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포스트-코로나 시기에 접어든 2023년은 떠오르는 신예들과 함께 아이돌팝/케이팝이 다방면으로 활발히 뻗어나간 한 해였다. 2023년도 아이돌팝/케이팝의 이모저모를 돌아보며, 아이돌로지의 현역 필진 6인이 모여 대담을 진행했다. (썸네일 이미지 ⓒADOR)
2023년 케이팝의 음악 트렌드
스큅: 2023년 케이팝의 음악적인 흐름부터 얘기해보자. 2022년 말 뉴진스가 볼티모어 클럽 장르의 ‘Ditto’를 내놓은 이후, 르세라핌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 세븐틴 ‘손오공’, 오드아이써클 ‘Air Force One’, 이븐 ‘Trouble’, 투모로우바이투게더 ‘Happily Ever After’ 등 인접 장르인 저지 클럽 장르를 녹여낸 음악이 올해 부쩍 늘었다. 저지 클럽은 몇 년 전부터 틱톡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하고 있는 댄스 음악 장르로, 저지 클럽을 차용한 팝 히트곡으로는 Lil Uzi Vert의 ‘I Just Wanna Rock’을 꼽을 수 있다.
스큅: 이외에도 싸이커스 ‘HOMEBOY’, XG ‘X-GENE’, 영파씨 ‘Posse Up’ 등 드릴 장르, 르세라핌 ‘Burn The Bridge’, 제로베이스원 ‘In Bloom’ 등 브레이크코어 장르의 영향을 받은 음악들도 눈에 띄었다. 모두 케이팝에서 이미 쓰인 적 있는 장르들이긴 하지만, 올해의 이러한 흐름은 SNS 상의 글로벌한 유행을 다분히 의식한 결과물로 느껴진다는 점에서 다르다. 명확하게 “SNS 상의 유행”을 의식한다는 점에서 2010년대 중반 케이팝 내 트로피컬 하우스 열풍 때와도 다르게 느껴지는데, 팝 시장과 동기화되고자 하는 케이팝의 열의가 어느 때보다도 노골적으로 느껴진 한 해가 아니었나 싶다.
예미: 그리고 올해 두각을 보인 신인 보이그룹에게서 이지 리스닝 음악이 두드러졌는데, 이는 정말 시대의 흐름이라는 인상이다. 정국의 정규 앨범처럼 영어 싱글을 전면에 내세운 경우도 생각난다.
에린: 이지 리스닝과 영어 싱글이 함께 갖는 특성도 있는 것 같다. 대부분의 이지 리스닝이 팝에 가까운 곡들이라 그런지 영어싱글로 내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스큅: 그런데 영어 싱글이나 이지 리스닝의 경우 올해만의 특징은 아니지 않나.
마노: 그런데 올해 유독 많긴 했다. 뭐랄까, 미국 진출을 굳이 노리지 않더라도 타이틀곡 영어 번안 버전 정도는 다들 수록하거나 따로 싱글 컷 하는 경향이 보였다.
비눈물: 영어 싱글과 이지 리스닝의 강세는 올해만의 흐름은 아니지만 올해에 유독 도드라진 면이 있다.
스큅: 나는 영어 싱글 자체보다는, 영어 싱글을 내면서 해외 팝 가수와 콜라보레이션을 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해외 아티스트와의 콜라보레이션도 몇 년 전부터 있던 흐름이긴 하지만, 피쳐링 라인업을 보면 점점 더 메인스트림 팝과 융화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은 든다. 정국이 Latto, Jack Harlow와, 투모로우바이투게더가 Coi Leray, Anitta, Jonas Brothers와, 엔하이픈이 Bella Poarch와 함께 작업했다.
조은재: 해외 아티스트와의 콜라보는 하이브 등 극소수 대형 기획사에 국한돼있어서 큰 ‘흐름’으로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스큅: 하긴 이런 빅 네임과의 콜라보레이션은 대형 기획사여야 성사시킬 수 있는 부분이 크다. 예전에 블랙핑크의 앨범 수록곡에 Cardi B가 참여했던 것처럼.
비눈물: 스페드 업 음원이 따로 발매되는 것도 하나의 현상 같다.
스큅: 스페드 업의 공식화도 2023년에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스페드 업 유행 자체는 전부터 있었지만, 회사에서 아예 공식적으로 스페드 업 음원을 내놓는 건 2023년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NCT 드림 등은 틱톡에서 스페드 업 음원을 별도로 태그해두었고, 에스파, 르세라핌, 정국, 피원하모니, 틴탑 등은 스페드 업 버전 음원을 아예 정식 발매했다. 트와이스는 리믹스 앨범으로 저지 클럽과 하이퍼팝 느낌을 가미한 ‘More & More’의 스페드 업 리믹스를 내기도 했다.
마노: 그런데 스페드 업 버전 유행도 그다지 메이저하진 않은 것 같다. 그러니까 공급은 꽤 되고 있다 쳐도, 향유가 충분히 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스큅: 향유는 거의 틱톡 등의 숏츠 플랫폼 안에서 이루어지긴 한다. 그런 점에서 마이너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틱톡 자체가 마이너한 게 아니게 되어버린지 오래라서. 그리고 예전부터 노래를 빨리 감기해서 듣는 ‘나이트코어’가 서브컬쳐로 향유되던 것을 생각하면 사실 꽤나 오래된 문화이기도 하다.
마노: 스페드 업 향유를 생각보다 많이 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해도 그걸 하나의 현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조은재: 오히려 올해 들어서 숏폼의 영향력이 많이 죽었다는 생각도 든다. 스페드 업 음원이 정식으로 나온 사례도 아직 그렇게 많진 않은 것 같고.
마노: 맞다. 다들 숏폼에 슬슬 좀 물려한다고 해야 하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한 것 같다.
조은재: 숏폼 마케팅 자체가 이제 좀 식상해지기도 했고. 슬릭백 챌린지가 숏폼 바이럴의 막차 아닐까 한다.
마노: 진짜 막차는 (엑소의) ‘첫 눈’ 챌린지 같기도 하다. 발매 10여 년 만에 1위까지 하고.
스큅: 제작하는 쪽에서도 그를 의식하고 있는 것인지, 숏폼 마케팅에서의 변화도 눈에 들어온다. 인사치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게 된 댄스 챌린지 이외에 다른 바이럴 콘텐츠를 만드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향유자의 입장에서 밈을 만들어보려는 것 같달까. 드라마 대사와 신곡을 결합해 밈을 만들어보려 한 NCT U, 엔믹스가 대표적인 예시겠다. (NCT U ‘Baggy Jeans’의 경우, 댄서 이대한이 만들어 올린 영상을 멤버 태용이 직접 동의를 구해 챌린지화한 사례이기도 하다.) 하지만 웬만해서는 ‘첫 눈’ 챌린지처럼 실제로 향유자로부터 시작되어 유행이 되는 것만큼의 위력은 가질 수 없는 것 같다. 애초에 밈이라는 게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식 아닌가. 제작자가 억지로 푸시하는 순간 밈으로서의 효력은 약해지는 것 같다. 숏폼 마케팅이 식상해지는 이유는 숏폼 콘텐츠나 플랫폼 자체가 힘을 잃었다기보다 그러한 힘의 작용을 소비자들이 예민하게 느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2023년의 사건: SM 경영권 분쟁
스큅: 사건 사고 이야기도 해볼까. 연초 SM 경영권 분쟁 사건으로 케이팝 업계가 한창 소란했었다.
비눈물: 결과적으로 SM하면 떠오르는 상징 같던 두 사람이 떠나게 된 것이 일단 가장 큰 일인 것 같다.
예미: ‘이수만과 유영진이 없는 SM’이 경영권 분쟁으로 개막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에린: SM 경영권 분쟁으로 인해서 SM이 구축하던 ‘광야’라는 브랜드의 의미도 이전보다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경영권 분쟁 끝에 SM 가수들이 위버스를 이용하게 된 점도 큰 일이었다. VLIVE가 없어지고 위버스에 라이브기능이 생기면서 SM은 본래 가지고 있는 플랫폼을 이용하게 될 줄 알았는데, 위버스에 들어가게 된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스큅: 위버스 플랫폼 사용을 조건으로 하이브가 인수전에서 철수했고, 결국 난립하던 여러 케이팝 플랫폼이 하나 둘씩 정리되어 위버스의 독점 체제가 공고해졌다. 사실 SM에게 자체 플랫폼을 안정성 있게 굴릴 역량이 부족하긴 했다. 하이브는 위버스 자체에만도 적지 않은 인력을 투입하는데, SM이 광야클럽에 그만한 투자를 하지 않았었다는 건 자명한 사실 아닌가.
