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KMTV 1기 VJ를 거쳐 ‘한류 1세대’ 아이돌 티티마(T.T.MA)의 리더로 활동했던 소이. 영화인이자 밴드 라즈베리필드(Raspberry Field)를 이끄는 싱어송라이터로 새로운 삶을 모색하고 있는 그녀는, 1세대 아이돌 출신으로서 전혀 다른 지평에서 연기와 음악을 계속해 나가고 있는 드문 사례이기도 하다. 그런 소이를 파리에서 만나, 아이돌 시절과 방황, 그리고 지금의 삶을 물었다.
아이돌 매체와 인터뷰하는 것은 오랜만인가? (웃음)
그렇다. (웃음) 예전에 〈파스텔〉… 그런 아이돌 잡지들 이후로는 처음이다.
근황이 궁금하다.
백수다. (웃음) <조류인간>이란 장편 영화를 찍은 것이 내년(2015년) 초에 개봉을 기다리고 있고, 그 후에 찍은 옴니버스 영화 〈프랑스 영화처럼〉도 내년 개봉 계획이다. 방송 일도 하고 있고, 중국 프로그램 MC도 맡고 있다. 이번에도 촬영 때문에 영국에서 머무르다가 잠시 기분전환 하러 파리에 들렀다. 그 외에는 ‘주업 : SNS’다. (웃음)
라즈베리필드는 작년 여름에 음반이 나온 후로 어떻게 돼가나?
사실 준비돼 있는 곡들이 많다. 작업은 계속 하고 있다. 가사 써서 보컬만 녹음하면 완성되는 곡도 있는데, 올해(2014년)는 연기에 집중하느라고 음악에 신경을 많이 못 썼다. 음악은 다 나왔는데 가사가 정리가 안 되는 곡이 많다. 억지로 하기보다 마음 가는 대로 하려 한다. 밝은 곡이다 보니 날씨 따뜻해지면 낼 생각도 한다. 책도 탈고했기 때문에 같이 맞춰서 내년(2015년) 봄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처음 데뷔한 건 1994년이니까, 지금 데뷔 20주년이다.
오 마이 갓! 그런데 내가 VJ했던 건 정식 연예계 데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음악이 너무 좋아서 했던 거니까.
그럼 (1999년부터) 15주년인가? 축하 드린다.
15주년인 걸로 하자. 감사하다.
1994년에 KMTV에서 VJ를 할 때는 어떤 계기가 따로 있었나?
초등학교 4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 대만에서 학교를 다녔다. 당시 집 근처의 백화점 멀티비전에 를 매일 틀어놓은 걸 보면서 “와, 이런 게 다 있나?”했다. 앞에 서서 책가방 메고 보고 있는 게 너무 좋아서, MTV에 대한 환상을 가졌다. 데이비드 우(David Wu)라는 VJ가 있었는데, 그가 너무 좋고 나도 해보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소개하는 게 멋있었다. 그런데 한국에 귀국하니 MTV가 한국에도 생긴다는 것이었다. 내가 항상 음악을 끼고 사니까 엄마가 먼저 “이런 게 있는데 너 해볼래?”하셔서 VJ에 지원해봤더니 붙었다. 15살부터 된다는데 내가 (14살이었지만) 학교를 일찍 들어가서 중3 졸업할 때쯤이었다. 간당간당했다. 그렇게 KMTV 1기 VJ가 됐다.
그 뒤에 티티마로 데뷔하게 됐다.
고3 때 미국에 있었는데, 한창 모 기획사에서 여자 그룹을 만들려고 캐스팅 중이라 대표님과 프로듀서님이 LA까지 왔다. 언니(헤이)가 노래를 잘 하는 것으로 유명해서 언니를 보려고 두 분이 집에 오셨는데, 언니는 너무 숫기도 없어 무서워하다가 뒷문으로 도망갔다. 대신 내가 있으니까 보시더니 노래 하냐고 물으셨는데, 나는 그냥 음악 좋아하는 학생이니까 그냥 음악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곤 두 번째 만났을 때 패스트푸드 레스토랑 주차장에서 차로 음악을 크게 틀어놓더니 춤 춰보라고 했다. 그래서, 춤 좋아하니까 췄다.
어떤 춤을 췄나?
블랙스트리트(Blackstreet)의 ‘No Diggity (feat. Dr.Dre, Queen Pen)’에 맞춰서 췄다. 힙합 춤을 너무 좋아해서, 흑인 음악으로 춤 추는 동아리도 들었었다.
