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리포트는 영화 〈성덕〉에 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덕〉, “네 멋대로 내 사랑을 끝낼 순 없어”
이런 말 해도 될까요? 11월 20일 부산에서 〈성덕〉을 관람하고 나섰을 때, 이상하게 블랙핑크의 ‘Lovesick Girls’가 생각났습니다.
〈성덕〉은 ‘덕질’(팬 활동)과 ‘성덕’(성공한 덕후)을 재정의하는 블랙코미디 다큐멘터리입니다. 이 작품은 스타에게 쏠린 시선을 돌려 팬에게 집중하기에, 지난 10월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이후 SNS에서 화제를 모았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연출가인 오세연 감독은 관객에게 덕질에 관해 무수한 질문을 던집니다. 첫 번째 질문은 ‘나는 실패한 성덕인 걸까’ 입니다. 영화의 초반부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의 눈에 띄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그래서 성덕으로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등 ‘성공한 덕후(팬)’의 역사가 나열됩니다. 뒤이어 그 스타의 이름은 (집단성폭행 및 불법 촬영물 유포 혐의로 기소된) 정준영이었다는 점을 카운터펀치처럼 날리는데, 그와 함께 첫 번째 질문을 묵직하게 던지면서 영화는 시작됩니다.
그의 성덕사는 스타가 저지른 범죄로 인해 ‘웃픈’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죄목이 있다면 FT아일랜드의 ‘사랑앓이’ 가사처럼 “너무나 많이 사랑한 죄” 정도겠지만, 오세연 감독을 비롯해 ‘사회면’에 등장한 스타를 사랑한 덕후들은 한순간에 자신의 취향부터 추억, 일상, 심지어는 나 자신을 향해 실망하고 자책하게 되었습니다.
오세연 감독은 이 웃픈 순간에 머무르지 않고 움직입니다. 사실 우리의 주변에는 “너무나 많이 사랑한 죄”를 경험한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주인공은 주변 사람들에게 “너는 누구를 좋아했어?”라며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더는 입에 올리기도 싫은 스타를 소환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스타를 사랑했던 시간 동안 겪은 추억, 행복 등을 회고하게 합니다. 결과적으로 오 감독이 듣고 싶었던 것은 단순 좋아했던 스타가 아니라 덕후 자신의 생각으로 보입니다.
덕질은 막장 드라마의 관계도처럼 한 번에 설명하기 어려운 관계입니다. 덕질에는 스타, 나, 다른 팬, 팬덤, 소속사 등 다수의 등장인물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성덕〉은 무수한 사람들과 인터뷰를 거치며 덕질의 주체는 덕후인 ‘나’라는 사실을 성공적으로 도출합니다. 입덕과 탈덕을 스스로 결정하듯, 덕질은 나만이 시작하고 끝낼 수 있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오 감독은 화면을 통해 덕질은 오로지 나만의 경험이자 행위이며, 덕질의 대상인 스타마저도 나의 덕질을 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넌지시 주장합니다. 그렇기에 “네 멋대로 내 사랑을 끝낼 순 없어”라는 ‘Lovesick Girls’의 가사가 절로 떠올랐습니다.
〈성덕〉은 덕질을 마냥 순수하거나 위대하게 보지 않고, 성숙한 시선으로 영화를 이끌어갑니다. 감독은 정준영의 법원 공판에 참석하는 한편, 그의 범죄를 처음으로 보도했던 박효실 기자에게 어린 날에 대한 사과를 보내는 등 좋아했던 스타의 범죄를 직시합니다. 우리의 웃픈 덕질 이야기를 하기에 정준영의 범죄 의혹이 막 일어났던 2019년 3월보다는 지금이 적시가 아닐까 싶습니다. 스타로부터 범죄 의혹이 일었을 때, 한때 팬덤은 ‘피의 쉴드’라는 단어처럼 스타를 무조건 신뢰하고 피해 사실을 쉬쉬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2019년 버닝썬 사건 등 여성을 상대로 한 끔찍한 사건들을 목격하면서, 팬덤은 남성 연예인을 사랑의 이름으로 감싸주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감싸주지 않는 게 아니라, 감싸주고 싶지 않아진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덕질과 관계없이 스타의 잘못을 정확히 인지하고 실망했다는 인터뷰이를 보면서 〈성덕〉이 팬덤 문화의 현주소를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독은 여기에 한발 더 나아가 덕후의 애정이 때로는 정치의 영역으로 들어가지는 않는지 비틀어 보기도 합니다. 박사모의 집회 현장을 찾아가는 장면은 ‘덕질’을 주목하고자 하는 흐름에 살짝 튀거나 무거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박사모의 애정과 나의 덕질을 비교하면서, 덕질의 방향성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듭니다. 