비눈물: 은행 어플처럼 괜히 숫자만 늘리다가 아무 관리도 안되고 버려진 서비스가 많았다.
스큅: 연말결산 시점에서는 소란했던 중간 과정에 대해 이제와 가타부타 말을 얹기보다는 그 결과 나타난 영향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더 의미 있을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는 ①이수만-유영진의 회사 이탈과 SM 3.0 시대 도래, ②위버스의 케이팝 플랫폼 독점으로 요약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비눈물: 이 사건의 여파로 SM도 이수만 1인 체제를 대신해서 센터제가 들어서기도 했다. 한편 SM 3.0의 경우 티켓 가격이나 VIP 좌석 등 당시 PT에서 세차게 비판하던 하이브의 문제점을 지금의 SM이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공약이 제대로 이행되고 있는지 되돌아볼 필요도 있는 것 같다.
조은재: SM 센터제와 관련해서는 아직 정착 중이라 그런지 이런저런 말이 많긴 하다. 센터별로 미숙한 부분도 있고. 센터제 같은 병렬적 분업 형태는 국내 엔터사 중엔 JYP가 시초였던 걸로 아는데, JYP는 본부제로 돌아가면서부터 경영 측면에서는 확실히 이전보다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분위기다. SM은 센터제 시행 이후로 아직 안정성을 체감할 수 있는 시간은 없었다보니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단계겠다.
비눈물: 그 불안정성으로 인해 센터마다 아티스트 케어와 프로모션에서 차이를 보이면서 팬들 사이에서 불만 사항이 나오기도 했다.
조은재: SM에서는 예전부터 슈퍼엠 같은 아티스트간 콜라보 기획도 종종 나왔는데, 이런 건 센터를 나눠서 운영하는 형태와 상충하는 기획인지라 앞으로 지켜봐야 하지 않을지.
스큅: 사실 연초 슈퍼엠 2023 리턴 예고가 있었는데, 결국 올해 나온 것이 없었다.
비눈물: 올해 가장 큰 티저 사기로 불리기도 한다.
조은재: 슈퍼엠이 이 SM 3.0 센터제의 최대 피해자일지도 모르겠다.
예미: 갓더비트도 올해 나온 곡 ‘Alter Ego’가 경영권 분쟁과 엮여 해석되는 불상사가 있었다.
에린: 1월에 갓더비트 앨범이 나오고 나서 갓더비트에 대한 이야기가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스큅: 슈퍼엠과 더불어 가장 큰 변동을 겪은 건 에스파였다. 정규 앨범을 준비하던 것이 무산되고 몇 달 뒤에야 뒤늦게 미니 앨범으로 컴백할 수 있었다.
비눈물: 발매가 계속 미뤄지면서 결국 에스파는 정규 없는 정규 앨범 투어를 돌게 됐다.
조은재: 에스파 같은 경우는 SM의 전체 레이블과 아티스트를 관통하는 ‘광야’ 세계관이 앨범의 주요 레퍼토리였기 때문에, SM 경영 분쟁은 문자 그대로 세계관이 흔들리는(…) 사건이었다. 경영 분쟁이 아티스트의 작품 내용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게 포인트다.
스큅: 타이틀곡에서는 세계관 용어가 싹 걷어졌고, 티저에 세계관과의 은근한 연결고리를 심어두기는 했지만 세계관 컨텐츠도 따로 나올 기미가 없다. 나이비스 솔로 데뷔도 정말로 추진되고 있는 것인지 모르곘다.
에린: ‘Welcome To MY World’에 나비스가 피쳐링을 하긴 했는데…
조은재: 어찌 됐든 경영과 컨텐츠는 어느 정도 거리를 가지고 운영돼야 하는데, 경영 불안정이 컨텐츠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면 아티스트나 제작 실무진 입장에서는 상당히 곤란해진다. 아티스트에 대한 존중이 필요했던 부분 아닌지.
예미: 광야 세계관 기획 자체가 SM 경영을 컨텐츠에 반영하려는 시도였다보니, 경영 변동이 컨텐츠의 변동을 일으켜 버린 모양새다.
스큅: 말마따나 실무진과 아티스트 입장에서 가장 곤란했겠다 싶다. 이수만의 ESG(Environmental, Social, Governance: 환경, 사회, 지배구조) 경영철학을 에스파의 신곡 타이틀에 녹여내 ‘나무 심기’같은 가사가 들어갈 뻔 했다는 것도 분쟁 과정에서 밝혀진 얘기였다. 이 곡을 차후 수정해 발매한 것이 하반기 컴백작 ‘Drama’였고.
조은재: 이수만이 국내 업계에서는 CT와 예술경영계의 아버지처럼 여겨져왔는데, 정작 경영권으로 예술성을 침해했던 가장 큰 사례를 만들어버렸다.
비눈물: 이 혼란의 틈바구니 속에서 무사히 미니 앨범 2장을 낸 것이 놀랍다. 사실 정규 소스를 이리저리 돌려 막은 것이지만.
스큅: 에스파는 결과적으로 좋은 결과물을 내놓긴 했다. 이미 준비하던 정규 앨범 소스로 만든 것이라고는 하지만 앨범들도 좋았고, 거창한 세계관 놀음 없이도 에스파의 그룹 색깔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낸 것 같다.
마노: 맞다. ‘세계관 없이도 된다’는 걸 증명해낸 것이 와중에 큰 성과라는 생각이 든다.
예미: 이미 데뷔 당시에도 경력이 쌓일수록 세계관보다 멤버가 중요해질 거라는 예측을 많이 했는데, 둘의 중요성 차이가 역전되는 시기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조은재: 이전에 있었던 ‘세계관’과 관련된 기획이 정체성을 빠르게 확립하는 데에는 확실히 유리했지만, 다양한 방식으로의 운용에는 무척 제한적으로 작용하는 요소라는 것도 증명된 셈이다.
2023년의 신예: 보이그룹의 약진
스큅: 그런 면에서 라이즈를 함께 언급하고 싶다. SM 3.0 시대 처음 내놓는 신인 그룹 라이즈는 에스파의, 조금 과장해 말하자면 기존 SM의 안티테제라 해도 될 정도의 그룹이다. (8할이 이수만-유영진에게서 비롯되었던) 특유의 난해한 화법이나 거창한 세계관 놀음 하나 없이 매우 가볍고 대중적인 접근법을 취했다.
예미: 아무래도 데뷔 시점이 시점이다 보니 라이즈 기획이 경영 변동을 선언하는 것처럼 읽히는 모양새였다.
마노: 그런데 경영 변동을 선언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기에는, 경영권 분쟁이 한창일 때 라이즈 데뷔를 준비하고 있었을텐데 그렇게 빨리 기획 방향 수정이 가능했을지 의문이다.
에린: 이전에 NCT에 있었던 멤버가 라이즈로 데뷔한 것을 보면 경영 변동을 선언하기 위한 수단으로 회사차원에서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라이즈라는 그룹 자체가 SM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신인 그룹이기 때문에 그 변화가 더 부각된 측면도 있다.
비눈물: SM 회사 내부 기준으로 봐도 라이즈는 NCT 다음 남자 아이돌이라는 포지션부터 반드시 변화해야만 하는 숙명을 안고 시작한 것 같다. 세계관의 경우 더 이상 아무도 길고 복잡한 것을 읽거나 찾으려들지 않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그 영향력이나 힘도 빛을 잃고 있는 것 같다.
마노: 동의한다. 세계관 놀이 자체가 이미 힘을 잃었고 다들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 라이즈가 세계관 없이 데뷔를 한 거라고 생각한다. 경영 변동 선언은 어쩌다 타이밍이 아주 잘 맞아 떨어져서 그렇게 보인 것이 아닌가 싶고.
스큅: 세계관의 효용 중 하나가 콘텐츠를 팔로-업하게 만드는 지속성과 유기성이었는데, 지금은 콘텐츠 소비 양식이 완전히 뒤바뀌어서 그 효용 가치가 많이 떨어진 것 같다. 구독보다도 알고리즘 중심의 시대로 바뀌었으니.
마노: 지금 피부로 느끼는 게 아이돌이든 뭐든 다 가볍고 인스턴트하게 즐기고 싶어하지, 깊게 파고들고 탐구하고 싶어하는 것 같지 않다는 것이거든.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아이돌 산업도 그렇고 요즘 트렌드 자체가 다 가벼워지고 있지 않나 싶다. 그걸 라이즈가 아주 시의적절하게 파고 들었다는 건 맞는 것 같고.
