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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남자 아이돌을 좋아해야 할 이유

남자 아이돌은 여성 팬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남자들이야말로 남자 아이돌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다. 쉽지는… 않을 수도 있다.

남자 아이돌은 여자들만의 것인가. 그렇지만은 않다. 그러나 아이돌을 들을 만큼 들었다 싶은 내 경우에도, 달콤한 목소리로 사랑을 고백하는 남자 아이돌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분명 다른 남자 가수의 러브송이 모두 이렇지는 않은데 왠지 모르게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은 내가 모 만화의 주인공도 아니고 무서운 사람이 무서운 물건을 던진 것도 아닌데 아무튼 이 음악은 나 같은 더러운 이성애자 남성이 들으라고 만든 게 아닌가 보다 싶어 서운하기도 하고 리뷰 쓸 생각에 걱정이 되기도 하는데 내 인생은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 왔나 회의하다 보니 남성성을 부정당하는 것이 가장 큰 공포인 수컷의 비루한 운명인가 싶어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이제 우리는 아이돌이 반드시 이성애적인 가상연애만을 제공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에 어느 정도 합의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이성애자 여성보다 이성애자 남성이 남자 아이돌에게서 즐길 거리가 적다는 것만은 사실이라 해도 안전할 듯하다. 심지어 게이들도 여자 아이돌을 더 좋아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사랑받는 이유

그렇게 남자 아이돌이 기본적으로 이성애자 여성에게 어필한다고 해보자. 많은 여자들이 한국 남자의 문제점으로, 사랑받으려는 노력이 없음을 지적한다. 좋은 말로 하자면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여자’지만, 이것이 얼마나 손쉽게 ‘엄마’로 치환되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노력하지 않는 것만은 아니다. 다만 남자는 오로지 경제력과 체력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그 외의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문제는 전통적인 가치에서 비롯된 그런 것들이 오늘날 절대다수의 여성에게 어필하는 최대의 요소가 아니란 점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할 때 남자들은 흔히 ‘돈만 있으면 여자는 붙는다 = 내게 여자가 없는 건 돈이 없어서다 = 여자는 속물’ 같은 제멋대로의 논리에 빠지곤 한다. 반면 여자들은 패션과 화장, (때론 억압적인) 고운 언동, 로맨스 콘텐츠 등을 어릴 때부터 수용하는 경우가 흔하고, 마침 이는 본의든 아니든 상당수의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사랑받는 길’과 멀리 동떨어지지 않는다. 연애에 있어 남녀의 차이가 압도적인 관심도의 차이로 종종 드러나는 것은 어쩌면 그래서일 것이다.

반면 남자 아이돌은 여성에게 ‘사랑받는 길’이 곧 직업이다.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가꾸고 정성을 들이는 사람들이다. 요리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에 ‘연애 좀 하려고 거기까지 해야 하느냐’고 묻는 남자들이 허다한 세상에서 말이다. 만일 우리 아이돌의 내면이 한국 평균 남자일 뿐이라면 그가 들이고 있는 노력은 가공할 만한 것일 터이다. 기본적으로 남자 아이돌이란 (여성) 팬들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꾸준히 고민하고 때론 배우며 늘 실천하는 노력가들이다. 얼굴 기억하기도 힘들 만큼 많은 팬들의 사소한 이야기를 기억해 줬다는 에피소드도 넘치도록 많다.

여성 혐오의 시대

그러나 여성 팬에게 ‘밥줄’이 걸린 남자 아이돌은 여성 비하 발언을 공공연하게 하는 행동은 치명적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좀 더 젠더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도 남자 아이돌들이다. 박준우는 신화가 상품화한 남성성이 어떤 면에서 진보적인지 살펴본 바 있다. 연령대별로 여성에게 사랑받기 좋은 포인트를 고민한다고 공공연히 말한 바 있는 전 엠블랙 멤버 이준은 자신도 ‘뜨려고 벗었다’고 발언하면서, 같은 연예인 노출이라도 여성에게 더 부정적인 시선이 모이는 현상을 지적하기도 했다. 신화의 김동완, 2AM의 조권, 샤이니의 종현, f(x)의 엠버 등은 LGBT 친화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남자 아이돌’이 아닌 사람이 껴 있다고 느낀다면 아마도 기분 탓이다.) 이는 물론 이들이 사회인, 문명인으로서 훌륭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영화인을 제외하면) 다른 분야의 연예인들에게서 이러한 공적 발화가 매우 드물다는 점을 생각하면, 여성 팬과 아이돌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지금 방송가 언저리에서 젠더적으로 가장 진보한 이들 중 하나는 바로 남자 아이돌이다. (여자 아이돌들도 그러하지만 입장상 발언을 삼가고 있을 뿐이라 믿어본다.) 국내 최고로 꼽히는 코미디 방송은 여성 외모 비하가 없으면 최소 반수의 코너가 막을 내려야 하고, 아나운서는 자녀를 볼모로 부인을 협박해 ‘길들이는’ 것을 결혼생활의 지혜라고 소개한다. 인기 개그맨은 여성 혐오 발언을 한 뒤 방송에서 자신에 대한 비판을 공공연하게 조롱한다. 국영방송은 인터넷 커뮤니티에 여성 혐오 발언을 하고도 채용된 것을 자랑스레 떠벌린 기자를 자르지 않기로 한다. 방송에서 ‘뇌섹남’으로 소개되는 칼럼니스트는 잡지 지면을 통해 한국의 페미니즘이 왜곡됐으며 그것이 IS보다 위험하다고 발언한다. 국내 정상급 MC들이 진행하는 토크쇼는 방금 팀 동료가 눈물을 보인 뒤 자신에게 애교 요구가 들어오자 이를 거부한 걸그룹 멤버에게 끝까지 애교를 요구하고 이 과정을 전부 방송에 내보내 그녀를 비난의 화살 앞에 노출시킨다.