박근혜를 향한 박사모의 애정은 나의 덕질과 다르다 할 수 있을까요? 나의 덕질이 누군가를 상처 주지는 않을까요? 그저 좋아서 시작한 덕질이지만, 덕질의 주체인 덕후는 이 질문에도 책임감을 느끼고 답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성덕〉은 덕후인 당신이 덕질하며 만났을 온갖 감정과 고민을 마주 보게 합니다. 당신은 아직 이런 감정과 고민을 겪지 못했을 수도, 알고 있지만 이를 회피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됩니다. 당신은 그와 관계없이 덕질을 계속하거나, 아니면 아예 그만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그 이유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덕후인 ‘당신’이 덕질의 주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라도 좋으니 이 감정과 관계의 주인인 당신이 〈성덕〉을 보면서, 영화가 던져주는 질문에 답하기를 바랍니다. 아마 당신은 〈성덕〉 속 인터뷰이처럼 할 말이 많을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마치 스타를 보기 위해 기다리는 당신처럼, 〈성덕〉은 ‘Lovesick Girls’의 답변을 느긋하게 기다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래는 11월 20일 부산 영화의전당에서 진행되었던 부산독립영화제 〈성덕〉 GV 갈무리입니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영화가 흐르는 과정을 보면서 블랙핑크의 ‘Lovesick Girls’가 생각났다. 혹시 영화에 등장한 음악 외에도 영화 작업 당시에 떠올렸던 노래가 있는지?
“사실 고백하자면 영화를 만들 때 마음을 다잡기 위해 그분(정준영)의 노래를 많이 들었다. 유료 사이트에서 들으면 수익이 가기때문에, 이를 지양하기 위해 과거에 사두었던 CD로 가끔 들었다. 그때 들었던 노래들이 기억이 많이 나는 것 같다.”
영화 마지막에 정준영에게 ‘죽지 마라, 절대로’라는 메시지를 남겼는데, 이 메시지의 뜻을 알고 싶다.
“이 영화를 처음 만들기 시작했을 때의 나, 그리고 인터뷰에 나와준 친구들은 (덕질했던 스타를) 정말 죽여버리겠다는 (분노의) 마음이 강했다. 그런데 조 모 씨를 비롯해 죽음으로 뭔가를 해결하려는 게 폭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죽고 나면 우리는원망할 사람도, 죗값을 물을 사람도 없어지니까. 그래서 죽음은 절대 좋은 해결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살아서 죗값도 달게 받고 뉘우치면서 더 큰 피해를 남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화 내용 중 박근혜 지지자들을 만나는 장면이 흥미로웠다. 인간의 본질에 대해 탐구한 것 같은데, 그 결과에 대해 듣고 싶다. 더불어 포스터를 보면, 노란색 글씨로 ‘성덕’이라 쓰였다. 노란색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누군가를 좋아하고 응원하는 마음에 박사모가 등장하는 것은 다소 비약이 있겠지만, 박사모가 (박근혜를 바라보는 행위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보다는 어떤 역사적, 정치적 맥락이 있지 않나. 뭔가를 좋아하고 지지하기로 마음먹게 되면 결국 그것 말고는 다른 것을 볼 수 없으니, 그렇게 (박사모와 같이) 행동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실 (집회에) 가기 전에는 ‘이상한 사람들이다’라고 생각했는데 현장에 가보니 팬의 마음이라는 것은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포스터 속 노란색 글씨는 내가 좋아하는 색깔이다.”
영화 정말 잘 봤다. 중간에 덕질 용품, 굿즈를 잘 처리하겠다고 했는데 이것들은 어떻게 처리했는지.
“단골 질문이다. 이 질문을 받으면 당황스러워서 갑자기 더워지는 기분이다. 나는 그의 팬이라 굿즈를 버리지 못했다기보다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촬영했는데, ‘데이터가 날아가면 어떡하나’ 이런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간다. 내가 백업을 여러 군데 해놔도 집에 불이 나서 백업한 게 사라지면 다시 촬영해야 하니 항상 보관해놓고 있다. 그래서 교수님이 “영화가 더 잘 되고 네가 나중에 거장이 되거든 나중에 이 굿즈들을 한국영상자료원에 기증하라”라고 하셔서 조금 떳떳한 마음으로 보관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여러 사람의 인터뷰가 나오는데, 촬영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은 인터뷰가 있다면?