스큅: 그런 인스턴트한 가벼움은 신인 그룹 전반에서 어느 정도 읽히는 기조인 것 같다. 올해 가장 두드러지는 건 신인 보이그룹의 약진이었다. 이전까지는 소위 ‘4세대 걸그룹’의 강세로 보이그룹은 근 몇 년 새 침체기였는데, 2023년에는 유독 눈에 띄는 보이그룹이 많았다. 엠넷 〈보이즈 플래닛〉으로 데뷔한 제로베이스원, 지코가 프로듀싱한 보이넥스트도어, SM 3.0 시대의 라이즈 등. 이들 모두 날이 선 절도보다는 가벼움과 산뜻함을 내세우며 등장했다.
예미: 2023년 주목받은 보이넥스트도어와 라이즈를 특히 그 ‘가벼움’과 엮어서 이야기하게 된다.
스큅: 제로베이스원의 데뷔곡 ‘In Bloom’도 리퀴드 훵크 기반의 상쾌한 질주감이 돋보이는 곡이었다.
2023년의 사건: 계속되는 오디션/서바이벌 프로그램
조은재: 제로베이스원은 오디션 프로그램 우승팀으로서의 메리트는 확실히 가져온 것 같다. 대신 단점도 그대로 가져왔다는 게 문제겠다. 오디션 프로그램 우승팀은 일단 인기투표로 멤버가 구성되다보니 캐스팅 문제를 완벽하게 보완해낼 수 있는 게 가장 큰 메리트고, 3년 미만의 짧은 활동 기간으로 인해 장기적이고 깊이 있는 기획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게 큰 약점인데, 제로베이스원이 정말 딱 이대로 흘러가고 있지 않나 싶다.
마노: 〈보이즈 플래닛〉 파이널 방영 이후 투표 결과에 만족해하는 반응이 많았던 것이 생각난다.
스큅: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구성된 그룹의 경우 대체로 공정 과정의 분절이 많이 체감된다. 최종 데뷔조 결성 이후 화제성이 식기 이전에 재빠르게 데뷔하는데, 어떤 멤버가 되건 상관 없이 그룹의 이미지와 데뷔곡을 이미 정해두어야만 가능한 속도다. 물론 애초에 뭘 해도 되는 멤버 구성의 그룹이 만들어지겠고, 또 아무렴 상관없는 곡을 수급받으려 하겠다. 하지만 이게 결국 깊이 있는 기획이 나올 수 없는 문제와 이어진다고 본다.
조은재: 그건 ‘활동 기간’과 엄청나게 큰 관련이 있다고 본다. 애초에 3년 미만의 프로젝트 안에서는 나올 수 있는 기획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보통 프로젝트는 2년 단위로 짜여지지 않나.
비눈물: 일종의 팝업 스토어 같다.
조은재: 엠넷의 팝업 아이돌인 셈이다.
예미: 데뷔 이후 결과물의 기획은 아쉽지만, 보이즈플래닛-제로베이스원의 흥행 성과가 〈프로듀스 101〉 이후로도 오디션 프로그램이 파워를 가지게 되는 한 사례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조은재: 그건 〈프로듀스 48〉의 아이즈원 때부터 부각돼왔던 점이다. 해외 팬덤으로의 확장이 이루어졌던 최초의 사례가 아이즈원이기도 했고.
스큅: 어쨌건 이러한 아이돌 오디션/서바이벌 쇼가 일종의 사업 모델로 자리 잡아 MBC 〈소년 판타지〉 같은 프로그램도 나오는 것 같은데…
조은재: 〈방과후 설렘〉-〈소년 판타지〉가 흥행에 실패한 건 ‘프로듀스 사태’에 대한 피로감을 전체 후속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떠안게 되었기 때문이다. 엠넷 〈걸스 플래닛〉-〈보이즈 플래닛〉 시리즈는 피로감과 함께 쇄신(!)의 기대감까지 가져가서 어느 정도의 흥행이 보장됐다면, 여타 프로그램들은 메리트 없이 데미지만 입은 상태로 진행됐던 것 아닌가 싶다.
비눈물: 투표형 오디션 프로그램이 전반적으로 신뢰를 잃은 것도 하나의 요인 같다.
스큅: 방송사 주도의 오디션/서바이벌 프로그램은 하락세지만, 기획사 주도의 오디션 프로그램은 어찌됐건 계속 이어지는 것 같다. JTBC 〈알 유 넥스트〉, SBS 〈유니버스 티켓〉, 방영 예정인 엠넷 〈아이랜드 2〉 모두 다 기획사 주도의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각각 빌리프랩, F&F, 웨이크원-더블랙레이블).
에린: NCT 뉴팀을 뽑는 〈LASTART〉도 생각난다. NCT에서 새로운 유닛이 나올지에 대하여 의견들이 분분한 가운데 SM 자체 오디션 프로그램을 진행해서 멤버를 뽑는 방식이 의외였다.
스큅: 〈LASTART〉 이외에 유튜브로 공개된 기획사 주도 서바이벌 쇼로는 YG의 〈Last Evaluation〉, JYP의 〈A2K〉, 하이브의 〈Dream Academy〉도 있었다 (각각 베이비몬스터, 비춰(VCHA), 캣츠아이 결성). 이런 흐름이 계속되는 건 아이돌 그룹에게 그만한 서사 부여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조은재: 아무래도 앞서 언급한대로 ‘캐스팅’의 부담을 덜어주는 이벤트니까. 기획사 주도의 오디션 프로그램은 캐스팅 단계에서 팬덤 형성 여부를 미리 파악하기 위해 진행하는 것에 가깝다고 본다. 기획사가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거다보니 시청자의 의견이 100% 수용되지 않아도 쉽게 용인되고 납득되는 분위기도 있고. 애초에 ‘프로듀스 사태’의 쟁점 중에 하나가 ‘100% 투표 선발이라고 공표해놓고, 투표 외의 요소가 투표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였기 때문에 ‘프로듀스 사태’도 사실 ‘투표 결과 100% 반영’을 서두에 내걸지 않았다면 그렇게 크게 불거질 문제가 아니었을 거라고 본다.
예미: 〈프로듀스 101〉이전에도 〈리얼다큐 빅뱅〉이나 〈식스틴〉 같은 게 있었던 걸 생각하면, 아이돌 서바이벌 쇼가 기획사 주도로 꾸려지던 과거로 원상 복구된 것 같다.
조은재: 기획사 자체 서바이벌은 꾸준히 있어왔고, 또 엠넷도 엠넷 나름대로 〈슈퍼스타 K〉 시리즈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을 꾸준히 해왔다.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수요 자체는 항상 일정 수준 유지되고 있지만, 지금은 한창 폭발적으로 유행하던 때만큼은 아니기도 하고, 장르 다변화 때문에 트로트, 댄스 등의 분야로 관심이 이탈하기도 했다. 그래서 앞으로 나오는 아이돌 오디션/경연 프로그램은 흥행이 점점 힘들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오디션 프로그램이 ‘신인 발굴’이라는 최초이자 최후의 효용은 아직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이브 등 대형 기획사들이 회사 자체적으로 아티스트 라인업을 다양하게 구축하면서, 중소규모의 기획사들은 점점 시장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와중에 대형 기획사 소속이 아닌 신인에게 큰 ‘버프’를 줄 수 있는 건 방송사의 오디션 프로그램들이었다.
비눈물: ‘오디션 출신’ 연습생들이 다수 소속사에 영입되고 데뷔하는 것을 보면 오디션은 연습생에게 약간 FA 제도와도 비슷하게 작동하는 것 같다.
2023년의 사건: 피프티 피프티
스큅: 그래도 중소 규모 기획사가 의미 있는 주목도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또 다른 사례가 피프티 피프티 아니었을까.
예미: 미국 차트 성과가 미국에서의 성공을 무조건 의미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틱톡 침투를 통해 미국 차트에 이름을 올려 한국에 기사를 낸다는 목적은 달성한 듯 하다.
스큅: 피프티 피프티와는 다르게 대형 기획사 아이돌의 위치이긴 하지만, 뉴진스의 경우도 별다른 해외 프로모션 없이 SNS 상의 붐으로 ‘Ditto’와 ‘OMG’를 빌보드 핫 100 차트에 안착시킨 것이 놀라웠다.
비눈물: 피프티 피프티로 말미암아 틱톡 발 바이럴 마케팅의 존재감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것 같다. 그 전에도 분명 시장에 큰 영향이 있었지만 업계인 뿐만이 아닌 모두가 그 쪽을 인식하게 된 계기 중 하나이지 않을까. 당시 피프티 피프티의 스포티파이 팔로워 수 기록이 매일 갱신되던 것이 떠오른다.
