상관관계는 무엇일까. 정답은, 없다. 그래서, 케이팝이다.
‘MIROH’가 혼란(‘스트레이’) 속 거침없이 전진하는 ‘키즈’의 객기를 실체화하며 ‘스트레이’-‘키즈’의 판도를 깔았다면, ‘神메뉴’는 청자를 그 미로 속에 가둔다. 심상치 않은 전운이 감도는 곡의 입구에 들어서자 곧 불호령과도 같은 인사가 멱살을 잡아채고, 이들이 이끄는 대로 속절없이 끌려가며 모퉁이를 돌아설 때마다 예고 없는 갖은 양념 세례에 의식을 잃으면, 쏟아지는 “뚜! 뚜! 뚜! 뚜! 뚜! 뚜!” “탕! 탕! 탕탕!” 폭격이 정신을 번쩍 깨운다. 훠궈 홍탕과 백탕에 번갈아 담금질 당하기를 수십 번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출구, 아니 다시 입구에 도착해 불호령같은 인사를 또 마주한다. 이 미로에는 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내로라하는 작곡·작사가들이 몸담고 있는 케이팝 프로덕션에서 아이돌이 굳이 싱어송라이팅을 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셀프 프로듀싱 아이돌에 특화된 미학은 분명 존재하며, 스트레이키즈의 ‘神메뉴’는 바로 그 증거다. 일견 터무니없어보이는 발상을 관철시키는 배짱부터, ‘파트 분배’가 아닌 ‘파트 구성’식으로 이루어지는 멤버 맞춤형 캐릭터 운용까지. 셀프 프로듀싱 아이돌의 참된 기능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성’이라기보다 이러한 직관의 힘일 것이다.
세를 넓혀갈수록 논리성을 갖춰가는 씬의 한가운데서 스트레이키즈는 보란듯이 비논리의 유희를 즐긴다. ‘神메뉴’가 올해 (특히 해외) 케이팝 팬덤 내에서 가장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킨 노래 중 하나라는 사실은 결국 케이팝의 뿌리가 무근본성에 있음을 상기시키는 듯하다. 본래 타이틀곡으로 내정되어있던 곡을 엎고 ‘神메뉴’를 내세운 멤버들의 확신과 JYP의 결단은 더욱 회자되어야 마땅하다. 케이팝의 무근본성을 체화한 ‘스트레이’-‘키즈’라는 이름이 앞으로 더욱 빛을 발하기를 기대한다. 필릭스 가라사대, “뭐든 그냥 집어넣어 / 눈치 보지 말고 더 / 망설이지 말고 부어 / 비벼 비벼”

아이유 ‘에잇 (Prod.&Feat. by SUGA of BTS)’

랜디: (‘에잇’ 이전까지의) 나이 시리즈는 대중문화 속 아이유라는 당대 가장 유명한 소녀가수의 자의식 표현, 또는 음악적 성장기였다. ‘에잇’ 속에는 대중이 없다. 그저 화자의 현재 상태와 머무르고픈 기억의 한 뼘만을 이야기한다. 아이유는 이전작들이 수필이라면 이것은 소설이라고, 직접 작성한 곡 소개에 적었다. (…) 아이유의 픽션은 비교적 명징하다. “Chat-Shire” 미니앨범의 ‘Red Queen’ 등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직접 언급만 피했을 뿐, 노래의 주인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다면 직관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비유다. 그나마도 아이유는 긴 시간을 오해 받아왔다. 비유가 어려워서가 아니다. 설마 대중의 사랑을 받는 대상으로서의 ‘유명 소녀 가수’가 저런 비판적 의식을 전면에 대놓았다는 것이 낯설어서, 많은 이들이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일 것이다.
(…) 흔히들 아이돌을 두고 ‘멋지고 예쁜 시절을 방송국 카메라에 담아놓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라고 하지만, 아이유는 그런 푸티지만을 남기고 싶은 것 같지는 않다. 자기 가슴으로 느끼고 자기 손으로 적은 기억을 기록하고자 하는 의지가 ‘에잇’에 있다. (아이유 “에잇” (2020) 리뷰 中 일부 발췌)

아이즈원 ‘FIESTA’

조은재: ‘축제’에 대한 가장 완벽한 메타포. 숨 가쁘게 달리는 베이스에 후렴에서 터져 나오는 브라스는 축제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폭죽을 음악으로 구현한다면 반드시 이런 형태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높은 음역을 쨍하게 찔러대는 멜로디 라인에서는 축제에 모인 인파의 환호가, 그 어느 때보다 직선, 사선의 대형을 강조하고 있는 퍼포먼스에서는 퍼레이드 마칭 밴드의 기강이 느껴진다. 이 노래를 듣고 ‘화려한 이 축제’를 떠올리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곡은 짧은 기간에 큰 폭발력을 발휘한 아이즈원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곡인데, 케이팝 신을 무대로 가장 화려한 축제를 즐긴 아이돌에게는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불꽃놀이와 같은 곡. 올해 초에 발표되었음에도 2020 한 해 최고의 노래로 꼽는 사람이 많은 이유 또한 이 곡이 주는 임팩트가 그만큼 강렬하기 때문일 것이다.

