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의 정규 5집 앨범 “LILAC”을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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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사방이 흰빛에 잠겨 고요해졌을 때, 우연히 그 광경을 마주한 사람들은 가만있질 못하고 못내 소란스러운 기운을 냈다. 누군가는 아끼는 사람에게 그 소식을 알려 상대가 아름다운 풍경을 미처 못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도록 주의를 줬고, 몇몇은 곧장 밖으로 나가 눈오리를 만들었다. 그중엔 도무지 눈[雪]이 내릴 기미는 보이지 않던 따뜻한 계절부터 미리 틀을 사둔 후 언젠가 개시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다음날 골목 구석구석엔 간밤에 탄생한 여러 모양의 눈생물이 눈에 띄었다. 저마다 눈으로 빚어내고 싶은 모양이 달랐기 때문에 같은 눈공예라도 결과물은 제각각이었다. 동네를 산책하며 사람들이 나뭇가지나 돌멩이 같은 자연물을 이용해 표현해 놓은 이목구비나 표정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길가나 담장에 일렬로 늘어선 눈오리를 보면 반가웠고, 눈코입이 삐뚤빼뚤한 눈사람을 보면 웃음이 났다. 엘사와 올라프도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어떤 형태로 남았든 그 속엔 차가운 눈을 토닥인 누군가의 어린 손자국이 찍혀 있는 듯했다.
열여섯(2008년)에 데뷔해 스물아홉 지금(2021년)까지 13년 동안 다양한 색감으로 빼곡히 채운 팔레트를 대중에게 선보이며 수다스럽게 말을 걸어왔던 아이유는 자신의 음력 생일인 3월 25일에 봄을 만끽하는 앨범 “LILAC”으로 아무 의문 없이 인사를 건넸다. ‘젊은 날의 추억’이라는 라일락의 꽃말처럼 아이유는 “HILAC(색도: 4도)”과 “BYLAC(색도: 단도)”의 2종으로 구성한 앨범을 내놓았다. 이 두 앨범엔 새롭게 맞이할 젊은 날인 30대에 반갑게 인사하는 ‘안녕(Hi)’의 의미와 지나갈 젊은 날인 20대에 작별을 고하는 ‘안녕(Bye)’의 의미를 동시에 담았다.
타이틀곡인 ‘LILAC’의 뮤직비디오는 경쾌한 멜로디가 흐르는 플랫폼에서 짐 가방을 들고 한껏 설레는 얼굴로 기차표를 보는 아이유의 얼굴로 시작한다. 극 중 주인공은 자신의 20대를 여행하는데, 처음 들어간 기차 칸에선 자리를 잘못 찾기도 하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이동하다 옆에 앉은 누군가를 건드리기도 한다. 다음 동작이 무엇인지 헛갈리지 않고 딱딱 춤추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주인공은 주변을 확인하며 쭈뼛쭈뼛 따라하지만, 그 어색하고 낯선 과정조차 즐기는 모습을 보인다.
기대감에 차올라 벅차기도 하고 뭐가 뭔지 몰라 혼란스럽기도 하던 첫 번째 칸을 지나 다음 칸에서 주인공은 누구보다 화려한 모습으로 나타나 여유롭게 고개를 까딱이며 어깨를 흔든다. 그러는 사이 기차는 터널을 통과해 어두침침한 칸에 도착한다. 그곳에선 입술이 터지고 콧등이 까진 주인공이 연달아 쳐들어오는 적을 상대하는 장면이 나온다. 갖은 기술로 모두 무찌른 다음 숨을 고르는 주인공의 왼손엔 붕대가 감겨 있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자신이 거쳐 온 기차 여행의 여러 순간이 교차하는 가운데 색안경을 벗은 여자아이가 가뿐하게 기지개를 켜는 삽화가 삽입된다. 이는 앞으로 세상을 직관적으로 바라보겠다는 아이유의 의지가 담긴 상징이다. 꽃가루가 흩날리는 배경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화려한 파티를 즐기던 주인공은 다시 첫 장면의 플랫폼에서 눈을 뜬다. 마치 한바탕 꿈을 꾼 것처럼 몽롱한 가운데 주인공은 떠나는 기차 안에서 인사하는 기장에게 손을 흔들어 답을 한다.