스큅: 이후의 말로는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분쟁 과정 상의 이야기에 우리 같은 외부자 입장에서 가타부타 말을 얹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 삼가고 싶다. 다만 이 와중에 복귀한 멤버 키나를 중심으로 새 멤버를 선발해 활동을 이어간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 피프티 피프티의 성공에 프로듀싱 팀 더 기버스, 그리고 보컬 멤버 아란과 시오의 기여도가 적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보니… 과연 어떻게 팀을 재건할 수 있을지는 진심으로 궁금할 따름이다.
2023년의 신예: 걸그룹
스큅: 어찌됐건 신인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볼까. 보이그룹이 약진하는 가운데 걸그룹은 어땠나. 피프티 피프티도 2022년 말엽에 데뷔한 신인급 걸그룹이긴 했다.
조은재: 걸그룹은 사실 2021~2022 시즌이 너무 크게 흥행해서 상대적으로 올해는 키스오브라이프, 영파씨 등을 제외하면 크게 두드러진 팀은 없었던 것 같다. 90년대 1세대 아이돌부터 팬덤 동향을 꾸준히 지켜봐온 입장에서는 보이그룹과 걸그룹이 동시에 흥행한 적은 정말 손에 꼽혔고 대부분은 한 쪽이 흥하면 상대적으로 다른 쪽이 덜 주목 받곤 했기 때문에, 작년 걸그룹의 대약진을 보면서도 2023~2025년 쯤엔 보이그룹 신인들이 대두되겠거니 하고 있었다.
스큅: 애초에 수요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이상 망할 이유는 없겠다.
예미: 2021~2022년 데뷔 걸그룹들이 2023년 주요작을 내놓으면서 세를 키워가고, 그 사이에서 보이그룹 신인이 주목 받는 것을 생각해보면 신인 보이그룹-걸그룹이 번갈아 주목받는 흐름으로 해석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비눈물: 2023년은 전 시즌에 자리 잡은 걸그룹 팀들이 기반을 다지는 시간이었다.
마노: 2021-2022 시즌 데뷔한 대형 걸그룹들은 현재 대부분 캐시 카우가 된 상황이다. 그냥 자연스러운 순환 구조인데 다들 너무 미시적인 것만 봐서 생기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스큅: 많은 걸그룹들이 거목이 되어 버티고 있는 가운데 막 데뷔하는 걸그룹이 이목을 끌기란 어려운 일이고, 자연스레 보이그룹 쪽에서 눈에 띄는 신인 그룹이 더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
조은재: 걸그룹과 보이그룹이 팬덤에 교집합은 있을지언정 완벽하게 팬덤을 공유하진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세대가 거듭될수록 팬덤 교집합이 점점 커지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도 완벽하게 공유되는 시장은 아닌 것 같다. 결국 걸그룹과 보이그룹 시장이 병행되는 거지 합쳐지진 않을 거라서 내년까지도 보이그룹 신인들한테 꾸준히 주목이 가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제로베이스원 활동 종료 즈음에 다시 걸그룹 신인이 나오지 않을까 싶고.
비눈물: 2023년도에 이목을 끄는 신인 보이그룹 팀들이 많았기 때문에 내년에는 그걸 보고 따라가려는 후발주자가 더 많이 나올 것 같다.
스큅: 키스오브라이프 얘기가 잠깐 스쳐지나갔는데, 엠넷 〈아이돌 학교〉 출신 이해인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은 그룹이라는 점도 짚어볼 만한 지점이다. LE나 지코처럼 프로듀서로 전향한 아이돌은 몇몇 있었지만, 순수 기획자의 지위는 새롭다. 포스트-아이돌 시기를 꾸려나가는 아이돌의 또 다른 활동 경로를 제시하는 느낌이기도 하다.
에린: 이해인이 키스오브라이프가 자신이 하고 싶다거나 할 수 있는 콘셉트와는 거리가 있다고 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예미: 아이돌 출신 기획자로는 포켓돌스튜디오 프로듀서이자 산하 자회사 엠이오 대표로 일하는 다이아 출신 조이현의 사례도 있다.
조은재: 이해인보다 조이현이 선례긴 하지만, 두 사람이 다른 점은 이해인은 본인이 직접 정식으로 데뷔해서 활동했던 아이돌은 아니었다는 점 정도겠다.
에린: 클라씨가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선발된 멤버들로 꾸린 그룹이라면, 키스오브라이프는 이해인이 멤버를 선출하는 과정에서부터 참여했다는 점도 큰 차이점이다.
2023년의 신예: 버추얼 아이돌
스큅: 다른 신흥 그룹들도 얘기해볼까. 이세돌, 메이브, 플레이브 등 버추얼 아이돌이 유독 많이 보인 한 해였다.
비눈물: 이세돌은 사실 진지하게 아이돌을 하려고 시작하진 않았는데 반응이 갑자기 폭발적으로 커진 케이스 같고, 나머지는 분명히 케이팝에 대한 노림수가 있었던 것 같다.
예미: 버추얼 아이돌을 다룰 때는 스트리머로 활동하거나 기획 및 활동 주체가 스트리머와 연관되어 있는지, 아닌지를 한 기준점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예컨대 이세돌의 기획 의도, 콘텐츠의 정서, 팬덤 경향성, 활동 형태는 ‘버추얼’이 공통점인 메이브보다는 오히려 ‘유튜버/스트리머 발 기획’이 공통점인 QWER과 더 유사하지 않나.
조은재: QWER의 경우 스트리머지만 버추얼 아이돌은 아니다.
비눈물: 그러면서도 QWER은 비-스트리머라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부족했던 보컬 멤버가 주목받는 점이 재밌다.
조은재: 메이브와 플레이브도 각각 주안점이 다르게 느껴진다.
비눈물: 메이브는 AI 등 첨단 기술을 굉장히 강조하는 것 같고, 플레이브는 오히려 스트리머 분류에 가깝게 닿아있는 것 같다.
스큅: 그런데 정작 메이브보다 플레이브가 기술력이 더 좋은 것 같기도 하다. 라이브 방송을 감당해내는 기술력이 대단하다.
비눈물: 플레이브는 라이브 방송 중 모션 캡쳐가 에러난 해프닝이 오히려 매력 포인트로 여겨져 홍보되는 사례를 보면 정교한 버추얼 기술력이 우선되진 않는 것 같다. 반면 메이브는 목소리 모델을 섭외해서 말하는 목소리는 전부 AI로 학습된 보이스로 만든다. 그래서 최초로 100년 활동할 수 있다는 키워드를 내세워 초반에 홍보하기도 했다.
예미: 플레이브는 스트리머 활동을 많이 하다보니 저절로 뒷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다.
조은재: 콘텐츠는 확실히 플레이브가 훨씬 많고, 활동 내용을 보면 스트리머에 가깝다는 생각도 했다. 버추얼 아이돌 중에 스트리머로 안 빠지고 의외로 정석 아이돌(?)의 형태로 운영되는 건 메이브 아닐까.
예미: 그런 것 같다. 헌데 메이브는 게임 회사에서 기술 및 게임 홍보용으로 제작했다 보니 무대 이외의 인간성에 대한 어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세돌, 플레이브 등 현 시점 다수의 버추얼 아이돌이 홀로라이브(hololive) 등의 영향 하에서 일본 오타쿠 문화를 기반으로 스트리머 및 가수 활동을 병행하고 있는데, 메이브 기획은 이와 반대로 가고 있다보니 장기적으로 잘 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비눈물: 아무래도 한국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내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아 안타깝다.
예미: 오히려 플레이브 같은 팀은 스트리밍을 하다 보니 인간적 매력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그 뒷사람의 역량이 캐릭터와 합쳐져서 시너지를 내는 것 같다.
에린: 사실 아이돌에게 ‘인간성’은 필수적인 요소인데 이 부분을 배제하고 오래가는 기획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플레이브도 스트리밍을 통해서 각 멤버의 캐릭터성이 부각된 건데, 메이브는 그런 부분이 배제된 기획이다 보니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지속적으로 이어가긴 어려워 보인다.
2023년의 사건: 케이팝과 E-스포츠
조은재: 메이브의 사례를 보면 버추얼 아이돌은 E-스포츠와의 연계성도 높은 것 같다. 메이브가 넷마블에서 기획한 프로젝트라는 점과도 연관이 있을 것 같고.
예미: 버추얼 아이돌의 시작 K/DA…(?)
마노: 그런데 K/DA가 버추얼 아이돌이기에는 좀 경우가 미묘하게 다르지 않나.
비눈물: 일단 앞에 캐릭터를 내세우고 있으니 이론상 버추얼 아이돌은 맞다.
마노: 근데 이제 뒷사람이 아주 명확하게 알려져 있는…
스큅: 버추얼 아이돌 외에도 E-스포츠와 케이팝의 협업이 꽤나 활발했다. 뉴진스, 백현과 리그오브레전드(이하 ‘롤’), 르세라핌과 오버워치 2의 콜라보레이션이 있었다.
