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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사정 – 인피니트 “The Origin”

목소리라면 자비 없이 몽땅 제거해버린 이 순도 100%의 인스트루멘탈 트랙들. 정작 인피니트 멤버들의 존재감은 안중에도 없는 앨범이란 말인가. 물론 속단은 금물이다.

라이브도 아니고 베스트도 아니다. 인스트루멘탈만으로 무려 3CD. 아이돌 사상 유례 없는 이 앨범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평소 인피니트와 스윗튠에 대한 애정을 아낌 없이 보여주던 칼럼니스트 김윤하에게 물었다. -에디터

The Origin
울림 엔터테인먼트
2014년 4월 10일

제 1장: 사장님

어느 아이돌 그룹이 그렇지 않겠냐 마는, 인피니트와 사장님의 관계는 다른 어떤 그룹들 보다 가깝고 긴밀하다. 울림 레이블의 대표 이중엽이 인피니트의 성공을 위해 전 재산에 가까운 망원동 주택을 팔아 ‘내꺼 하자’ 뮤직비디오를 찍은 사실은 이미 유명해도 너무 유명한 도시전설이며, 멤버들은 그런 그를 서슴없이 아버지니 삼촌이니 부른다. 인피니트 멤버들에게 아버지이거나 삼촌이거나 사장님인 그는 방송에 나와 ‘인피니트는 내 전부’란 일견 낯간지러운 말을 서슴없이 하고, 팬들은 ‘사장이 인피니트를 가지고 덕질(팬 활동)을 한다’며 재미있어한다.

여기서 더 재미있는 건, 그런 사장님에게 인피니트는 알고 보면 튀어도 너무 튀는 이력이라는 점이다. 멀게는 어떤날과 이승환에서 가깝게는 김동률, 진보, 에픽하이, 넬 같은 뮤지션들과 연을 쌓아온 이중엽 대표가 지금 사력을 다하고 있는 건, 참 뜬금없게도 아이돌 그룹이다. 하지만 이 뜬금없음은 인피니트가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가장 큰 힘을 발휘한 중심축이었다. 트렌드나 흐름 같은 데엔 관심 없다. 대신 그 자리에 좋은 음악에 대한 욕심과 땀 흘리면 언젠가는 인정받을 것이라는 무모한 믿음을 채운다. 다행히, 정말 다행히도 그 무모함이 통했다. 사장님이 반 봉사 행세를 하며 재산과 미래를 걸었던 일곱 아이들은 이제 컴백과 동시에 각종 공중파 채널 1위를 휩쓸고, 수십만 장 단위로 앨범을 팔며, 20개국 이상의 나라를 돌며 월드투어를 하는 ‘귀한 몸’들이 되었다.

인피니트의 앨범 이야기를 하면서 굳이 사장님 이야기를 이렇게 길 필요가 있을까 싶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아무리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이 앨범에서 사장님의 의지와 고집을 빼면 도무지 할 이야기가 없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발라드 트랙들을 모은 White, 거친 사운드를 주력으로 한 Black, 인피니트만의 시그니쳐 사운드를 담은 Gold. CD 한 장당 10곡씩, 총 서른 곡이 모여있지만 잔인하게도 멤버들이 목소리는 숨소리 하나 없다. 효과처럼 왜곡돼 쓰인 소리마저 원 소스가 목소리라면 자비 없이 몽땅 제거해버린 이 순도 100%의 인스트루멘탈 트랙들의 운명은 도 아니면 모다. ‘노래방 반주냐’는 시니컬한 반응이 도라면 보컬이 입혀지기 전, 작곡가의 손 안에서 온전히 만들어진 각 노래의 원류(Origin)를 반가워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모일 것이다. 그리고 그 ‘모’의 한 가운데, 스윗튠(Sweetune)이 있다.

