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묘의 플레이버튼 : 케이팝 유토피아의 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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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서 지상낙원은 신선들의 땅이다. 우연히 그곳에 당도하게 되지만 되찾아갈 순 없다. 때론 속세와는 다른 시간의 흐름을 갖기도 한다. 그야말로 ‘이세계’다. 서구의 그것은 조금 다르다. 토머스 모어가 그린, 그리고 유토피아 사상으로 이어진 개념으로서 유토피아는,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건설해 외부 세계와 스스로를 격리한 공동체다. 때론 뱃길이 없는 섬이기도 하고, 때론 육지에서 건너오는 것을 막는 요새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인간은 교육을 통해 ‘완벽한 인간’으로 거듭나고, 구성원들은 서로 동일하지는 않지만 동등하게 각자의 역할을 맡아 공동생활을 한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그렇다.

케이팝 아이돌이라는 유토피아

케이팝 세계는 유토피아주의의 아이러니한 구현이다. 사실 한국 대중음악 그 자체가 이미 유토피아였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세계에서 유례가 드물 정도로 자국 음악을 많이 소비하는 사회였고, 제3세계답게 우리 음악이 해외에서 팔리는 일도 물론 없었다. ‘단일민족’이란 이상 아래 외부와의 혼합을 겪지 않았거나, 겪지 않은 것으로 해왔다. 그런 ‘닫혀있음’이야말로 유토피아의 필수적인 요건이다. 그러면서도 대중음악의 지상목표는 경제성장기 우리 사회의 많은 영역들이 그러했듯 영미권을 모사하고 ‘따라잡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그리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내부에서 변화시켜왔다. (‘가요계’라는 집단주의 혹은 공동체 의식도 있다.) 케이팝은 그런 갈라파고스에서 독자적 유전을 이룬 이종이다.

아이돌도 그렇다. 이를테면 연습생 시스템은 교육을 통해 완벽한 인간을 ‘만드는’ 과정이다. 샤이니의 ‘Everybody’가 인간을 기계로 만든 듯한 ‘완벽성’과 함께 (유토피아라는 동전의 이면인) 전체주의 디스토피아 콘셉트를 보여준 것은 그야말로 상징적이다. 아이돌은 팀 내에서 각자 다른 역할을 부여받고, 선배 아이돌이 벌어온 돈은 아직 손익분기를 못 넘긴 후배 아이돌과 연습생들의 비용으로 들어간다. 기획사, 또는 한 팀의 아이돌은 케이팝 유토피아 속 또 하나의 유토피아를 구성한다. 무엇보다 유토피아적인 것은 격리된 공간 속의 통제력이다. ‘사장님 마음대로’라는 클리셰는 ‘아이돌 엔지니어링’의 많은 결정이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지는 것을 비꼬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내부에서 어떤 로직에 의해 내려진 결정인지 외부에선 거의 이해할 수 없음을 반영한다. 외부로 노출되는 것은 전문가들에 의해 완벽하게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아이돌들이 “좋은 모습 보여드리는” 이면에서 실제로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삶을 사는지는 좀처럼 공개되지 않는다. 팬들은 그 격리된 섬에 관람객으로서 출입증을 얻은 이들인 셈이다.

그런데 이 통제력을 발휘하는 방식이 마침 한국적 특성과 맞물린다. 리스크 요소는 유토피아에서 ‘배제’한다는 것이다. ‘꽃길만 걷길’ 바라는 것은 팬들만이 아니다. 무언가의 ‘완벽성’에 흠집이 날 가능성이 존재하는 요소를 만났을 때, 우리는 그것이 흠집이 아님을 토론하거나 ‘뭐 어때?’라며 흠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국적 솔루션은 그 요소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다. ‘고심 끝에 해체’한다든지 말이다. 이것은 한국적인 동시에, 케이팝 또는 한국 주류 연예계의 더욱 두드러지는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니 올랜도에서 총기 테러가 발생했을 때 아이돌이 SNS에 무지개 하트를 올려 성소수자 이슈가 결부되면, 게시물을 내리고 없었던 일로 하기를 선택한다. 그것이 유토피아적 무결성을 부당하게 해하는지, 그것이 무결성을 해하기는 하는지에 대한 토론은 별로 이뤄지지 않는다.

통제력의 한계선이 오고 있을까?