에린: E-스포츠의 케이팝 아이돌 콜라보레이션으로 아이돌의 새로운 시도를 볼 수 있는 측면도 있다.
조은재: 넷마블에서는 아예 자사 콘텐츠 홍보에 아이돌이 필요해서 메이브를 기획한 듯 한데, 롤이나 오버워치 등 E-스포츠 콘텐츠에서 케이팝 아이돌 콜라보레이션을 계속 진행하는 것을 보면 팝 음악의 레퍼토리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스큅: 캐릭터 플레이를 하는 게임이 많아서 아이돌과 호환이 잘 되기도 한다. 르세라핌이 티저 이미지에서 오버워치 캐릭터 아이템을 장착하고 나온 것만 보더라도 그렇다.
조은재: 단순히 스타 이름값을 빌어오는 스타 마케팅과 지금 E-스포츠 업계와의 콜라보는 약간 다르긴 한 게, 말씀하신 대로 기존 캐릭터들과의 호환성을 염두에 둔 기획물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것 같다. 그 때문에 마냥 인기가 많고 팬덤이 큰 아이돌만 섭외되는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
에린: 점점 게임 그래픽과 아이돌에서 재현하고자 하는 이미지가 겹쳐지는 것도 콜라보에 한몫하는 것 같다.
예미: 다만 올해 롤드컵 주제곡 ‘GODS’는 한국 개최 롤드컵에 맞춰 현 시점 뉴진스의 화제성을 이용했다는 느낌이었다.
비눈물: ‘GODS’ 뮤직 비디오와 라이브 무대의 구성을 보면 퍼포머보단 게임과 연관된 스토리 연출에 집중하고 있어서 기존 경향은 그대로 이어가는 것 같다.
마노: 롤이 이번에 발표한 두 곡의 신곡도 모두 인하우스 프로듀싱 결과물이었던 건가.
예미: 올해 나온 뉴진스의 ‘GODS’와 하트스틸의 ‘PARANOIA’는 모두 라이엇 내부 작업물이었다.
마노: 롤이 그런 의미에서 일을 굉장히 잘하는 것 같다. 외부 케이팝 프로듀서 기용 없이 인-하우스 프로듀싱만으로 케이팝 때깔을 엄청나게 잘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스큅: 롤이 음악 전반에 대한 관심도와 투자가 큰 것 같다. 걸그룹 K/DA, 보이그룹 하트스틸 외에도 밴드 펜타킬, 힙합 크루 트루 대미지 등 게임 캐릭터를 바탕으로 다양한 음악 그룹을 만들어냈다.
2023년의 사건: AI와 아이돌
조은재: 버추얼 아이돌 하니 AI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고 싶다. AI가 케이팝에 어떻게 접목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 있었다. 팬들 사이에서는 좋아하는 아이돌의 AI 커버가 유행하고 있고, 최근에는 AI 필터로 구현한 아이돌도 등장했다.
마노: 일단 도덕이나 윤리 문제는 잠시 제쳐두고 얘길 하자면 AI 커버는 이제 일종의 놀이 문화가 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우리 가수가 안 해주는데 듣고는 싶으니까 우리가 만든다’는 느낌이랄까.
비눈물: ‘How Would Sing’으로 일컫는 가상 파트 분배가 AI 커버로 이어진 게 재밌는 부분이다. 아직은 기술력이 완전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원곡에 기대야 해서 바탕 없는 창조가 안되는게 AI 커버가 더 나아갈 수 없는 지점이긴 하다.
예미: 현재까지 AI 커버는 팬들의 상상력을 충족하는 목적으로 향유되는 느낌이다.
조은재: 사실 AI 커버 같은 건 그냥 팬들의 2차 창작물에서 멈출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예전에 엠넷에서 제작한 〈다시 한 번〉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이미 고인이 된 아티스트를 AI로 재현해내려는 시도를 했었고, 다른 방송사에서도 비슷한 시도를 몇 번 했던 걸로 아는데, 그 당시 반응이 썩 좋지 않아서 시도만 남고 사라지지 않았나. 그런 사례를 보면 공연은 정말 인공적으로 대체되기 쉽지 않은 분야라는 생각도 든다.
예미: 해당 프로그램에서 거북이의 터틀맨과 김현식의 모습을 AI로 재현했다. 그런데 고인을 다루는 방송은 아무래도 팬이나 주변인 반응에 대한 리스크가 너무 크다.
마노: 엠넷에서 한 것 말고도 다른 파생 프로그램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것들은 일단 윤리성 문제까지 있어서 더 반응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조은재: 근데 사실 살아있는 인물을 대체하는 AI는 굳이 등장할 필요가 없는지라, 사업 차원에서 접근할 이유도 없고, 팬들의 단편적인 니즈 충족 정도에서 그칠 듯하다.
예미: AI 커버가 활발했던 가수 중 딘처럼 살아 있는데도 활동을 보기 어려운 가수가 많았던 것도 기억난다.
조은재: 하지만 정말로 딘을 대체하는 AI를 생산하고 컨텐츠로 판매하는 사업을 벌일 순 없지 않나. 웹툰이나 영화 쪽은 AI에 의한 인력 대체와 윤리성 때문에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음악이나 공연 쪽에선 의외로 크게 대두되지 않는 것 같다. 대신 그 위치에 버추얼 아이돌이 있는 정도인 것 같고.
비눈물: 조금 다른 주제지만 AI로 앨범 아트를 만드는 사례도 조금씩 늘면서 논란이 생기긴 했다.
마노: 아무래도 완전히 대체하기엔 무리가 있다. 지금 클로바 노트 같은 AI 서비스도 결국 사람 손을 한 번 거쳐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는데, 하물며 음악이나 공연은…
조은재: AI도 하드 트레이닝 시켜서(!) 공연을 대체하게 되는 날이 올지…
예미: 음악이나 아이돌 산업에서는 아직 ‘뒷사람’에 의존하지 않는 AI 작업물이 잘 보이지 않는 듯 하다.
조은재: 생각해보면 연예산업 분야 중에 아티스트 인격 자체에 가장 많이 기대있는 게 음악과 공연인 것 같다.
마노: 나올 수가 없다. 조금 다른 경우긴 하지만 보컬로이드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보컬로이드로 아무리 최대한 그럴싸한 결과물을 만든다고 해도, 숨소리나 미세한 발음 차이 같은 것까지 완벽하게 재현하진 못하니까.
비눈물: 보컬로이드는 사실 사람다움이 아니라 인공미가 주요 포인트라 조금 다르긴 하다.
예미: 아무리 버추얼이나 캐릭터를 내세워도 그 ‘뒷사람’을 지우지 않는 콘텐츠가 훨씬 파급력이 큰 느낌이 든다.
마노: 그 ‘뒷사람’에 대해서는 예전에 은재 님이 Monthly 리뷰에서 메이브를 다루면서 한 차례 열변을 토하기도 하셨다.
조은재: 향유하는 사람들도 사실은 완벽한 걸 기대하는 게 아니라, 아티스트 컨디션에 따른 변화까지도 소비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조금 잔인한 말이지만,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열광만 봐도 공연자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열의를 보이는 것을 보고자 하지, 완성도 자체만으로는 크게 집중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사실 대중이 바라는 건 그 ‘고통’과 ‘인간성’에 있는데 AI는 고통을 구현할 수 없기 때문에… 뭔가 철학적인 얘기로 가는 것 같다.
마노: 버추얼 아이돌 이야기와 이어지는 것이지만, 아무튼 버추얼 아이돌에게 기대하는 ‘사회면에 나지 않는 아이돌’이라는 게 정말 순진한 동상이몽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지.
예미: 휴먼 리스크 없는 아이돌을 꿈꾸며 버추얼 아이돌을 만든다 쳐도 리스크를 안 걸면 리턴도 없어 보인다.
마노: 정말 적확한 요약인 것 같다.
2023년의 신예: 글로컬 아이돌
스큅: 버추얼 아이돌 외에 급부상한 독특한 형태의 아이돌로 글로컬 아이돌을 들 수 있다. 니쥬, 앤팀은 일전에 데뷔했으나 2023년 한국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 특징이고, MLD에서는 호라이즌(HORI7ON)이라는 필리핀 기반 케이팝 그룹을 내놓았다. JYP와 하이브는 자체 서바이벌 쇼를 통해 각각 비춰(VCHA), 캣츠아이(KATSEYE)라는 걸그룹을 꾸려 2024년 글로벌 데뷔를 앞두고 있다. 이 흐름 가운데 XG도 거론할 수 있겠다.