제 2장: 스윗튠

사실 꽤나 오랜 궁금증이었다. 왜 인피니트의 앨범에는 인스트루멘탈 트랙이 수록되지 않는 걸까. 싱글과 미니앨범 발매가 잦은 탓에 인스트루멘탈 트랙으로라도 곡 수를 채워 맞춰야 하는 다른 아이돌 앨범들과는 사뭇 다른 노선이었다. 한 편 스윗튠 팬으로서는 조금 야속하기도 했다. 특히 다 채운 데 확인한 뒤 또 채우는, 차고 넘치는 소리들로 유명한 이들이었기에 보컬의 멜로디를 따라가느라 놓치게 되는 수많은 디테일이 아쉬워 매번 발을 동동 구르는 이들이 많다는 소문도 끊이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런 콘셉트의 앨범이 발표되면 즐겁기만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왠 걸, 기대야 했지만 이 정도로 규모가 커진 판을 보고 있자니 한 편으로 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노래나 사진 없이 반주만 담아 세 장이라는 무리수 볼륨에 이소라나 벡(Beck)도 아니건만 수작업으로 그린 전곡 악보 수록은 또 뭐란 말인가. 이 사장님은 정말 중간이라는 걸 몰라 절로 한숨이 나온 것이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3만 장 한정’ 딱지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딱 봐도 찍으면 찍을수록 손해날 것 같은 두둑한 패키지의 이 앨범은 한정이라는 고깔모자를 쓰며 무모함의 굴레를 겨우 벗어난다. 명분도 얻었다. 만일 인피니트의 유명세를 이용해 한 몫 보자는 목적이라면 한정판은 어불성설이다. 반면 사장님과 인피니트의 음악적 욕심을 채움과 동시에 조금 더 다양한 방법으로 이들의 음악을 즐기고 싶어하는 소수의 팬들에게 반가운 선물을 만들고 싶었다면, 납득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안방마님 스윗튠이 있다.

앨범을 들어본 이들이라면 십중팔구, 인피니트에 있어 생각보다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는 스윗튠의 존재감에 깜짝 놀랄 것이다. 수록곡 숫자부터가 그렇다. 서른 곡 중 스윗튠의 곡이 아닌 곡은 데뷔곡 ‘다시 돌아와’(히치하이커)와 “Destiny” 앨범의 수록곡인 심은지 작곡가의 ‘인셉션(Inception)’, 넬의 이정훈이 작곡한 성규의 솔로곡 ‘Because’ 정도다. 덕분일까. 수적으로 워낙 열세라 절대비교라곤 할 수 없지만, 첫 음만으로 ‘아, 인피니트구나’하는 경각의 종을 울리는 건 역시 스윗튠이라는 믿음이 더욱 공고해진다. 더불어 보컬이 빠진, 온전히 스윗튠의 손만을 거친 생생한 소리들이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 모습을 구경하는 재미가 은근히 쏠쏠하다. 이번 앨범의 타이틀 곡이자 자타가 공인하는 스윗튠의 역작 ‘BTD’나 ‘파라다이스’ 같은 곡들을 듣고 있노라면, 스윗튠 곡들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인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메탈 풍 기타 리프들을 종류별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수 있다. ‘BTD’의 후반 2분 39초경부터 곡이 끝날 때까지 이어지는 기타 솔로는 웬만한 록 넘버 솔로 파트를 무색하게 만들고도 남을 정도고, 비교적 덜 알려진 ‘몰라’ 같은 경우 디스토션 지퍼를 목까지 끌어 올린 기타 연주를 아예 곡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로 사용하며 변주한다. 이것은 아이돌 앨범 수록곡이라기보다는 반항아를 주인공으로 한 청춘 드라마 스코어나 <기타 히어로> 같은 게임 메인 테마에 어울릴 법한, 이미 충분히 목적을 달성하고도 남은 완성작처럼 들린다. (물론 그들은 이후 보컬을 얹는다. 그것도 숨 돌릴 틈 없이 빽빽하게.)

그리고 이 숨 막히는 디스토션 폭격을 지나면 아기자기한 구성으로 뜯어 듣는 재미를 주는 곡들이 늘어서 있다. 후렴구의 네 마디 메인 테마를 제외하고는 안일한 반복 없이 매 파트 별로 다른 효과를 주며 다양성을 꾀하는 ‘추격자’나, 짧게 끊어가는 원곡의 보컬 호흡만큼 절대 두 마디 이상 같은 패턴을 반복하지 않으며 도무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She’s Back’은 대표적인 잔망미 넘치는 곡들이다. 쉴 틈 없이 흩뿌려져 있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리들을 찾아다니는 것만으로도 3분여의 반주곡을 굳이 들을 가치가 충분하다. 대표곡 ‘내꺼 하자’가 비교적 심심한 반면, 딱히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Man In Love’가 오히려 귀에 들어온다. 서두와 후렴구, 보컬이 얹힐 부분과 그를 받치는 반주 사이의 심상치 않은 밀고 당기기가 오히려 원곡보다 흥미롭게 들린다.