에버글로우 ‘LA DI DA’

심댱: ‘당나라 비트’로 일컬어지는, 강렬하고 자극적인 사운드가 특징인 에버글로우와 디스코의 만남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LA DI DA’는 위켄드의 ‘Blinding Lights’와 두아 리파의 ‘Physical’ 등으로부터 불어닥친 레트로 트렌드를 바짝 추격하면서도 케이팝과의 합체를 안정감 있게 제시했다. 날카롭게 세공된 비주얼과 안무는 곡이 가진 속도감을 잘 드러낸다. 까만 에나멜 레더를 입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은 헤이터를 신경 쓸 새도 없는 라이더 혹은 전사처럼 연출되기 때문이다. 특히 손을 활용한 안무가 인상적이었는데, 얼굴 근처에서 어른거리다 일순간 입을 제외한 얼굴을 감추는 손짓은 “라디다디다”를 읊조리는 숨은 표정과 함께 메시지에 집중하게 만든다. 기민한 프로듀싱 아래 레트로 기조의 스타트를 끊으면서도 새로운 이미지를 어색함 없이 갈아입은 아티스트의 수행력이 빛을 발한 트랙.

엔플라잉 ‘아 진짜요.’

하루살이: 마침표까지 꾹 찍은 ‘아 진짜요.’라니 괜히 도발적으로 여겨진다. 불통, 부적절한 대응을 상징하는 밈(meme)이 되어버린 한 문장을 “SO, 通(소통)”이라는 앨범의 타이틀로 내세웠다. 반복되는 “아 진짜요”, “아 헐 진짜요”, “네 진짜요” 전부 단순한 멜로디지만 일상에서 흔히 듣게 되는 어투와 닮아 있다. 무심한 상대 때문에 외로움과 서운함이 가득한데 이를 익살스럽게 피력한다. 코러스가 지닌 해학을 강조하려 프리코러스와 브릿지에서 분위기를 극단적으로 전환하기도 한다. 이 부분을 충분히 느끼려면 뮤직비디오와 함께 감상하기를 권장한다. 또, 군데군데 촘촘한 베이스 필인이 귀에 들어와 자연스레 허니스트 출신 베이시스트 서동성의 성향을 상기하게 된다. 베이스를 화성적으로 사용하는 아이디어가 좋은 편인데, 바운스 타는 드럼과 쉼표를 즐기는 베이스로 리듬감을 주는 엔플라잉의 기존 작법과 묘한 조화를 이루며 곡의 밀도를 높였다.

오마이걸 ‘Dolphin’

심댱: 오마이걸이 정갈하게 담아 내놓은 “NONSTOP” 속 ‘Dolphin’이 선사하는 충격은 지나치기 쉽지 않다. 우선 화자 앞에 놓인 상황과 정서를 단숨에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오래간 알아 온 친구와 무인도에 떨어지게 된다면?’이라는, 설렘을 설명하기 위한 타이틀곡의 대전제와는 달리 로맨틱 코미디에서 볼 법한 깜찍한 클리셰를 들어 익숙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화자와 대비되는, 상황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상대의 뒷모습은 얼마나 얄밉고 매력적인지 모른다. 그는 “da da da…”라는 연속적인 흔적을 남기며 불퉁하게 지나가는데, 이 중독적인 훅은 대중의 귀를 사로잡으며 ‘물보라’와 같은 반응을 일으켰다. 돌고래가 꼬리를 퉁기는 듯한 모습은 통통 튀는 베이스로, 무게감 있게 흩어지는 중저음은 그가 흩뿌린 물보라처럼 감각적으로 표현해냈다. ‘Dolphin’ 속 상대의 모습은 야속할지 몰라도, “원을 갈라 그려내는 하트”처럼 은은하게 밀려드는 관심은 올해 오마이걸을 향해 나아갔음이 분명하다.