“참 어려운 질문이다. 10명 넘게 만난 인터뷰이 모두 각자 할 말이 있었다. 아무래도 나와 같이 덕질했던 친구와 이야기할 때 제일 공감이 많이 갔고, 생각이 많아졌던 것 같다. 여성으로 이루어진 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스타가 뒤로는 여성 혐오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에 대한 배신감을 친구가 이야기했을 때, 스타가 팬한테 했던 행동들을 복기하게 되면서 여러 생각이 들더라. 그 친구가 가장 공감을 주는 인터뷰를 했고, 인상 깊었던 친구들은 워낙 각자의 (주관이) 뚜렷해서 재미있게 촬영했던 것 같다.”
영화 기대 정말 많이 했는데 이제 볼 수 있었다. 정준영에게 팬이 많았을 텐데, 그중에서도 여성인 팬분들만 만나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남성 팬들도 서운하거나 힘든 감정을 느꼈을 텐데, 왜 여성 분들만 인터뷰했는가?
“여자라서 만난 게 아니라, 그런 일을 겪은 주변 사람들이 다 여자라서 그랬던 것 같다. 굳이 남성 팬을 찾거나 좀 더 연령대가 다양한 사람들을 찾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 말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나는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이 솔직하게 이야기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영화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기 보다는 내 주변에서, 내 친구들의 이야기를 담는게 더 솔직하다고 판단했다. 또, 주변에 이렇게 많은 만큼 팬들의 고통이 만연해 있다는 것도 보여주고 싶어 (여성 위주의 인터뷰로) 구성했다. 실제로 내 주변이 아니더라도 여성 팬분들이 이런 경험이 더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성덕〉을 보면서 와닿은 부분이 많았다. 가장 궁금했던 것은 어머니와의 인터뷰였다. 특히 어머니께서 ‘(감독의) 유년 시절, 집에사람이 없었는데 감독님이 헤드폰으로 정준영의 노래를 들으면서 지냈다는 게 안심이었다’는 일화와 덕질을 ‘한 대상을 꾸준히 좋아하고, 집중할 수 있는 활동’으로 여기는 말씀이 지금껏 생각했던 덕질의 좋은 부분과는 달라 인상 깊었다. 어머니를 인터뷰했을 당시에 마음이 정리된 상태에서 진행한 것인지 궁금하다.
“사실 어머니가 조민기의 팬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영화에 참여한 대부분의 사람이 나의 친구들인데, 어른의 목소리로 영화를 정리하는 느낌이 들까 봐 인터뷰하지 말까 고민했다. 하지만 어떤 재밌는 이야기가 나올지 모르니 어머니와 처음으로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인터뷰해보니, 팬들은 스스로가 가진 죄책감을 들어 우리끼리 ‘괜찮아, 우리는 잘못 없으니까 됐어’하고 넘기기보다는 제3자가 그렇게 말해주기를 항상 바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그렇게 얘기해 주셔서 놀랐다. 우리보다 더 많은 경험을 한 사람이 ‘덕질’을 얘기해준다는 것 자체가 우리 세대 팬들과 나에게 위로를 주었던 것 같다. 인터뷰 전부터 마음이 정리되었던 것은 아니고, 인터뷰하고 나서야 이렇게 (마음이 정리)되었다.”
〈성덕〉을 보면서 감독님의 팬이 되었다. 감독님의 팬이 생김으로 인해 고민스러울 것 같다. 그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지.
“잘 살아야겠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잘 살자. 착하게 살자. 열심히 살겠다. 그렇지만 나 역시 사람이기에, 한두 번쯤 봐달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중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을 테니까.”
다큐멘터리가 매진되기 쉽지 않은데, 감독님이 만든 영화가 매진되어 다큐멘터리 감독을 꿈꾸는 사람으로서 부럽고 축하드린다. 영화 중간중간에 기차로 지나치는 풍경이 나온다. 이 기차 씬의 연출 의도가 있는지, 그리고 영화를 만들기 전과 후 심경의 변화가 있는지 알려 달라.
“기차에 타서 찍은 장면들이 많은 이유는, 내가 어릴 때 그 사람 때문에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가봤다. 그때 부산과 서울을 오가면서 항상 설렜거나 여운에 젖어 있었다. 이제는 그 사람이 (범죄 등으로) 바뀌어 버렸고, 내가 영화를 찍는 상황이 되어선지 기차에서의 마음가짐이 바뀌어서 색다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이 영화를 기행문으로 만들었다. 이동하면서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영화를) 만들기 전에는 후회와 배신감, 그리고 쪽팔림이 강했다면 영화를 만들고 나서는 ‘어쨌든 간에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으니 우리가 너무 고통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우리 팬들이 계속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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