여름에 (한국에) 나오면 기획사에서 연습하라고 하셨다. 한국으로 대학을 갈 생각이어서 여름에 어차피 공부를 하러 나와야 했었다. 그래서 나왔는데, 병행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아침 일찍 학원에 가 1시까지 공부하고, 바로 연습 시작해서 새벽에 끝났다. 이러다 대학도 못 갈 것 같았다. 내게 있어 대학이란 건 어렸을 때부터 안 가면 안 되는 곳이었다. 그래서 한 달 정도 하다가 그만뒀다.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다시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 “이제는 대학이 중요하지 않은 때가 왔다”고 하시는데, 나의 좁은 시야에서는 그게 말이 안 됐다. “대학이 중요하지 않은 때가 왔다고요?” (웃음) 그래서 대학을 선택했다.
그랬는데 대입 후에도 워낙 춤 추는 걸 좋아해서 거의 매일 학교 끝나고 강남역을 출근하다시피 했다. 강남역에서 캐스팅 제의를 하러 많이 다니던 때였다. 그때 친구가 오디션을 보러 간다는데 같이 갔다가, 친구는 떨어지고 나는 티티마가 되었다.
오디션 뒤에 연습기간이 있었나?
1년 했다. 그런데 지금 아이돌을 생각하면 연습시간이 새 발의 피도 아니고, 그 당시 아이돌 연습생들 사이에서도 우리처럼 널널하게 한 경우는 없었다. 1집 멤버들 중에 외국인 학교 다니는 자매가 있었다. 이주혜와 퀴나였는데 그때 그녀들의 계약조건이 “학업이 먼저”였다. 내가 따로 얘기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돼 다행이었다. 학교 다 끝나고서 5시간 정도 연습하고 밤에 들어왔다. 그래도 1년 정도 했다. 그러다 마지막에 보컬(최유진)이 들어왔는데, 그 뒤 몇 달 있다가 바로 데뷔했다.
데뷔했을 때 기분은 어땠나?
나는 그때 음악을 좋아하긴 하는데 취향이랄 게 없었다. 누가 좋다고 하면 다 좋았다. 이문세부터 흑인 음악까지 다 좋아했다. 연예인도 사실 가수를 하려고 한 게 아니라 재미있을 것 같아서 한 거고, 그냥 아르바이트처럼 생각했다. 몇 년 하다가 졸업하면 부모님이 원하시는 안정적인 직업을 택하려 했다. PD를 생각했었다. “음악을 좋아하니까 너는 음악을 해라”는 아니고, “음악을 좋아하니까 라디오 PD를 해라”. 그렇게 정말 가볍게 생각했다. 그래서 첫 데뷔도 그냥 재미있었다. 카메라 앞에 서는 건 떨렸지만, 모든 게 신기하고 부담 없고.
‘한류 1세대’라고들 하지 않나.
우리는 정말 한류 1세대였다. 중국에서 NRG가 거의 마이클 잭슨이었다. 우리가 NRG 동생 그룹이지 않나. 그래서 중국에서 재닛 잭슨이었다. 공항에… 와… 그런 건 처음 봤다. 정말 컸다.
당시엔 인터넷으로 접하는 게 아니니까, 외국에서 잘 되고 있다고 해도 반신반의하기도 했는데.
한류가 한창 커졌을 때, 내가 다닌 학교 중문과에서 한류에 관한 발표 같은 게 가끔 있었다. 다들 찻잔 속의 태풍이라고들 하는데, 나는 거기 직접 간 사람으로서 아니라고 하고 싶었다. “교수님 아니에요, 얘들아 아니야.” 아니나 다를까 지금은 더 커지지 않았나. 정말 대단해졌다. 우리 때와는 이제 완전히 다르다. 그때도 “와…”했지만 지금은 ‘중화권’을 넘어서 동남아까지 가니까.
티티마도 유럽으로도 갔었다고 들었다.
독일에 갔었다. 그런데 그건 문화교류 형식으로 간 거다. 동유럽은 진짜로 간 거고.
소이 씨를 비롯해 외국에서 살다 온 멤버들이 특히 많았다. 해외 활동을 본격적으로 작정하고 결성한 그룹이라고들 이야기하는데.
우리뿐만 아니라 S.E.S.(1997~2002)도, 그 후의 서클(1998~2000)도 그랬지만, 티티마 세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해외 시장을 노렸던 것 같다. 베이비복스는 우리보다 더 유명했고.
