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묘의 플레이버튼 : 아이돌의 여성상은 지워지지 않는다

이미지 CC BY-SA Ted Eyt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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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시피, 우리는 함께일 때 더 강해지며 함께 앞으로 나아갈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걸 위해 싸운 것을 절대로, 후회해선 안 됩니다.” 힐러리 클린턴의 미국 45대 대통령 선거 결과 승복 연설은, 당혹스러운 패배를 용기의 순간으로 뒤바꾸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불만스럽게 여기겠지만, 그는 선거의 핵심에 유리천장에 대한 여성의 도전이 있었음에 방점을 찍었다. “어린 소녀 여러분, 여러분은 소중하고 강하며, 자신의 꿈을 좇고 이루기 위한 모든 가능성과 기회를 가질 자격이 있음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이 쏟아졌다고 줄지어 증언했다. 어떤 사람들은 썩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아마, 그 순간 클린턴이 역사에 새겨 넣은 용기가 인류의 (다른) 반을 위한 것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곳은 ‘필몰로지’가 아니라 ‘아이돌로지’지만, 한 명의 관객으로서 나는 어떤 사람들이 〈고스트버스터즈〉(2016, 폴 페이그 감독)에 분개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각자 조금씩 한심한 네 명의 여성이 멋지고 씩씩하게 활약하는 모습을 보는 것에 화가 난다면, 그저 남성이 활약하는 다른 영화를 보러 가면 그만이지 않은가. 여성 관객, 또는 성평등을 믿는 관객에게 쾌감을 주는 것이 뭐가 나쁘단 말인가. 나는 꽤 긴 시간 동안, ‘이런 작품이 많아져야 한다’고 믿어왔다. 그것은 클린턴의 연설을 듣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2013년 즈음부터 아이돌 씬에는 ‘소녀’ 콘셉트가 유행했다. 생각보다는 긴 유행이었다. 이에 불만을 갖는 이들은 ‘과거의 걸그룹들은 이렇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점은, 이들이 회고하는 ‘생기 있는 여성들’ 중 아마도 2NE1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아티스트들에 대한 당시의 일반적 평가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효리나, (‘아브라카다브라’ 시점의) 브라운아이드걸스가 묵직한 사운드로 내달릴 때, 그것이 여성에게 용기를 주는 음악이라고 생각한 이는 많지 않았다. 그런 음악을 만들던 사람들 중에도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둔 이는 제한적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쎈 언니’가 유행하던 2000년대 말 걸그룹의 트렌드는 ‘섹시하면서 쎈 언니’를 중점으로 했고, “나는 이렇게 매력적이야, 그러니 날 원해라”라는 구애가 가사와 안무 속에 급증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제작자 및 산업의 의도와 당시의 통념은 오히려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런 여성상이 가능하다는 증언으로서 우리의 사고의 대전제에 자리했으니 말이다.

나는, 특정한 콘텐츠의 감시가 ‘십 대들에 영향’을 이유로 하며 아이돌은 특히 그러하다는 논리에 대체로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다른 기회에 하기로 하겠다.) 그러나 지금의 십 대들에게 2016년의 아이돌 씬이 어떤 여성상을 제시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반드시 고민해야 할 일이다. 다시 8년이 지난 2024년에 올해를 돌이켜 본다고 가정하면, 우리에겐 어떤 여성상의 기억이 남아있을 것인가.

정말 다행히도 몇몇 아티스트들은 은근하게 또는 역설적으로 주장을 펼쳤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청자로서, 평론가로서 나는 이들의 작품에 결코 충분한 지지를 보내지 못했다.:

3월 25일, 엠버는 ‘Borders’를 통해 경계선상에 위태롭게 선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 연대를 보냈다. 특히, 퀴어 파트너의 등장 없이도 성소수자인 듯 연출된 뮤직비디오 속 인물들은 더욱 인간적으로 존재했다.

