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의 남자 팬을 봤다는 이들이 있다. 자정에 거울 앞에서 씨디를 입에 물고 이재원을 세 번 부르면 나타나는지, “하얀 풍선 줄까, 노란 바지 줄까?” 하는지, 아무튼 드물게나마 보았다는 이들은 꼭 있다. 그리곤 19년, 혹은 H.O.T.가 해체한 2001년부터 따져 14년이 흘렀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로 팬 문화에 대한 기록과 연구는 다양하게 남았지만, H.O.T.의 남자 팬에 대한 연구는 찾기 어렵다. 이들이 누구였으며, 어떤 마음으로 H.O.T.를 지지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말이 ‘팬’이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팬인지를 구별하는 것도 쉽지 않으며, 팬의 기준 역시 달라졌다. 추억 보정도 있을 것이다. 이 짚더미 속에서 날카로운 팩트를 추출해내는 일은 쉬울 수 없다. 이렇게 된 바에야 일종의 상상 게임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사실 H.O.T.가 데뷔하던 1996년, 이성애자 남성이 그들의 팬이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H.O.T.가 한국 최초의 아이돌이었음을 기억하자. 당시 우리 대중에게 유사연애를 (어쨌거나) 중심에 둔 아이돌이란 ‘형식’은 무척 낯선 것이었다. 더구나 H.O.T.의 중심 화두는 광범위한 대중을 사로잡았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계승 여부였다. 달리 말해, 1996년의 이성애자 남성 중 대부분에게 이것은 그저 새로운 남성 5인조 댄스그룹일 뿐이었다. ‘우리 들으라고 만든 게 아니구나’라 직감하고 등을 돌릴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전사의 후예’와 ‘캔디’는 실제로 적잖은 남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누군가는 강타의 창법을, 누군가는 장우혁의 표정이나 몸짓을 본받고 싶어했다. 거기엔 동경, 혹은 “아, 그 새끼 멋있는데?” 하는 감정이 개입될 여지가 있었다. 음악이 취향에 맞는다면 따라 부르거나 외우게 되기도 했다. 또한 주위의 여자 친구들이 좋아하는 의상이나 안무를 따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모든 것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당시 가요 혹은 팝 시장에 있던 다른 남성 그룹들과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다.
H.O.T.가 십대 남성에게 어필했거나 혼돈을 줬다면, 그것은 기믹에 있었다. 그룹 이름은 ‘십대의 승리’를 말한다고 했다. 연령대도 엇비슷했다. ‘전사의 후예’는 학교에서의 일을 노래했다. 그것은 ‘십대들의 대통령’ 서태지와 아이들과 유사하면서도 전혀 달랐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는 “우리”를 말하고 있음에도 곳곳에서 이미 성인이 된 화자의 존재를 내비친다. (“좀 더 비싼 너로 만들어주겠어”는 직접인용에 해당한다 해도, 다른 가사는 청자와 거리를 둔 채 변화를 ‘권유’하는 화자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히 있다.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조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이젠 생각해봐”, “좀 더 솔직해 봐 넌 알 수 있어” 등이 그렇다.) 반면 ‘전사의 후예’는 십대의 친구나 멘토가 아니었다. 적어도 어조의 측면에서만은 철저히 십대 동료였다. 벅차는 감정을 조리 없이 쏟아내는 가사도 그렇지만, 아무런 대안도 없이 절망감만을 토로하거나 가해자를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내용도 그랬다. 책임 있는 성인이 학교 폭력을 공적으로 논할 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이 신인 그룹은 십대들을 대변하는 목소리기에 ‘나’와 관계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음악만 취향에 맞는다면야 ‘내’가 남자란 사실이 이들을 좋아해선 안 될 이유가 되진 않았다.
그런 점에서, ‘캔디’의 모호한 가사는 매우 적절, 혹은 위험했다. 곡은 청자를 명백히 연인으로 지정하고 있지만 이 지극히 비논리적인 횡설수설은 의미 전달을 방해했다. 듣는 이는 각자 마음에 드는 요소들을 조합해 각자의 해석을 내리며 곡을 즐겼고, (‘단지’가 여자친구 이름이라는 설을 포함해) 일종의 ‘열린 텍스트’로 남았다. 여기에 앞서 언급한 아이돌 ‘형식’의 낯섦이 결합되면, “단지 널 사랑해”가 이 곡을 듣고 있는 ‘나’에게 직접 건네는 말이란 사실을 모르고 넘어가기에 충분했다. (영리하게도 이 곡은 후렴의 애정 고백을 “단지 ‘널 사랑해’ 이렇게 말했지”라는 인용문으로 처리해버렸다.) 사랑한다는 말이 들어간 가요를 처음 들어본 것도 아닐 것이었다. 정확한 비율을 따질 수야 없으나 상당수의 남성 팬들은 이 의미심장한 고백을 여느 가요와 크게 다르지 않게, 그저 ‘괜찮은 신인 그룹’의 어느 연가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시기가 길지만은 않았다. 누군가는 여전히 H.O.T. 전화 사서함이나 이벤트 현장, PC 통신 게시판과 팬클럽을 전전했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어딘지 위화감을 느끼는 순간들이 생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통 순정만화 작화 같이 여리여리하던 젝스키스와 비교하자면 천계영의 그림 같은 H.O.T.는 부담이 덜했다. 훗날의 어떤 후배 그룹처럼 “하루만 너의 방 침대가 되고 싶어”라 노래하는 것도 아니었다. 돌이켜 보면 조금 의외일 정도로, H.O.T.는 ‘사회파’ 노선을 유지하며 직설적인 연가와는 거리를 두었다. 내용은 거대담론화했고, 사운드와 콘셉트는 ‘소녀들이 무서워할 것 같은’ 것들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해야 할까. 역설적으로 이는 H.O.T.가 ‘아이돌’로서 몸집을 불리는 방식이었다. 그룹과 팬덤의 공동체는 코어화했다.
