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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 에이티즈 “THE WORLD EP.FIN : WILL”

‘에이티즈의 시대정신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 근본적이고도 근원적인 질문을, 스스로 되물어야 할 시점이 기어코 찾아온 것은 아닐까. 바라건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현명하고 효율적인 답을 곧 찾을 수 있기를. 잊혀 있던 이 시대 정신을 팀의 새로운 ‘세계’로 다시 불러 모을 수 있기를.

시대 정신을 잊은 에이티즈의 ‘세계’

“‘시대 정신’의 성장판”. 에이티즈의 새로운 연작 “THE WORLD”의 서막을 알렸던 EP “THE WORLD EP.1 : MOVEMENT”를 다루며 필자가 언급했던 문장이다. 데뷔 초기 “TREASURE” 연작의 트레일러, 그리고 작금 “THE WORLD” 연작의 트레일러 간에 감지되는 “공통적인 기류”와 팀이 내세웠던 ‘해적’과 ‘게릴라’라는 컨셉 사이에 놓인 “무국적성”에 대해, 또한 두 연작을 거치며 보여온 ‘시대 정신’의 어떤 성장에 대해 논하며 본 앨범이 가진 미덕을 열거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앨범을 관통하는 탄탄한 스토리에 설득력을 더하는 음악적 유기성, “직관적이고 명료하되 유치하거나 단조롭지 않”은 메시지와 세계관 같은 것들을. 여덟 ‘게릴라’들이 꿈꾸는 디스토피아에의 ‘혁명’은 꽤 성공적인 듯 보였다. 적어도 여기까지는.

“THE WORLD EP.FIN : WILL”.  제목에서부터 암시하듯이, 여덟 명의 게릴라들이 깨부수려 애쓰던 ‘세계’는 이내 종장(終章)을 맞이하게 되었다. 부제로 붙은 ‘WILL’이 “미래에 대한 의지”를 담아내고 있다고 한다면, 연작의 마지막 챕터인 만큼 팀이 초창기부터 그려온 그들만의 ‘시대 정신’을 야심차게 그려내리라는 기대감이 드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해적’으로 대표되는 개척 정신, 또는 ‘게릴라’로 표방 되는 저항 정신 같은 것들을 지켜보아 왔으니 말이다. 그러나, 앨범을 뜯어보고 나면 의외로 그 지점에 크게 물음표가 붙고 만다. 팀 특유의 시대 정신을 계승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기실 그 시대 정신을 ‘잊은’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앨범 단위로서의 ‘듣는 재미’는 우선 보장되어 있다. 풀 렝스(full length) 앨범 단위로서의 유기성도 준수하거니와, 각 트랙의 면면도 (취향에 따른 호오는 있을지언정) 상당히 걸출하다. 육중한 저음의 보컬과 비트가 돋보이는 ‘WE KNOW’로 비장하게 문을 열고 나면, 그 기세를 ‘Emergency’가 이어받아 텐션을 이끌어가고, 아프로비트와 댄스홀의 하이브리드격이라 할 수 있는 타이틀곡 ‘미친 폼’이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 뒤, 라틴풍의 이국적인 리듬에 멕시코 민요 ‘라쿠카라차’를 차용한 ‘ARRIBA’가 잠시 과열된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이어 비탄에 젖은 신스 사운드가 도시의 불빛처럼 점멸하는 ‘Silver Light’가 전반부를 마무리 짓는다. 마냥 텐션을 팽팽하게 당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느슨하게 풀어주기도 하는 완급 조절이 수준급이다. 여기서 곧바로 (수록곡 중 상대적으로 가장 밝은 무드의) 팬송 ‘꿈날’이 이어지고 유닛 및 솔로곡 파트로 넘어갔다면 흐름이 어색해지고 말았겠지만, 그 틈에 인털루드 트랙(‘Crescent Part.2’)을 배치하는 것으로 보완한 것은 명민한 한 수였다.