6월 13일, 핫펠트는 윤하의 ‘알아듣겠지’에 치타와 함께 피처링으로 참여해 ‘여자에게 못나게 구는 남자는 하찮다’는 메시지를 담았으며, 또한 맹하거나 히스테리컬하거나 냉혹하거나 못된 모습으로 변신하며 다면성을 가진 여성 캐릭터를 보여줬다.

6월 28일, 태연은 굳이 서로를 강하게 연상시키는 두 편의 뮤직비디오를 발표했다. ‘Starlight’에서 남성의 존재만 쏙 빼낸 듯한 ‘Why’는, 사랑할 때 즐겁지만 혼자여도 얼마든 행복할 수 있는 여성을 그려냈다.

7월 5일, 원더걸스의 ‘Why So Lonely’는 가사와 뮤직비디오에서 모두 남성을 부정하면서, (이성애자) 여성의 사랑이란 이데아에 상대 남성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하다는 통념에 반대, 애타는 사랑이라도 남성과는 별개의, 여성 내면의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8월 1일, 현아가 “어때?”라고 물을 때 이는 분명 상대의 시선을 전제한 것이지만, (‘애교’를 포함한) 그런 행위들조차 남성에게 구애하기 위함이 아니라 여성 스스로가 자신의 매력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전복돼 나타났다.

9월 9일, 가인의 ‘Carnival’은 연애의 종말 앞에 세상이 무너진 듯 느낄 수도 있는 이들을 향해, 열심히 사랑했다면 그 끝을 찬란하게 긍정해도 된다고, “충분히 아름다웠다”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밀렸던 부끄러운 숙제를 하는 김에 조금만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정당한 논의의 기회를 얻지 못했던 작년 아이유의 ‘Zeze’는 (피학대) 미성년자에 대한 성적 대상화가 아니라, (피학대) 미성년자라 해도 인간으로서의 입체성과 (때론 자기혐오마저 일으키는) (성적) 욕망을 지닌 ‘인간’이라고 하는 웅변이었다. (“Climb on me”가 대체 작중 누구의 대사라고 생각하는가.)

모두가 훌륭한 상업적 성과를 거둔 것만은 아니다. 부당한 평가만을 받거나, 은근한 메시지가 채 전해지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마도 다른 작품들을 많이 놓쳤을 게으른 눈과 귀를 가진 나 같은 사람의 지지 없이도 누군가는 가슴 뭉클하게 영감을 주는 작품을 내놓았다. 음악 비평이 척박한 한국 음악 시장의 대중인 우리에게 그것은 아티스트들의 용기와 신념에 기댄 순수한 행운에 가깝다. 성적 대상화를 필연으로 하는 아이돌 산업이지만, ‘원래 그러라고 만들어진 게 아닌’ 할리우드나 자본주의에서 젠더적 진보의 싹이 트기도 했듯, 이곳에도 변화의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뚫고 나오고 있다.

서두에서 나는 ‘이런 작품이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고 말했다. 성평등의식에 영감을 주는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이 있다고 할 때, 나의 생각은 이 두 종류를 서로 대체재로 놓는다. 그것은 틀렸다. 많은 이들이 말하듯, 클린턴의 연설을 겪은 이들 중 누군가는 결정적으로 변화한다. 분명 크기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가 애착을 갖는 이 곡들도 그 점에서는 〈고스트버스터즈〉와 나란히 선다. 2024년의 어느 여성은 올해를 회고하며 이 곡들이 있었기에 자신이 당당할 수 있었노라고 말할 것이다. 이 곡들은 2016년을 사는 우리를 조금은 덜 부끄럽게 만들고, 성평등을 지지하는 우리들을 지탱해주는, 그런 작은 벽돌들이다. 이런 작품은 ‘많아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꼭 있어야 하는 것’이다.

미묘의 플레이버튼 시리즈

  1. 미묘의 플레이버튼 : 케이팝 유토피아의 항구
  2. 미묘의 플레이버튼 : 아이돌의 여성상은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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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식과 내숭의 외길 인생. 음악 만들고 음악 글 씁니다. f(x)는 시대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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