비눈물: ‘글로컬 아이돌’이라는게 정확히 어떤 기준일까?
스큅: 케이팝 회사/프로덕션이 케이팝 시스템으로 제작한, 해외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그룹이라고 할 수 있겠다.
비눈물: 해외 활동/거점이 주요 포인트라면, 멤버 전원 외국인인 블랙스완도 글로컬 아이돌로 볼 수 있는지 궁금하다.
스큅: 블랙스완은 오히려 완연한 한국 아이돌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주 활동 무대가 분명히 한국인 것으로 보여서.
예미: 니쥬 같은 사례를 보면, 한국 기획사가 기획하고 해외에 활동 거점을 둔다는 두 포인트를 모두 만족해야 글로컬 아이돌로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마노: 앤팀 같은 경우도 전원 외국인은 아니지만 글로컬 아이돌로 보고 있다. 앤팀은 리더 의주만 한국인이고 다른 멤버들이 모두 일본인인 케이스.
스큅: 사실 니쥬와 앤팀이 굳이 한국 활동을 하려는 게 조금 의문이긴 했는데, 일본 시장이 워낙 폐쇄적이라 글로벌 팬덤을 확충하려면 한국 활동을 해야만 하나 싶었다. XG가 굳이 한국 음악 방송을 도는 것도 정말 한국 활동을 염두에 둔다기보다 해외 활동을 위한 발판을 만드는 느낌 아닌가. 아직까지 한국 음악방송 만큼 케이팝 식 퍼포먼스를 보여주기 적합한 곳이 없기는 하다.
비눈물: XG의 경우 이번 겨울 싱글 프로모션으로 일본의 〈THE FIRST TAKE〉와 한국의 〈it’s LIVE〉 영상이 거의 동시에 발행되었는데, 그룹의 포지션이 굉장히 중간에 걸쳐있는 느낌을 받았다.
예미: 니쥬가 글로벌 그룹을 목표하고 데뷔했지만, 일본 위주로 활동할수록 해외 진출과 거리가 멀어진다고 생각한 것 같다. 결국 이 팀도 한국 활동을 해야 글로벌 시장 전파에 유리하다고 결론을 내린 것 아닐까 싶었다. 기존 한국 내 케이팝 그룹의 일본 활동곡과 한국 활동곡이 글로벌 시장에서 갖는 파급력에 차이가 컸다.
마노: ‘한국 활동을 해야 글로벌 시장에 전파된다’기보다는, ‘일본 시장이 너무 폐쇄적이라 한국까지 뻗어나가야 그나마 확장성이 생긴다’ 쪽에 가깝지 않을까.
스큅: 어차피 한국은 일 때문에 오기 마련이고, 그렇기에 더더욱 한국 활동을 안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조은재: 예전에 WayV가 한국에서 활동할 때만해도 거의 유일한 예외 사례라서 아이돌로지에서 크게 다루지 않았는데, 유사한 사례가 점점 늘어나서 이제는 따로 카테고리화 할 필요가 생겼다.
스큅: WayV 전에 JYP의 보이 스토리나 필리핀의 아이돌 그룹 SB19 같은 사례들이 있긴 했지만, 해외 거점 그룹이 본격적으로 초국적인 활동을 표방하는 것은 WayV 정도 뿐이긴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사례들이 훨씬 많아졌다.
마노: XG도 그렇고 WayV도 그렇고, ‘대체 어디까지 케이팝으로 봐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불을 지핀 장본인들이라는 것이…
스큅: 얼레벌레 쓰이던 케이팝이라는 용어의 재정립이 필요한 것 같다. 사실 케이팝이란 말 자체는 일본에서 (아이돌 음악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던) 한국 대중음악을 총칭하는 용어로 만들어졌던 말이고, 한국을 비롯한 다른 곳에서도 이를 받아 쓰며 용어가 굳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애초에 정의가 모호할 수밖에 없는 단어긴 하지만, 이제는 정말 새로이 규정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비눈물: 케이팝이라는 용어는 이제 일종의 장르나 음악 정체성으로까지 받아들여지기도 하니…
에린: 어디까지를 ‘케이팝 아이돌’의 범주 안에 넣을 것인가도 고민이 되는 지점이다.
스큅: 영미권을 중심으로 활동할 비춰와 캣츠아이의 정식 데뷔 때 그 얘기가 본격적으로 더 많이 나오지 않을까. 해외 매체 인터뷰에서 두 그룹에게 자신들을 케이팝이라 규정하는지 질문하는 그림이 쉽게 그려진다.
2023년의 사건: 페스티벌에서의 케이팝 아이돌
스큅: 해외를 무대로 활동하는 글로컬 아이돌 얘기가 나온 만큼, 케이팝 아이돌의 해외 활동 이야기도 해보자. 갈수록 해외 페스티벌에 케이팝 아이돌이 등장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블랙핑크는 코첼라 헤드라이닝으로 큰 화제를 모았고, 투모로우바이투게더는 시카고 롤라팔루자에 처음 얼굴을 비춘 지 1년 만에 헤드라이너 위치에 올랐다. 뉴진스도 시카고 롤라팔루자 무대에 올라 헤드라이너 못지 않은 주목도를 이끌어냈고, 이후 일본의 썸머소닉 페스티벌에도 출연했다. 이외에도 2022년 드림캐쳐가 케이팝 아이돌 중 최초로 프리마베라 무대에 섰고, 2023년에는 레드벨벳이 이를 이어받았다. 피원하모니는 몬스타엑스에 이어 미국 최대 연말 쇼인 징글볼 투어에 합류했다. 케이팝 그룹이 해외 페스티벌에 출연하는 것은 이제 익숙한 일이 되었지만, 헤드라이너로 거론될 정도가 되었다는 게 올해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마노: 예전에는 썸머소닉에 이름만 올려도 다들 신기해 했었는데 이제는 굵직한 페스티벌에 헤드라이너로도 서고, 참 격세지감을 느낀다. 헤드라이너 급 라인업이 됐다는 건 확실히 다른 이야기인 것 같다.
스큅: 특히 블랙핑크의 코첼라 헤드라이닝이 인상적이었다. 이전의 코첼라 퍼포먼스보다 훨씬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관객 동원력도 굉장했다. 다른 매체에서도 했던 얘기지만, 페스티벌 무대가 케이팝이 생각 이상으로 뚫기 어려운 벽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케이팝이 마니악한 것으로 치부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케이팝 퍼포먼스가 비디오 프레젠테이션에 보다 특화된 부분이 많다 보니 대형 페스티벌 무대 세팅에서의 퍼포먼스 자체가 큰 도전이기 때문이다. 블랙핑크가 이를 굉장히 잘 풀어냈던 것 같다.
조은재: 국내 페스티벌 얘기도 좀 하면 좋지 않을까. 권은비가 이렇게 페스티벌을 통해서 히트할 줄 생각도 못했다.
마노: 워터밤에 출연했는데, 이후 ‘워터밤 여신’이라는 별칭을 얻고 솔로로서는 사상 첫 1위까지 거머쥐었다.
예미: 페스티벌 무대를 통해 가수가 성장하는 사례가 등장했다는 점에서 확실히 포스트-팬데믹 시대가 왔구나 싶었다.
에린: 코로나 이후에 국내 페스티벌들이 재개되면서 관객 수가 정말 많아져서 그런지, 국내 페스티벌 참석이 가수의 인지도를 올려주기도 하고 그게 이후 가수 콘서트 관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보인다.
비눈물: 국내 음악 페스티벌의 경우 오히려 케이팝 아티스트가 그 외 라인업 사이에 섞여서 위치하는게 흔치 않은 것 같다. 만약 섞여서 나와도 양일 중 하루에 케이팝 가수끼리 모여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또한 록 페스티벌의 이미지가 아직도 강해서 아이돌/케이팝 언급이 잘 되지 않는 편이기도 하다.
예미: 해외 페스티벌이 이미 팝 전반을 포괄하는 분위기의 라인업이 많았어서 오히려 그 안에 케이팝 아티스트가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는 것 같다.
비눈물: 그래서 지금 한국에서 아이돌이 제대로 활약할 수 있는 메인 무대는 대학 축제가 되지 않았나 싶다.
스큅: 워터밤처럼 엔터테인먼트적인 성격이 강한 페스티벌이라면 모를까, 국내의 일반적인 음악 페스티벌에서는 케이팝이 굳이 고려사항이 아닌 것 같다.
에린: 워터밤이 전국적으로 개최했던데 , 밴드 라이브를 할 수 없는 환경이기도 하고 행사 분위기 상 아이돌이 다수 출연하기에 적합한 상황 같다.
마노: 심지어 워터밤은 일본에 수출되기까지 했다.