당시 소속사 뮤직팩토리의 사장 김태형 씨는 소방차 출신이다. 만날 일이 많이 있었나?
그렇다. 거의 매일 연습 때마다 오셨다. 그렇게 큰 회사가 아니었다. 자주 뵀다. 얼마 전에도 어느 시사회에 갔다가 너무 우연히 뵈었다. 여전하시더라. 친절하시고 자상하시고. 우리한테 다 맞춰주셨다. 번 돈은 별로 없었지만. (웃음) 심지어는 스케줄도 힘들다고 하면 하지 말라고 하셨다.
활동 종료할 때 갈등은 없었나?
사실 사장님은 3집을 제작할 생각이 없으셨던 것 같다. 2집이 그렇게 잘 되지 않았으니까 돈도 없었던 것 같다. (웃음) 그때는 한류가 크지 않아서 다른 곳에서 돈이 들어오는 시스템도 아니었고, 한국에서 안 되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런데 그룹 외 활동은 거의 나 혼자 했다. 요즘은 멤버들이 나눠서 하지만 당시는 거의 한 사람씩만 할 때인데 그게 나였다. 2집 말부터는 그게 너무 힘들어지기 시작했는데, 그러다 내가 활동 중에 교통사고가 크게 났다. 허리에 금이 가서 한 달을 병원에 누워 있었다. 어린 마음에 속상하기도 하고, 그때가 “나는 누구인가?”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사장님께 말씀 드렸더니, 두 말 없이 깨끗하게 보내주셨다. 계약도 안 끝났는데.
얼마나 남아 있었나?
1년 정도. 앨범을 하나 더 할 수 있는 기간이었다. 그런데 “저 못할 것 같아요” 했더니 “알았어”라고 아주 깔끔하게.
요즘 분위기와도 차이가 있지만, 사장님도 대단한 분이신 듯하다. NRG를 봐도 풀어놓은 것 같은 이미지가 있다.
그렇다. 그 당시 유명했던 다른 기획사들보다 훨씬 자유로웠다. 그래도 열심히 했다. 열심히 했는데… 잘 안 됐다. (웃음) “1위 좀 해보자!” (웃음)
티티마 활동 내내 갈팔질팡한 듯한 인상이 있는데?
나를 못 찾고 있다는 게 지쳤다. 사람들은 나를 똑똑하고 밝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순간 TV를 보면서 ‘저 모습은 내가 아니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티티마에서 나와 회사를 옮겼는데, 여전히 대중이 원하는 이미지는 그런 거였다. ‘티티마의 소이’니까. 그러다가 벽에 부딪히는 때가 왔고, 모든 예능 프로그램을 한번에 다 그만뒀다. 예능 프로그램을 거의 다 했으니까 거의 일주일에 5번 촬영을 하던 때였다.
그게 2003년경인가?
그렇다. 2003년에서 2005년까지 시기다. 예능을 그만둔 건 2004년일 것이다. 그리고 〈가발〉이라는 영화를 찍었다. 그러면서 나의 어두운 면을 나도 좀 알아가기 시작했다. 반항심리로 “나는 이렇게 어두워!”라는 걸 너무 보여주고 싶으니까 일부러 화장도 고스(goth)처럼 하고 다니고 어두운 음악 더 듣고 일부러 공포영화 출연하고 그랬다.
까딱 옆으로 나갔으면 마일리 싸이러스처럼 될 뻔했겠다.
그러니까! 조금만 우리나라가 개방적이었으면… (웃음)
작은 역이지만 연기를 하고, 독립영화를 하게 되면서, ‘나는 표현하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구나’하고 생각했다. 자아의 기반이 어느 정도 성립되는 시기였고, 그맘때인 2005년에 기타를 들기 시작했다. 원래는 다시는 음악 안 하려고 했는데.
가수로서 사람들 앞에 노출되는 것에 피로를 느꼈으니 말이다.
그냥 밝고 발랄한 모습이 너무 싫었던 것 같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워낙 좋아하는 게 음악이었고, 기타를 들면서 나도 모르게 내 이야기들이 멜로디에 묻혀지고 그러니까. 그냥 물 흐르듯이 다시 그렇게 된 것 같다.
요즘 아이돌들도 좀 지켜보나?