누가 봐도 다음 투어를 의식하지 않았을 리 없는(실제로 에이티즈는 12월 8일에 새로운 투어 “Towards the Light: Will To Power”를 예고한 바 있다) 유닛 및 솔로곡 파트 역시 적절한 안배로 물 흐르듯 이어진다. 에너제틱하고 하드코어한 힙합 트랙 ‘MATZ’, 센슈얼한 팝 넘버 ‘IT’s You’, 서정적인 무드의 힙합 트랙 ‘Youth’, 특유의 섬세한 감수성과 가창력이 돋보이는 발라드 ‘Everything’까지 연이어 등장하고 나면, 차분히 가라앉은 분위기를 받아 나직한 영어 내레이션으로 ‘당신에게 감정이란 무엇인가’ 연신 질문을 던지는 아웃트로 트랙(‘FIN : WILL’)이 앨범의 문을 조심스레 닫는다. 깔끔하기 이를 데 없는 마무리까지, 무어라 크게 토를 달기가 어려울 정도의 만듦새를 자랑한다. 거기에 요즘 씬(scene)에서 보기 드물어진, 재수록곡 및 인스트루멘탈, 리믹스 트랙 없이 11곡이라는 풍성한 볼륨까지 갖춘 아주 충실한 한 장이기까지 하다.

결론적으로, 앨범 단위로서는 상당한 수작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하다. 문제는 싱글 단위로서 타이틀곡이 갖는 상징성이다. 이번 앨범의 타이틀곡으로 내세운 ‘미친 폼’은, 제목 자체도 그렇지만 곡 역시 들으면 들을수록 당황스럽다. 저항과 변혁이라는 슬로건을 선명히 내세우고 있었던 ‘Guerrilla’와, ‘우리가 원한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메시지를 “청양고추 바이브”의 ‘매운 맛’으로 치환했다는 ‘BOUNCY’와 무드도 메시지성도 사뭇 다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주 강하게 표현하자면, 팀이 초창기부터 계승해 온 ‘시대 정신’을 무참히 배신하고 마는 곡이기 때문이라고 할까. 물론, 어떤 작품이 항상 메시지성을 띠고 있을 필요는 없다. 모두가 이 세상을 일깨우며 싸워나가는 혁명군으로 살 수 없듯이. 그러나, 적어도 연작의 첫 단추를 그렇게 끼웠다면 마지막까지 일관성을 지킬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끝끝내 고개를 들고 만다. 

연작 내부적으로도 그렇지만, 팀이 지금껏 일궈온 디스코그래피를 생각해봤을 때에도 이 곡은 일종의 ‘변절’에 가까울 정도다. 한시적으로 금방 휘발되고 말 밈(meme)을 고스란히 차용한 곡 제목도 그렇거니와, 곡의 기조나 가사도 매우 인스턴트하다. 물론 이른바 ‘마라 맛’으로 표방되는 고자극성을 누구보다 뚝심있게 지켜온 팀이기에 오가닉함과 거리가 먼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시대를 관통하는 어떠한 불변의 가치와 나름의 독창성을 추구하는 미덕을 잃지 않았었는데, 그것을 기어이 외면하고 스스로 격을 낮추는 선택을 한 이유가 무엇인지 의아할 뿐이다. 자극적이긴 해도 그것이 결코 말초적이진 않았으나, ‘미친 폼’은 자극을 넘어 말초 그 자체에 가까워보인다. 속알맹이 없이 껍데기만 남은, 무맥락과 무근본의 결정체라 해야 할 것만 같다.

‘에이티즈의 시대정신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 근본적이고도 근원적인 질문을, 스스로 되물어야 할 시점이 기어코 찾아온 것은 아닐까. 시대의 흐름을 따르기보다는 오히려 “없던 길도 만들”겠다는 패기로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쪽에 가까웠기에, 이렇게 시류에 쉬이 편승하고 말아버린 점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바라건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현명하고 효율적인 답을 곧 찾을 수 있기를. 잊혀 있던 이 시대 정신을 팀의 새로운 ‘세계’로 다시 불러 모을 수 있기를.

마노

By 마노

음악을 듣고 쓰고 말하고 때때로 트는, 싫어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반짝이고 싶은 사람. 목표는 지속 가능한 덕질, 지속 가능한 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