에린: 아직 국내 페스티벌들이 밴드 라이브를 선호하고 있어서 라인업에 들어가기 어려운 점도 작용하는 것 같다.
스큅: 애초에 갈래가 다른 것이라 생각해 큰 유감은 없지만, 록 페스티벌에 나와도 손색 없는 케이팝 아이돌은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드림캐쳐를 처음으로 부른 페스티벌이 국내 페스티벌이 아니었다는 건 참 아쉽다.
에린: 그나마 국내 페스티벌 생각하면 렛츠락 페스티벌 때 우즈가 있었던 경우가 있긴 하지만, 아직 페스티벌이 생각만큼 다양한 방면으로 있는 게 아니라 많은 라인업에서 볼 수 없는 상황이다.
예미: 올해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과 부산 국제 록 페스티벌에 엔플라잉이 출연한 것처럼, 밴드 아이돌이 페스티벌에 출연하는 사례는 종종 봤다.
마노: 록 페스티벌은 아니긴 한데, 2022년 러브썸 페스티벌에서 백현, 에이티즈, 싸이커스 등이 라인업에 있었다. 에이티즈도 2곡 정도를 밴드셋 라이브로 꾸렸고.
비눈물: 2023년에는 태양이 서재페에 출연했었다. 하지만 여전히 (록)페스티벌 라인업에 아이돌의 이름이 보이면 격하게 불만을 표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마노: 아이돌까지 갈 것도 없이 싸이만 해도… 2006년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에 싸이가 출연했는데, 처음엔 다들 편견에 실눈 뜨고 봤다가 종국엔 신나게 놀았다는 얘길 들었던 적이 있다(웃음).
예미: 부산 록 페스티벌이 2019년에 god를 불렀던 사례도 있었다.
스큅: 어찌됐건 대개 밴드의 포맷을 가져야만 록 페스티벌에 설 수 있는 명분이 생기는 느낌이다. 물론 힙합 가수들이 록 페스티벌에 번번히 출연하긴 하지만. 그런 점에서 보아가 그린민트페스티벌 무대에 섰던 것이 꽤나 예외적으로 다가온다. 물론 밴드 셋으로 무대를 했다지만, 보아는 ‘댄스 가수’의 이미지가 훨씬 강하지 않은가. 셋리스트에도 자신의 댄스 히트곡을 다수 수록했다.
예미: 밴드 라이브 문제도 있지만, 국내 페스티벌 업계가 아직까지도 아이돌 산업의 안티테제에 서 있다는 정서가 깔려 있는 것 같다.
스큅: 일단 향유층의 문제 아닐까. 물론 아이돌 음악과 밴드 음악을 동시에 소비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아닌 사람들도 많으니. 동시에 소비하는 사람들도 록 페스티벌에 기대하는 것은 드림 콘서트 같은 행사에 기대하는 것과 조금 다를 것이다.
2023년의 사건: 부산 엑스포, 그리고 잼버리 사태
스큅: 글로컬 아이돌과 한국 아이돌의 해외 활약상까지 이야기해보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케이팝 인식은 다소 국수주의적일 때가 많다고 느낀다. 특히 부산 엑스포 유치, 잼버리 사태 등 케이팝이 정치권과 엮인 사건들을 지켜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미: 안 그래도 정치인, 공무원들이 대중문화계를 제대로 존중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게 많이 알려져 있는데, 케이팝이 해외에서 인기를 얻으며 기존 동원의 맥락에 국수주의적 시각이 덧붙여진 모양새다. 2023년에도 대중문화 종사자를 동원의 대상으로 보는 현실을 규탄해야 한다는 것이 매우 유감이다. 동원 대상이 달라졌지, 동원의 역사는 유구한데 그걸 이 시대에도 또 떠올려야 한다니…
마노: 정말이다. 2023년인데. 정치인들이 보이그룹의 병역 의무에 대해 왈가왈부할 권리가 대체 어디 있는지 모르겠고…
조은재: 정치가 전체주의로 흘러가다보면 모든 분야를 막론하고 ‘총동원령’ 같은 게 나오게 되고, 그 과정에서 문화예술이 다뤄지는 방식도 어느 정도 일정한 형태가 보이게 된다. 대중선전용 아니면 이슈를 가리기 위한 홍보 수단 정도가 되는데, 현 정권으로 제한해서 보자면 전자는 부산 엑스포가 사례였던 것 같고, 후자가 잼버리 케이팝 콘서트였던 것 같다. 실제로 잼버리 케이팝 콘서트는 대기업들까지 급하게 동원된 ‘총동원령’에 가까운 형태로 진행됐다.
비눈물: 따로 활동하던 마마무 멤버들이 갑자기 한 무대로 끌려오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생겼고, 공연장으로 쓰이면서 잔디가 훼손되는 등 경기장 여건에 대한 고려도 없었다.
조은재: 스케줄 조정이 불가피했던 아티스트도 결국 압박에 의해 스케줄을 재조정해서 출연하기까지 했던 거 보면 아직도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정부의 인식이 전근대에 멈춰있다고 봐야한다.
마노: 그런 일이 있으면 절대 안 되지만, 이러다 정말 전쟁이라도 나면 현실판 마크로스 되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놓고 잼버리 개영식에서 온열 환자가 속출하니까 운영위원회 측에서 핑계를 케이팝으로 돌려서 빈축을 사기도 했다.
조은재: 사실 케이팝이야말로 미비한 국가 지원 하에 자생적으로 성장한 분야다. 국민의정부에서 문화산업 정책의 기조를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로 방향성을 잡은 이후로 정권이 바뀌는 것과 상관 없이 이 방향성은 바뀐 적이 없었다. 문화산업에 한해서는 꾸준히 작은정부적인 스탠스가 유지돼온 셈이다. 덕분에 코로나 국면에서는 최소한의 대응 방안도 없어 전부 고사될 뻔하기도 했다. 그런데 큰 지원이나 주도 없이 자생한 분야를, 정작 국가 차원의 홍보 수단이 필요할 때만 급하게 공치사 해가며 동원한다는 게, 국가가 이걸 ‘산업’의 차원으로 인식하고 있는 게 맞는지부터가 의문이다.
비눈물: K 얘기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게 BTS를 비롯한 케이팝인 것을 보면, “K-“를 강조하기 좋은 홍보 수단 정도로만 보는 것 같다.
마노: 그래서 BTS가 슬슬 군대에 갈 시기가 되자 정치인들이 병역 특혜를 주네 마네로 열띤 토론을 벌이는 촌극을 빚기도 했는데, 정말 넌센스라고 생각한다. BTS가 뭔가 국익을 가져오고 국격을 높여준다는 생각이 드니까 관심도 없던 분들이 갑자기 거기에 열심히 매달리시는 게 우습다는 생각만 들고.
스큅: K- 라는 접두사가 한국에서는 다소 국수주의적으로 동원된다는 점이 ‘케이팝’이라는 용어에 혼란을 주는 또다른 교란 요소가 되는 것 같다.
2023년의 신예: 아이돌 “5세대”?
마노: ‘케이팝’ 용어의 재정립도 필요하고, 떠오르는 그룹들 이야기로 돌아와 소위 ‘세대론’도 재점검이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싶다.
스큅: 동의한다. 올해 다양한 신흥 그룹들이 있었고, 일각에서는 ‘5세대’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이 말이 거의 보이그룹 중심으로 나온다고 느껴서 솔직히 조금 치사하다고 느낀다. 따지고 보면 사실 보이그룹이 소위 ‘4세대’ 흐름에 뒤쳐져 뒤늦게 부상하고 있는 것 아닌가. 왜 자신들을 새로운 세대의 개척자인 것처럼 포장하려 드는지 의구심을 거둘 수 없다.
예미: ‘4세대 걸그룹’ 보다 더 앞서나가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몇몇 보이그룹이 ‘5세대’를 붙이는 것 같았다.
비눈물: 앞과의 고리를 끊는 ‘새로운’ 분류를 원해서 쓰는 수식어인 것 같다.
마노: ‘5세대’에 대한 논의 자체가 아직 매우 이르다고도 생각하고, 오지도 않았을 뿐더러, 심지어 애초에 시작이 어그로성 마케팅 용어라는 점에서 정말 괘씸하게 생각한다. 일단 세대의 변화를 논하려면 어떤 산업의 지형도에 지각 변동 급의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4세대와 5세대를 가르는 데에 있어 그러한 변화가 있었는가, 라는 것이 가장 큰 의문이다. 4세대에 대한 논의도 이제 막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갑자기 5세대를 논하자고 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는 거지.