이야기가 끝난 것 같은 찰나, 저편에서 불을 밝히며 들어오는 기차가 일으키는 바람에 주인공의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얼굴이 환해진다. 이편과 저편을 보던 주인공은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고정해 관객과 눈을 맞추며 슬며시 미소 짓는다.
이처럼 완결된 한 챕터의 서사와 함께 다음 챕터를 여는 결말이 이어지는 구조는 곡 자체의 리드미컬함과 쫀쫀한 찰기를 입어 풍성한 메시지로 변환된다. 20대의 끝자락과 30대의 초입에 있는 아이유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정리하고 다가올 시간을 말끔하게 받아들이고자 하는 결심이 통통 튀는 멜로디와 함께 가볍고 신나는 분위기로 발화되는 것이다.
“나리는 꽃가루에 눈이 따끔해 (아야) / 눈물이 고여도 꾹 참을래 / 내 마음 한켠 비밀스런 오르골에 넣어두고서 / 영원히 되감을 순간이니까”
‘LILAC’ 中
‘LILAC’은 전체적으로 화사한 분위기와는 달리 마냥 밝은 감정만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복잡하고 미묘한 이야기는 자신만의 오르골에 넣어두고서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다.
“오 라일락 꽃이 지는 날 good bye / 이런 결말이 어울려 / 안녕 꽃잎 같은 안녕 / 하이얀 우리 봄날의 climax / 아 얼마나 기쁜 일이야”
‘LILAC’ 中
되돌릴 수 없는 결별의 순간에 응축된 기쁨의 감정을 터트리듯 내지르는 소리는 고음에도 불구하고 날카롭게 박히지 않는다. 외려 청자의 머리 위로 꽃가루를 뿌려주는 것처럼 충만하고 산뜻한 기분을 선사한다.
“나를 알게 되어서 기뻤는지 / 나를 사랑해서 좋았었는지 / 우릴 위해 불렀던 지나간 노래들이 / 여전히 위로가 되는지 / 당신이 이 모든 질문들에 / 그렇다고 대답해 준다면 / 그것만으로 끄덕이게 되는 나의 삶이란 / 오, 충분히 의미 있지요”
‘에필로그’ 中
이번 앨범의 마지막 수록곡인 ‘에필로그’는 곡이 나오기도 전에 아이유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죽 써 내려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중에 곡이 왔을 때 그 마음을 풀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오래 헤매지 않고 바로 작업하고 빨리 완성했다고 한다. 그만큼 분명한 진심을 담았기 때문에 소중한 곡이라고 말하는 아이유의 부연 설명이 없어도 이 곡은 그의 여정을 꾸준히 따라 밟아온 팬들에겐 그 자체로 애틋한 선물이다. 답가를 부른다면 어디서부터 소리 내야 할지 막막해질 정도로 무한히 깊은, 영원히 가물지 않는 바다가 둘 사이에 흐르고 있을 것 같다.
‘Celebrity’-‘어푸’-‘에필로그’는 전체적으로 힘을 풀고 때론 발랄하게 때론 차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곡들이다. 아이유의 음악은 한 곡 내부의 리듬으로도 서사를 이어가지만, 곡마다 달라지는 힘의 강도로도 특유의 운율을 만들어 낸다는 특징이 있다.
“잊지 마 넌 흐린 어둠 사이 / 왼손으로 그린 별 하나 / 보이니 그 유일함이 얼마 나 / 아름다운지 말야 / You are my celebrity / 발자국마다 이어진 별자리 / 그 서투른 걸음이 새겨놓은 밑그림 / 오롯이 너를 만나러 가는 길 / 그리로 가면 돼 점 선을 따라 / 잊지마 이 오랜 겨울 사이 / 언 틈으로 피울 꽃 하나 / 보이니 하루 뒤 봄이 얼마나 / 아름다울지 말야 / You are my celebrity”
‘Celebrity’ 中
이번 5집 앨범의 선공개 곡이었던 ‘Celebrity’는 유명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내세우는 곡일 것이라는 예상을 배반하고 청자에게 ‘Celebrity’의 자리를 내준다. 그것도 가장 빛나는 부분만 모아놓은 세심함이 특별하다. 익명의 다수에게 이름이 알려지면 뒤에 따라붙을 수 있는 나쁜 부분은 ‘my’로 한정해 아예 차단해 버린 부분도 주목하고 싶다.