오마이걸 ‘살짝 설렜어’

서드: 아주 조금 일찍 도착한 여름 노래 같은 ‘살짝 설렜어’는 역대 오마이걸 타이틀 중 가장 비움의 미학이 두드러지는 곡이다. “살짝 설렜어”란 한 마디로 포인트를 준 뒤 “난나난나나”하는 허밍과 그 뒤에 깔리는 경쾌한 비트만으로 심플하게 전개되는 후렴은 캐치하면서도 기존 곡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파격인데, 승희와 효정이라는 강력한 보컬 멤버를 무기로 두고 있는 팀이기에 작은 변화임에도 과감한 시도로 읽힌다. 이전과는 달리 미미의 랩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점 또한 눈에 띄는 변화다.
연애감정이라곤 전혀 없는 친구와 보드게임을 하던 중, 문득 둘이 함께 무인도에 떨어진다면 어떤 감정이 들까 상상하다 자신도 모르게 ‘살짝 설레어’ 버린다는 귀여운 가사와 경쾌한 리듬감이 만들어내는 조화는 데뷔곡 ‘CUPID’와 ‘LIAR LIAR’ 같은 곡의 연장선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보드게임을 테마로 한 앨범 디자인과 만화 속 세계인 듯 파스텔 톤으로 가득한 뮤직비디오 또한 콘셉트에 충실해 완성도를 높이는 요소. 무대의상 또한 이전과는 달리 멤버 저마다의 개성과 취향이 반영된 듯이 치마와 바지를 가리지 않고 편하게 입은 모습이 잘 어울린다. 다음 번 콘셉트가 벌써 기대되는, ‘콘셉트 장인’다운 면모가 또 한 번 빛을 발한 곡.

우주소녀 ‘Pantomime’

스큅: 우주소녀의 순항궤도를 그린 타이틀곡 ‘Butterfly’도 인상적이었지만, 이번 연말결산에서 아이돌로지 필진들을 매료시킨 것은 수록곡 ‘Pantomime’의 서스펜스였다. 난기류를 연상시키는 인트로 노이즈 뒤에 펼쳐지는 “신비로이 가려졌던 비밀 장막” 오로라 커튼, 엑시가 차지게 뱉는 랩과 대구를 이루는 낭랑한 베이스와 신스, 곡에 돌연 제동을 걸고 시작되는 빌드업, 드롭을 쥐락펴락하는 “mute[뮽-ㅌ]”와 “stop[스탚-ㅍ]”의 지연된 파열음, 정박의 킥에 쉴새없이 어깃장을 놓는 엇박자 선율, 휘청이는 반음계를 광폭하게 휘감는 리듬과 버즈 베이스, 겉잡을 수 없는 브릿지의 전조, 낙차에 대한 예상을 저버리고 둥실 떠오르는 마지막 후렴구의 황홀한 “Pause”까지. 정박과 엇박, 장조와 단조, 매서움과 우아함을 고고하게 가로지르는 ‘Pantomime’의 에어쇼는 피터팬이 떠난 네버랜드에 홀로 남은 팅커벨의 이야기 “Neverland”의 단연 백미를 장식한다. 작사와 작·편곡을 도맡은 김진환의 아이돌팝 대표작이 소녀시대 ‘1년 후’, ‘영원히 너와 꿈꾸고 싶다’, 샤이니 ‘재연’이라는 데에 놀라면서도, “찰나의 무언극”이라는 역설적인 메타포가 자극하는 오묘한 서정성에 곧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오마이걸의 ‘Dolphin’과 더불어 기억되어야 할 올해의 수록곡.

원위 ‘TRAUMA (Aquarium)’

하루살이: 감정과 함께 범람하는 소리를 찾는다면 이 곡을 듣는 것이 꽤 좋은 선택이 되겠다. 수록곡이지만 타이틀보다 강한 인상을 남긴다. 리얼 베이스와 808 베이스가 큰 폭으로 오르내리며 깊은 흐름을 만들어내고 드럼도 구간마다 리듬을 바꾸며 혼란스러운 바다를 그린다.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기타 속주가 몰아친 뒤, 노래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가 어느덧 다시 위태롭게 마친다. 익수 트라우마라는 배경에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연상시키는 ‘marlin’(청새치)를 콜라주해 다각적 해석을 불러일으키는 가사도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문맥이 다소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이쯤 되면 원위는 가사도, 음악도 기존의 맥락을 파쇄하고 그 파편을 재구성하기를 즐긴다고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분명 수월하게 읽히지는 않지만, 록스타를 경험한 적 없는 세대가 구사하는 자유로운 문법에 어쩐지 귀를 기울이게 된다.