제 3장: 인피니트

이쯤 되면 정작 인피니트 팬들이 서운해하지 않을까 싶다. 일곱 명 멤버들의 존재감은 안중에도 없는 앨범이란 말인가. 물론 속단은 금물이다. 이 앨범에는 그동안 정규 앨범에 포함되어 있던 멤버 별 랜덤 포토카드 대신 금/은/동 세 가지 색의 스페셜 코인이 역시 랜덤으로 포함되어 있다. 앨범 안 깊숙이 박혀 있는 코인을 꺼내 뒤집어 보면, ‘Since 2010, Infinite’라 새겨진 글자가 보인다. 사장님의 의지가 그리고 한 작곡가 그룹의 빛나던 시절이 이 앨범의 맥인 건 사실이지만, 그 모두를 가능케 한 건 인피니트라는 그룹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무엇보다도 이 앨범을 다 듣고 나면 인피니트 멤버들의 목소리가 참을 수 없이 그리워진다. 그리하여 다시, 인피니트다.

덧붙여,

(1) 사실 인피니트와 이중엽의 인스트루멘탈 활용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3년 봄 ‘Man in Love’ 활동 당시, 무려 앨범의 ‘랜덤 히든트랙’으로 수록곡들의 인스트루멘탈 트랙들을 수록한 적이 있다. 그 곡들 가운데 “The Origin”에 다시 실리지 않은 레어 오브 레어 트랙들은 우현 작곡의 ‘Beautiful’과 ‘60초’, ‘불편한 진실’ 세 곡이다.

(2) 본의 아니게 ‘White’ 앨범 수록곡들에 대한 개별 코멘트가 빠져 있는데, 취향해주시죠 존중입니다. 이 앨범을 선호하는 이들은 ‘피아노나 기타 등 어쿠스틱 악기로 따 보고 싶어지는 썩 괜찮은 반주앨범’이라는 평을 주로 내놓고 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취향해주시죠 존중입니다.

(3) 4월 말 앨범 발매, 5월 초 방송 컴백을 앞두고 있는 이들의 앨범은 (드디어) 정규 2집이 될 예정이다. 스스로 ‘Season 2’라는 슬로건을 당당히 붙인 이들의 새 모습이 무척이나 궁금하다. 얼마 전 인터뷰에 따르면, 변신 보다는 기존의 인피니트의 색을 더욱 공고히 하는 방향이라고.

인피니트의 “The Origin”에 관한 아이돌로지 필진들의 단평은 1st Listen : 2014.04.01~04.10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윤하

By 김윤하

듣고 보고 읽고 씁니다. 특기는 허송세월.

6 replies on “각자의 사정 – 인피니트 “The Origin””

글 잘 봤어요~ 작곡진에서 제이윤씨가 언급되지 않은 것 같아 말씀드려요~전체적으로 보면 비슷하지만 세세히 들으면 확실히 다른 곡들을 쓰시는데 스윗튠은 아니시거든요. 아마 스윗튠을 제외한 노래중에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계실거라 생각해요~

신디님 반갑습니다. 네, 저도 글을 올리고 나서보니 제이윤씨 언급이 빠진게 좀 아쉽더라고요. 스윗튠 외 작곡가분들 중 일부만 나열하다보니 본의아니게 이런 결과가 나왔네요. 제이윤씨 역시 데뷔때부터 지금까지 인피니트와 꾸준히 작업해 온 작곡가분이죠. 이번 앨범에선 마음으로, 시간아, with…, 날개, 틱톡, Feel so bad 가 수록되어있군요. 정말 팬들 사이에서 특별히 인기가 많은곡들만 모여있네요 :-)

제이윤 음악을 빼고 인피니트를 말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인데… 마치 스윗튠 전문그룹 같은 인상을 주는게 영 계속 찝찝하네요. 맨인럽 음반이 대표적으로 제이윤이란 대척점없이 스윗튠 만으로 가서 개망한 음반이죠…(팬들이 싫어한단 의미로 망이라고 썼습니다. 물론 뉴비팬이나 해외팬은 많이 끌어들인 음반이지만…)
팬들이 좋아하는 음악이 아티스트의 대표음악입니다. 파워가 강한 작곡가그룹의 음악이라고 타이틀이 아니라…

스윗튠은 평단에서 늦게주목받고 그때쯤부터 단물 많이 빠짐ㅠㅠㅠ 인피니트라서 좋지용 ㅋㅋㅋ

글에서 중요한 내용은 아니지만 내꺼하자 뮤직비디오는 사장님이 살던 오피스텔보증금으로 찍었고, 그렇게 당시 인피니트 숙소였던 망원동 주택의 반지하로 들어가 생활한 것이 맞는걸로 알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