그런 과정에서 어느 순간, 남성 팬들은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과격함과, 그에 대한 보상처럼 보여주는 달콤한 모습, 두 가지 모두 평범한 이성애자 남성에겐 부담스러울 만한 것이었다. H.O.T. 향수나 DNA 목걸이 같은 것들은 남성 가수의 남성 팬을 겨냥한 게 아님이 확실해 보였다. ‘여자애들이 널리 좋아한다’기에는 ‘여자애들만 좋아하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었다. 또한 그 반대편에는 ‘남자애들 좋아하라는’ S.E.S.와 핑클이 있기도 했다. 아이돌이라는 ‘형식’에 점차 익숙해진 우리 대중 역시 이미 H.O.T.는 여성 팬에게 어필하는 보이그룹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이성애자 남성이 H.O.T.의 팬을 자처하는 일은 처음처럼 쉽지만은 않은 일이 되었다.
시계를 돌려 2015년,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걸크러시 붐과 ‘여성향’ 걸그룹에 가까운 이들도 나타나고, 보이그룹의 남성 팬도 눈에 띈다. 빅뱅처럼 아이돌과 아티스트의 평행우주를 동시에 운영하는 경우도 있지만, 비스트, 인피니트, 엑소 등 몇몇 보이그룹도 소수지만 남성 팬들의 존재가 수면 위로 드러나곤 한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아이돌 현상 자체에 관심을 갖다 보니, 좋아하는 걸그룹의 소속사 동료다 보니, 주위 여자 친구들이 좋아하다 보니, 혹은 빅뱅이다 보니…
그러나 1996년과는 처지가 조금 다르다. H.O.T.의 남성 팬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기 힘든 H.O.T.의 몇 가지 특징들이, 국내 최초의 아이돌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태어났다. 일종의 ‘오해’에서 비롯된 부분도 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그러니 시간이 흘러 2015년, 지금 보이그룹을 좋아하는 남성 팬은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진 H.O.T. 남성 팬의 빈 자리 위에, 아이돌이란 ‘현상’에 대한 대중적 합의를 딛고 서게 되었다. 즉, ‘여성 팬을 공략하는 남성 아이돌을 좋아하는 남성’으로서의 자신을 처음부터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다양한 성소수자의 경우도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대체로 남자들이란 성역할을 뛰어넘음으로써 자신의 남성성을 부정 당하는 것이 최악의 공포인 법이다. 남자들의 젠더적 고충을 논하려 함은 아니다. 하지만 간혹 보이는 남돌남팬은 내적 갈등의 힘든 걸음을 한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점을 기억한다면, 아이돌 팬이라는 수라의 길을 함께 가는 동료로서 이들을 아껴주는 것도 좋은 일일 것이다.
H.O.T. 남성 팬의 사례들은 수집되지 못한 채 시간 너머로 흘러가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서두에서 말했듯 온전한 형태로 회복되기는 이미 늦었는지도 모른다. H.O.T. 남성 팬들의 지나간 날들에 따뜻한 애정을 보내며, 지금이라도 보이그룹 남성 팬에 관한 아카이빙과 연구가 이뤄지길 바란다.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보이그룹 남성 팬이 있다면 대화를 나누길 원한다. 간략한 소개와 연락처를 [email protected]으로 보내주기 바란다. 당사자의 동의 없이는 어떤 내용도 공개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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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replies on “H.O.T. 19주년 : H.O.T. 남자 팬 도시전설”
저는 남돌을 좋아할때 이성애자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가사나 구성에 끌리진 않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B1A4의 Solo Day, 이게 무슨 일이야는 유쾌한 리듬에 남자이기 때문에 공감이 가는 가사들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Sweet Girl은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었거든요.
더불어서 남돌만이 낼 수 있는 매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아이돌 덕질을 하게 된 계기는 걸그룹의 퍼포먼스와 음악이 아름답고 감각적이라는 생각을 했는데(애프터스쿨의 뱅이나 브아걸의 아브라카다브라 등) 그 때는 눈에 가는 남돌이 딱히 없었고, 관심을 아예 끊었어요. 그러다 작년부터였나, 인피니트나 B1A4, 비스트를 과거 영상까지 찾아보면서 관심가지게 되고, 남자가 봐도 멋있다. 걸그룹과는 다른 힘있는 느낌이 난다라는 생각때문에 지금은 보이그룹에도 관심이 더 가게되는것같아요