위키미키 ‘COOL’

마노: 일전에 위키미키의 ‘La La La’를 평하며 ‘지금껏 없던 새로운 소녀’라고 이들을 명명한 바 있다. ‘다가와 달라’고 소심하게 어필하기보다는 먼저 상대에게 ‘벽치기’를 시전해버리는 과감함이라던가, ‘친구도 싫고 썸도 싫다’며 애써 에둘러 말하지 않는 당당함 같은 것으로 스스로를 소개해왔기 때문이다. (약간의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데뷔작부터 꾸준히 펼쳐온 이 당돌하고 당찬 소녀상에서, 위키미키는 한 발 더 나아가 시작부터 “얌전히 따라가지 않아 / 내가 만들어가 New rules”라고 선언해버린다. 실제로 케이팝씬의 걸그룹이 시도해본 적 없던 양식 – 모든 멤버가 맞춰서 입은 밀리터리풍 점프수트라던가 – 을 이 ‘COOL’을 통해 제시하고 소화해낸 그들이기에 이 선언은 더 설득력있게 들린다. 127 BPM으로 시원하고도 뜨겁게 내달려나가는 곡은 당당함으로 대표되는 이들의 팀컬러에 방점을 찍으며 그룹을 ‘쿨’하게 빛나도록 판을 깔아준다. 곡을 전체적으로 리드하는 거친 베이스와 질주감 있는 신스 사운드 사이를 헤치고 누비며, 위키미키는 그야말로 “감당 안 되게”, “예상이 빗나게” 그들만의 퍼포먼스를 수행해보인다. “알잖아 우리 스타일 / 겹치지 않는 색깔이지” 라는 한 줄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게 되는 이유는, 이들이 정말로 씬의 신선한 한 끗을 만드는 데 다시금 성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가사에서처럼, 그들은 이 한 곡으로 케이팝 씬의 ‘새로운 규칙’을 만들고 스스로 증명해냈다. 앞으로도 만들고 써내려 나갈 그들만의 ‘새로운 규칙’이 기대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청하 ‘Stay Tonight’

마노: 조금씩 기대감을 고조시키며 상승하는 인트로의 얇다란 베일처럼 드리워진 장막을 걷어내고 나면, 마치 점멸하는 불빛과도 같은 밤의 공기가 몸을 선뜩 감싸온다. 또 한 번 한껏 상승하며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프리코러스를 지나고 나면, 출렁이는 듯한 두껍고 둔탁한 베이스가 오감을 타격하며 신경을 곤두세우게끔 만든다. 시시각각 표정을 달리하는 밤의 장막 속에서, 청하는 마치 벨벳처럼 우아한 목소리와 몸짓으로 여유롭고 기민하게 그 사이를 누비며 듣고 보는 이를 은근하고도 뜨겁게 유혹해온다. ‘오늘 이 밤을 함께할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가버리라’는 메시지는 도발적이기까지 하다.
첫 정규 앨범을 발매하기에 앞서 선공개 형식으로 발표된 시리즈 중 첫 타자인 ‘Stay Tonight’은 청하가 아닌 다른 이가 수행하는 것을 감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철저히 그 존재감에 맞춰진 곡이다. 이미 세간에 정평이 난 독보적인 퍼포먼스 능력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보깅을 차용한 장대한 스케일의 퍼포먼스로 더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자체만으로 오감을 충분히 충족시키는 곡이기도 하다. 비록 ‘디바’ 형의 절창은 아니나, 특유의 담백한 창법은 거친 하우스 리듬과 시너지를 이루며 곡의 배경인 밤을 더없이 깊고 그윽하게 표현한다. 통속이나 신파 없이 절제된 창법은 오히려 그렇기에 화려하고 세련된 곡의 무드를 더 드라마틱하게 강조하는 효과가 있다. 그간 무대 위를 장악해온 숱한 디바들의 계보가 스쳐지나가는 특유의 아우라는 그를 새로운 디바로 호명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을 정도. 모두가 잠든 어둠 속에서 더욱 아름답게 군림하는 밤의 여왕을 청하는 완벽하게 그려내보인다. 두고두고 케이팝 씬의 센세이션으로 남을 곡. 곧 발매될 그의 첫 정규 앨범을 기대한다.