아이돌 좋아한다. 보고 있으면 자기 세계가 그룹이나 회사보다 더 클 것 같은 멤버가 보인다. 힘들겠구나 생각이 들어 괜히 마음이 가고, 잘 ‘진화’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진화’라고 하는 이유가, 우리 ‘야채파’만 해도 스타트라인은 다 똑 같은 여자 아이돌이었지만 각자의 길로 진화를 했다. 자기 이야기를 잔뜩 담은 세계를 가졌을 듯한 아이들이 보이면, 뮤지션으로든 아티스트로든 잘 진화해줬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응원해주고 싶어진다. 그리고 남자 아이돌은… 보기에 좋더라. (웃음)
주로 마음이 가는 건 여자 아이돌이고… (웃음)
그렇다. 좋아하는 건 여자 아이돌이다. 남자 아이돌은 보면 흐뭇해지면서 “으음~” (웃음)
아이돌의 환경도 티티마 때와는 많이 다르지 않나. 당시는 시스템화된 부분도 적었고.
우리 때는 어떻게 보면, 말이 계약이긴 하지만… 요즘에 비교하면 말도 안 될 정도로 느슨했다.
곡을 정하고 녹음하는 과정은…
우리는 전혀 관여가 없었다. 나는 얘기하긴 했다. “사장님, 전 이 곡이 좋은 것 같아요.” 하지만 반영이 되는 건 아니었다. 머리나 스타일 같은 경우는 상의를 해서 할 때도 있었는데, 음악이나 안무에 있어서는…
당시엔 발언권 때문에 답답함을 느꼈나?
아니다. 그때는 내 음악을 하기 전이었고, 음악에 관해서는 크게 열정이 없었다. 글을 쓰는 게 좋아서 가사 쓰는 건 좋았지만, 음악적으로는 엄두를 못 냈던 것 같다. “내가 음악을? 난 래퍼니까!” (웃음)
인트로 담당… (웃음)
“니하오마!” 같은 거. (웃음)
‘Wanna Be Loved’의 작사는 “네가 해봐” 같은 식으로 된 건가?
내가 하겠다고 했다. 스웨덴 작곡가 곡이라서 원래 영어 가사가 있었고, 다른 분이 쓰신 한국어 가사가 왔는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이미 2집 ‘His Smile’이란 곡의 작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사장님 제가 해볼게요” 했고, 내 가사가 OK가 된 거다. 쏠쏠하다. 요즘도 가끔 노래방에서 몇 만원 들어온다. (웃음) 정말 무슨 생각으로 썼는지 모르겠다. 스무 살 때 쓴 가사니까. 그런데 아직도 그 모드다. “사랑 받고 싶어요!” 예언이다.
지금은 분야별로 전문적인 분업화가 돼있는데, 〈핫젝갓알지〉 같은 방송을 보면 1세대 당시에는 안무도 멤버가 짠다든지 하는 경우도 있었던 듯하다.
맞다. H.O.T.나 신화가 그런 케이스였다. NRG는 백댄서 출신들이긴 했는데, (천)명훈 오빠가 한 적은 있을 거다. 하지만 우리 회사는 안무 담당하시는 분이 따로 있었다.
김태형 씨 본인도 댄서 출신이시고.
김태형 사장님 부인도 방송국 안무단 출신이다. 사모님이 일본 문화를 정말 좋아하셔서 우리에게 아무로 나미에 등 일본 쪽 춤을 가르쳐주셨고, 그게 1집 ‘My Baby’의 베이스가 되었다. 그때 티티마는 지금 생각해 보면 약간 매니악한 게 있었다. 그 당시 같이 활동했던 걸그룹 멤버들이 특히 ‘Wanna Be Loved’ 안무 보고 “우리도 저런 춤 추게 해달라”고 얘기를 했었다고 한다. 김태형 사장님도 일본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으셔서, NRG도 일본 보이그룹을 많이 벤치마킹했고, 우리도 스피드(SPEED)를 벤치마킹한 케이스다. 이래저래 달랐던 것 같다.
당시 한국 걸그룹들은 스피드 영향이 많지 않았나?
그런데 우리가 나왔을 당시에는 다들 “귀염귀염”, 핑클의 ‘내 남자친구에게’ 같은 거였다. 그렇게 강한 음악에 강한 안무, 웨이브가 많은 안무, 핫팬츠 쫙 입고 나오고, 그런 건 우리가 처음이었다.
진행/정리 : 미묘 | 취재사진 : 김꽃비/미묘 | 사진 편집 : 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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