그런 아이돌 세계가 변화하고 있다. 외국인 작곡가들이 케이팝에 본격적으로 진출한지도 곧 10년이 된다. 인디 씬의 음악가들이 참여하는 일도 점점 많아진다. 해외에서 케이팝을 지켜보거나, 케이팝 스타들이 해외 팬들을 접하는 일도 너무나 자연스러워졌다. 케이팝 유토피아의 항구에, ‘가요계 상식’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는 것이다. 특히, ‘누군가가’ 싫어할 수 있는 일은 일어나선 안 된다는 식은 한국 주류 연예계 바깥의 대중음악이 열심히 지양해온 것에 가깝다.

한때 메이저 아이돌 기획사는 녹음된 보컬 소스를 비상식적일 정도로 완벽하게 처리하기 전까지는 프로듀서에게조차 넘겨주지 않는다는 말도 있었다. 프로듀서가 보컬 소스를 직접 작업하는 것이 통상적이고 간편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외국인 작곡가가 자신이 참여한 곡들의 매시업 트랙을 사운드클라우드에 올리기도 하고, 발매된 케이팝 음반의 마스터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발언하기도 한다. 인디 음악가가 아이돌 기획사의 투철한 보안과 수많은 금지사항들이 답답하다고 (비공식적인 루트로나마) 토로하기도 한다. 기획사의 디지털 싱글이 외부 프로듀서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기재하거나, SM과 JYP 소속 아티스트가 미스틱에서 콜라보 싱글을 내는 일도 생겼다. 한국에선 (어떻게든) 통용되는 발언이 해외에서는 충격적인 인종주의적 또는 성차별적 발언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기존의 ‘팬덤 상식’과는 다른 움직임을 보이는 팬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런 상식의 충돌은 유토피아의 ‘폐쇄성’에 위배되고 ‘배제’를 어렵게 하여 ‘완벽성’을 저해한다. 항구를 닫으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항구를 닫는 일이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콘텐츠 속 젠더적 문제의 소지를 꼼꼼하게 살피는 것으로 알려진 어느 기획사의 아이돌은, 인터넷 방송에서 인터뷰어의 교묘한 질문에 결국 누군가는 민감하게 받아들일 만한 답변을 내놓고 말았다. 내부에서 아무리 정교하게 통제하려 해도 인터넷 방송과 SNS의 시대에는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이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팬덤과 가요계의 ‘기존 상식’이 지배하기에는 너무 열린 곳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SNS상에서 아이돌 이름을 꼬아서 ‘검색 방지’를 할 것을 요구하는 팬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그 통제 불가능성을 반증한다. 더구나 아이돌의 MCN, SNS의 활용은, 다름 아니라 유토피아의 요새 너머로 아이돌을 더 가깝고 자세히 접하고자 하는 대중적 욕구가 끊임없이 문을 두드린 결과이기도 하다. 케이팝 아이돌 유토피아의 항구는 이미 열렸다.

완벽한 무결성 너머로?

그것은 유토피아의 종말이 다가옴을 의미한다. 항구를 통해 그 어떤 것이라도 들어올 수 있으니 말이다. 무결한 ‘깨끗함’에 고별해야 할 시간. 그러나 그 ‘깨끗함’에도 이면은 있다. 케이팝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한 외국인 저널리스트는, 케이팝 스타들이 인터뷰에서는 종종 그 음악만큼 흥미롭지 못한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선량하고 정중하며 상냥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거슬리지 않도록 준비된 답변만을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서구사회가 흥미와 애정을 느낄 ‘입체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완벽성을 달성하기 위해 무결만을 추구한 결과로서 평면적인 인간, 사실 그것은 유토피아주의가 그리는 이상적인 인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럴 때 더 적합한 표현은 ‘디스토피아’다. 이는 유토피아의 파국적 결과가 아니라, 유토피아의 다른 얼굴을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항구 안에 있는 이들과 바깥에서 들어오는 이들이 어떻게 서로를 조정하고 공존할지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어쩌면 무결한 ‘깨끗함’을 포기하고, 먼지가 좀 묻어도 별 탈 없는 면역성을 길러야 할지도 모른다. 또는 여전히, ‘고심 끝에’ 항구를 바라보지 않기를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항구는 돌이킬 수 없이 열려버렸고, 케이팝 유토피아는 균열을 맞고 있다. 그것은 그냥, 사실이다.

미묘의 플레이버튼 시리즈

  1. 미묘의 플레이버튼 : 케이팝 유토피아의 항구
  2. 미묘의 플레이버튼 : 아이돌의 여성상은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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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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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식과 내숭의 외길 인생. 음악 만들고 음악 글 씁니다. f(x)는 시대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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