아이돌이라고 완벽한 사람이겠는가. 정상급 남성 아이돌 중에도 여성 비하 발언을 한 경우가 있었지만 팬들의 항의에 급격하고 정성 어린 사과를 했다. 진심 어린 반성이었을까,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공개된 장소에서 그런 발언을 해선 안 된다는 메시지만으로도, 사람은 문명인이 된다. 가식조차 여성 혐오 발언보다 낫다. 진심으로 반성한다면 그는 더 나은 사람이 된다. 그렇게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면, 이를 만든 것은 ‘빠순이’들의 지갑이다. 여성 혐오 발언 개그맨에 대한 비판 여론이 광고 불매로 번지자 가장 먼저 광고를 철회한 것도 화장품 브랜드인 시드물이었다.

시드물
여성친화기업 인증을 받기도 한 자연주의 화장품 브랜드 시드물. 본 기사는 시드물로부터 어떤 협찬이나 제의와도 관련 없음을 밝혀둔다.
배워야 산다

남자들은 잘 모르기 쉽다. 나는 여학우 비율이 압도적인 과를 다니면서 수많은 진상남의 사례를 수집해 나의 반면교사의 제물로 바쳤다. 나는 “그런 남자는 당장 따끔하게 거절해야지!”를 입에 달고 다님으로써 여학우들의 환심을 사려 했지만, ‘모진 사람으로 보이면 안 된다는 교육을 평생 받아왔기에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지금의 여자친구에게서야 처음으로 배울 수 있었다. 인간은 눈을 감고 태어나, 배워야만 생존할 수 있는 동물이다.

갤럽 조사에 의하면 13세 이상 10대 남성의 10%는 가수 중 엑소를 가장 좋아한다고 응답했다. 아이돌보다 ‘남자인 내가 인정’하기 쉬운 탤런트를 살펴보면 이런 경향은 더 강하다. 10대와 20대 남성 모두 1위의 김태희(8%)와 근소한 차이로 김수현(10대 8%, 20대 6%)을 좋아한다고 답한 것이다. 이들 중 엑소의 음악이나 김수현의 연기를 좋아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남자 아이돌의 남성 팬이 은근히 적게나마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10대 여성의 30%가 좋아하는 엑소, 10대 여성 17%, 20대 여성 13%가 좋아하는 김수현이 남성에게도 영향력을 갖는다는 것은 의미 깊다. 결국 남자들이란 서열을 나누는 동물, ‘여자들이 좋아한다’는 ‘강점’을 가진 동료 남성에게 호감을 갖기 좋은 법이다. 강동원이 군대에 가서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모심’을 받았다는 일화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렇게 호감을 갖고 지켜보다 보면 배우거나 본받을 거리도 있게 마련이다. 다이어트를 좀처럼 하지 않는, 키의 억울한 듯한 말투와 지코의 볼살을 본받으려는 나지만, 내가 할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90년대 중반까지 우리 사회에는 ‘꽃미남’이란 말이 없었다. 남자들은 여전히 저항을 보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꾸미는 남자들도 무척이나 많아졌다. 메이크업을 하기도 하고, 가장 잘 나간다는 남자 아이돌의 옷을 (때론 무리하게) 따라 입기도 하는 식이다. 지금도 ‘기생 오라비’라는 비아냥은 있으나, 이제는 ‘예쁜 남자’에게 강점이 있음을 부인하는 이는 거의 없다. 주지하다시피 ‘꽃미남’ 코드는 여성들의 경제력에서 싹을 틔웠다. 그 경제력은 지금도 남자 아이돌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그리고 남자 아이돌들은 한 바퀴 돌아 남자들을 조금씩이나마 바꾸고 있다.

사랑받을 가치를 만드는 것

우리가 사랑하는 아이돌들은 모두 훌륭하다. 그들의 훌륭한 외모와 목소리, 근사한 곡과 의상, 콘셉트는 그들 각자의 부모와 기획사(그리고 경우에 따라 다른 몇몇 사람들)의 공이다. 그러나 데뷔한 시점부터는, 그들을 훌륭하게 만드는 것은 팬들이다. 굳이 ‘고나리’하지 않아도, 그들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을 위해 훌륭해지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니 그런 훌륭한 아이돌을 만들어낸 자신을 자랑스러워 해도 좋다. 그리고 그들의 어떤 점이 정말로 훌륭한지를 이야기해도 좋겠다. 남자도 남자 아이돌을 좋아할 수 있고, 남자 아이돌은 남자를 더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 (인정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남자 아이돌을 의식해 외모를 가꾸는 남자라면, 남자 아이돌들이 여성 팬을 어떻게 존중하는지 또한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가능성 없는 남자라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사랑받고 싶은 욕구를 실천할 의지가 조금이라도 있는 남자라면, 적어도 우리가 사랑하는 이 아이돌이 ‘사랑받는 이유’를 알고 싶어 할 것이다.

미묘

By 미묘

가식과 내숭의 외길 인생. 음악 만들고 음악 글 씁니다.
f(x)는 시대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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