스큅: 세대론을 정리하는 아티클을 한 차례 냈던 입장에서, 지각 변동 급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기보다는 그러한 지각 변동 이후 안정기가 찾아와야 비로소 다음 세대가 안착하는 것이라 보기는 한다. 지각 변동기는 오히려 쩜오(.5) 세대일 것이다. 방탄소년단, 블랙핑크도 따지자면 3.5세대에 성장한 그룹들이었고. 지금까지의 세대 주기를 돌아보았을 때, (개인적으로 4세대의 시작을 2018년으로 잡았던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슬슬 쩜오 세대가 올 즈음이 되기는 했다.
에린: 애초에 ‘세대론’은 사후평가가 이루어진 뒤에 불려지는 것인데, 현시점에서 5세대 그룹이다라고 선언하게 되는 점에서부터 5세대가 오지 않았다는 걸 반증한다.
비눈물: 세종대왕의 이름이 세종이 아닌 것처럼…
스큅: 4세대 논의를 본격적으로 촉발시킨 있지와 투모로우바이투게더는 데뷔 당시 본인들을 4세대로 전면 포장하지는 않았었다. 이들의 데뷔 이후 ‘4세대’라는 말이 스멀스멀 쓰이기 시작했고, 차후 이들도 이를 받아 쓰게 된 것에 가깝다. 그러나 지금은 데뷔 전부터 자신들을 5세대라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으니 사정이 다르다.
마노: 애초에 시작이 〈보이즈 플래닛〉에서 ‘우린 좀 다르다!’ 를 표방하겠답시고 5세대를 운운했던 건데…
비눈물: 사실 있지의 경우 데뷔 앨범 설명 끄트머리에 4세대를 언급하긴 했다. 메인으로 쓴 건 그 이후지만.
에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야 5세대로 나눌 수 있을 정도인지 평가될 수 있을 것이라, 지금 ‘5세대’라고 명명하는 건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섣부른 마케팅용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비눈물: 분명한 흐름을 보이던 4세대 걸그룹과 비교했을 때 당시 보이그룹에 마땅한 ‘세대’가 제대로 구축되었는지 짚어볼 필요도 있다.
예미: 그렇다면 에이티즈, 스트레이키즈와 라이즈가 같은 세대라고 보는 게 아직까지는 맞나?
마노: 에이티즈, 스트레이키즈와 라이즈가 같은 세대가 아닐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예미: 산업 지형도로 따지면 기존 4세대 남자 아이돌 대표 주자였던 ‘즈즈즈’ (에이티즈, 스트레이키즈, 더보이즈)와 보이넥스트도어-라이즈를 같은 세대로 보는 게 맞는데, 둘 간의 경향성 차이가 보인다.
에린: 라이즈나 현재 신인 보이그룹의 흐름은 작년에서부터 이어오던 걸그룹의 영향을 받은 걸로 보여져서, 조금 시간이 지나서 세대가 구분될 수 있을 것 같다.
스큅: 세대 구분 자체가 거칠게 나누어보는 것이고, 칼로 자르듯이 세대를 나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즈즈즈’와 2023년 데뷔 보이그룹들은 따지자면 쩜오 세대의 구분 정도만으로 쉽게 이해되는 정도 아닌가 생각한다.
비눈물: 나도 쩜오 정도로는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지금의 세대론을 정리하면 ‘아직 5세대를 논하기엔 이른 시기이며, 본래 의미에서 변질된 오남용을 경계해야한다’로 볼 수 있겠다.
마노: 사실 현재 정의 내려진 세대론도 굉장히 두루뭉술하게 데뷔 시기를 기준으로 잡고 있는 거라 재점검이 필요하긴 하다. 예를 들자면 데뷔 시기로는 3.5세대에 해당하는 에이티즈나 온앤오프를 작금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4세대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있겠다.
스큅: 팬데믹 시국을 끼고 성장한 아이돌들을 함께 묶어보게 되는 부분도 있긴 하다. 결국 앞서 얘기가 나왔듯 사실 애초에 세대론 자체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틀로서 의미가 있는 것인데, 그 이상의 상징성을 자꾸 부여하려 하는 게 문제다.
조은재: 세대론은 마케팅 용어가 될 수 없고, 사후적인 평가가 수반되어야 한다.
마노: 그저 한국 역사 공부할 때 역대 왕 이름 외우는 거랑 비슷한 건데 마케팅 용어로 오용되고 있으니 참 답답할 노릇이다. 게다가 사실 ‘5세대론’은 ‘우리가 이 세대의 게임체인저가 되겠다’는 선언과도 맞물리는데, 결과물이 게임 체인저 급의 그것이었나?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고.
스큅: 결과적으로 이전과 다른 흐름이 감지되는 것은 맞지만, 이는 그들의 선언과 관계 없이 그저 시대의 흐름이 그렇게 되어서에 가깝지 않나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것이 정말로 세대가 전환된 것일지, 혹은 그저 전이 과정 중에 있는 것일지는 향후에 더욱 분명해지겠다.
2023년의 신예(?): 선배 가수들의 새로운 활동기
스큅: 새롭게 떠오르는 그룹들이 있는가 하면, 연차가 오래된 가수들이 동시대적인 활동을 지속해나가는 것도 눈에 띄었다. 연차가 오래된 여가수들을 한데 모은 tvN의 〈댄스가수 유랑단〉, KBS의 〈골든걸스〉와 같은 프로그램들이 있었다.
에린: 특히 댄스가수 유랑단은 방송 이후에 출연진의 콘서트로 그 열기가 이어졌다는 점에서 고무적이었다.
마노: 맞다. 서로의 노래를 바꿔서 불러보기도 하고, 서로의 공연에 게스트로도 출연하고.
스큅: 12월에 있었던 엄정화의 콘서트 “초대”는 지금까지 가본 콘서트 중 최고로 손꼽는다.
마노: 댄스가수 유랑단도 그렇고 골든걸스도 그렇고, 소위 말하는 ‘중견급 여가수’를 재조명할 기회가 되었다는 점에서 소중한 기획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 케이팝과 다소 거리가 있는 중장년층 솔로 가수들에게는 케이팝을 시켜보는 귀중한 장면도 볼 수 있었고. 아이브의 ‘I AM’을 부르는 박미경씨 정말 말이 안 나올 정도로 멋있었다.
조은재: 〈댄스가수 유랑단〉과 〈골든걸스〉를 묶어서, 전성기 이후의 아이돌에게 롤모델을 제시한다는 측면에서 좋은 예능으로 평가받을만 하다.
마노: 선배들에게 있어서도 좋은 자극이며 기폭제가 되지 않았나 싶다. 특히 〈골든걸스〉 같은 경우 멤버들 모두 정말 새로운 도전이었던 것이지 않나. 원래 추구하던 장르와도 판이하게 달랐으니까. 후배들에게는 ‘나도 장래에 저렇게 될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주었을 것 같고, 동년배 아티스트에게는 ‘나도 저렇게 도전하고 성장할 수 있겠구나’ 하는 자극이 되었을 것 같다.
스큅: 엄정화가 콘서트에서 “나는 선배가 없어서 힘들었는데, 후배가 오히려 나를 끌어줄 수도 있다는 걸 이효리를 통해 처음 깨달았다”고 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선후배가 서로를 이끌어주며 성장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긍정하고 싶은 기획들이다.
조은재: 조용필도 올해 신보를 발표했는데 여전히 트렌드를 날카롭게 파악하고 있어서 놀랐다. 어떻게 사람이 음악 그 자체일 수 있나 신기했고.
스큅: 엄정화가 수민 앨범에 피쳐링한 것도 참 좋았다. 나이와 상관없이 동시대성을 계속해서 갖춘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노: 아티스트 뿐만 아니라 나 같은 시청자에게도 의미 깊은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다. 나도 저렇게 고여있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사람이 되어야지, 라는 생각을 해봄과 동시에 멋있게 늙어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상상해보게 됐거든.
조은재: 시니어들이 공연 뿐만 아니라 앨범 활동도 꾸준히 하고 있고, 그게 또 좋은 반응으로 주목 받고 있는 건 확실히 시장에도 꼭 필요한 흐름인 것 같다.
예미: 이 시니어들의 활발한 활동이 댄스가수라는 직업의 연한을 늘리게 된다는 점에서 은재 님 말씀에 매우 동의한다.
마노: 아무래도 앞으로의 인구 편성 측면에서도… (쓴웃음)
스큅: 떠오르는 신인들은 물론, 새로운 활동 양식을 보여주는 선배 가수들까지. 다사다난한 가운데서도 2023년의 케이팝은 이들 덕에 한층 더 다채롭고 빛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2024년에도 이들의 활동이 지속되길, 그리고 또 다른 가수들의 새로운 활약상들이 계속되길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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