크래비티 ‘Break All The Rules’

조은재: 신인 특유의 패기와 에너지로 가득한 것까지는 여느 그룹과 비슷한데, 오랫동안 공들여 완성한 서슬퍼런 퍼포먼스 안에는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서늘함이 깔려있다. 이 서늘함은 스릴러 영화에서나 볼 법한 서스펜스를 형성하는데, 데뷔곡인 ‘Break All The Rules’ 뿐만 아니라 이후에 발표한 ‘Flame’까지 이어져 이 그룹의 아이덴티티로 작용하는 듯하다. 이것은 보이그룹들에게선 흔하게 볼 수 있는 심상이 아닌데, 씨스타, 몬스타엑스 등 양기가 넘쳤던 같은 레이블의 아티스트들과도 확연하게 대비되는 점이라는 게 흥미롭다. 박자가 잘게 쪼개져있음에도 속도감을 살려 맞춰져있는 포메이션이나 빠른 비트에 대응하는 리드미컬한 챈트 등이 눈에 띄고, 특히 비트 드롭 직후 터져나오는 후렴의 화성 전조는 앞서 언급한 서스펜스를 극대화한다. 에너지 드링크만 생산하던 공장에서 나온 민트맛의 이어 캔디.

태민 ‘Criminal’

심댱: ‘Criminal’은 전작 ‘MOVE’와 ‘ WANT’에서 진하게 느껴지는 유혹의 주체와 대상을 반전시켜, 스톡홀름 신드롬을 소재로 상대에게 매료되는 과정을 치명적으로 묘사한다. 이 피학적 정서는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후렴구에서 “우-아-해”, “It’s-O-Kay”, “Not-O-Kay” 등 시차를 두며 분절되는 3음절의 발화는 ’Drip Drop’의 녹진함을 연상시키고, 한 호흡으로 가져가는 버스에서 건조하게 긁어내리는 끝 음은 상대를 갈망하는 마음을 내비친다. 4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태민은 보고 듣는 이의 눈과 귀를 심장에 가득 새겨진 지문처럼 깊은 인상을 남긴다.
태민이 제시하는 자극적인 인상 중에서도, 드라마틱한 반전을 주는 한 마디를 빼놓을 수 없다. 노이즈가 잔뜩 낀 뉴스 소리를 뒤로 한 채 힘없이 내뱉는 한 마디, “더 망쳐 줘”는 쾌락의 마지막 버튼이며, 이를 기점으로 내달리는 후반부는 자기파멸의 서사를 극대화한다. 이 극단적인 드라마는 ⟨2020 KBS 가요 대축제⟩ 무대의 인트로로 보여준 비틀린 미소로도 요약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자극이 도사리는 ‘Criminal’을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이유는, 태민이 공고하게 세운 제4의 벽을 통해 이 완벽한 몰입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서사를 전달하면서도 부담 없는 몰입을 주는 하나의 곡을 꼽는다면 태민의 ‘Criminal’이 그 답이 될 것이다.

화사 ‘마리아 (Maria)’

랜디: 여러모로 가인의 ’진실 혹은 대담’과 ‘Paradise Lost’를 동시에 떠올리게 하는 곡이다. 걸출한 보컬 그룹 출신의 여성 솔로 아티스트로서, 드물게 세간이 여성 아티스트에 던지는 가혹한 시선을 작품으로 다루었고, 크리스트교적 레퍼런스를 진하게 활용한 점도 그렇다. 본 그룹 마마무가 부른 ‘Hip’처럼 미움을 말하고 있지만 그 곡처럼 공격을 통쾌하게 맞받아치고 있지는 않다. 노래가 집중하는 대상은 마리아(화사의 세례명이다) 본인이다. 후렴을 픽업하는 첫 줄 “마리아”는 일반적인 미-도의 6도 도약이 아닌 옥타브 아래에서부터 극적으로 끌어올리는 13도 도약으로, 깊은 속에서 길어올린 듯한 목소리로 고통 받는 마리아, 화사 자신 혹은 또다른 마리아들을 덤덤하게 위로한다. 실은 아슬아슬하다. 뮤직비디오와 함께 보면 대중의 폭력 앞에 자포자기까지 고민하는 마리아의 모습이 좀 더 분명히 그려진다. 그러나 화자는 그 폭력을 강하게 쳐내는 대신 아예 유약한 자아를 빛 아래 드러내 맞선다. 그런 그가 안타까우면서도, 그 내면의 강고함에 압도된다. “마음을 더럽히지 마 / 타락하기엔 아직 일러” 라는 당부가 더없이 숭고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Editor

Author:

idology.kr 에디터입니다.


http://twitter.com/idologykr
http://facebook.com/idologykr

Share This Post 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