“시선을 끄는 차림과 조금 독특한 취향, 다양한 재능, 낯가림에서 비롯된 방어 기제, 매사에 호오가 분명한 성격 등으로 인해 종종 별난 사람 취급을 받아온 친구가 있다. 그 친구의 그런 특징들 때문에 나는 더욱 그 애를 사랑하는데, 본인은 같은 이유로 그동안 미움의 눈초리를 더 많이 받으며 살아왔다고 했다. (…) 내 친구를 포함해 투박하고도 유일하게 태어난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은 별난 사람이 아니라 별 같은 사람이라고.”
‘Celebrity’ 곡 소개 中
아이유는 이 곡을 ‘왼손으로 그린 별 하나’라는 중심 표현을 바탕으로 써 내려갔다고 소개했다. (왼손잡이인 사람에겐 별로 와 닿지 않을 비유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지만) 세상의 어떤 기준과 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외감을 느껴본 사람들에게 조명을 비춰주려는 마음이 전해지는 대목이다. 곡이 공개된 후로 SNS에선 자신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모습에서 눈부신 조각들을 모아 이어붙이고 배경 음악으로 ‘Celebrity’를 띄우는 ‘셀러브리티 챌린지’가 유행하기도 했다. 각양각색의 영상에서 눈에 띄는 것은 저마다 다른 자신의 모습을 한데 모아 편집한 사람이 스스로에게 보내는 사랑스러운 시선이다. 이는 아이유가 이 곡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마음을 잘 받았다고 두 손을 힘차게 흔들며 신호하는 것과 같다. (다들 짐작했던 것처럼 아이유가 유명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내세워 노래하는 곡도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건 그것대로 멋있고 색다를 것 같아 궁금하니까.)
아이유는 이번 정규 앨범 5집 “LILAC” 자체가 자신의 20대를 함께해 준 관객에게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보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주 성의를 담아 인사한 앨범이라는 게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앨범 활동을 하며 여러 매체를 통해 그는 자신이 20대엔 미친 듯이 일하며 일이 주는 그 자극적인 속성에 중독되어 있었다고 밝혔다. 그래서 재미있었고 희열을 느끼며 열심히 일했지만, 앞으로 또 10년이 그렇게 똑같이 이어지면 해로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가 30대엔 자신을 돌보고, 삶을 돌보고, 주변을 돌보며 살겠다는 다짐(‘Coin’)을 드러낼 때 그의 팬들은 그 어느 때보다 반가운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소모되어 지쳐도 결국 또 잘해내는 패턴을 반복하는 이면에 스스로를 방치하고 있진 않은지 늘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으니까. 그러니 아이유가 앞으로 자신을 더 돌보며 일과 삶의 균형을 찾고, 어떤 파도가 와도 쉽사리 바다에 빠지진 않겠다는 결의(‘어푸’)에 안도감이 드는 것이다.
사실 ‘Blueming’-‘Love poem’-‘에잇’부터 이번 앨범 ‘LILAC’-‘아이와 나의 바다’로 이어지는 노래들은 모두 힘을 꽁꽁 뭉쳐 던져준 곡이라고 생각한다. 꼭 눈사람을 만들 때처럼 시린 손으로 자꾸만 흩어지는 눈송이의 곱고 순한 마음을 모으고 또 모아 덩어리로 뭉쳐 우리에게 힘껏 안겨줬다고. 곱고 순한 마음이라 덩어리째로 맞아도 누구도 전혀 아프지 않고, 그 안의 단단한 힘만흡수할 수 있게 굳이 따로 신경을 써준 다정함이라고.
내겐 차가운 눈을 토닥인 아이유의 손자국이 어린 듯한 노래들로 통과한 겨울의 나날들이 있다. 아이유의 노래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면 정말이지 아득해진다. 언제까지나 그의 음악이 지금처럼 나의 삶에 당연하게 스며들어 있기를 바란다. 계절과 시기에 따라 달라지는 감각을 몇 번이고 되감아 피부에 새기고 싶다. 할머니일 땐 어떤 스타일의 노래를 부를까. 아직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그가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목소리를 들려주는 그에게 늘 고맙다.
글: 빙하
작은 바닷마을에서 빵을 굽고 글을 쓴다. 아이유를 뭉근히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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